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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1월 7일(월)~10일(목) 인도 사르나트 티베트 대학에서 열린 달라이라마의 신년 법회에 함께 한 이야기를 전합니다. 입보리행론 (A Guide to the Boddhisattva’s Way of Life) 에 관해 법문을 들었고, 마지막 날은 관정(수계식)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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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12월 31일 난생 처음 인도를 가게 되었어요. 돌아올 비행기표와 비행기에 내려 찾아갈 딱 하루치 숙소만 정해두고 떠난 여행이었지요. 첫 숙소는 델리에 있는 원불교 교당에서 하는 게스트하우스였어요. 거기서 또래의 쪽진 머리를 한 교무님을 만나 달라이라마 티칭에 관한 소식을 듣게 되었지요. 교무님은 꼭 들어보면 좋겠다고 하셨고, 그 뒤 자연스럽게 달라이 라마 티칭을 중심으로 일정을 짜고 움직였어요. 덕분에 델리 귀신이 붙었다고 할 정도로 델리 주변을 맴맴 돌며 여행객은 잘 가지 않는 델리 구석구석을 돌아봤지요. 모든 것이 긴장되고 불편했던 델리의 매력을 알게 될 즈음, 바라나시로 이동했어요. 바라나시 골목을 졸졸 따라가 숙소를 잡고 날마다 아침이면 오토릭샤를 타고 사르나트에 있는 티벳대학으로 갔지요.
첫날 가보니, 사진을 첨부한 신분증을 만들어야 한다고 했어요. 그래야 출입할 수 있다고 했지요. 정말 많은 사람들이 이곳저곳에서 사진을 찍고, 신분증을 작성하느라 소란스러웠지요. 그런데 그 많은 인파 속에서, 글쎄 예전에 한 동네서 같이 살던 사람들이 바로 거기에 있는 거예요. 어머나. 한국서도 잘 만나기 어려웠던 사람들을 여기서 만나다니.. 신기했지요.
법문을 하는 곳에 들어서니,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사람들이 꼭 줄을 맞춘 것처럼 단정하게 앉아 있었어요. 달라이 라마님이 말씀하시는 단상 앞에는 남방계 스님들이 끝없이 앉아 계셨고, 오른쪽과 왼쪽에는 다양한 피부색의 사람들이 가득 앉아 있었어요. 정말 많은 사람들이었어요. 수 천 명이라고 해도 될 것 같은데.. 암튼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있어도 소란스러움 없이 참 조용했지요. 저는 특히 제 주변에 앉아 있던 파란 눈의 서양 사람들이 인상적이었어요. 차림부터가 달랐어요. 양말은 구멍이 나서 바느질을 여기 저기 한 흔적이 가득했고 옷도 낡아보였지요. 그런 사람들이 좌선을 하듯 반듯하게 앉아 눈을 감고 달라이 라마님의 말씀을 깊이 듣고 있었어요. 주변에 앉아 있으니 저도 고요해지는 듯 했어요. 그곳에서 새로 사귄 대만에서 온 친구 지앙은 달라이 라마가 사시는 다람살라에서 산스크리트어를 배우고 있다고 했어요. 달라이 라마 신년 법회를 들으러 여기에 왔다고 했고요. 인도사람들과 섞여도 이질감이 전혀 없어 보이던 그 친구는 낯선 우리 일행에게 참으로 친절했어요. 그런데 착한 사람은 어리숙할 것 같잖아요, 아니에요. 같이 다녀보면 놀라울 만큼 영민하고 순발력이 장난 아닌 거예요. 아.. 부처님 공부를 하면, 고요하고 친절하고 영민한 사람이 되려나? 그런 마음에 한국 와서 처음으로 부처님 말씀을 귀담아 듣게 되었지요.
