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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된 원고와 실제 녹음된 내용이 정확하게 일치 하지는 않습니다.
2012년 6월 10일 주일예배 설교내용 – 생명으로 인도하는 좁은 문
본문: 마태복음 7장 13~14
13 ○"좁은 문으로 들어가거라. 멸망으로 이끄는 문은 넓고, 그 길이 널찍하여서, 그리로 들어가는 사람이 많다. 14 생명으로 이끄는 문은 너무나도 좁고, 그 길이 비좁아서, 그것을 찾는 사람이 적다."
0. 성도인 우리고 일상을 살 때, 하나님의 약속과 그 말씀보다 세속의 권위에 더 자주 마음을 빼앗기를 것을 봅니다. 그들이 말하는 진리가 진리인지, 하나님의 영이 감동하여 말씀으로 남기신 성경이 말하는 진리가 진리인지 선택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성도인 우리가 보다 많은 사람들이 찾아 가는 넓은 문이 아닌, 불편하고 비좁을지라도 생명을 소개하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명령하십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것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성령께서 조명해 주심으로 명확히 볼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1. 미국에 1930년대 에드워드 버네이스라는 사람이 살았습니다. 그는 역사상 PR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원래 베이컨을 팔던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삼촌은 독일의 심리학자 지그문트 프로이트라는 사람입니다. 그가 말합니다. “우리는 스스로 자유의지에 따라 행동한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거대한 권력을 행사하는 독재자들의 지배를 받는다.” 그가 오늘날 미국식 아침식사의 전형인 베이컨과 달걀 식사를 만들어낸 사람입니다. 의사를 찾아가서 넉넉한 아침식사를 강조합니다. 더불어 그 식사에 베이컨이 도움이 된다는 말을 곁들입니다. 1929년 3월 31일 미국의 신문들에 1면 톱기사에 여성의 흡연권을 주장하는 사진과 글이 실립니다. 담배 판매량이 2배가까이 늘었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권위자의 말에 동의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그것을 이용해 엉뚱한 소비를 촉진시킨 사람입니다. 그의 말과 노하우를 독일 나치정부의 선전부장인 괴벨스가 적극 활용했다고 합니다.
유진 피터슨은 성경을 재해석한 메시지라는 책에서 오늘의 본문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하나님께 이르는 지름길을 찾지 마라. 세상에는 여가 시간을 활용하는 것만으로도 성공하는 인생에 이를 수 있다고 말하는, 쉽고도 확실한 공식들이 넘쳐난다. 대다수 사람들이 그런 말에 속겠지만, 너희는 속지 마라. 생명, 곧 하나님께 이르는 길은 정신을 바짝 차려야 갈 수 있는 힘든 길이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속고 있는 가르침이 있다는 것입니다. 더구나 성공에 이르는 쉽고 확실한 공식이라고 말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성공을 하기 위해서 시간과 노력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기울어야 할 노력과 사용해야 할 시간을 조금이라도 덜 사용하여 남들만큼, 혹은 남들보다 더 좋은 결과를 얻고 싶어합니다. 이것이 대다수 사람들의 가진 심리입니다. 이러한 심리작용의 최면에 빠지지 말고 깨어서 생명에 이르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선택하라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본문의 한글로 사람이라고 번역된 말(아우토스)은 육신을 가진 사람의 모습(안뜨로포스)을 표현한다기 보다는, 사람이 자기 자신이라고 생각하는 심리적인 대상으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즉 ‘자아’라는 말로 표현할 수 있겠습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눈에 보이는 육신의 활동이 아니라, 내면의 선택에 따른 작용을 말한다는 것이지요. 즉 일상에서 양자택일해야 할 기회를 만났을 때, 어느 쪽을 선택해야 하는가를 말하는 것입니다. 수 많은 일상의 선택의 기로에서 생명을 선택할 것인가? 아니면 멸망을 선택할 것인가? 과연 생명을 선택한다는 것이 무엇인가? 예수님은 좁은 문으로 들어갈 길을 선택하라고 하셨습니다. 좁은 문은 비좁아서 선택하는 자아가 적다고 했습니다. 비좁고 불편하여서 자주 선택 받지 못하는 곳에 생명으로 이끄는 문이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상황에 따라서는 좁은 문이 반드시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좁은 문은 영적인 상식으로 그곳이 생명의 문인 것을 아는데도 단지 불편하다는 이유 때문에 사람들에게 인기가 없는 길(일상의 태도)을 말하는 것입니다.
