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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한시감상
「안령대풍」 정여창
[ 鞍嶺待風 鄭汝昌 ]
待風風不至(대풍풍부지) 바람을 기다리나 바람은 오지 않고
浮雲蔽靑天(부운폐청천) 뜬구름만이 푸른 하늘을 가리네
何日涼飆發(하일량표발) 어느 날 시원한 회오리바람 불어와
掃却群陰更見天(소각군음갱견천) 온갖 음기 쓸어 내고 다시 하늘을 볼 수 있을까?
〈감상〉
이 시는 무오사화(戊午士禍)로 함경도 종성에 유배되어 안령에서 바람을 기다리며 지은 시로, 그의 절의(節義)가 잘 드러난 시이다.
바람(좋은 기풍(氣風)이나 세상을 뜻함)을 기다리지만 바람은 불어오지 않고 뜬구름(암울한 시대 상황, 임금 주변에 있는 권신(權臣)을 뜻함)만이 푸른 하늘에 가득하다. 어느 날 시원한 회오리바람이 한 번 불어와 온갖 음기(陰氣)들을 다 쓸어 내고 다시 푸른 하늘을 볼 수 있을까?(임금을 둘러싼 권신(權臣)들을 제거하고 요순(堯舜) 시대의 정치가 행해지는 시대를 만들 수 있을까? 하지만 현실의 문제에 있어서는 그렇지 못한 상황을 노래하고 있다)
정여창은 절의(節義)뿐만 아니라 효(孝)도 뛰어났는데, 『유선록(儒先錄)』에 그 일단이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선생이 중년에 소주를 마시고 광야에 취해 쓰러져서 한 밤을 지내고 돌아오니, 어머니가 매우 걱정되어 굶었는데, 이때부터 음복(飮福)밖에는 절대로 술을 입에 대지 않았다. 성종이 술을 내린 적이 있는데 선생이 땅에 엎드려 아뢰기를, ‘신의 어미가 살았을 때에 술 마시는 것을 꾸짖으므로, 신이 다시 마시지 않을 것을 굳게 맹세하였사오니, 감히 어명을 따르지 못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감탄하여 이를 허락하였다. 선생이 일찍이 태학(太學)에 가서 공부하다가 어머니를 뵈러 집에 갔더니, 집안에 전염병이 바야흐로 크게 펴졌는데, 공이 들어가서 그 어머니를 뵙고 얼마 안 지나서 어머니가 이질을 얻어 매우 위독하니, 공이 향을 태우고 기도하였으나 효험을 보지 못하자 이윽고 똥을 맛보았다.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소리치며 울어서 피를 토하였으며, 염습빈전(殮襲殯奠, 염과 습은 주검에 임하는 속옷과 겉옷, 빈은 장사 지내기 전에 시체를 안치하는 것, 전은 잔 드리는 것, 곧 상례를 뜻함)을 한결같이 예문(禮文)에 따랐다. 장사 지내려 할 적에 감사(監司)가 군(郡)으로 하여금 곽판(관을 짜는 판자)을 마련해 주게 하였는데, 공이 사양하고 받지 않으며, ‘백성을 번거롭게 하고 곽판을 얻으면 원망이 반드시 어머니에게 돌아간다.’ 하고, 이에 자기 집의 재물을 내서 바꾸어 사서 썼다. 때마침 장마가 열흘 동안 계속 이어져 시내 골짜기가 넘치니, 사람들이 두려워서 어찌할 줄 몰랐는데, 하늘이 갑자기 갰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신기하게 여겼다.
3년 동안 여묘살이 하는 동리에서 나가지 않았고, 하루도 베옷을 벗지 않았으며, 아버지의 묘를 같은 묏자리에 옮겼다(先生中年飮燒酒(선생중년음소주) 醉倒曠野(취도광야) 經宿而返(경숙이반) 夫人憂甚不食(부인우심불식) 自此飮福之外(자차음복지외) 絶不接口(절불접구) 我成廟嘗賜酒(아성묘상사주) 先生伏地曰(선생복지왈) 臣母在時(신모재시) 嘗責飮酒(상책음주) 臣固誓不復飮(신고서불부음) 不敢承命(불감승명) 上嗟嘆許之(상차탄허지) 先生嘗遊太學(선생상유태학) 省母到家(성모도가) 則家內癘疫方熾(칙가내려역방치) 公入見其母(공입견기모) 未幾母得痢疾甚劇(미기모득리질심극)
公焚香祈禱不見效(공분향기도불견효) 乃嘗痢(내상리) 及母沒(급모몰) 哭泣嘔血(곡읍구혈) 殮襲殯奠(염습빈전) 一依禮文(일의례문) 將葬(장장) 監司令郡辦給槨板(감사령군판급곽판) 公辭而不受曰(공사이불수왈) 煩民取板(번민취판) 怨必歸母(원필귀모) 乃出家資(내출가자) 貿易用之(무역용지) 時積雨連旬(시적우련순) 溪壑漲溢(계학창일) 人懼不克(인구불극) 天忽開霽(천홀개제) 人皆異之(인개이지) 三年不出廬洞(삼년불출려동) 一日不釋麻衣(일일불석마의) 移父墳於同兆(이부분어동조)).”
