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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신론理神論 #기신론氣神論 #『탈춤의 원리와 신명풀이(2006년)』 #『소설의 사회사 비교론1, 2, 3(2001년)』
#유니버시토피아
제13강 허구의 실상
"존재하는 모든 것은 신神이다." 스피노자의 이 말이 무슨 뜻일까. 존재하는 모든 것은 천지자연이므로 천지자연이 곧 신이다. 신이 따로 있어 천지자연을 창조한 것이 아니다. 인간은 천지자연에 속함으로 인간도 신이다. 신이 따로 있어 인간을 창조한 것이 아니다. 스피노자는 인간이 신이 될 때 고통을 벗어나 평화를 누릴 수 있다고 생각했다. 스피노자는 왜 이런 생각을 했을까. 창조주인 신을 끌어들여 인간세상을 억압하는 종교권력의 실체를 경험했기 때문이다. 스피노자가 이성理性을 통해 천지자연의 이법을 탐구했으므로, 우리는 이를 이신론理神論이라 명명한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기氣이다.” 서경덕의 이 말은 무슨 뜻일까. 존재하는 모든 것은 천지자연이므로 천지자연이 기氣이다. 리理가 따로 있어 천지자연을 다스리는 것이 아니다. 인간은 천지자연에 속함으로 인간도 기氣로 구성되었다. 리理가 따로 있어 인간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다. 기氣가 움직이는 법칙을 깨달을 때 인간은 마음의 평화를 누릴 수 있다고, 서경덕은 생각했다. 이 기는 이미 둘을 품고 있으므로 나누어지고 합쳐지는 작용이 쉼 없이 일어난다고, 서경덕은 생각했다. 음기와 양기가 나누어지는 것이 생성이요, 음기와 양기가 합쳐지는 것이 극복이다. 극복과 생성은 쉼 없이 일어나니, 이를 음양의 상생상극, 줄여서 생극론이라 이른다. 서경덕은 왜 이런 생각을 했을까. 서경덕은 성인聖人이 되고자 하는 열망이 컸기 때문이다.
스승을 모시던 제자가 스승의 임종을 앞두고 물었다: “선생님! 심경이 어떠십니까?”
서경덕이 대답했다: “삶과 죽음의 이치를 오래 전에 알았으므로 편안하다.”
라틴문명이 추구한 신과 한문문명이 추구한 성인은 말〔語〕은 다르나 지향하는 바가 같다. 인간은 누구나 누추한 현실을 초월해 완전해지고 싶은 욕구를 지니고 있으므로, 인간이라면 누구든 완전한 경지에 도달하고자 애를 쓴다. 바로 그 완전한 경지의 도달점이 신이고 성인인 것이다.
“기는 바로 신이요 신은 바로 기이다.(氣卽神神卽氣)” 이것은 최한기의 말이다. 이것은 유신론有神論도 아니고 무신론無神論도 아니고 이신론理神論도 아니다. 이것은 기신론氣神論이다. 최한기가 말하는 성인聖人은 기학氣學에 달통한 사람이다. 오늘 우리사회를 괴롭히는 서교西敎의 맹목과 광란을 바로잡는데 최한기의 처방은 명약이다. 한국고전번역원에 올라있는 인정『人政』 측인문「測人門」 천인운화天人運化의 한 문단을 아래에 옮긴다.
“신과 기를 함께 말하면 신은 기 가운데 포함되고, 신 하나만을 말하면 기의 공용功用으로 뚜렷이 드러난 것이니, 기는 바로 신이요 신은 바로 기이다. 옛날 사람들은 대부분 기와 신을 둘로 여겨 쉽게 허탄하고 괴이한 데 빠졌으므로 후인들이 혼란하여 준칙을 얻지 못하게 되었으니, 이것은 애초에 기를 알지 못하고 따라서 신도 알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진실로 기에 나아가 형색形色의 영향과 운화의 공용을 분명하게 꿰뚫어 안다면, 신을 알 수 있고 또 신이 기에서 벗어나지 않음도 알 수 있을 것이다.(幷言神氣。則神包氣中。單言神。則氣之功用現著也。氣卽神神卽氣。而古之人。多以氣神爲二。易入于虛誕奇異。至使後人。渾淆無準。始不知氣。從不知神。苟能於氣。有見得形色影響。運化功用。瞭然透澈。可知其神。又知其不外於氣。)”
제14강 세계문학사 이해 바로잡아야
본강은 『탈춤의 원리와 신명풀이(2006년)』에서 시작해서 『소설의 사회사 비교론1, 2, 3(2001년)』에서 마친다. 전자는 생극신명풀이설이고, 후자는 생극소설론이다. 둘 다 설파가 평생 동안 화두를 들고 진력해 이룩한 과업이다. 『대방광불화엄경』의 요지를 추렸다는 『화엄일승법계도』만 읽어서는 화엄세계의 진면을 속속들이 알 수 없듯, 설파의 학문세계를 간추린 본강만 듣고서는 생극신명풀이설과 생극소설론의 전모를 파악할 길이 없다.
