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대산사고>
오대산은 월정사와 상원사의 산이었다. 문수보살의 산, 중국 따퉁의 오대산과 동명의 그 오대산이 이번에는 사고의 오대산이 되었다. 여태 오대산 사고를 찾아볼 생각을 못하다니, 찾아본 후에는 오히려 그런 의문이 생겼다. 진입로의 아슬아슬함은 왜 이제야 찾았는지를 설명해주는 것같다. 역시 보물은 누구나 닿을 수 없는 곳에 있는 거다.
1.방문지 대강
방문일 : 2025.8.11.
위치 : 강원 평창군 진부면 동산리 산1번지
면적 : 8,053㎡
입장료 :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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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교통편
월정사에서 상원사로 오르는 길에서 왼쪽 기슭으로 약 800미터를 다시 올라야 한다. 월정사와 상원사 간에는 비록 일부 비포장이라도 버스도 다니는 큰 길이어서 차량 이동이 문제가 없으나 큰길에서 벗어난 기슭길은 오르기가 만만치 않다. 버스는 바로 이 지점에 승강장이 있으므로 여기서부터 걸어올라야 한다. 226번 등 두 대의 버스가 다닌다.
이 길은 돌과시멘트로 길을 잘 마련했으나 차 한 대가 겨우 지나갈 정도의 넓이이고, 나무가 빽빽하여 대낮에도 길이 잘 보이지 않는다. 더구나 닦아놓은 길 옆쪽으로 차가 미끄러지면 쉽지 않을 수 있으니 매우 조심해야 한다. 솔직히 도로 사정이 이런 줄 알았으면 걸어올라오거나 포기했을 거 같다.
전주 사고, 적성산 사고에 이어 세번째 사고 탐방이다. 보고 나니 그 동안 오대산 사고를 입으로만 외고, 월정사를 그렇게 여러번 왔다가면서도 찾아볼 생각을 못했다는 것이 희한하게까지 여겨졌다. 이 깊은 산중에 사고를 두어 역사를 보존하려 했던 우리의 기록정신에 다시 숙연해진다.
중국은 도자기, 일본은 그림, 우리는 서적이 대표 문화라는 설파 선생님의 견해가 실체로 수긍된다. 이런 기록문화 정신 덕분에 임금마저 엄격하게 임무를 다하고, 혼자 있어도 삼가는 신독을 실천하면서 살았고, 후손이 무서워서라도 엄정한 삶을 살았던 문화가 손에 잡히는 거 같다.
서양에서는 고백록이라는 이름으로 신에게 자기의 인생을 고했다면 우리는 선비는 문집으로 후손에게 자신의 삶을 고했다. 임금은 이처럼 사관이 기록한 실록을 통해 삶을 고하고 평가를 받았다. 그 평가는 다음 세대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대대손손 후손이 살아 있는 날까지 영구적으로 평가가 계속될 터이니 얼마나 엄정하게 살려고 노력했을 것인가. 법이나 관습이 아닌 후손 생각만 해도 저절로 옷깃을 여미는 삶을 살았을 터인데 그 끝을 이곳 사고에서 확인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 정신이 법없어도 사는 사람들을 만들고, 세계에서 가장 안전한 나라를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품격 있는 삶, 나를 넘어 후손까지 생각하는 삶, 이제 한국을 넘어 인류의 행복을 염려하는 정신으로 이어져 한류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닌가 한다.
2.2. 오대산사고 모습
원래의 사각은 6.25때 불타 없어져서 1992년에 새로 복원한 것이다. 사고는 두 동의 건물로 구성되는데 앞의 것은 실록을 보관한 사각이고, 뒤의 것은 선원보각(璿源譜閣)이다. 선원보각은 왕실족보인 선원록(璿源錄)을 보관하던 곳이다. 문은 앞 쪽과 건물 왼쪽의 두 개로 되어 있다. 사진은 두 동의 건물과 두 개의 문을여러 각도에서 찍은 것이다.
임진왜란으로 남은 유일본 전주사고본을 저본으로 만든 교정본을 보관한 오대산사고, 일제 때까지 남아 있다가 일본으로 가져가 도쿄대학에 보존되었는데, 관동대지진 때 거의 타버렸다. 그때 대출된 실록 45책 등 화를 면한 실록이 환수되어 지금은 총 75책이 서울대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다.
2.3. 오대산사고 소개
강원도 평창군 진부면 월정사 북쪽에 있었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으로 그전에 있던 4사고 가운데 전주사고만 남아 그 기록을 내장산·해주·강화도·묘향산 등으로 옮겼다.
1603년 7월에서 1606년 3월까지 2년 9개월 동안 〈태조실록〉부터 〈명종실록〉까지 804권의 실록을 다시 출판했다. 이때 출판한 3부와 교정본, 전주사고에 있던 실록 원본을 합친 5부의 실록을 강화도 마니산, 봉화군 태백산, 영변군 묘향산, 평창군 오대산에 각 1부씩 나누어두었다. 이 가운데 오대산사고에는 교정본을 봉안했다.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으로 춘추관사고가 없어졌고, 1633년 후금과의 관계 악화로 묘향산사고를 적상산으로 이전했으며, 1636년 병자호란으로 마니산사고가 크게 파괴당하자 1678년(숙종 4) 정족산으로 옮겼다.