〈주석〉
〖鞍嶺(안령)〗 함경도 종성(鍾城)에 있는 고개. 〖涼〗 서늘하다 량, 〖飆〗 회오리바람 표, 〖掃〗 쓸다 소
각주
1 정여창(鄭汝昌, 1450, 세종 32~1504, 연산군 10): 본관은 하동(河東). 자는 백욱(伯勗), 호는 일두(一蠹). 김굉필(金宏弼)·김일손(金馹孫) 등과 함께 김종직(金宗直)에게서 배웠다. 일찍이 지리산에 들어가 오경(五經)과 성리학을 연구했다. 1490년(성종 21) 효행과 학식으로 천거되어 소격서참봉에 임명되었으나 거절하고 나가지 않았다. 같은 해 과거에 급제하여 관직에 나간 후 예문관검열·세자시강원설서·안음현감 등을 역임했다. 1498년(연산군 4) 무오사화에 연루되어 경성으로 유배되어 죽었다. 1504년 죽은 뒤 갑자사화가 일어나자 부관참시(剖棺斬屍)되었다. 시호는 문헌(文獻)이다.
「대우제청주동헌」 성현
[ 帶雨題淸州東軒 成俔 ]
畫屛高枕掩羅幃(화병고침엄라위) 그림 병풍 속에 베개 높이고 비단 휘장으로 가리니
別院無人瑟已希(별원무인슬이희) 별원에 인적 없고 비파 소리 벌써 끊겼네
爽氣滿簾新睡覺(상기만렴신수각) 시원한 기운이 주렴에 가득해 막 잠이 깨었는데
一庭微雨濕薔薇(일정미우습장미) 온 뜰의 보슬비가 장미꽃을 적시네
〈감상〉
이 시는 비를 마주하고 청주 동헌에서 쓴 것으로, 화려하게 수놓은 병풍과 비단 휘장 안에서 낮잠을 즐기고 있는 가진 자의 여유로움을 느끼게 하는 관각(館閣)의 시이다.
그림 같은 병풍과 비단 휘장 속에 베개를 높이 베고 누워서 자는데, 별당에는 인기척도 없고 비파소리도 벌써 끊어져 들리지 않는다. 비가 오고 있어 상쾌한 기운이 드리운 주렴에 가득해 막 잠에서 깨니, 온 뜰에 내린 가랑비에 장미가 촉촉이 젖어 들고 있다.
이처럼 15세기 관각시인(館閣詩人)인 성현(成俔)과 서거정(徐居正)의 시에는 여유로움을 느낄 수 있으나, 16세기 관각시인 이행(李荇)과 박은(朴誾)의 시에서는 사화(士禍)로 인한 정치적 문제 때문에 그러한 여유를 얻지 못하고 있어 차이를 보이고 있다.
〈주석〉
〖幃〗 휘장 위, 〖睡〗 자다 수, 〖薔薇(장미)〗 장미꽃.
각주
1 성현(成俔, 1439, 세종 21~1504, 연산군 10): 본관은 창녕. 자는 경숙(磬叔), 호는 허백당(虛白堂)·용재(慵齋)·부휴자(浮休子)·국오(菊塢). 서거정(徐居正)으로 대표되는 조선 초기의 관각문학(館閣文學)을 계승하면서 민간의 풍속을 읊거나 농민의 참상을 사실적으로 노래하는 등 새로운 발전을 모색했다. 1462년 식년문과에, 1466년 발영시(拔英試)에 각각 3등으로 급제하여 박사가 된 뒤 홍문관정자를 거쳐 사록(司錄)이 되었다. 1468년 예문관수찬·승문원교검을 겸했고, 1485년 첨지중추부사로 천추사(千秋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온 뒤 대사성·대사간·동부승지·형조참판·강원도관찰사 등을 지냈다. 1488년 평안도관찰사로 있을 때 동지중추부사로 사은사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온 뒤 대사헌을 거쳐 1493년 경상도관찰사가 되었다. 여말선초의 정치사·문화사에서 많은 인물을 배출한 명문의 후예로 비교적 평탄한 벼슬생활을 했으나 공신의 책봉에서는 빠지는 등 정치의 실권과는 거리가 있었다. 62세 때는 홍문관과 예문관 양관의 대제학(大提學)에 올라 이 시기의 문풍을 실질적으로 주도했다. 그의 시론의 특징은 이규보와 서거정의 기론(氣論)을 계승·발전시키는 한편 다양한 미의식의 구현을 주장한 점이다. 또한 사회적 효용을 중시하는 각도에서 정치적 득실에 대한 풍간(諷諫)의 작용을 강조했는데, 이것은 그의 애민시(愛民詩) 계열 작품의 이론적 토대를 이루었다. 그의 작품세계는 매우 다양하다. 형식적 측면에 있어서 고시(古詩)·율시(律詩)·악부(樂府)·사부(辭賦) 등의 양식을 고루 창작했는데, 그중에서도 고시(古詩) 창작에 관심을 가졌다. 주제 면에서도 사회 현실에 대한 명확한 의식을 바탕으로 하여 관리나 승려 등의 부패와 횡포를 비난하고, 그들로 인해 고통받는 백성들의 실상을 묘사했다. 우리나라의 풍속을 소재로 한 국속시(國俗詩) 계열의 작품을 썼으며, 명나라 여행 중에 쓴 시를 모아 엮은 「관광록(觀光錄)」은 그의 이름을 중국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일상의 모든 속박에서 벗어나 도가적 초월을 지향하는 시를 남기기도 했는데, 자연에서의 즐거움과 한적한 심경이 잘 나타나 있다. 형인 성임(成任)과 성간(成侃)은 서거정과 절친하여 서거정이 확립한 관각문학의 전통을 충실히 계승했고, 역시 시를 잘 썼는데, 그 두 사람은 성현(成俔)의 문학세계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문장, 시, 그림, 인물, 역사적 사건 등을 다룬 잡록 형식의 글 모음집인 『용재총화(慵齋叢話)』를 저술했으며, 장악원의 의궤(儀軌)와 악보를 정리한 『악학궤범(樂學軌範)』을 유자광 등과 함께 편찬했다. 문집으로 『허백당집(虛白堂集)』이 전한다. 죽은 뒤 수개월 만에 갑자사화가 일어나 부관참시당했으나, 뒤에 신원(伸寃)되었고 청백리(淸白吏)로 뽑혔다. 시호는 문재(文載)이다.