호한浩瀚한 저서를 남긴 정약용이 두 아들에게 보내는 편지에 이런 말을 남겼다: 주역대전『周易四箋』은 내가 하늘의 도움을 얻어 지어낸 문자이다. 결코 사람의 힘으로 통할 수 있거나, 사람의 지혜나 생각으로 이룰 수 있는 바가 아니다. -후략-
상례사전『喪禮四箋』은 내가 성인聖人을 독실하게 믿어 지어낸 문자이다. 날뛰는 물결〔狂瀾〕을 돌리고 온갖 내〔川〕를 막아 수사洙泗〔공맹지도孔孟之道〕의 참된 근원으로 돌아가게 했다고 생각한다. -후략-
이 두 부部만 전할 수 있다면 나머지 책들은 폐기해도 좋다."
나는 정약용의 『상례사전』은 읽지 못했으나 『주역사전』은 동도들과 만나 원전을 강독한 적이 있다. 그때 읽은 소감을 고백하자면 『주역사전』은 그리 대단한 책이 아니다. 주역『周易』을 상수학象數學의 관점에서 수학적으로 풀었으나, 효사爻辭 풀이에 견강부회가 심하다고 느꼈다. 정약용은 자신의 주역 해석이 매우 독창적이라고 여겼으나 실제로는 재래의 관점을 크게 벗어났다고 하기 어렵다. 반면 설파는 자신이 쓴 두 책을 미완이라 여기며 후속연구를 기다린다고 했으나, 완성도가 높은 독창적인 이론이다. 두고두고 읽어야 할 고전이라고, 나는 굳게 믿고 있다.
제15강 민요의 고향에서 찾은 희망
설파는1960년 4.19를 몸소 겪으면서 세계관이 바뀌었는데, 나는 1980년 5.18을 구전으로 접하면서 의식이 깨어났다. 1985년 2.12 총선 때 급조된 야당 후보한테 의식적으로 표를 던진 것이 그 출발이다. 사람은 누구나 태어난 지역, 타고난 환경의 지배를 받으며 살다가, 어떤 계기를 만나 크게 변하거나 도약한다. 설파가 범인과 다른 하나는 단순히 정치적 견해의 변화에 머물지 않고 학문적 세계관이 근본적으로 변했다는 점에 있다. 주희朱熹가 말하는 활연관통豁然貫通이요, 지눌知訥이 말하는 돈오점수頓悟漸修의 돈오가 이에 해당할 것이다.
오늘 설파 강의는 돈오에 바탕을 둔 학문이라야 진정한 학문이고, 위대한 학문이며, 학문다운 학문임을 설파하고 있다. 설파가 큰 학문을 이룩하고 내가 작은 교육에 머물고만 까닭은 단순하다. 설파는 약관弱冠의 나이에 돈오했고, 나는 그렇지 못한 것에서 차이가 벌어졌다고, 나는 생각한다.
제16강 현지조사의 경과
『서사민요연구』가 발행된 1970년은 내가 중학교 1학년 다니던 때고, 『인물전설의 의미와 기능』이 발간된 1979년은 내가 군에 입대한 이듬해로 일병을 달았던 때고, 『동학성립과 이야기』가 상재된 1981년은 군에서 제대하고 대학 1학년 2학기에 복학했던 때다. 당시 이 세 책이 세상에 나온 줄도 몰랐고, 조동일 이라는 사람이 이 땅에 같이 살고 있는 줄도 몰랐다.
