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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타의 세계 ⑭
제2장 세존의 생애 – 깨달음에의 길, 열반에의 길
제6절 전향과 귀의(세존의 제자들)
▶고유명사와 그밖의 용어는 산스크리트어로 표기
1. 세존을 둘러싼 비구들
바라나시에서 다섯 출가 수행자의 전향과 장자 아들들의 출가 귀의 및 재가신자의 출현에 의해서 시작된 불교 교단이 그 후로 점차로 발전하여 오늘에 이르는 기초가 구축된 것은, 당시의 마가다국과 코살라국을 중심으로 한 지역에서 도를 구하던 많은 사람들이 세존에게 귀의하고 출가하여, 세존과 함께 교단을 형성해 나갔기 때문이다. 그들은 세존과 더불어 출가자의 올바른 생활을 몸소 실천했으며, 전도에 있어서는 멀리 서인도 등지에까지도 나가서 많은 사람들을 출가시킴으로써 교단의 기초를 확고부동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다음에는 세존에게 귀의하여 세존과 함께 바른 수행의 실천에 힘쓰고 또 세존의 뜻을 이어받은 비구들을 소개하기로 한다.
1) 카샤파(깟사빠, 가섭) 삼형제
보드가야 대탑의 동쪽에서 북으로 흐르는 나이란자나 강은 약간 하류에서 모하나 강과 합류하여 화르구 강이 되며, 다시 북으로 흘러서 가야에 이르고 있다. 이 두 강의 합류점에는 현재 자그마한 사당과 한 그루의 나무가 있다. 전설에 의하면 이곳은 후에 세존에게 귀의한 사화외도(事火外道 : 불을 신앙하여 섬기는 수도자) 카샤파 삼형제의 한 사람인 나디 카샤파의 유적이라고 한다. 다른 두 형제는 각기 거주지의 이름을 따서 울빌바 카샤파와 가야 카샤파라고 불리는데, 이들은 보드가야 근교의 우루빌바 마을과 가야 교외의 가야 쉬르샤(상두산)에 살았다고 한다. 이들 세 사람은 각기 수백 명의 제자를 거느리고 있어서, 당시 마가다국 내에서는 가장 명성이 높은 종교가였었고 또 빔비사라 왕의 존경을 받고 있었다. 녹야원에서 나와 전도길에 오른 다음, 다시 마가다의 땅을 찾은 세존이 먼저 교화의 대상으로 삼은 것은 이 유명한 출가자 교단의 지도자였다고 한다.
이 일파는 머리를 땋고 불을 숭배하면서 수도를 하는데, 해탈을 목표로 했던 것 같지만 자세한 것은 확실히 알 수 없다. 경전에서는 이렇게 삼형제와 신통력을 겨루어서 세존이 그들을 이기고, 그로 인해서 세 사람이 제자들과 함께 세존에게 귀의하게 된 경과를 ‘우루빌바(우루웰라)의 신변(神變)’이라 하여 자세하게 기술하고 있다.
세존은 카샤파를 찾아가 하룻밤 자고 갈 것을 청했다. 더욱이 신성한 불을 모시는 화당(火堂)에서 자게 해달라고 간청했던 것이다. 카샤파는 “나는 상관 없으나 저 화당에는 무서운 용이 살고 있으니 그만 두는 것이 좋겠소.”라고 말했다. 세존은 이럴 줄 미리 알고서도 계속 간청하여 결국 카샤파에게 허락을 받았다.
화당에 들어간 세존을 풀방석을 깔고 좌선에 들었다. 이를 본 용은 노하여 독 연기를 뿜었으나 세존은 용에게 상처는 입히지 않고 신통력만을 빼앗아야겠다고 생각하여 자신의 신통력으로 연기를 내뿜었다. 용이 더 노해서 불길을 토하자 세존도 화계삼매(火界三昧)에 들어 불길을 토했다. 멀리서 이 광경을 지켜보는 바라문 수행자들은 훌륭한 사문이 용에게 죽음을 당한다고 가여워 헸다.