「농중압」 김정
[ 籠中鴨 金淨 ]
主人恩愛終非淺(주인은애종비천) 주인의 사랑이 끝내 얕지 않은데
野性由來不自除(야성유래부자제) 유래된 야성은 스스로 없애지 못했네
霜月數聲雲外侶(상월수성운외려) 서리 내린 달밤 구름 밖에서 우는 짝을
籠中不覺意飄如(농중불각의표여) 새장 속에서 깨닫지 못하고 떠돌기를 생각하네
〈감상〉
이 시는 새장 속의 오리를 읊은 것으로, 오리에 자신을 가탁하여 현실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노닐기를 희망하고 있다.
새장 속의 오리에게 주인은 많은 사랑을 주었는데, 오리는 야성을 버리지 못하고 새장을 벗어나려고 한다. 서리 내린 가을밤, 오리는 새장 속에 갇혀 있기 때문에 구름 밖에서 우는 기러기의 마음을 깨닫지 못하고 그저 새장을 벗어나 땅 위에서 떠돌기만을 생각하고 있다.
날지 못하는 기러기를 김정(金淨)에, 주인을 임금에, 새장을 조정에 비유하여 생각해 본다면, 임금의 사랑을 많이 받았지만 김정은 타고난 처사(處士)의 본능을 없애지 못했고, 높은 벼슬에 있는 벼슬아치들의 소리를 깨닫지 못하고 그저 조정에서 벗어나 자연 속에서 자유롭게 노닐고 싶다는 것이다.
김정(金淨)의 이러한 심사에 대해 『기묘록(己卯錄)』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공은 천성이 순수하며 겉으로는 순후하고 안으로는 민첩하다. 서사(書史)를 두세 번만 읽으면 곧 외웠다. 문장을 지은 것이 정하고 깊으며 넓고 멀어서 멀리 서한(西漢)의 풍을 따랐으며, 시는 성당(盛唐)을 배웠다. 일찍이 속리산에 들어가 경전(經傳)에 침잠하여 거경(居敬)·주정(主靜)의 학문을 하였고 어진 이를 좋아하고 착한 일을 즐거워함이 천성에서 나왔다. 살림살이를 돌보지 아니하였으며, 뇌물을 받지 아니하였으며, 봉급은 친척들에게 고루 나누어 주었다. 그가 귀양살이를 하면서 자제들에게 말하기를, ‘나의 평생 동안 먹은 마음이 한적하여 홀로 있는 데에 부끄럽지 아니하였는데, 이제 괴상한 화를 얻었으나 너희들은 나 때문에 스스로 게으른 일이 없도록 하라.’ 하였다.
공이 남쪽으로 내려갈 때, 가는 길이 순창(淳昌)을 지나는데 순창 백성들이 다투어 술과 안주를 장만하여 가지고 나와 길을 막고 울면서, ‘우리들 전날의 원님이라.’ 하였다. 인조 말년에 명을 내려 공의 벼슬을 복직시키고, 선조 때에 문간공(文簡公)이란 시호를 내리었다(公天性純粹(공천성순수) 外醇內敏(외순내민) 於書史讀數遍輒誦(어서사독수편첩송) 爲文章精深灝噩(위문장정심호악) 遠追西漢(원추서한) 詩學盛唐(시학성당) 嘗入俗離山(상입속리산) 沈潛經傳(침잠경전) 爲居敬主靜之學(위거경주정지학) 好賢樂善(호현락선) 出於天性(출어천성) 不顧生產(불고생산) 不通關節(불통관절)
俸祿均頒於族親(봉록균반어족친) 其在謫中(기재적중) 語子弟曰(어자제왈) 余平生處心(여평생처심) 不愧幽獨(불괴유독) 而今得奇禍(이금득기화) 汝等無以我自怠也(여등무이아자태야) 公之落南也(공지락남야) 道過淳昌(도과순창) 淳昌之民(순창지민) 爭持酒饌(쟁지주찬) 攔道涕泣曰(난도체읍왈) 吾舊使君也(오구사군야) 仁廟末(인묘말) 命復公爵(명부공작) 宣廟朝(선묘조) 贈謚文簡(증익문간)).”