암튼 첫날 사람들 사이에서 앉아 있었지만, 영어로 하는 법문이라 알아 들을 수 없어 오늘 분위기 봤으니 되었다 싶었어요. 그런데 점심시간이 되니 어디서 한국 아줌마들 목소리가 뭉텅이로 들리는 거예요. 자연스레 그곳을 가보니, 밥과 국과 반찬을 나눠 삼삼오오 모여 밥을 잡수시는 보살님 무리가 눈에 딱 들어왔지요. 옷도 맞춰 입고 오신 보살님들은 우리를 보시고는 동시에 어서 앉으라며, 달라이라마 말씀 들으러 왔냐며 밥을 챙겨주시는 거예요. 얼떨결에 인도에서 한국음식도 맛보고, 좋은 정보도 알았지요. 한 스님이 달라이라마 법문을 통역해주고 있다며, 라디오 주파수를 맞추면 들을 수 있다는 거예요. 아싸~ 웬 횡재냐! 싶었지요. 그렇게 4일간의 법회를 듣게 되었고, 보살님들이 달라이 라마 친견을 하러 가는데 끼여서 저희도 달라이 라마님을 뵈었지요. 그 사진은 대대손손 가보로 물려야 한다며 호들갑을 떨며 자랑을 한 것이 퍼져나가. 난데없이 여기서 달라이라마 이야기를 전하게 되었네요. 이제 자랑은 그만 해야겠어요. 달라이라마 말씀을 제대로 이해도 못하면서 이렇게 일이 커지네요. ^^;
따라서 제가 기록한 달라이 라마 말씀은 둘째 날 부터에요. 그리고 불교 교리를 전혀 모르던 저로써는 알지 못하고 옮겨만 적은 것이라.. 아마도 달라이라마 말씀을 잘못 전하는 것이 수두룩 할 것 같아요. 그걸 이해하시고 자기 공부를 바탕으로 검토하신 뒤 받아들이면 좋겠습니다.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2장. 악업 정화
𐒤 깊은 후회, 고백, 참회하면 번뇌와 악업이 사라진다.
𐒤 가족, 친구, 원수에게 집착하나, 죽을 때 돈, 가족, 친구 모두 도움이 안 된다. 특히 돈이 많을수록 죽을 때 갈등 많다. 우리는 언제 죽을지 모른다. 죽으면 사라지는 존재이다. 수행자처럼 열심히 보리심을 닦을 수 있다면 죽을 때 평화롭게 죽을 수 있다. 인과로 생기는 모든 인연은 모두 무상하다. 원인과 조건 때문에 일어나므로 선업/악업으로 흔적이 남는 것이다. 잘 때 지각은 사라지나, 자기 전에 몇 시에 일어나겠다하면 그 시간에 일어나는 것처럼 생각(의식)의 흔적이 남는다. 순수한 마음, 보리심과 공성, 본존불을 마음에 기리면 죽을 때 본존불의 이미지를 떠올린다. 죽을 때 원수를 이기지 못했다고 생각하면, 마지막 숨을 내쉴 때 번뇌 많아 좋지 않다. 그러므로 지금부터 참회, 공덕, 선업 쌓으면 좋다.
𐒤 병이 있다면 의사에게 처방을 받듯, 번뇌가 있다면 번뇌의 형상을 잘 알아야 한다.
𐒤 의심에는 2종류가 있다. 첫 번째는 번뇌를 가져오는 좋지 않은 의심이 있고, 두 번째는 좋은 의심이 있다. 지성이 뛰어난 수행자들은 꼭 좋은 의심을 한다. 궁극적 의미도 볼 수 있어야 한다. 일반적인 의식과 궁극적 의식을 구분하기 위해서는 ‘의심’이 필요하다. 보통 의심하면 좋지 않다고 하나 그렇지 않다. 무조건 신심으로 믿지 말고 자세히 분석하고 자세히 봐서 스스로 사실이라 볼 수 있을 때 받아들여라. 허무주의를 일으키는 의심은 안 좋은 의심이다.
𐒤 모든 종교는 번뇌의 결함을 가르치고 보도록 돕는다. 모든 번뇌는 독립적인 ‘나’라는 것에 뿌리를 둔다.
𐒤 앞으로 악업 짓지 않겠다는 참회와 결의해야 한다.
𐒤 잠 잘 때도 공덕 쌓고 싶다면, 다른 사람의 공덕에 함께 기뻐하라. 다른 이의 공덕에 질투 말고, 함께 기뻐하는 것이 생각보다 어렵다. 상대가 고통에서 벗어난 것을 기뻐하는 것은 공덕 중의 하나이다. 해탈하신 분(아라한)들의 공덕에 수의찬탄하고 깨달음의 길 과정 과정마다 기뻐하며, 법륜을 굴려 법을 전하며 우리 떠나지 마시고 곁에 계시기를 바라는 마음은 나도 공덕을 쌓는 것과 같다.