그러나 날이 새자 세존은 신통력을 잃어버린 용을 바리때에 담아 카샤파에게 내보이며 “이것이 당신의 용이오.”라고 말했다. 이에 카샤파는 “이분은 참으로 훌륭한 사문이다. 그러나 나와 같은 아라한에게는 미치지 못할 것이다.”고 생각했다. 그러자 세존을 카샤파에게 3,500가지 신통한 변신을 보여주었다.(이 부분은 역자가 첨가한 것임)
성화당(聖火堂)에 사는 독룡을 굴복시켜 사발에 가두는 이야기와 큰 홍수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배를 타지 않은 채 걸어서 강을 건넌 이야기 등, 신통력에 관한 전설은 불교 조각의 좋은 주제가 되어 있다.
불을 숭배하는 종교로서 유명한 것으로는 고대 이란의 조로아스터교(배화교)가 있는데, 현재 봄베이 주변에 많이 살고 있는 파르시교도는 시체를 신성한 불로 태우는 것을 금하여 ‘침묵의 탑’이라 불리는 곳에서 조장(鳥葬 : 시체를 들에 내다 놓아 새가 파먹게 하는 장사)을 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불을 신성시하는 사상은 인도에서도 옛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것으로서, 불의 신(火神) 아그니에 대한 찬가는 「리그 베다」에서 많이 볼 수 있다. 요즘도 힌두교의 가정에서는 가옥의 서쪽이나 서남쪽 모퉁이가 화신의 자리로 되어 있으며, 또 신혼 가정에서는 맨 처음으로 켜놓은 불을 꺼뜨리지 않고 계속 이어간다. 성인식이나 결혼식 등의 통과의례, 그리고 장례식이나 마을 수호신의 제사 등에도 성스러운 불은 필수 불가결한 것으로 되어 있다.
카샤파 삼형제는 추운 겨울 밤, 눈이 올 무렵이 되면 나이란자나 강에 들어가서 가라앉았다 떠올랐다 하는 고행을 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물에 의한 고행도 행해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세 사람 가운데서는 먼저 우루빌바 카샤파(우루웰라 깟사빠)가 세존에게 귀의하여 머리를 깎고 의식용 도구 – 사화구(事火具)라고 적혀 있음 –를 강물에 흘려 보냈다. 강 아래쪽에 살던 나머지 두 사람도 이것을 보고, 자기들의 형제가 개종한 것을 알고는 다함께 세존에게 귀의하기에 이르렀다고 한다.
이러한 전승은 마가다국 최대의 종교 도시인 가야로 되돌아 온 세존이, 전통 힌두교와는 다른 출가자 교단의 지도자와 격렬한 종교 논쟁이나 또는 종교상의 대결을 통해서 그를 물리치고 불교 교단의 기반을 이 지역에 굳게 구축해나간 것을 상징해 주는 것이다. 불교 교단은 개종자를 흡수하면서, 계속 확장되고 있었다. 삼형제를 귀의시킨 세존은 가야 쉬르샤로 가서 삼형제와 그의 제자들에 대하여, 인간의 고뇌를 불에 비유한 ‘타오르는 불로부터 벗어난 해탈의 가르침’을 폈다. “모든 것은 불타고 있다. 모든 것이 불타고 있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눈(眼)은 불타고 있다. 색채와 형태는 불타고 있다. 눈의 식별작용은 불타고 있다. 눈의 접촉(색∙형태∙식별작용)은 불타고 있다. 눈의 접촉에 의해서 생기는 감수(感受)는 좋거나 나쁘거나 혹은 그 어느 쪽도 아닐지라도 그것 역시 불타고 있다. 무엇에 의해서 불타고 있는 것인가. 탐욕의 불로, 혐오의 불로, 미혹의 불로 모든 것은 활활 타오르고 있다. 탄생과 노쇠, 죽음과 근심, 슬픔과 고통, 번뇌와 번민에 의해서 불타고 있는 것이다.” 세존이 이와 같이 설법을 했을 때, 천여 명의 제자는 모든 번뇌가 씻은 듯이 사라져서 해탈하게 되었다고 한다.(「위나야」 대품)
2) 사리불(사리뿟따)과 목건련(목갈라나)
이어서 경전은 불교 교단의 확대와 발전에 중요한 열쇠를 쥐었다고 생각되는 샤리푸트라(Ⓟ사리뿟따, 사리불)와 마우드갈랴야나(Ⓟ 목갈라나, 목건련 혹은 목련)의 개종에 관해서 전하고 있다.