〈주석〉
〖籠〗 새장 롱(농), 〖鴨〗 오리 압, 〖侶〗 짝 려(여일작안(侶一作雁)), 〖飄〗 방랑하다 표
각주
1 김정(金淨, 1486, 성종 17~1520, 중종 15): 본관은 경주. 자는 원충(元沖), 호는 충암(沖菴)·고봉(孤峯). 조광조(趙光祖)와 함께 사림파를 대표했으며, 기묘사화 때 제주도에 귀양 갔다가 「제주풍토록(濟州風土錄)」을 써서 기행문학의 성격을 바꿔 놓기도 했다. 3세에 할머니 황씨에게 성리학(性理學)을 배우기 시작했고, 20세 이후에는 구수복(具壽福) 등과 성리학을 연구했다. 1507년 증광문과에 급제하여 관료생활을 하면서도 성리학 연구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여러 관직을 거쳐 1514년 순창군수가 되었다. 이때 중종이 왕후 신씨를 폐출한 것이 명분에 어긋난다 하여 신씨 복위를 주장하며 신씨 폐위의 주모자인 박원종(朴元宗) 등을 추죄(追罪)할 것을 상소했다가 왕의 노여움을 사서 보은에 유배되었다. 얼마 뒤 다시 등용되어 응교·전한 등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고, 뒤에 사예·부제학·동부승지·좌승지·이조참판·도승지·대사헌 등을 거쳐 형조판서를 지냈다. 그 뒤 기묘사화로 인해 금산에 유배되었다가 진도를 거쳐 제주도에 옮겨졌으며, 다시 신사무옥(辛巳誣獄)에 연루되어 사약을 받고 죽었다. 사림세력을 중앙정계에 추천했으며 조광조의 정치적 성장을 도왔다. 사림파의 세력기반을 다지기 위해 현량과(賢良科)의 설치를 주장했고, 왕도정치를 실현하기 위해 미신타파와 향약의 실시, 정국공신의 위훈삭제(偉勳削除) 등과 같은 개혁을 시도했다. 시문에 능해 유배생활 중 외롭고 괴로운 심정을 시로 읊었다. 특히 경치를 보고 기개를 기르자고 읊을 뿐 지방마다의 생활풍속은 무시했던 이전의 기행문학과는 달리 제주도의 독특한 풍물을 자세히 기록하여 「제주풍토록」을 남겼다. 저서에 『충암집(沖菴集)』이 있다.
「산당병기」 이언적
[ 山堂病起 李彦迪 ]
平生志業在窮經(평생지업재궁경) 한평생 뜻과 일은 경전(經典) 궁구(窮究)에 있어
不是區區爲利名(불시구구위리명) 구구하게 이익과 명예 구하지 않으리
明善誠身希孔孟(명선성신희공맹) 명선(明善)과 성신(誠身)엔 공맹(孔孟)을 바라고
治心存道慕朱程(치심존도모주정) 치심(治心)과 존도(存道)엔 정주를 사모했네
達而濟世憑忠義(달이제세빙충의) 통달해서 세상을 구제함엔 충의에 의지하고
窮且還山養性靈(궁차환산양성령) 궁하면 산으로 돌아와 성령을 기른다
豈料屈蟠多不快(기료굴반다불쾌) 어찌 험하고 많은 불쾌함 생각하리오?
夜深推枕倚前楹(야심추침의전영) 깊은 밤 베개 밀어 두고 앞 난간에 기대노라
〈감상〉
이 시는 과거 급제 후 24세에 산에 있는 집에서 병이 들어 일어나 지은 것으로, 이언적의 포부가 잘 드러난 시이다.
한평생의 포부와 일은 오직 경전(經典)을 궁구하는 것이니, 구차스럽게 명예나 이익을 구하지는 않겠다. 공자(孔子)와 맹자(孟子)에게서는 명선(明善)과 성신(誠身)을 배우고, 정자(程子)와 주자(朱子)에게서는 치심(治心)과 존도(存道)를 배운다. 이러한 것을 배우고 벼슬길에 나아가면 세상을 구제함으로써 충의(忠義)를 실현하고, 여의치 않아 물러나면 산으로 돌아와 성정(性情)을 기르겠다. 이러한 길에서 험하고 어려움을 어찌 걱정하겠는가? 병이 들어 잠 못 드는 깊은 밤에 베개를 밀치고 일어나 앞에 있는 난간에 기대어 본다.
『해동잡록』에 그의 출처(出處)에 대한 간략한 내용이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본관은 여주로 자는 복고이고 호는 회재이며, 또 하나의 호는 자계옹(紫溪翁)이다. 초명(初名)은 적(迪)이었으나, 정덕(正德) 갑술년에 등제하였을 때 중종의 명령으로 언(彦) 자를 가하였다. 경인년에 사간(司諫)으로 벼슬을 그만두고 전리(田里)에 돌아갔는데 7년 만에 김안로(金安老)가 패사(敗死)하게 되자, 다시 부름을 받아 관직을 역임하고 이조판서가 되었다. 인종(仁宗) 초에 특별히 좌찬성을 배수하고, 화(禍)가 일어나자 강계(江界)로 귀양 갔다가 귀양 간 곳에서 죽었다. 사람됨이 충효(忠孝)가 천성으로 뛰어났으며, 학문이 정심(精深)하였다. 저서로는 『봉선잡의(奉先雜儀)』, 『대학장구보유(大學章句補遺)』, 『중용구경연의(中庸九經衍義)』 등의 책이 있다.
뒤에 명에 의하여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문원(文元)이다. 문집이 세상에 전한다(驪州人(여주인) 字復古(자부고) 號晦齋(호회재) 又號紫溪翁(우호자계옹) 初名迪(초명적) 正德甲戌登第(정덕갑술등제) 我中廟命加彥字(아중묘명가언자 ) 庚寅以司諫罷歸田里(경인이사간파귀전리) 凡七年(범칠년) 及金安老敗死(급김안로패사) 復召累遷(부소루천) 至吏曹判書(지리조판서) 仁廟初(인묘초) 特拜左贊成(특배좌찬성) 及禍作(급화작) 謫江界(적강계) 卒于謫所(졸우적소) 爲人忠孝出天(위인충효출천) 學問精深(학문정심) 所著有奉先雜儀大學章句補遺中庸九經衍義等書(소저유봉선잡의대학장구보유중용구경연의등서) 後命贈領議政(후명증령의정) 謚文元(익문원) 有集行于世(유집행우세)).”
