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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9년 7월 12일(양력 8월26일) 동대문 밖 청량사에서 만해(1879-1944) 화갑연 친필 유묵
1939년 7월 12일(양력 8월26일) 동대문 밖 청량사에서
3.1독립운동의 적극적인 첫 움직임은 윌슨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에 자극을 받아 태동하기 시작했으며 여운형이 김규식을 파리강화회의에 파견하는가 하면 신익희 윤치영 이광수 등이 일본에서 2.8독립선언을 일으킨 것을 기폭제로 국내에서도 독립운동의 시기가 왔음을 간파하고 시기를 보고 있다가 1월 22일 고종이 승하함으로써 손병희·권동진·오세창·최린 등의 천도교 측 중진들이 목숨을 걸고 앞장서서 이끌어가게 되었는데, 이후 천도교계 15명과 105인사건으로 일제에 대한 반감이 컸던 개신교계에서 이승훈 등 16명, 불교계 2명이 추가되어 33인의 민족대표를 꾸렸다. (천도교 수운회관 앞에서 - 탑골공원 - (영락교회) - 명동성당 - (남산1호터널) 까지의 길을 ‘3.1로(삼일로)’라고 부르게 된 것은 바로 이 역사를 기록하는 이름이다.) 천주교에서는 고종의 아버지 흥선대원군의 천주교박해와 '105인사건'의 영향으로 불참하게 되었다.
천도교인이었던 최린은 친한 친구인 불교계의 한용운을 찾아가 그를 설득하였는데 불교계는 사정에 의해 두 사람만이 참여하게 되었다.
105인 사건이란(안악사건=데라우치 총독 암살미수사건) 1911년 안중근의 사촌동생 가톨릭신자 안명근 야고보가 데라우치 총독을 암살하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사전에 보고받은 명동성당 ‘뮈텔’ 주교가 총독부에 이 사실을 신고하였다. 당시 명동성당은 해결하지 못하고 있던 일본인과의 토지분쟁 때문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는데 이 암살계획 정보를 제보함으로써 토지문제를 해결하게 되었다. 이후 일제가 이 사건을 개신교를 탄압하는 빌미로 삼아 확대 왜곡시켜 개신교도 수백명을 체포하고 105인을 구속 기소하여 재판에 넘긴 사건이다. 이때 개신교도인 이승만은 미국인 선교사의 도움으로 미국에 망명하여 이 사건의 전모를 미국사회에 알리며 이름을 널리 알리기 시작했다. 천주교계가 3.1운동에 참여하지 않은 것은 이 사건의 경위와 무관하지 않다.
만해선생 송수첩
1939년 기묘년 7월12일(양력8월26일) 벽초(최초의 에스페란티스트) 홍명희 등은 청량리 북쪽에 있는 천장산 청량사에 삼일독립운동을 처음부터 기획 진행한 발기인 중에 살아있는 권동진 오세창 등의 지인들을 초청하여 한용운 의 회갑을 축하하는 모임을 가졌다. (손병희는 감옥에서의 고문으로 병에 걸려 1922년에 일찍 사망하였다.) 그러나 최린은 맨 처음 기획단계에서부터 독립선언서 초안을 작상한 인물이고 최남선 이광수 등은 3.1독립선언서, 2.8독립선언서를 작성한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이 자리에 초대받지 못했다. 한용운은 친일로 변절한 이 사람들을 이미 죽은 사람으로 취급하고 만나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회갑연에 일제의 감시를 피해 모인 독립운동가와 민족주의자 등 열여덟 명이 만해의 회갑을 함께 축하하고 나서 각자 한 구절씩 축수의 의미로 한시를 짓고 해어 김관호(1906~ 한국고미술협회 감정위원인 김영복 김선원의 스승 )가 사온 서화첩에 18명의 필적을 남기게 되었다.
만해선생 송수첩은 3.1운동에 참여해 서대문형무소에서 만행 한용운과 함께 수감생활을 하며 교류했던 서화미술회 서과 졸업생 이당 김은호(1892~1979)의 표제가 실려있고 첫장에 이당이 송수만년 그림을 그렸으며 그 뒤에 연장자 순으로 우당 권동진, 위창 오세창 석정 안종원 박광 등의 축시가 실려있으며 맨 마지막 장에는 만해 한용운의 화답시가 실려있는 시화첩이다.