남방 불교의 전승에 의하면 샤리푸트라는 마가다국의 라자그리하에서 가까운 나라카 마을의 바라문 집안 태생으로서 부친을 방간타, 모친을 루파사리라 했다. 본명은 우파팃사이고, 우파세나, 방가타풋타 등의 3형제와 차라 등의 3자매가 있었다고한다. 또 마우드갈랴야나는 코리타 마을 출신으로서 모친인 목갈리의 이름을 따서 목갈리풋타라고 불렸다. 두 마을은 상당히 가까웠기 때문에, 동년배인 두 사람은 젊은 시절부터 둘도 없는 친구였던 것 같다.
어느 날, 두 사람은 라자그리하의 축제에 가서 행렬을 구경하며 함께 즐기고 있었는데 그들은 문득 백년 후에 이 사람들 중에서 살아남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러자 그들의 마음속에는 무상한 감개가 밀려들어, 그들은 곧 해탈의 길을 구하여 집을 떠나 육사외도의 하나인 회의론자 산자야의 제자로 들어가서 수도에 힘 쓴 끝에 그의 수제자(首弟子)로 일컬어지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라자그리하 북문 근처에서 탁발을 하고 돌아가던 세존의 제자 아쉬바지트(Ⓟ 앗사지, 마승 馬勝)를 만나 그 단정함에 감복한 나머지, 샤리푸트라는 스승이 누구이며 어떠한 가르침을 펴는가를 물었다. 이에 대해서 아쉬바지트는 자신이 샤캬족 출신이 위대한 사문을 스승으로 모시고 있으며, 신참자이기 때문에 그 가르침을 상세하게 전할 수 없다고 하면서, “모든 것은 원인에서 생긴다. 진리의 체현자는 그들의 원인을 설법하신다. 또 그들을 멎게 하고 멸하는 법도 설하신다. 위대한 수도자는 이렇게 설법하신다.”는 게(偈)를 외었다. 법에 관한 세존의 이러한 가르침을 듣고 크게 느낀 바가 있었던 사리푸트라는 돌아와서 마우드갈랴야나와 상의한 다음, 산자야의 만류를 뿌리치고 제자 250명과 함께 세존에게 귀의하기에 이르렀다. 산자야는 이때 그 분함을 이기지 못하여 입에서 피를 토했다고 한다.
세존은 제자가 된 이들 두 사람을 모든 제자의 상좌(上座 : 윗자리)에 두었다. 이는 하루라도 일찍 교단에 들어온 자를 상좌에 두는 전통에 어긋난 것이다. 그로 인하여 고참 비구들로부터의 불평이 많이 있었지만 세존은 이들을 잘 달랬다고 한다. 이 일은 두 사람이 얼마나 뛰어난 자질과 재능을 가지고 있었던가 하는 사실을 잘 나타내 준다. 샤리푸트라는 ‘지혜 제일’이라는 칭찬을 받을 정도로 갖가지 지식에 통하고 통찰력도 뛰어났으며, 더욱이 교단의 통솔에도 빼어난 능력을 발휘했다고 한다. 특히 최근에 출판된 자이나교의 옛 전승인 「이시바샤임(성선의 말)」에는 ‘붓다 아라핫트 선인인 샤티풋타의 가르침’이라는 것이 적혀 있는 바, 이는 샤리푸트라를 지칭한 것이며 그가 붓다라고 불린 것으로 미루어 자이나교도는 불교 교단의 대표를 샤리푸트라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다고 지적하는 경우도 있다. 경전 가운데도 세존을 대신해서 샤리푸트라가 교리를 상세하게 설하고, 세존이 그것을 추인하는 형식이 가끔 보인다.