〈주석〉
〖憑〗 기대다 빙, 〖性靈(성령)〗 =성정(性情), 〖屈蟠(굴반)〗 꼬불꼬불함. 〖料〗 헤아리다 료, 〖楹〗 기둥 영
각주
1 이언적(李彦迪, 1491, 성종 22~1553, 명종 8): 본관은 여주(驪州). 초명은 적(迪). 자는 부고(復古), 호는 회재(晦齋)·자계옹(紫溪翁). 10세 때 아버지를 여의고 외숙인 손중돈(孫仲暾)의 도움으로 생활하며 그에게 배웠다. 1514년(중종 9) 문과에 급제하여 경주 주학교관(州學敎官)이 되었다. 이후 성균관전적·인동현감·사헌부지평·이조정랑·사헌부장령 등을 역임했다. 1530년 사간(司諫)으로 있을 때 김안로(金安老)의 등용을 반대하다가 그들 일당에 의해 몰려 향리인 경주 자옥산(紫玉山)에 은거하며 학문에 열중했다. 1537년 김안로 일파가 몰락하자 종부시첨정으로 시강관에 겸직 발령되고, 교리·응교 등을 거쳐, 1539년에 전주부윤이 되었다. 이후 이조·예조·병조의 판서를 거쳐 경상도관찰사·한성부판윤이 되었다. 1545년(명종 즉위) 인종이 죽자 좌찬성으로 원상(院相)이 되어 국사를 관장했고, 명종이 즉위하자 「서계십조(書啓十條)」를 올렸다. 이해 윤원형(尹元衡)이 주도한 을사사화의 추관(推官)으로 임명되었으나 스스로 벼슬에서 물러났다. 1547년 윤원형과 이기(李芑) 일파가 조작한 양재역벽서사건(良才驛壁書事件)에 무고하게 연루되어 강계로 유배되어 죽었다.
「제비해당 사십팔영」 신숙주
[ 題匪懈堂 四十八詠 申叔舟 ]
「熟睡海棠(숙수해당)」
高人睡起掩朱扉(고인수기엄주비) 고인이 잠에서 깨어 일어나 붉은 사립문을 닫으니
月轉長廊香霧霏(월전장랑향무비) 달빛은 긴 회랑을 돌고 꽃향기 어린 안개는 내리네
獨繞芳叢燒短燭(독요방총소단촉) 홀로 꽃떨기에 둘러싸여 작은 촛불 켜 두고
沈吟夜久更忘歸(침음야구갱망귀) 밤늦도록 읊조리며 다시 돌아가길 잊네
〈감상〉
이 시는 안평대군(安平大君)의 저택과 그 주변의 사물들을 제재로 하여 지은 시 가운데 깊은 잠에서 깨어 해당화를 보고 노래한 것이다.
안평대군을 중심으로 신숙주(申叔舟)·성삼문(成三問)·김수온(金守溫)·서거정(徐居正) 등은 유미적(唯美的) 성향의 시를 짓는다. 최항(崔恒)의 「산곡정수서(山谷精粹序)」에, “비해당은 학문이 해박하고 견식이 높은데, 평소 황산곡의 시를 좋아하여 늘 읊조리며 감상하기를 멈추지 않았다. 마침내 단편 가운데 좋은 작품을 뽑고 뛰어난 것을 모아서 평론을 더하고 『산곡정수』라 하였다. ······뒤에 시를 배우는 자들이 만일 이 한 질의 시집에 나아가 숙독하여 깊이 체득할 수 있다면 고인들이 깨달은 법도를 마땅히 이로부터 얻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천근하고 비루한 기운을 제거하여 청신하고 기묘한 골수로 바꿀 수 있을 것이고, 고장 난 거문고 소리가 남의 귀를 거스르는 일을 걱정하지 않게 될 것이며, 사광과 종자기(鍾子期)가 잠깐 사이에 얼굴빛을 바꾸고 음식 맛을 잃게 될 것이다.
재덕(才德)을 겸비한 군자가 오묘하게 살펴보고 정밀하게 모았으니, 정성을 다해 선인들을 빛나게 하고 후진들을 이끌어 주려는 아름다운 뜻이 이에 다소 실현될 것이다(匪懈堂學該識高(비해당학해식고) 雅愛涪翁詩(아애부옹시) 每詠玩不置(매영완불치) 遂采其短章之佳者(수채기단장지가자) 粹而彙之(수이휘지) 就加評論(취가평론) 名曰山谷精粹(명왈산곡정수) ······後之學詩者(후지학시자) 苟能卽此一帙(구능즉차일질) 熟讀而深體之(숙독이심체지) 則古人悟入之法(칙고인오입지법) 當自此得之(당자차득지) 祛淺易鄙陋之氣(거천역비루지기) 換淸新奇巧之髓(환청신기교지수) 枯絃弊軫(고현폐진) 不患其不滿人耳(불환기불만인이) 而師曠鍾期俄爲之改容忘味(이사광종기아위지개용망미) 大雅君子妙覽精輟(대아군자묘람정철) 惓惓焉發輝前英(권권언발휘전영) 啓迪後進之美意(계적후진지미의) 於是乎少酬矣(어시호소수의)).”라 하였는데, 이를 통해 안평대군의 후원 아래 기존의 시풍(詩風)에서 벗어나고자 하였음을 볼 수 있다.
조선 전기의 서거정·강희맹·이승소(李承召)·신숙주 등의 관각문인(館閣文人)들은 화려한 수사와 세련된 감성을 위주로 시를 창작하였다. 문학에 있어 실용적인 측면을 강조했던 이들이 유미주의적(唯美主義的)인 취향을 드러내는 것은, 왕정(王政)의 분식(粉飾)과 대명(對明) 외교의 필요성으로 인해 기교적인 시문(詩文)의 창작이 요구되었고, 한미(寒微)한 출신에서 집현전 학사로 발탁되어 특별한 대우를 받았던 사람으로서의 엘리트 의식이 귀족적인 성향으로 변질되었던 것이다. 위의 시가 그 대표적인 작품이다.