2. 심리학 용어 중에 사회적 증거의 법칙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불확실한 상황에 처하게 되면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이 하는 행동을 학습하고, 모방한다는 이론입니다.
60년대 미국 대도시 뉴욕에서 38명의 증인이 지켜보는 가운데 죽어간 여인의 사건.
어려움에 처했을 때 꼭 한 사람을 지명해서 구체적으로 도와 달라고 해야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대체로 자신이 쉽게 결정할 수 없는 상황에 맞닥뜨리게 되면 타인의 행동을 보고 모방하려는 심리적인 기재가 있기 때문이다. 유사하게 우리도 사람들을 의견에 많이 영향을 받는다. 특히 많은 사람들이 좋다고 하면 할수록 우리도 함께 좋은 점을 찾아내려고 한다.
사람은 대체로 타인의 영향력에 복종하고 싶어한다고 합니다. 하지만, 정말 그 영향력이 자신을 살리는 영향력인지는 고민하지 않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이것이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이 추종하는 가벼운 대중성의 문제입니다. 그저 흘러가는 대로 살고 싶어합니다.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그래 봐야 어차피 다 죽을 인생들인데 말이지요.
또한 마찬가지로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싶어서 그들이 가진 의견에 신경을 쓰려는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다 보면 우리의 마음은 더욱 산만하여 질 수밖에 없습니다. 더욱 부정적인 스트레스의 노예가 되어 버립니다. 우리는 주변의 모든 사람을 만족시킬 수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과 복음에 집중하면 모든 사람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좁은 문으로 이어진 길을 따라가는 사람이 누릴 능력입니다.
타인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려고 하든, 받으려고 하든 모두 사람에게만 신경을 쓰기 때문에 생기는 문제들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공평하게 하루에 24시간만을 지냅니다. 따라서 사람들의 시선에 신경을 쓰는 시간이 많아지면, 비례적으로 하나님의 약속에 신경을 쓰고, 하나님의 시선에 관심을 갖는 시간은 줄어드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의 도시생활에서 말씀에 관심을 갖는다는 것이 쉽지 않고, 불편할 때가 많다는 증거들도 많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생명이며, 영원합니다. 사람들의 인생은 멸망(폐허, 낭비, 죽음)으로 끝나고 말지요. 하나님의 약속을 의지함으로 폐허로 끝나버리는 사람들의 시선에서 자유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3.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사람들의 시선이 아닌, 하나님의 약속에 좀 더 관심을 기울일 것을 주문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시선에 의지하는 것은 넓은 길로 가다가, 넓은 문으로 들어가는 인생을 사는 것과 같다는 말이죠.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 길을 선호합니다. 왜냐하면 많은 사람들이 선택했기 때문에 그 길이 안전할 것이라고 짐작해 버리는 것입니다. 일단 그렇게 짐작하면 자신의 선택이 옳았다는 것을 증명할 증거들을 계속해서 찾아 나갑니다. 이것이 심리학입니다. 복음이 아닙니다. 심리학은 눈에 직접 보이지 않는 사람의 마음이 드러난 현상을 연구하는 사회과학이며, 이론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사람인 우리는 그런 과학으로 완벽하게 설명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어쩌면 우리의 심리와 육체는 과학적인 실험과 이론을 갖고 설명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영혼의 문제는 심리학이나 의학으로 해결하지 못합니다. 정서의 문제는 심리상담과 의료적 치료로 해결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어차피 멸망할 영혼으로 사는 것은 변하지 않습니다. 심리적이고 정서적인 안정을 찾았다고 해서 복음을 믿는다고 착각해서는 안 됩니다.