마우드갈랴야나(목갈라나)는 동명의 불제자들이 많아서 마하 마우드갈랴야나(마하 목갈라나, 대목련)라고도 불렸다. 후에 불제자 중에서 ‘신통 제일’이라고 불리우고 있는데, 그 이유는 분명치 않다. 어느 날, 그의 안색이 너무나 좋아서 샤리푸트라가 그 이유를 물은 즉, “오늘 나는 불타와 법담(法談)을 나누었는데, 불타와 내가 모두 천안천이(天眼天耳)를 가지고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요”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 볼 때, 그의 신통력은 세존과 동등한 것으로 생각되었던 것 같다. 또 그는 가끔 프레타(아귀)를 보고 웃곤했는데, 그 이유를 묻는 이에게 프레타에 대해 설명했다고 한다. 프레타는 보통 사람은 볼 수 없는 조상의 영혼이나 전세에 지은 악업의 대가로 기아와 갈증에 시달리며 배회하는 귀신을 뜻한다. 또 마리지(摩利支, 산스크리트 마리치의 음사, 신 또는 신의 이름) 세계에 살고 있는 죽은 모친을 천안으로 보고서, 그곳으로부터 모친을 구출했다고도 한다. 이것이 소위 목련구모(目連求母)의 전설인데, 이것은 중국 등지에서 거행되는 우란분(盂蘭盆 : 지옥에 떨어진 이의 혹심한 괴로움을 구원하기 위하여 닦는 법)이나 시아귀회(施餓鬼會 : 굶주림에 고통받은 망령을 위안하기 위하여 베풀어 주는 법회)에서의 인연 설화의 기원이 되고 있다.
마우드갈랴야나는 세존과 함께 쉬라바스티(사밧티) 교외의 녹자모(鹿子母) 강당에 있을 때, 많은 비구들이 단정치 못한 자세로 잡담을 즐기는 광경을 보고, 신통력을 써서 발가락으로 강당을 흔들었기 때문에 비구들이 놀라서 도망친 일이 있다고 한다. 또 모여든 비구 중에 부정한 자가 있음을 알고 그의 팔을 잡아 축출해냈다고도 한다. 그는 아난다, 샤리푸트라와 함께 교단 내부의 분쟁을 해결하는 역할을 하기도 했으므로, 교단의 통제를 위해서도 그는 큰 힘이 되었던 것이다.
마우드갈랴야나와 샤리푸트라는 모두 세존이 열반에 드시는 것을 차마 볼 수가 없어서, 세존보다 먼저 입멸했다고 전해진다. 두 사람 모두가 세존보다 나이가 많았고 또 세존보다 먼저 세상을 떠난 것은 사실이다. 세존의 최후를 그린 「대반열반경(大般涅槃經」에서 세존의 임종 장소에 그 두 사람의 이름이 나와 있지 않다. 세존 자신도 “양인의 죽음으로 모든 비구들이 허전해 하는 것 같다.”라고 술회하고 있다. 샤리푸트라의 죽음을 애도하는 마우드갈랴야나의 게(偈)가 전해지고 있는 것을 보면 샤리푸트라가 먼저 세상을 떠난 것으로 생각된다.
현장은 라자그리하와 날란다의 중간 지점에서 샤리푸트라의 출생지로 알려진 카라피나가 마을을 찾아 스투파에 참배했다. 그리고 몸에 갑옷을 두르고 금강저(金剛杵)를 든 인물이 산을 때려 부시고 어떤 산기슭에 서 있는 광경을 꿈에 보고서 그의 모친이 그를 잉태한 사실과 그가 아쉬바지트(앗사지)에게 인도되어 세존에게 귀의한 사실 등을 기록하고 있다. 이어서 현장은 마우드갈랴야나의 고향인 코리타 마을의 스투파에도 참배하고 있다.