3장 행보리심 일으키기
𐒤 중생에게 필요한 의사, 약, 음식, 물 등이 내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또한 내가 모든 중생의 즐거움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𐒤 보리심을 일으키는 보살계를 받으면 기쁘다. 보리심은 자신감과 기쁨을 주는 내면의 약이다. 보리심으로 자신을 의심하지 않게 되면 건강에도 좋다.
𐒤 가난에는 2가지 종류가 있다. 마음의 빈곤과 물질적 빈곤이다.
𐒤 보리심은 행복의 시작이다. 행복하면 윤회하더라도 열반의 경지에 오른다. ‘나’라는 자체가 번뇌 일으키지 않으면 보리심에도 집착하지 않는다. 마음이 불안하면 일상의 실체를 분석할 수 없다. 마음이 편해야 분석할 수 있다. 행복을 바라는 모든 존재는 보리심이 필요하다. 이타심, 선한 마음이 있다면 두려움 없다. 해치려고 해도 도와주려하니까 무서움 사라진다. 나와 남을 바꿔볼 수 있는 수행할 줄 안다면 공양 올릴 필요도 없다.
4장 보리심 지키기
𐒤 모든 중생에게 행복을 주겠다는 보살도를 받았다면, 스스로에게 매일매일 상기해야 한다. 실제로 남에게 도움을 주지 못하더라도 그러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 보살계를 받고도 실천하지 않는다면 더 안 좋은 결과를 가져다준다. 따라서 보살계를 받는 것에 신중해야 한다.
𐒤 불교에서의 원수는 ‘번뇌’이다. 번뇌는 이기심에서 다른 이를 탓하고, 나를 앞세우는 것이다. 내면의 원수인 ‘번뇌’와 싸워야 한다. 가까이 있는 원수가 먼 원수보다 위험하다. 번뇌는 몸에 베어있다고 생각할 수 있으나, 그렇지 않다. 꽃이 피기 위해 좋은 조건을 갖춰야 하고 나쁜 조건을 없애야 하듯, 좋고 나쁨이 원래 그렇다고 생각하는 것은 번뇌의 결함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것이다. 밖의 원수는 힘이 없다. 아이와 노인의 시기에는 밖의 원수 없다. 아이와 노인 그 사이에 밖의 원수와 대립하고 원망하고 복수한다. 짧은 생애에 많은 갈등이 생긴다. 번뇌의 특징은 마음을 불안하게 한다. 밖의 원수가 자신을 해쳐도, 좋게 말하고 좋게 대하면 친구 될 수 있다. ‘윤회’는 한 순간의 번뇌가 다른 번뇌로 계속 되는 것이다. 우리는 내면의 원수를 이기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𐒤 어려움을 겪을 때 ‘인욕(忍辱)’ 가져야 한다. 그래야 좌절하지 않는다.
𐒤 항상 내면의 원수를 적이라고 여겨라. 밖의 원수는 한번 이겨도 다시 대립하지만, 내면의 원수는 한번 이기면 다시 오지 않는다.
𐒤 탐욕, 오만 등 모든 번뇌는 ‘무지’ 때문에 생긴다. ‘무지’에 대치할 수 있다면 모든 번뇌에 대치할 수 있다. 번뇌 중에서 옳지 않은 지견과 관련된 번뇌 있다. 모든 오만은 독립적인 ‘나’라는 것을 믿어 생긴다. ‘집착’하면 집착의 대상이 좋게 보인다. 대상을 객관적으로 본다고 믿는 것은 ‘나’라고 하는 대상이 독립적으로 존재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모든 번뇌가 잘 보지 못하는 견해, 오해에서 시작한다. 무지는 옳지 않은 지견이며, 모든 존재는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없음을 알 수 있다면 번뇌는 사라진다. 번뇌도 자세히 보면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환영’같다. 이런 것을 대치법으로 볼 수 있다면 성장할 수 있다.