만해선생송수첩 폭당 280*263mm
만해 한용운의 회갑일(1939년 7월12일(양력 8월26일)) 청량사에서 삼일만세운동의 동지 후학 등 18명이 모여, 18명이 송수첩에 즉흥 한시를 한 수씩 지었다.
1919년 1월 하순 고종황제 붕어 이전 부터 기미 독립운동을 함께 기획했던 최린과 만해 한용운은 3.1독립만세운동으로 함께 옥살이를 하고 나왔는데 왜 이 자리에 최린은 초대받지 못했을까? 이완용까지 만나가면서 3.1운동을 가장 적극적으로 앞장서서 기획했던 최린은 나중에 일제로부터 작위를 받고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의 사장으로 취임하게 되는데, 한용운은 최린의 집앞에 찾아가 내친구 최린이 죽고야 말았다며 크게 곡을 하고 이후로 최린을 죽은 사람으로 여기며 만나지 않았고 , 독립선언서의 기초를 작성한 육당 최남선도 일제로부터 중추원 참의라는 벼슬을 받아 일제에 부역을 하게 되었으며 2.8독립선언서를 작성한 이광수는 창씨개명을 하고 일제에 협력하게 되었는데 한용운은 어느 자리에서든 그들이 인사를 해와도 내가 아는 최남선은 예전에 이미 죽어서 장송한 사람이라면서 그를 아는 체도 하지 않는가 하면 문학적 교류로 끔찍하게 가까이 하던 춘원 이광수도 집에 오려하면 얼굴도 보지 않고 호통을 쳐서 돌려 보내곤 하였다.
이렇게 아무리 친하던 친구라도 변절자들은 사람 취급도 하지 않고 만나지도 않았던 대쪽처럼 강직한 성품을 가진 만해였기에, 회갑연이라고 해도 권세가며 호사가들이 모이는 것은 원치 않았으며 일제 헌병과 밀정들의 눈을 피해 남몰래 연락한 3.1만세운동을 기획하고 옥살이를 했던 독립운동가와 민족주의자 동료 등 18명 만을 청량사에 초대하여 조촐하게 뜻깊은 자리를 만들었던 것이다.
송수첩은 장수를 축하하는 의미를 지닌 것이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모임에서 가장 연장자가 맨 앞에 먼저 글을 써서 장수를 축하해주는 서첩인데, 당시에 가장 유명한 서예가이자 3.1독립운동을 기획단계에서부터 함께한 민족대표33인이었던 독립운동가 우당 권동진 선생(1861~1947)과 위창 오세창(1864~1953) 선생이 그 자리에 있었던 시화첩인데도 불구하고, 30년이나 어린 이당 김은호(1892-1979)의 작품이 송수첩 표지의 표제자와 첫 페이지를 장식하고 있다는 것은, 한용운 선생이 이당을 신뢰했던 만큼 그 모임에 참가한 사람들의 사상과 만해선생송수첩을 만든 사람들의 생각과 송수첩을 끝까지 지니고 있던 김관호가( 한용운전집의 저자 ) 이당을 확실하게 신뢰했다는 증표라고 할 수 있다. 만해선생이 말년을 보낸 심우장에는 만해의 사후까지 이당의 그림과 여러 글들이 벽에 걸려 있었지만 그렇게도 가까이 지냈던 이광수나 최남선의 글이 걸릴 자리는 없었다.