샤리푸트라는 고향 나라카 마을에서 시종이기도 했던 동생 춘다(쭌다)의 임종 간호를 받으며 세상을 떠났다. 춘다는 그 유골과 남긴 주발, 입었던 옷 등을 가지고 쉬라바스티에 체류 중이던 세존 앞에 이르러, 아난다와 함께 그의 죽음을 알렸다. 세존을 그 소식을 듣고 크게 슬퍼했다고 한다. 현장은 이 두 제자가 모두 자신의 출생지에서 사망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법현은 마투라에 사리불탑과 목련탑이 있었다고 전하고, 현장고 그곳에서 목련과 그밖의 다른 불제자의 사리탑에 참배한 것을 기록하고 있다.
3) 마하카샤파 (마하 깟사빠, 대가섭)
엄격한 수도의 실천자로서 ‘행법 제일’이라고 불리던 마하카샤파(마하깟사빠, 대가섭, 大加葉)는 마가다국의 마히티타 마을 태생으로 어릴 때 이름은 핍팔리라고 했다. 그는 바라문계의 여자와 결혼했으나 가정생활을 싫어하여 함께 출가해서, 라자그리하 성 밖의 바흐풋타카 냐그로다수(樹) 아래에서 세존과 만나 그의 제자가 되었다고 전해진다. 그는 언제나 의식주에 대한 집착을 누르고 간소한 생활규율(두타행, 頭陀行)을 지켰다. 세존이 당신은 이미 늙었으니 부드러운 옷을 입고 신자의 초대를 받으면서 나의 곁에 있으라고 권했을 때도, 그는 이를 거절했다고 한다. 또 언젠가 그는 지난날 함께 수도를 하던 동료가 환속을 하여 도적질을 하다가 체포당해서 형장으로 끌려갈 때, 곧 달려가서 여러 가지로 훈계를 하여 올바른 깨달음을 얻게 했다. 그리하여 그가 형리의 무기를 두려워하지 않아, 당시의 왕을 놀라게 했다고 한다.
세존의 임종 후 유해를 넣은 관은 마하카햐파가 도착할 때까지 아무리 해도 불이 붙지 않아서 다비를 행할 수가 없었다고 한다. 세존이 열반에 든 직후, 교단의 동요와 분열을 염려한 그는 아난다와 함께 비구들을 라자그리하의 칠엽굴(七葉窟)에 모이게 하고, 세존의 바른 가르침을 확인하기 위한 이른 바 제1차 결집을 거행했다고 한다.
[칠엽굴]
4) 아난다
세존은 성도 후 2년 만에 자신의 청년 시절을 보낸 고향 카필라바스투에 가서 샤캬족의 연고자들을 많이 교화하여 출가시키고 있었다. 후에 세존의 시종으로서 늘 곁에 있으면서 ‘다문(多聞) 제일’, ‘근시(近侍) 제일’이라 불린 아난다(아난, 阿難)가 출가한 것도 이 시기였다.
아난다의 부친과 세존의 부친이 형제 관계에 있었으므로 세존과 아난다는 종형제가 되는 셈이며, 후에 세존에게 반역을 한 데바닷타도 같은 관계에 있었다.
세존은 성도 후 20년간 특정한 시종을 거느리지 않고, 여러 제자들이 때와 형편에 따라서 시중을 들었다. 세존이 병으로 누웠을 때, 약탕이나 꿀을 얻기 위해서 동분서주했던 쉬라바스티의 바라문 출신 우파바나, 밤늦게까지 수도를 계속하는 세존의 몸을 염려하여 귀신의 흉내를 내서 이를 중단시키려다가 오히려 질책을 받았던 나가사말라, 카필라바스투의 크샤트리야 출신인 샤캬족의 왕자 메갸 등 여덟 명의 시종이 알려져 있지만, 이 가운데는 수낙카타처럼 세존의 시종으로 수년 간이나 훈도를 받았으면서도 후에 외도로 개종한 제자도 있다.