밀양이라는 제목의 영화를 보면 참된 구원과 정서적 안정의 차이가 얼마나 큰지를 고발하고 있습니다. 혹시 우리는 복음을 믿는다고 하면서 여전히 넓은 문으로 들어가는 삶을 선호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좁은 문에 들어간다는 것이 단지 수적인 마이너리티가 되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적은 무리에 들어간다는 것을 좁은 문을 선택한 것으로 착각하지 말자는 것입니다. 참으로 좁은 문에 들어선다는 것이 무엇인지 성령의 조명으로 맑고 밝아진 눈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4. 그렇다면 좁은 문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본문에 보면 좁은 문으로 인도하는 길(여기서 길은 삶의 노하우, 혹은 삶의 태도라고 해도 좋다.)은 비좁다고 했습니다. 원어로 보면 압박을 받는다는 뜻입니다. 어떤 사전은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번역했습니다. 스트레스를 받지 않겠다고 교회를 나오는데 지금 무슨 소리인가? 하고 반문할 분이 있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산다는 것 자체가 스트레스가 아닐까요? 스트레스를 전혀 받지 않는다는 것은 무덤에 누워있다고 하는 말과 다르지 않다고 누군가 이야기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산다는 것 자체로 크고 작은 스트레스를 받습니다. 하지만, 어떠한 스트레스를 받고 있느냐는 모두 다르다. 스트레스에 따라서 사람은 삶의 의욕을 갖기도 합니다. 건전한 삶을 이끄는 건강하고 긍정적인 스트레스도 있습니다.
육신의 삶도 그렇지만, 우리의 영혼이 영생하는 길에도 그러한 스트레스가 있다. 성경은 하나님의 일을 위해서 고민하는 것을 권면하고 있습니다(고후 7:10-11, 하나님의 뜻에 맞게 마음 아파하는 것은, 회개를 하게 하여 구원에 이르게 하므로, 후회할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세상 일로 마음 아파하는 것은 죽음에 이르게 합니다. 11 보십시오. 하나님의 뜻에 맞게 마음 아파함으로써 여러분에게 얼마나 많은 변화가 일어났습니까! 여러분이 나타낸 그 열성, 그 변호, 그 의분, 그 두려워하는 마음, 그 그리워하는 마음, 그 열정, 그 응징은 참으로 놀라운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 모든 일에 잘못이 없음을 보여주었습니다.).
넓은 길을 걷느라고 부딪히게 될 사소하고 많은 문제들에 신경쓰며 스트레스를 받는 것은 결국 우리를 폐허로 만듭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집중하기 위해서 받는 스트레스를 받아들이면 그 스트레스는 오히려 우리를 영생으로 이끈다는 것입니다.
과연 우리는 결국은 멸망하고, 폐허가 될 일을 추구하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사는 것처럼 아무런 생명도 없는 스트레스를 자처하고 있는가? 아니면 생명으로 이끄는 스트레스에 감사하며 살고 있는가? 이로서 추측 하건데 우리는 참 생명과 구원의 약속을 위해서 압박을 받는 것 같은 불편함을 선택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인 것을 배울 수 있습니다.