만해 한용운 선생과 위창 오세창 선생 등은 본래부터도, 이당이 약관의 나이에 임금의 어진도 여럿 모셨을 뿐 아니라 적극적으로 독립운동을 해서 자신들과 함께 서대문형무소에서 고문을 받으며 옥살이를 함께 하면서, 스승인 심전 안중식 선생이 고문 끝에 후유증으로 돌아가시는 것을 보았고, 본인도 병보석으로 감옥에서 나온 이후에 '요시찰인물'로 일제의 감시를 받아가면서도 이왕직의 명을 거역하지 않고 기꺼이 창덕궁 대조전의 벽화를 그린 인재였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오세창은 이당이 일본에서 돌아왔을 때 화실인 낙청헌을 구입하도록 도움을 주고 그 화실에 낙청헌이라는 당호를 지어준 당사자이기도 하다. 그는 제1회 조선미술전람회 이후 일본에서 초빙해온 일본인들만이 심사위원을 하고 있을 때부터 이당이 일본인 화가들의 기세에 눌리지 않고 큰 상을 여러 번 타는가 하면, 나중에는 추천작가가 되어 심사에도 참여하여 선전에서 조선인 화가들과 제자들을 지켜줬으며 1936년에는 제자들의 모임인 후소회를 만들어 활발하게 활동하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조선의 문화재를 일제로부터 지키기 위해 간송 전형필에게 많은 가르침을 줬던 오세창은 자연히 일제로부터 조선화단을 든든하게 지켜오고 있던 젊은 이당을 그만큼 확실하게 믿어주고 아껴왔었다.
특히 만해 한용운의 입장에서는 이당이 고종황제를 직접 알현하며 어진까지 그렸는데, 그 아버지 같이 따뜻하게 대해주던 고종이 독살을 당하여 장례를 치르게 된 비참한 충정을 품은 채 남보다 앞장서서 독립신문을 배포하는 등 독립운동을 했던 젊은이의 마음을 십분 이해했었다. 당시 활동하던 화가중에는 이당만이 유일하게 총독부에 의하여 실형을 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옥살이를 한 애국자였고, 게다가 서대문형무소에서의 고문으로 인해 병보석 출감을 한 후에 일본 순사의 감시를 계속 받는 상황에서도 꾸준하게 만해 자신의 유심사에 활동자금을 몰래 제공하고 있던 것을 고마워 했었다. 한용운이 감옥에서 옆방의 죄수들과 대화를 나누었던 탓에 손가락에 철사를 묶고 잠시 억류를 당했을 때 옥중에서 읊었던 옥중시를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른 다음에도 이당은 정확히 외우고 있었을 정도로 두 사람의 관계는 돈독했었다.
만해가 죽을 때까지도 이당의 그림은 항상 그의 곁에 있었다는 것도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은 부분이다. 목숨을 걸고 3.1운동을 함께 기획한 친구 최린과 최남선 이광수 조차도 변절하였다는 이유로 죽은 사람으로 취급하고 사람으로 보지도 않을 만큼 대꼬챙이 처럼 지조가 굳은 만해였다는 것을 알고 본다면, 그 당시 이당에 대한 그의 신뢰가 얼마나 대단했었을지를 어렵지 않게 파악할 수 있다. 1937년 금차봉납도가 세상에 알려진 2년 후 1939년 여름의 일이었고 친구 최린 최남선은 변절자라고 비판하였지만 젊은 이당은 사실은 변절하고 금차봉납도를 그린 것이 아니라 조선인 화가들과 제자들의 화단 활동을 지켜주기 위해 자의반 타의반으로 본인이 오욕을 감당하고 스스로를 희생시킨 독립운동가의 한 사람이라고 인정하고 대우해주던 한용운이었다.
첫 페이지 '송수만년'
이당 김은호는 서대문형무소에서 병보석으로 나온 후 만해가 아직 형무소에서 옥살이를 하고 있을 때 본래 만해 선생이 창덕궁 돈화문 서측 대동상업학교 앞에서 운영하던 유심사惟心社 건물에 본인이 들어가 살면서 만해가 출옥할 때까지 유심사를 지켰고, 이후에도 만해의 작품활동이나 독립활동 자금 마련에 꾸준히 도움을 주고 있었으며, 만해가 비밀결사인 '만당'의 영수로 추대된 후에도 꾸준히 만해에게 자금을 후원하였었다. 만해 한용운 선생을 지근거리에서 모시고 <한용운전집>을 지어 후세에 널리 알린 김관호는 그 누구보다도 이런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런 만해와의 돈독한 인연으로 기꺼이 '만해선생송수첩'의 표제와 첫 장에 이당의 작품이 실릴 수 있었다.
