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의 딸} ⑫:
죽음보다 더욱 깊은 그리움
ㅡ“아버지는 어머니를 사랑하셨습니까?”ㅡ
①
朴埰同 (2015.03:21.12:04)
1987년 어느 봄날이었습니다. 목포 제일교회 자매가 저에게 “저는 하나님을 사랑한다 하면서도 왜 홀로 있을 때 고독을 느낄까요? 하나님을 사랑하는 제 마음이 거짓이기 때문일까요?” 물었습니다. 저는 “그것은 000 자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거짓된 마음 때문이라기보다는, 하나님께서 아담을 지으신 뒤 아담이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다 하셔서 이브를 지으셨는데, 그 고독은 하나님께서 작정하신 000 자매 반려자를 통해, 결혼으로 채워야 할 고독이 아닐까요?” 대답했습니다. 다음은 {목사의 딸} 52쪽에서 옮깁니다. 또 옮기는 글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와 같이하시는 것이 가족을 만나보는 것보다 좋습니다. 당신도 나를 만날 날을 기다리지 마시오. 하나님만 모시고 사십시오. 예수님께서 우리 구주시고, 길이요 생명이십니다.
나를 위해 기도할 것은 성령 충만히 받아 돌아가는 것이오. 편지를 너무 기다리지 마시오. 무소식이 희소식입니다. 그러나 내게는 편지를 종종 하시오. 나는 너무 외롭습니다. 아침마다 두어 시간씩 교회와 가정을 위해 기도합니다.
다음은 {목사의 딸} 69쪽에서 옮깁니다.
또 도착한 다음 날 신학교에서 경건회 설교를 하고 강의를 시작하셨다. 사람들은 이런 아버지 모습을 극히 존경스러워하며 경건하다 평가했다.
1987년은 제가 광주 서강전문대학 영어과 1학년을 다니던 때였습니다. 1987년 6월 10일 수요일부터 그 주간 학교 모든 수업은 휴강하게 됐습니다. 그런데 6월 항쟁 다음 날인 1987년 6월 11일 목요일 새벽이었습니다. 제 광주 자취방 주인댁 전화번호를 아시는 제 아버지께서 술 취하신 채 영산강 어귀 댐 바다 쪽에서 수영하시다가 심장마비로 돌아가시고, 저는 아버지 별세 소식을 학과장님 결혼식에 가서야 급우에게 듣게 됐습니다. 저는 광주 자취방을 거쳐 광주 버스터미널에서 버스를 타고 고향 목포로 갔습니다. 6월 13일 토요일이었습니다.
어머니께서는 저를 붙잡고 통곡하셨습니다. 어머니께서 더욱더 소리를 높여 대성통곡을 하실수록 저는 아랫입술을 더욱 깨물었습니다. “독한 놈!”, 제 울음을 터트리게 하려고 대성통곡을 하다가 지치신 어머니께서 저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다음 날인 주일, 저는 목포 제일교회 주일 낮 예배에 참석했습니다. 주보 광고란을 통해 ‘6월 10일에 젊으신 장로님 한 분이 주님 품으로 가셨음’을 알게 됐습니다. 그런데 예배 시간 끝까지 자리에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헌상 시간, 예배를 인도하시는 (부)목사님께서 “남편을 주님 품으로 부르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는, ‘권사님 감사헌금 내용’을 읽으시자마자 먹은 것도 없이 헛구역질이 나와 예배당 밖으로 뛰쳐나온 것입니다.
다음 날, 월요일 이른 아침이었습니다. 저는 “선산으로 삼우제를 가자.” 하시는 집안 어른들 말씀을 듣지 않고 집을 떠나 광주로 갔습니다. 그리고 그날 오후였습니다. 목포고등학교 한 해 후배이자 목포 제일교회 한 해 후배 00이 자취방으로 갔습니다. 교사가 꿈이었으나 뒷바라지를 해 주시지 않은 아버지 때문에 고교를 졸업하자마자 대학 진학을 하지 못한 채 학비를 벌려고 이른바 “공돌이” 생활도 했던 후배였습니다. 아버지를 원망하는 후배, 교회를 떠난 후배였습니다. 00이에게 막걸리를 사 올 것을 부탁했습니다.
제 눈빛을 보고도 제 마음을 아는 후배, 큰일이 있음을 눈치챈 00이는 아무 말 없이 막걸리를 사 왔습니다. 그리고 저는 ‘잔칫집의 기쁨 주酒’이자 ‘고통을 이기게 하는, 초상집의 위로 주酒’를 마신 뒤 00이에게 부고 소식을 알렸습니다. 그리고 00이 앞에서 펑펑 울다가 지쳐 잠이 들었습니다.
다음은 {목사의 딸} 74쪽과 136쪽에서 옮깁니다.
하루에도 수백 번 어머니를 향한 소리 없는 그리움을 삼키며 살았다.
그래서인지 중고등학교 시절 나름대로 내면의 갈등을 겪었지만, 밖으로는 일부러 밝게 보이려고 애썼다.
아버지 죽음 앞에서 패자였던 저는 위 두 문장에서 어머니를 일찍 여의신 박혜란 님과 형제분들 고통, 슬픔, ‘죽음보다 더욱 깊은 그리움’을 느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