5. 우리는 매일 선택의 기로에 섭니다. 좁은 문으로 이어진 길을 선택할 용기를 달라고 기도하면 반드시 하나님께서 그 힘을 주실 것을 믿습니다. 이것이 복음을 믿는 사람이 누리는 일상에서의 영적인 힘입니다. 복음을 믿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것이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사람은 주변의 모두가 멸망으로 가는 선택을 하더라도, 그 선택에 부화뇌동하지 않습니다. (부화뇌동: 출전, 예기(禮記)의 곡례(曲禮), 유래, 『예기(禮記)』 <곡례(曲禮)> 상(上)에 이런 말이 있다. "다른 사람의 말을 자기 말처럼 하지 말고, 다른 사람의 의견에 동조하지 마라. 옛 성현을 모범으로 삼고 선왕의 가르침에 따라 이야기하라."이것은 손윗사람에게 아랫사람이 지켜야 할 예절(禮節)에 대해 설명한 것이다. 또 논어 <자로(子路)>편에는 이런 말이 있다. "공자(孔子)가 말하기를, 군자는 화합하되 부화뇌동하지 않고 소인은 부화뇌동하되 화합하지 않는다(子曰 君子和而不同 小人同而不和)."군자는 남을 자기 자신처럼 생각하기 때문에 남과 조화를 이루면서도 각자에게 주어진 역할을 열심히 수행하므로 부화뇌동하지 않는다. 반대로 소인은 이익을 좇으므로 이익을 같이하는 사람끼리는 함께 행동(行動)하지만 남과는 조화를 이루지 못한다. 우레가 한번 쳤다 하면 천지 만물은 이에 호응하듯이 연달아 덜컥거린다. 이처럼 자신의 줏대와 기준을 망각한 채 이해관계(關係)에 따라서 혹은 무조건 남의 주장에 따르는 것을 경고하고 있다.)
결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버겁게만 여겨집니까? 그렇다면 자신의 삶을 어떻게든 멸망으로 이끄는 수많은 세속적인 격언과 태도, 타인의 시선과 의견은 버겁지 않습니까? 삶의 치열한 이유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우리가 죄로 물든 육신과 동거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죄로 물든 육신을 입고 산다는 것 자체가 어차피 버거운 일입니다.
생명과 이어진 길로 걷는 인생은 타인의 시선에 흔들릴 필요가 없습니다. 이에 반해 멸망으로 인도하는 커다란 문으로 이어진 넓은 길에는 그 만큼 많은 것들이 우리의 신경을 빼앗습니다. 하지만, 좁은 문으로 연결된 좁은 길에서 신경을 쓸 것은 단 한 가지, 십자가의 복음인 구원의 약속뿐입니다. 우리는 모든 사람의 의견과 시선에 신경을 쓰며 그 모든 일들을 완벽하게 소화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용기를 냅시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아버지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기도하면 좋은 것을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생명을 얻을 힘을 달라고 하는데 그저 죽게 내버려두실 우리 하늘 아버지가 아닙니다. 사람들의 의견에 일일이 대응하지 않고도 살아갈 힘, 오직 하나님의 약속에 의지하면 반드시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생명과 성령의 힘을 주실 것을 믿습니다. 용기를 부으실 것을 믿습니다. 그래서 눈을 뜨면 하루가 기대가 되고, 소망이 될 것을 믿습니다.
주변과 환경과 인간관계들이 지속적으로 생명으로, 좁은 문으로, 좁은 길로 가려는 나를 조롱해도 걱정하지 맙시다. 무시해도 신경 쓰지 맙시다. 괴롭혀도 웃어 넘겨 봅시다. 우리의 참된 하늘 아버지는 당신께 순종하는 자들에게 상급을 주실 것입니다. 영생이라는 상급을 이미 주셔서 우리가 누리게 하셨습니다.
육신에 필요한 여러 가지 것을 챙기기 위해서 애쓰기 보다, 생명을 누리기 위해 좁은 문에 집중할 수 있는 사람이 되기를 원합니다. 이렇게 집중하는 사람에게 반드시 힘을 주시는, 성령의 능력을 부어주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능력과 사랑과 은혜를 믿습니다. 십자가의 능력을 믿습니다. 보혈의 능력을 믿습니다. 이번 한 주간도 구원의 약속을 성취하신 십자가의 복음을 믿는 믿음으로 좁은 문을 선택할 수 있는 용감한 시간들을 지내시길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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