〈주석〉
〖匪懈堂(비해당)〗 세종대왕의 3남인 안평대군(安平大君) 이용(李瑢)의 호(號)이다. 당대의 명필(名筆)로서 시문(詩文)에 뛰어나 중국 사신들이 올 때마다 그의 필적을 얻어 가곤 하였다. 단종(端宗) 즉위 후 황보인(皇甫仁)·김종서(金宗瑞) 등과 제휴하고 문신들을 포섭하여 수양대군(首陽大君)의 무신 측과 맞서다 단종 1년 계유정난(癸酉靖難)으로 몰락하여 사사(賜死)되었음.
〖睡〗 자다 수, 〖高人(고인)〗 평범하지 않은 사람. 〖扉〗 문짝 비, 〖廊〗 행랑 랑, 〖霏〗 오다 비,
〖繞〗 둘러싸다 요, 〖沈吟(침음)〗 낮은 소리로 읊조림.
각주
1 신숙주(申叔舟, 1417, 태종 17~1475, 성종 6): 본관은 고령. 자는 범옹(泛翁), 호는 희현당(希賢堂)·보한재(保閑齋). 1438년(세종 20) 생원시·진사시에 합격했고, 이듬해 친시문과에 급제하여 전농사직장(典農寺直長)을 지냈다. 입직할 때마다 장서각에 파묻혀서 귀중한 서책들을 읽었으며, 자청하여 숙직을 도맡아 했다고 한다. 이러한 학문에 대한 열성이 왕에게까지 알려져 세종으로부터 어의를 받기도 했다. 1443년 통신사 변효문(卞孝文)의 서장관으로 일본에 가서 우리의 학문과 문화를 과시하는 한편 가는 곳마다 산천의 경계와 요해지(要害地)를 살펴 지도를 작성하고 그들의 제도·풍속, 각지 영주들의 강약 등을 기록했다. 일본에서 돌아온 뒤 집현전수찬을 지내면서 세종의 뜻을 받들어 훈민정음 창제에 심혈을 기울였다. 1452년(문종 2) 수양대군이 사은사로 명나라에 갈 때 서장관으로 수행하면서 그와 깊은 유대를 맺었다. 1453년 수양대군이 계유정난을 일으켜 김종서(金宗瑞)·황보인(皇甫仁) 등을 제거하고 정권을 장악했을 때 중용되어 수충협책정난공신(輸忠協策靖難功臣) 1등에 오르고, 이듬해 도승지로 승진했다. 1455년 세조가 즉위하자 동덕좌익공신(同德佐翼功臣) 1등에 고령군(高靈君)으로 봉해지고 예문관대제학으로 임명되었다. 서장관으로 일본에 갔던 경험을 바탕으로 「해동제국기(海東諸國記)」를 지어 일본과의 교류에 도움을 주고, 오랫동안 예조판서로 있으면서 명과의 외교관계를 맡는 등 외교정책의 입안·책임자로서도 활약했다. 글씨에도 뛰어났으며, 특히 송설체를 잘 썼다고 한다. 저서로는 문집인 『보한재집』이 있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궁사사시」 성간
[ 宮詞四時 成侃 ]
陰陰簾幕燕交飛(음음렴막연교비) 어둑한 주렴과 장막으로 제비는 번갈아 나는데
日射晴窓睡起遲(일사청창수기지) 햇빛이 맑은 창을 비치도록 자다가 더디 일어나네
急喚小娃供頮水(급환소왜공회수) 급히 어린 계집종 불러 세숫물 바치게 한 뒤
海棠花下試春衣(해당화하시춘의) 해당화 밑에서 봄옷을 입어 보네
〈주석〉
〖宮詞(궁사)〗 시체(詩體)의 하나로, 궁정 생활의 작은 일들을 노래함. 〖睡〗 자다 수, 〖喚〗 부르다 환, 〖娃〗 미인 왜, 〖頮〗 세수하다 회
陰陰簾暮暑風輕(음음렴모서풍경) 어둑한 주렴과 장막에 여름 바람 가벼운데
閑瀉銀漿滿玉缾(한사은장만옥병) 한가로이 은빛 음료를 따라 옥병에 채우네
好箇黃鸝多事在(호개황리다사재) 예쁜 저 꾀꼬리는 일도 많아
隔墻啼送兩三聲(격장제송량삼성) 담 너머에서 두세 번 고운 소리 울어 보내네
〈주석〉
〖漿〗 미음, 음료 장, 〖缾〗 술병 병, 〖好〗 아름답다 호, 〖箇〗 이 개, 〖黃鸝(황리)〗 꾀꼬리.
碧梧金井換新秋(벽오금정환신추) 오동잎 금정에 떨어져 새 가을로 바뀌나니
斜倚薰籠一段愁(사의훈롱일단수) 화로에 비스듬히 기댄 채 한 가닥 시름이네
明月滿庭天似水(명월만정천사수) 밝은 달은 뜰에 가득하고 하늘은 물 같은데
起來無語上簾鉤(기래무어상렴구) 일어나 말없이 주렴 갈고리 올리네
〈주석〉
〖碧梧(벽오)〗 푸른색의 오동나무. 〖金井(금정)〗 난간에 장식이 되어 있는 우물로, 일반적으로 궁정 원림(園林) 속의 우물을 일컬음. 〖薰籠(훈롱)〗 덮개를 싼 화로. 〖段〗 조각 단, 〖簾鉤(렴구)〗 주렴을 걷는 데 쓰는 갈고리.