5장 지계(持戒)와 정지(正知)
𐒤 몸과 마음의 병은 마음대로 행동하기 때문에 생긴다. 모든 행동을 할 때 신중하게 하는 것이 어진마음(양심)이다. ‘마음챙김’이라는 것은 마치 감시자처럼 살피고 있다가 나쁜 마음이 생기면 __하는 것이 어진 마음(양심)이다. 분별하여 알아차려야 한다. 큰 병 오지 않도록 작은 병을 살피듯, 더 안 좋은 것이 오지 않도록 더 좋은 쪽으로 어진 마음을 일으키는 것이다. 이전에 어떻게 없앴는지에 대한 기억과 어진 마음을 통해 불편한 마음을 없앨 수 있다.
𐒤 ‘계’를 지킬 필요 있다. 나를 지키기 위해, 누군가에 의지하지 않고 내 마음 편한 것은 지키고 마음 불편한 것은 잘라내는 것이 필요하다. ‘룰’이라는 것이 그러기 위해 필요하다.
𐒤 ‘보시’는 주려는 마음이다. 내 것이 남아서 주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진정에서 우러나와 주려는 것이다.
𐒤 마음 걷어 들이면 편해지고, 걷어 들이지 못하면 불편하다. ‘조건’에 따라 달려있고, ‘조건’은 전생의 ‘업’에 따라 달라진다. 바로 ‘나’에서 시작하니, 내가 지은 것에서 내가 받는 것이다. ‘업’이라는 것은 마음에 따라 구별해야 한다. 마음의 동기가 좋지 않으면 입으로는 좋다하나 남을 해치려는 동기가 있다면 ‘악업’이다.
𐒤 남을 이롭게 하려는 마음이 ‘예의’다.
𐒤 억염(憶念)과 정지(正知)를 지켜라. 억염은 잘 지키는 것으로 선업이 사라지는 것을 막는다. ‘정지’는 ‘마음챙김’으로 잘 살피는 것이다. 인터넷을 통해 이 시대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알아야 하나, 그것을 통해 산만함을 쫓아서는 안 된다. 마음이 ‘선정’에서 떠나지 않도록 마음을 끊임없이 바라보고 지켜야 한다.
𐒤 부처님은 모든 것을 본다는 생각을 못하면 누군가를 편애하고, 잘 모르는 분이라는 오해를 한다.
𐒤 부정적인 마음을 발견하면 나무토막처럼 가만히 있어야 한다.
𐒤 어리석은 중생을 만나면 어린 아이처럼 알지 못해 일으키는 잘못에 불쌍히 여기며 이해심을 가지고 자비롭게 대해야 한다.
𐒤 우리 몸을 원수와 같이 바라봐야지 ‘나’라고 바라보면 안 된다. 우리 몸은 내가 아니다. 우리 몸에 대한 집착 버려야 한다. 이 세상 모든 것을 ‘해골’을 관하듯 보라. 몸을 피, 장기, 뼈, 피부 등으로 나눠봐라. 그 어디에도 ‘나’라는 실체 없다. 우리 몸은 더러운 오물 덩어리이다. 먹을 수도 마실 수도 없는데, 무엇 때문에 지키고 있나? 왜 우리는 몸에 집착하는가?
𐒤 상대가 행복하기를 바라는 것을 통해 ‘사랑’이 생긴다. ‘사랑’의 마음을 키워갈 때 내 곁의 사람만이 아니라 온 중생으로 퍼져나간다. 반대로 ‘화’는 한 대상이 필요하다. 모든 사람을 두고 화내려 하지 않는다. 반대로 모든 중생에 대해 ‘사랑’은 할 수 있다.
𐒤 ‘번뇌’의 마음은 키워갈 수 없으나, ‘보리심’은 지켜가고 키워갈 수 있다.
𐒤 인간을 사회적 동물이라 하듯, 사람들 속의 하나로 인식하여 혼자, 독립할 수 없는 존재임을 인식해야 한다.
𐒤 번뇌는 내 마음이 제 정신이 아니라 나타난 것이며, 이전의 나쁜 업이 만들어 낸 것이다. 나를 해치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해칠 수밖에 없는 상황이기 때문이라고 이해하면 된다. 법집으로 그 사람 이해하고 편안히 받아들이는 것이 필요하다.