오대산사고는 조선 말기까지 보존되었던 사고였으나 1913년 일제가 오대산사고에 있던 실록을 일본 도쿄대학[東京大學]으로 가져갔으며, 1923년 관동대지진으로 거의 다 타버렸다. 남은 잔본 약간만 경성제국대학으로 옮겨져 현재 규장각에 보관되고 있다. (다음백과)
오대산사고(五臺山史庫)는 조선 후기에 실록(實錄)을 비롯하여 국가의 주요한 역사 기록물을 보관 ‧ 관리하던 외사고(外史庫)이다. 임진왜란 당시 전주에 있던 사고를 제외한 3곳의 사고가 모두 병화를 입게 됨에 따라 전란 이후에는 외사고를 산간의 오지나 도서 지역으로 이설하였다. 이 사고는 당시 외사고 입지 선정에 있어 사적의 이용과 관리의 효율성을 중요시하였던 입장이 사적의 안전을 최우선시하는 방향으로 전환됨에 따라, 전주 사고본 실록을 저본으로 새롭게 제작한 실록을 안전하게 분산하여 보관하기 위해 설치한 4곳의 외사고 가운데 하나이다.
이보다 앞서 1605년 10월, 재인쇄된 실록의 교정쇄본을 봉안할 장소로 오대산 상원사(上院寺)가 선정되었다. 그러나 월정사 부근에 사각(史閣)을 건립하여 실록을 보관하기로 방침을 변경함에 따라 1606년(선조 39) 월정사(月精寺) 북쪽에서 10리 떨어진 남호암(南虎巖) 기슭에 오대산사고를 설치하였다. 오대산사고의 수호 사찰(守護寺刹)인 월정사는 사고에서 너무 떨어져 있어 실제로는 암자 격인 영감사(靈鑑寺)에서 수호를 하였다. 따라서 영감사를 일명 사고사(史庫寺)라 하기도 하였다.
1603년(선조 36) 7월부터 1606년 3월까지 진행된 실록 복구 사업을 통해 태조~명종대의 실록 4부가 재간행되었으나, 전란 직후 재정의 궁핍으로 인하여 이 가운데 3부만 정본(正本)으로 인쇄하고, 나머지 1부는 최종 교정쇄본을 장정(裝幀)하여 정본을 대신하도록 하였다. 1606년 당시 오대산사고에 봉안된 실록은 태조~명종실록 교정쇄본이다. 이후, 1616년(광해군 8)에는 『선조실록』을 봉안하였다. 그리고 1653년(효종 4)에는 『인조실록』을, 1657년에는 『선조수정실록』을, 1661년(현종 2)에는 『효종실록』을, 1678년(숙종 4)에는 『광해군일기』를, 1728년(영조 4)에는 『숙종실록』을, 1732년에는 『경종실록』을, 1805년(순조 5)에는 『정조실록』을 봉안하였다.
실록 포쇄(實錄曝曬: 실록책을 바람에 쐬고 햇볕에 쬐는 것)는 수시로 행해져 정확한 횟수는 파악하기 어렵다. 그러나 현재 남아 있는 형지안(形止案)에 근거해 볼 때, 약 59회 행해졌다. 사고를 관리하는 책임은 참봉(參奉)에게 있지만, 사고 수호의 책임은 실록수호총섭(實錄守護總攝)에게 있었다. 오대산 사고 실록수호총섭은 월정사의 주지였다. 이 사고를 설치할 때에 수호군(守護軍) 60명, 승군(僧軍) 20명이 맡아 지켰다.
1910년 국권 상실 후, 오대산사고의 서책은 이왕직도서관(李王職圖書館)에서 관리하였다. 이듬해인 1911년 3월, 조선총독부 취조국(取調局)에서 이 서책들을 강제로 접수했다가 1913년 10월 동경제국대학(東京帝國大學) 부속도서관에 기증되었다.
그러나 1923년 9월 관동대지진(關東大地震)으로 이 서책들이 대부분 소실되고 당시 대출 중이었던 45책만이 화를 면하였다. 소잔본(燒殘本) 가운데 27책은 1932년 5월에 경성제국대학에 이관되어 이후 서울대학교 규장각으로 이어졌다. 2006년초 동경대학도서관 귀중 서고에 오대산사고본 실록의 일부가 소장되어 있다는 사실이 확인되어 2006년 7월 47책이 반환되었으며, 2018년 1책이 추가로 환수되었다. 현재 총 75책의 오대산사고본 실록이 국립고궁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전재)
2.5. 국립조선왕조실록박물관
월정사 입구에는 2025.5.1.에 개관한 조선왕조실록 박물관이 있다. 오늘이 월요일 휴관일이라 가보지 못하였다. 함께 살펴보면 좋을 거 같다. 여기서는 조선왕조실록 원본과 의궤를 볼 수 있다.
"박물관 관계자는 "강원 평창군 오대산에 있는 실록박물관은 수도권 및 대도시에서 멀리 떨어져있어 관람객 유치가 쉽지 않은 상황에도 불구하고, 조선왕조실록 원본을 볼 수 있는 유일한 박물관인 동시에 일제강점기 반출에서 100여 년 만에 이루어진 환수 과정에 담긴 감동적인 이야기로 많은 이들의 관심과 사랑을 받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동물 캐릭터로 관심을 끌고 있는 어린이박물관, 오대산 자연을 배경으로 실록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담은 영상실, 오대산사고를 찾은 조상들의 여정을 함께 따라가는 특별전시 등 다양한 콘텐츠가 관람객의 주요 흥미 포인트로 꼽히고 있다"고 덧붙였다." (뉴시스, 2025.5.28.)
3. 사고 주변
사고에서 좁은 블록 길을 따라 내려오면 상원사와 월정사를 잇는 비포장도로가 나오는데, 그곳에는 226번 시내버스가 서는 버스 정류장이 있다. 그 아래를 흐르는 계곡이다.
이 계곡에는 섶으로 만든 섶다리가 설치되어 있다. 다리를 건너면 요즘 조성된 선재길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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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오대산 사고 소개 및 안내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