내가 조동일 책을 처음 읽은 것은 1991년 삼국유사강독회를 결성하고 매주 한 차례씩 『삼국유사』를 강독할 때였다. 별다른 참고서 없이 『삼국유사』 원문을 해석하는 것이 너무 힘겨워, 이런저런 자료를 찾다가 만난 것이 『삼국시대 설화의 뜻풀이』라는 책이다. 이 책은 1990년에 나온 것이니, 아직 출생 온기가 가시지 않아 김이 모락모락 솟는 책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거슬러 올라가 1987년인지 1988년인지 정확한 기억은 없으나 교무실을 함께 쓰는 동료 국어교사가 『한국문학통사』를 읽고 있는 걸 본 적이 있다. 물론 그때 이 책을 구해 읽지 않았다. 한문교육과를 졸업했다는 핑계로 『한국한문학사』와 『중국문학사』를 더듬고, 유교경전을 뒤적이는 게 당시 나의 독서 이력의 전부였다.
내가 언제부터 조동일 책을 본격적으로 찾아 읽기 시작했는지 그 시점을 말하기 어렵다. 처음 어떤 책에 꽂혔는지도 알 수가 없다. 그저 눈에 띄는 대로 이 책 저 책 읽다말다 하며 지낸 것 같다. 지금도 책장에 꽂혀있으면서 나의 손길을 기다리는 조동일 책이 수두룩하다. 그래서 장님 코끼리 다리 만지듯 조동일 학문 세계를 내 멋대로 추측하고 평가한다. 오늘 강의에 등장한 세 책은 제목은 알고 있었으나 읽은 적이 없다. 이 책들은 조동일 학문의 출발점이기에, 조동일 학문을 탐색하는 입장에서 이 책들을 빼버릴 수 없다. 조만간 시간을 내서 첫사랑의 추억을 떠올리듯 살금살금 이 책들을 읽어 나갈 계획이다.
제17강 율격론
사람은 살다보면 어떤 계기를 만나 크게 깨닫는 순간이 온다. 깨달음이란 눈이 번쩍 뜨여 그 동안 보지 못하던 세계가 환하게 열리는 체험을 말한다. 온갖 고생을 하며 오른 백두산 천지天池에 덮여있던 짙은 운무가 한 순간 사라지며 드러내는 천지의 전경을 상상해보라. 이를 불가에선 돈오頓悟라 하고 유가에선 활연관통豁然貫通이라 하고 설파는 통찰洞察이라고 한다.
1960년 4.19를 통해 현실을 자각하고 한국학에 뜻을 세운 것이 설파의 첫 돈오다. 돈오는 임계점에 도달하는 순간 폭발하기에 영원히 지속되지 않는다. 돈오가 유지되려면 반드시 실천이 뒤따라야 한다. 그 실천을 불가에선 점수漸修라 하고 유가에선 수신修身이라 하고 설파는 학문저술이라 부른다. 설파의 첫 돈오의 산물은 『서사민요연구(1970)』이다. 1963년 여름에 시작해서 이듬해인 1964년 그리고 1969년과 1970년에 걸친 서사민요 현지조사의 결과물이다.
본강에는 나오지 않지만 설파의 두 번째 돈오의 산물은 『문학연구방법(1980)』이다. 이 책은 왕필의 말을 빌면, 지혜를 비우고 무지를 실천한(虛有智而實無知) 성과물이다. 『한국문학통사(1982-89, 2005)』는 서사민요 율격 연구 성과를 비롯해 설파의 평생의 노력을 집대성해 이룬 금자탑이다.
본강에 나오지 않는 설파의 세 번째 돈오의 산물은 『철학사와 문학사 둘인가 하나인가(2000)』이다. 이 책은 내가 두고두고 애독하는 명저이다. 이 책 마지막 단원 「새로운 학문은 시작되는가」는 설파의 우언이다. 문학과 철학이 합쳐져야 한다는 평소 지론을 실행한 것이다.
설파는 말한다: "새로운 학문이 시작되는가? 마땅히 그래야 한다. 그러나 길게 보면 필연적인 일이 당장은 일어나지 않을 수 있다. 나의 계획안이 채택될지 의문이다. 아름다운 꿈은 실현되지 않는다 해도 그 자체로 소중하다. 불운에 굴복하지 않으면서 꿈을 키운 선인들의 용기와 지혜를 이제는 이해할 것 같다. 이룬 것은 얼마 되지 않으나 꿈이 컸던 사람들 가운데 조동일도 있었다고 기억될 수 있으면 지금까지 분투한 보람이 있겠다."
산목은 말한다: "설파가 제안한 유네스코 국제대학인 유니버시토피아는 반드시 이루어진다. 유니버시토피아는 새로운 시대의 필연이다. 유니버시토피아의 등장과 더불어 무덤 속에 들어간 설파는 다시 살아난다. 설파의 부활은 설파의 법신法身인 생극론이다. 생극론은 대등론 · 창조주권론과 함께 세상의 모습을 새롭게 바꾸어 나갈 것이다.”