七寶房中別置春(칠보방중별치춘) 칠보방 안에 따로 봄을 감춰 두었나니
羅巾斜帶辟寒珍(나건사대벽한진) 비단수건 비낀 띠에는 벽한진일세
朝來試步梅花下(조래시보매화하) 아침에 시험 삼아 매화나무 아래를 걸어 보는데
臉上臙脂懶未勻(검상연지라미균) 볼 위의 연지를 게을러 고루지 못했도다
〈주석〉
〖辟寒珍(벽한진)〗 추울 때에 그것을 집 안에 두면 추위를 물리쳐 추위를 모른다는 보물(寶物)임. 〖臉〗 뺨 검,
〖臙脂(연지)〗 여자가 화장할 때 양쪽 뺨에 찍는 홍분(紅粉). 〖懶〗 게으르다 라, 〖勻〗 두루 미치다 균
〈감상〉
이 시는 고체시(古體詩)의 하나인 궁사(宮詞)를 통해 궁인(宮人)의 사계절 생활을 봄부터 겨울까지 노래하고 있다.
이 외에도 『청구풍아』에 그의 시(詩)와 시(詩)에 대한 평이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진일재가 우연히 한 절구를 짓기를, ‘흰 태양 봄 하늘 만 리에 찬란하니, 상서로운 기린과 위엄스런 봉황새가 함께 때를 타고 났다. 삼경에 달 떨어지고 촌락이 적적하니, 도리어 여우들이 호랑이 위세를 빌렸구나.’ 하니, 점필재(佔畢齋)가 평하기를, ‘청명(淸明)한 조정에 혹 위엄과 복록을 몰래 농간하는 자가 있는 것을 말한 것인데, 시의 뜻이 꼭 누구를 지적한 것 같다.’ 하였고, 박팽년(朴彭年)이 비평하기를, ‘이 시는 신기한 점이 많으니, 명성이 근거 없는 것이 아니다.’ 하였다.
성진일(成眞逸)은 책을 넓게 읽고 잘 기억하며 손에서 책을 떼지 않았다. 시문을 짓는 데는 호방하고 깊고 건장하며, 삼엄하게 법도가 있었다(眞逸齋偶書一絶曰(진일재우서일절왈) 白日春天萬里暉(백일춘천만리휘) 祥麟威鳳共乘時(상린위봉공승시) 三更月落村墟黑(삼경월락촌허흑) 留與狐狸假虎威(위여호리가호위) 佔畢齋評云(점필재평운) 謂當淸明之朝(위당청명지조) 或有竊弄威福者(혹유절롱위복자) 詩意似有所指(사의사유소지) 朴仁叟批云(박인수비운) 此詩多有奇氣(차시다유기기) 名不虛得(명불허득) 成眞逸博覽强記(성진일박람강기) 手不釋卷(수불석권) 爲詩文豪放奧健(위시문호방오건) 森有法度(삼유법도)).”
각주
1 성간(成侃, 1427, 세종 9~1456, 세조 2):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화중(和仲), 호는 진일재(眞逸齋). 성임(成任)의 아우이고 성현(成俔)의 형이다. 문벌을 자랑하는 집안에서 태어나 일찍부터 재능을 보였다. 유방선(柳方善)의 문인으로 1453년(단종 1) 증광문과(增廣文科)에 급제한 뒤 집현전에 들어가 문명(文名)을 떨쳤으나 30세에 병으로 죽었다. 용모가 추하고 성격이 괴팍해서 웃음거리였다고 하며, 훈구파의 폐쇄적인 의식에 불만을 품은 것 때문에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나 경사(經史)는 물론 제자백가서(諸子百家書)를 두루 섭렵하여 문장·기예(技藝)·음률·복서(卜筮) 등에 밝았다. 강희안에게 준 시 「기강경우(寄姜景愚)」에서는 천고에 신기함을 남길 예술은 어떤 것인가 묻고, 개성 있는 표현을 모색하면서 문학과 미술이 조화되는 경지를 추구했다. 「신설부(新雪賦)」에서도 문학하는 자세에 관심을 보였다. 패관문학인 「용부전(慵夫傳)」에서는 세상의 문제에 적극적으로 맞설 자신이 없으므로 게으름에 빠져 마음의 위안을 찾는다고 했다. 저서로는 『진일재집』이 있다.
「좌유화자 부용전운 이시석춘지의」 신광한
[ 座有和者 復用前韻 以示惜春之意 申光漢 ]
名是爲春實是賓(명시위춘실시빈) 이름은 봄이지만 실은 손님
桃花欲謝強爲春(도화욕사강위춘) 복사꽃 지려는데 억지로 봄이라 하네
年年惜此春光去(년년석차춘광거) 해마다 봄빛이 지나가는 것을 애석해했는데
春作殘春人老人(춘작잔춘인로인) 봄은 늦봄이 되었고 사람은 노인이 되었네
〈감상〉
이 시는 함께한 사람 중에 화운(和韻)한 사람이 있어 다시 앞에 사용했던 운(韻)을 사용하여 봄이 가는 것을 애석해하는 뜻을 보여 준 시이다.