두번째 페이지 ' 卍 '
우당憂堂 권동진(1861-1947 향년 87세)은 동향출신에 동갑인 손병희와 함께 천도교를 이끈 지도자이며 3.1독립운동을 기획한 민족 대표 33인의 한 사람인데, 1905년 손병희가 3대 동학교주로서 천도교를 창건할 때부터 같이 활약하였다. 1919년 3 · 1운동 당시 「3 · 1독립선언서」에 서명했을 뿐만 아니라, 순종황제 장례 때인 6 · 10만세운동 당시 자금 지원을 약속하였다. 또한 '105인사건'으로 핍박을 받았던 신간회 부회장 등으로 활동하면서 광주학생운동을 널리 알리기 위한 민중대회를 준비하였다. 8·15 해방과 좌우의 대립에 이르기까지 한국 근대사의 역사적 격동을 지켜본 산 증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그가 당시 회갑연에서는 연장자 자격으로 만(卍) 자를 먼저 써서 남겼으며
세번째 페이지 壽者相
역시 3.1 독립운동에 기획단계부터 참여한 민족대표 33인으로 존경받는 독립운동가이며 근역서화징槿域書畵徵을 써서 우리나라의 고대부터 근대까지의 서화역사와 작품을 정리하고, 만해의 성북동 심우장의 현판을 써준 위창 오세창 (1864-1953) 선생이 전서체로 수자상壽者相(불교에서 목숨은 하늘이 정해서 내려주는 것이다.)을 써서 오래 사는 사람의 모습이라고 장수를 기원했다. 오세창은 간송 전형필에게 문화재 수집에 큰 가르침을 주고 지지했던 스승이기도 하다.
네번째 장에는 서예가 석정 石丁 안종원安鍾元(1874~1951)이 쓴 '득기묘방'
일곱번째 장에는 고령출신 독립운동가 박광朴洸 (1882~?)이 '만법귀일'이라고 썼다. 박광은 만해에게 심우장을 마련해준 사람중 한 사람인데 대구에서 식당을 운영하며 독립운동자금을 모아서 효당(曉堂) 최범술과 일당 김태신 등의 손으로 이당 김은호에게 보내 만해 한용운에게 전달하곤 했다. 식당은 경상도 일대의 애국지사들이 자금을 몰래 가지고 올 때 사람들이 일경의 눈을 피해 자유롭게 드나드는 수단이었다.
여덟번째 장에는 역시 만해 선생의 심우장을 마련하는데 힘을 보탰고 소설 임꺽정을 쓴 벽초 홍명희 (1888~1968) 가 만해선생 축시를 남겼다. 홍명희는 청량사 회갑연을 주도한 사람이기도 하다.
맨 마지막 장에는 만해 선생이 앞에 글을 쓴 지인들의 축하에 대한 화답으로 답시를 썼다.
1939년 7월 12일(8월26일) 동대문 밖 청량사에서 만해(1879-1944) 친필 유묵
만해스님은 이 회갑연 5년 후 1944년에 해방된 조국을 보지 못하고 세수 66세로 입적하였다.
만해 한용운 말년의 거처 심우장
서울 성북구 성북동 222-1
(도로명)서울 성북구 성북로29길 24
(우) 02879 만해 한용운 심우장 사적 550호
경성부 사직동 141번지에 살던 만해 한용운은 소화 10년 1935년 3월 25일, 성북정 222-1번지로 주소를 옮겼다.
이것은 지인들의 도움으로 마련한 집인데 1931년에 재혼한 아내 유숙원의 소유로 되어 있던 심우장을 개축하고 한용운의 명의로 바꾼 것이다.
2019년에 국가사적으로 지정된 심우장은 이곳에서 만해선생과 교류한 인물들 가운데 심우장의 건립에 관련된 사람들과 심우장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분들 위창 오세창, 취산 김구하, 석정 안종원, 우당 유창환, 벽초 홍명희, 위당 정인보, 이당 김은호, 운허 용하, 원광 경봉, 청남 오재봉, 강석주, 효당 최범술 등 독립운동가와 불교계의 문화예술인 20인의 작품들이 전시되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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