『세계문학사의 전개(2002)』는 생극론을 적용한 문학사 서술 작업의 최종 결산으로, 세계문학사의 한 장을 차지하는 거작이다. 설파의 네 번째 돈오의 산물은 지금 행하고 있는 유튜브 방송 창조주권론과 남불문화기행이다.
인간은 태어나면 누구나 한 번은 돈오를 체험한다. 어렸을 때 익히는 모어母語 습득이 바로 그것이다. 대부분의 인간은 여기서 멈추고 마는데, 한두 번 더 돈오를 체험한다면 참으로 운이 좋은 사람이라고 한다. 이 글을 쓰면서 스스로 묻고 있다. 나에게도 돈오가 찾아왔을까?
제18강 서사구조
요즘 듣는 강의는 설파의 평생 저서를 담고 있다. "하나 속에 전체가 들어있고 전체 속에 하나가 들어있듯(一中一切多中一, 一卽一切多卽一.)” 강의 한 편 한 편마다 설파의 전체 학문 역정이 녹아있다. 책만 읽어서는 감지할 수 없는 세계가 눈앞에 환히 드러난다. 강의의 위대함이요, 조동일문화대학의 존재 이유이다.
『소설의 사회사 비교론1,2,3』은 『인물 전설의 의미와 기능』에서 시작되었다. 여러 차례 경북 영해 지방을 발로 뛰어다니며 탐구한 바탕이 있어서 세계를 무대로 한 소설론을 이룩하게 되었다. 나처럼 설파의 후기 저작부터 읽는 사람은 한 발짝 한 발짝 뚜벅뚜벅 걸어온 설파의 발걸음을 짐작도 못한다. 어제부터 읽기 시작한 『인물전설의 의미와 기능』이 너무도 재밌다. 지방방언은 알아듣지 못해도 얘기를 나누는 광경만큼은 눈에 선하다.
제19강 문학과 사상
1864년 최제우가 순도하고 1894년 동학혁명이 좌절하기까지 30년간 진행된 동학의 역사를 어떻게 볼 것인가? 30년간 전개된 동학의 교세 확장을 정치적, 사회적 관점에서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정치적 요인으론 1차, 2차 아편전쟁을, 사회적 요인으론 콜레라 대유행을 꼽을 수 있지 않을까. 반석 같던 중원제국과 동아시아질서가 양이洋夷에 의해 속절없이 무너진 데서 오는 정신적 공황과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괴질이 온 동네를 초토화시키는 데서 오는 심리적 공포가 조선민중을 동학으로 끌어낸 것은 아닐까. 당시 조선지배층의 무능은 이러한 내우외환에 속수무책이었으니, 민중이 주체적으로 살 길을 찾아 나선 것이 동학이 아니었을까. 그런 면에서 동학은 종교를 뛰어넘는 종교요, 종교에 갇히지 않은 종교요, 종교가 아닌 종교라 할 수 있을 것이다.
2020년 코로나 대유행은 세상을 어떻게 변모시킬 것인가. 1864년부터 1894년까지 진행된 30년간의 조선 사회 변화와 2020년부터 2050년까지 30년간 진행될 우리 사회 변화를 비교 예측해보자. 우선 20세기를 지배한 세계경찰국가 미국이 서서히 몰락할 것이다. 미국 대통령 트럼프는 우연히 등장한 돌연변이가 아니고, 오늘날 미국의 현실을 그대로 비추는 거울이다. 갈수록 미국의 정치적 지도력은 하락할 것이다. 그 동안 미국을 받들고 따르던 사람들은 공황까지는 아닐지라도 공복감을 느끼겠지만, 새로운 질서를 꿈꾸던 사람들은 희망을 품어도 좋지 않을까.
동학이 급격하게 세를 불린 건 역병疫病 콜레라 덕분이었다. 동학에 입도하면 콜레라에 걸리지 않는다는 소문이 조선민중의 마음을 사로잡았는데, 오늘날 우리나라 서교西敎는 코로나 방역에 협조하기는커녕 확산의 주범 노릇을 하고 있으니 국민의 마음을 잃는 것은 필연이다. 미국이라는 의지처가 사라지고 국민의 마음까지 잃으면 서교의 앞날은 어찌 될까. 과연 조선의 사상가 정도전이 꿈꾸던 종교 없는 사회를 꿈꿀 수 있을까. 인간의 허약함이 지속되는 한 그것은 불가능한 꿈이요, 인간의 각성이 보다 깊어지고 넓어진다면 요행을 바랄 수도 있지 않을까.