𐒤 늘 온화한 미소, 행동으로 상대방을 대하는 것도 큰 보시 공덕이다.
𐒤 벗이란 내 주장을 선명하게 하는 관계 아니다. 예의 바르게 “~ 그런 것이 아닐까요?”라고 말하라.
𐒤 그보다 내가 더 잘나고자 하는 바람은 상대의 공덕을 칭찬하지 못한다. ‘마음공덕’이라는 것은 상대방이 공덕을 짓게 하고, 상대의 공덕을 함께 기뻐하는 것이다.
𐒤 마음 깊이 일어나 정직하게 말하는 것이 마음이 편안하고 행복하게 사는 법이다. 거짓말을 하는 사람은 마음에 불안함이 있고 표정을 찡그리게 된다. 바르게 말하면 마음이 편하고 이루어지지 않더라도 뜻을 전할 수 있고 조리 있고 부드럽게 표현할 수 있다.
𐒤 3가지 복전(福田)이 있다. 공덕의 복전과 은혜의 복전 그리고 고통의 복전이 있다. 마지막 고통의 복전은 고통을 받는 이들에게 공(空)을 가르쳐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 주는 것이다.
𐒤 보시, 지계, 인욕 등의 육바라밀은 단계가 있다. 작은 것보다 큰 것 버리지 말고 더 큰 이타행으로 나아가야 한다. 행위의 크고 작음과 선후를 잘 살펴야 한다.
𐒤 내가 얻은 물건은 나의 것이 아니라 대중과 나눌 것이다. 필요한 만큼 취할 뿐 이것으로 인해 상대를 해쳐서는 안 된다.
𐒤 수행 없는 의식(儀式)은 집착과 화를 생기게 한다.
𐒤 수행은 첫째, 날마다 낮과 밤에 세 번씩 게송을 외워라. 두 번째 상황에 맞는 수행을 하라. 세 번째 중생을 위한 수행을 하라. 중생을 위한 수행은 지와 덕을 갖춰야 한다. 이를 위해 많이 듣고 생각하라. 사랑, 지덕, 성취의 공덕이 필요하며, 오로지 중생을 위한 마음으로 하라.
𐒤 아집에 대해 타파하는 법을 아는 자를 ‘학자’라 한다. 학자는 1단계 복 아닌 것을 끊은 자, 2단계 아집을 끊은 자, 3단계는 법집을 끊은 자이다.
6장 인욕(忍辱) 바라밀
𐒤 무엇이 다른 이와 대립하려는 마음, 화내는 마음을 사라지지 않게 하는가?
𐒤 대승에서는 탐욕을 허락하는 부분이 있다. 자비심에 대한 탐욕은 허락하기도 하나 어떤 경우라도 ‘화’를 허락하지는 않는다. ‘화’는 몸과 연관되어 있다. 혈압 높아지고 걱정, 불안, 소심하게 한다.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하거나 하고 싶은 것을 못하게 되면 화가 생긴다. 나쁜 조건을 만나지 않으면 ‘화’ 내지 않는다.
𐒤 ‘화’ 일어날 때 움직이지 말고 잘 살펴보면 제재하는 방법이 생긴다. ‘화’ 못 움직이도록 묶는 것이 ‘인욕’이다. ‘화’를 억지로 누르는 것이 아니라 ‘화’가 일어나기 전에 원인을 살펴 마음 불편함이 생기지 않게 하는 것이다. ‘화’는 ‘마음불편함’이라는 벗과 함께 온다.
𐒤 ‘화’의 반대는 ‘인욕’이다.
𐒤 ‘화’는 일어난 손해이다. 계속 화를 낸다면 계속 손해를 보는 것이며, 반복하면 선업 사라지고 악업을 쌓게 된다.
𐒤 만약 화가 나면 ‘무엇 때문에 그런가?’라고 생각하고 가늠할 수 없으면 ‘나쁜 상황에 처했을 뿐이다’라고 생각하라. 어쩔 수 없는 일이므로 과하게 생각하여 불편한 마음을 더 일으키지 말고, 어쩔 수 없었다고 마음을 내려놓는 것이다.