산문(散文)에서 필력(筆力)을 펴고 기운을 깊이 있게 하기 위하여 동일한 어구를 반복하는 중복(重複)의 수사(修辭)를 사용한다. 시(詩)에서도 어세(語勢)를 강화시키고 표현을 적극적으로 하기 위해 중복(重複)을 사용하였다. 일반적으로 근체시에서는 한 글자가 두 번 들어가면 작법(作法)에 어긋나지만, 1구(句)에 또는 1연(聯)에 같은 자가 두 번 들어가는 것을 허용하고 1수(首)에 같은 자가 3번 들어가는 것도 허용은 하지만 피하는 것이 좋다. 신광한은 이 시에서 춘(春)과 인(人)을 중복(重複) 사용하여 산문화(散文化) 경향을 띠고 있다.
허균은 『성수시화(惺叟詩話)』에서 신광한을 포함한 조선의 시사(詩史)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조선의 시(詩)는 중종조(中宗朝)에 이르러 크게 성취되었다. 이행(李荇)이 시작을 열어 눌재(訥齋) 박상(朴祥)·기재(企齋) 신광한(申光漢)·충암(冲庵) 김정(金淨)·호음(湖陰) 정사룡(鄭士龍)이 일세(一世)에 나란히 나와 휘황하게 빛을 내고 금옥(金玉)을 울리니 천고(千古)에 칭할 만하게 되었다. 조선의 시는 선조조(宣祖朝)에 이르러서 크게 갖추어지게 되었다. 노수신(盧守愼)은 두보(杜甫)의 법을 깨쳤는데 황정욱(黃廷彧)이 뒤를 이어 일어났고, 최경창(崔慶昌)·백광훈(白光勳)은 당(唐)을 본받았는데 이달(李達)이 그 흐름을 밝혔다. 우리 망형(亡兄)의 가행(歌行)은 이태백(李太白)과 같고 누님의 시는 성당(盛唐)의 경지에 접근하였다.
그 후에 권필(權韠)이 뒤늦게 나와 힘껏 전현(前賢)을 좇아 이행(李荇)과 더불어 어깨를 나란히 할 만하니, 아! 장하다(我朝詩(아조시) 至中廟朝大成(지중묘조대성) 以容齋相倡始(이용재상창시) 而朴(이박) 訥齋祥(눌재상), 申企齋光漢金冲庵淨鄭湖陰士龍(신기재광한김충암정정호음사룡) 竝生一世(병생일세) 炳烺鏗鏘(병랑갱장) 足稱千古也(족칭천고야) 我朝詩(아조시) 至宣廟朝大備(지선묘조대비) 盧蘇齋得杜法(노소재득두법) 而黃芝川代興(이황지천대흥) 崔白法唐而李益之闡其流(최백법당이이익지천기류) 吾亡兄歌行似太白(오망형가행사태백) 姊氏詩恰入盛唐(자씨시흡입성당) 其後權汝章晩出(기후권여장만출) 力追前賢(역추전현) 可與容齋相肩隨之(가여용재상견수지) 猗歟盛哉(의여성재)).”
이 외에도 『성소부부고』에는 신광한의 시에 대해 다음과 같은 내용이 실려 있다.
“낙봉(駱峰) 신광한(申光漢)의 시는 청절(淸絶)함에 아취가 있다. 「중추주박장탄(中秋舟泊長灘)」라는 시에, ‘갈대꽃 핀 물기슭에 외로운 배 매고 보니, 양 갈래 맑은 강에 사면에는 산이로세. 인간 세상에도 이 밤 같은 달이야 없을까만, 백 년 가도 이러한 달 보기 어려우리’라 하고, ······편편이 모두 읊을 만하다. 비록 웅기(雄奇)함에 있어서는 호음(湖陰) 정사룡(鄭士龍)에 미치지 못하나 청창(淸暢)함에 있어서는 오히려 그보다 낫다(申駱峯詩(신락봉시) 淸絶有雅趣(청절유아취) 中秋舟泊長灘曰(중추주박장탄왈) 孤舟一泊荻花灣(고주일박적화만) 兩道澄江四面山(양도징강사면산) 人世豈無今夜月(인세기무금야월) 百年難向此中看(백년난향차중간) ······篇篇俱可誦(편편구가송) 雄奇不逮湖老(웅기불체호로) 淸鬯過之(청창과지)).”
〈주석〉
〖謝〗 시들다 사, 〖强〗 억지로 강
각주
1 신광한(申光漢, 1484, 성종 15~1555, 명종 10): 본관은 고령(高靈). 자는 한지(漢之)·시회(時晦), 호는 기재(企齋)·낙봉(駱峰)·석선재(石仙齋)·청성동주(靑城洞主). 신숙주(申淑舟)의 손자로, 1507년(중종 2) 사마시를 거쳐 1510년(중종 5) 식년문과에 급제, 1514년(중종 9)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고 홍문관전교가 되었다. 조광조(趙光祖) 등과 함께 신진사류(新進士類)로서 1518년(중종 13) 대사성에 특진되었으나 다음 해 기묘사화에 연좌되어 삭직되었다. 1537년(중종 32) 등용되어 이조판서·홍문관제학을 지냈다. 1545년(명종 즉위) 을사사화 때 윤임 등 대윤(大尹)을 제거하는 데 공을 세워 위사공신(衛社功臣) 3등이 되었다. 같은 해 우찬성으로 양관대제학을 겸임, 영성부원군(靈城府院君)에 봉해졌으며, 1550년(명종 5) 좌찬성이 되었다. 1553년(명종 8) 궤장(几杖)을 하사받고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필력이 뛰어나 몇 편의 몽유록(夢遊錄)과 전(傳)을 남겼는데 「안빙몽유록(安憑夢遊錄)」·「서재야회록(書齋夜會錄)」은 이른 시기에 이루어진 몽유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