제20강 새로운 학문
성향이 다를수록 잘 어울리고 성향이 같을수록 다툼이 잦다. 남녀궁합도 체질이 반대일 때 잘 살고 체질이 같을 때 싸움이 자주 일어난다. N극과 N극이 서로 밀어내고 N극과 S극이 서로 끌어당기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기독교와 이슬람이 서로 밀어내는 것은 뿌리가 같은 종교이기 때문이다. 유교는 기독교나 이슬람과 아주 달라, 기독교와 이슬람간의 중재자 구실을 할 수 있는 1차 자격은 갖추었다. 다만 중재자 노릇을 제대로 하려면 균형 잡힌 시각과 지식을 가져야하는데, 유교와 기독교에 관한 정보는 넘치나 이슬람에 대한 지식이 너무도 빈곤하다. 향후 조동일문화대학에서 이슬람학 강의가 예정된 이유일 것이다.
21세기 인류사 최대 주제 중의 하나가 종교 간의 화해다. 그중에도 기독교와 이슬람의 화해는 절대적 과제다. 이 과업의 성취여부에 세계평화가 달려있다. 설파의 관념의 모험에 박수와 응원을 보낸다.
나오는 말
지난 토요일 밤, 한국신명나라에 들어가 강의 논평문 양식을 내려 받고 글을 쓰기 시작했다. 「들어가는 글」을 먼저 쓰고 나서, 그 동안 유튜브 강의에 올린 댓글을 찾아 하나하나 복사해 강의 논평문에 붙여 넣었다. 썼던 글들을 다시 읽어 보니 엉망이다. 중언부언은 예사고 맥락이 어긋나고 문장 자체가 되지 않는 비문이 수두룩했다. 오자, 탈자, 띄어쓰기는 말할 것도 없는, 글쓰기 기초가 전혀 안된 초보 중 초보였다. 낯 뜨거워 쥐구멍을 찾는다는 속언을 절절히 체험하면서, 문장을 다시 손보며 고쳐 쓰느라 시간이 꽤나 걸렸다.
창조주권론 강의 한 편 한 편이 넓고 깊은 설파의 학문세계를 축약하고 있고, 시대와 지역을 넘나들며, 다방면의 문제를 제기하고 있어 강의 내용을 포괄하는 댓글을 쓰는 게 불가능했다. 강의 내용과 표현된 문장이 완벽에 가까워 빈틈을 찾는 것도 간단치 않았다. 내가 쓴 댓글에 설파의 강의에 대한 반론이 전무한 것이 그 때문이다. 바둑세계에 급수가 있듯이 학문의 세계에도 분명히 단수가 있다. 후생가외後生可畏란 말이 있지만, 우둔한 나한텐 일어날 수 없는 먼 나라 이야기다. 설파선생은 여전히 우뚝 선 설산고봉雪山高峯이다. 단지 고봉이 하나가 아니라 여기저기 산재해있다는 말을 믿고 나는 나의 길을 가겠다는 각오를 다진다.
댓글을 수정할 때, 어떤 편은 아예 새로 썼고, 어떤 편은 다시 썼고, 어떤 편은 부분만 손을 봤다. 새로 썼거나 다시 쓴 편은 다음과 같다.
창조주권론 1부 3강, 창조주권론 1부 10강, 창조주권론 2부 13강, 모두 세 편이다.
올해 10호 태풍 하이산(海神)이 큰 피해 없이 동해를 지나가는 것 같다. 사실 태풍을 지구라는 생명체가 자기 스스로를 유지하기 위한 활동으로 본다면 반드시 나쁘게만 여길 이유가 없다. 인간에게 막대한 인명피해와 재산손실을 끼쳐서 그렇지, 바닷물을 한 번 크게 휘저어 놓음으로써 생태계의 균형을 가져다주는 이로움도 있다. 대국적인 입장에서 크게 보면 손해보다 이익이 클 수도 있다. 상극이 상생이요, 상생이 상극이라는 이치가 여기서도 적용된다고 하겠다. 번데기 앞에서 주름 잡는 만용을 부렸다. 이 모두 무식한 덕이다.
2020. 9. 7(월) 23:30 현금석 삼가 쓰고 다시 고쳐 씀.
#『인물 전설의 의미와 기능』 #동학東學 #코로나 대유행 #이슬람학 #설산고봉雪山高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