𐒤 고통을 기꺼이 받아들이기 위해 고통의 ‘원인’을 제대로 바라보는 것이 중요하다. ‘원인’을 바라봐야 벗어날 ‘힘-마음’이 생긴다.
𐒤 사성제를 이해하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
고성제: 알아야 할 것 없다.
집성제: 끊어야 할 것 없다.
도성제: 가야할 길 없다.
멸성제: 없애야 할 것 없다.
𐒤 수행이 고행이라고 하나, 고행이 최상의 깨달음을 가져다주지는 않는다. 다만 우리가 수행하다 만나는 고행에 익숙하다보면 작은 어려움을 참음으로써 큰 어려움을 이길 수 있다.
𐒤 번뇌와 힘껏 싸워 더러움에 오염 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𐒤 마음은 습관, 길들임으로 점점 강해지는 것이다. 정확한 근거로 길들이면 점점 강해지나, 근거 없으면 커지지 않는다.
𐒤 ‘법’에 의해 저절로 일어나는 것을 잘 살펴보고 필요에 따라 정확한 근거로 보는 것으로 번뇌에서 벗어날 수 있다. 번뇌의 뿌리인 ‘무지’를 얼른 알아차리면 벗어날 수 있다.
𐒤 번뇌와 고통이 밀려올 때, 마음을 일으켜 보리심과 환희심을 증장시키는 것이 좋다. 전기가 일정하게 오듯, 어떤 상황에도 마음을 일정하게 유지하라.
𐒤 원인에 분노하지 않고 ‘화’의 대상에 분노한다. ‘화’ 또한 일어나려 한 것이 아니라 조건에 의해 일어난 것이다.
𐒤 외도의 사상이나 나와 다른 생각을 만나면 계속 토론하는 것이 중요하다.
𐒤 의지하지 않고 생기는 것은 ‘법’이 아니다. ‘모든 것은 의지해서 일어난다.’라고 하는 것이 ‘법’이다.
𐒤 번뇌 때문에 자신을 해하는 자에게 자비를 일으키지 못할망정 화를 내서 무엇 하겠느냐? 과거에 나 또한 해를 끼쳤으니, 해침을 만나면 과거의 나의 해침을 생각하라.
𐒤 다른 이의 고통, 내게 다가오는 고통을 기꺼이 받아들여라. 고통의 나의 잘못에 의해 오는 것인데 왜 남에게 화를 내는가? 나에게 화를 내는 이에게 인내하는 것은 선업을 가져오는 것이니 나에게 화를 내는 이는 나에게 선업을 가져다주는 사람이다.
𐒤 이번 생에 고통을 겪고 다음 생의 지옥의 고통을 멸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은가? 다른 이를 위해 겪는 고통은 나로 인한 고통에 비해 가져다주는 것이 얼마나 큰 것인가?
𐒤 나와 친하지 않는 이의 칭찬에 의심하지 말고 함께 기뻐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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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까지 둘째 날, 오전과 오후 법문 내용을 옮겼습니다. 셋째 날부터는 다음에 이어 갑니다.
이야기를 들은 민들레는 어제 밤, 오늘 아침 마음을 비춰볼 수 있었다고 했습니다. 두더지는 달라이라마님의 명쾌함에 고개를 끄덕이시며 도서관 사람들이 ‘보살’을 지향하며 살아보면 좋겠다고 했습니다. 필요할 때 도움이 되었다며 기뻐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이야기를 정리하여 카페에 올려주시면 좋겠다고 의견을 내셨습니다. 푸른솔은 “신중하게 수계를 받아야 한다.”고 하신 말씀이 마음에 남는다고 했습니다. 저 역시, 우연히 듣게 된 달라이 라마 법문이 이렇게 쓰이니 신기했습니다. 그동안 좋은 울타리에서 좋은 것들을 들을 수 있었던 인연들에 고마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다음 모임은
8월 26일(월) 오후 3시, 각별한 마음에서 있습니다.
두더지, 미란, 푸른솔이 먼저 만남을 시작하고,
이후 민들레, 간송은 형편에 맞게 함께 하겠습니다.
『형식과 자유사이』 18장부터 공부를 이어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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