아난다는 세존과 같은 연배로 세존의 나이 55세 때에 시종으로 추천되었는데, 의식주 모두에 대해서 세존에게 바치는 것과 동일한 보시를 받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그 자리를 맡았다고 한다. 그 후, 25년간 아난다는 그림자처럼 세존을 따라다니면서 신변의 모든 일을 뒷바라지해 드리고, 세존이 병석에 누우면 계를 범해 가면서까지도 특별한 식사를 준비했다. 또 가르침을 구하여 찾아오는 사람에게는 가능한 한도 내의 모든 편의를 제공해 주고, 고민을 가진 동료의 상담역을 맡기도 했으며, 때로는 세존을 대신하여 설법을 하기도 했다고 한다.
아난다는 샤리푸트라, 마우드갈랴야나, 마사카샤파, 아누룻다 등과 친교가 깊었으며, 특히 샤리푸트라와는 각별한 사이였던 것 같다. 경전에는 그가 샤리푸트라를 칭찬하는 말이 나와 있다. 샤리푸트라의 죽음을 그의 동생과 함께 세존에게 보고한 일은 앞서 말한 바와 같지만, 이때의 아난다가 낙심하는 모습은 “고양이의 습격을 간신히 피해서 허탈감에 빠진 수탉과 같이” 매우 딱하게 보였다고 한다.
그는 세존의 숙모이며 양어머니이기도 한 마하프라자파티 가우타미를(마하빠자빠띠)를 비롯한 샤캬족의 여성 출가에 전력하여, 세존에게 세 번이나 여성 출가를 간청했는데, 그 결과 세존도 마침내 이를 허락했다. 그는 캬우샴비국 우다야나왕의 여관(女官)들과 코살라국 푸라세나짓트왕(빠세나디왕)의 왕비들 가운데 한 사람인 말라키 등으로부터 청을 받고 설법을 한 일도 전해지고 있는데, 그는 출가나 재가를 불문하고 여성의 교화에 많은 힘을 쏟았던 것이다.
아난다는 아누룻다와 함께 세존의 최후를 지켜보고, 이어서 그때까지 개별적으로 전해지던 세존의 가르침을 정리하고 경전으로 편집하기 위하여 마하카샤파와 함께 제1결집을 열었다.
이 회의에서 아난다는 세존의 측근으로서 가장 많은 설법을 들었기 때문에 「경(經)」을 편집하는 일을 주관했다. 아난다는 매우 오래 살았다고 전해진다.「테라카타」에는 비구들이 “다문(多聞)한 사람, 법을 소유한 사람, 어둠 속에서 어둠을 헤치는 사람인 아난다 장로는 보배의 근원이로다.”라고 그의 죽음을 애도한 게(偈)가 전해지고 있다.
법현은 아난다가 자신의 사후에 그 유해를 둘러싸고 마가다국의 아다타샤트루왕과 바이샬리의 릿차비족이 분쟁을 일으킬 것을 우려하여, 갠지스 강의 한가운데서 “스스로 불을 당겨 그 몸을 불태우고” 유골을 둘로 등분해서 나누어 주도록 했다는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다.
5) 샤캬족의 자제들
카필라바스투에서의 세존은 아난다와 아울러 자신의 아들인 라후라, 종제인 아누룻다와 데바닷타, 이복동생인 난다, 이발사인 우팔리 등을 교화하고 출가시켰다.
아누룻다는 출가 후 세존을 도와 교단의 통솔에 진력했다. 비구들이 분쟁을 일으키는 일이 많았던 카우샴비의 동쪽, 대나무숲에서 두 동료와 사이좋게 지내는 화합의 모범을 보여, 마침 이곳을 방문한 세존을 기쁘게 한 일도 있었다. 세존을 뒤따르는 일이 많았으며, 특히 쿠쉬나가가에서 세존이 입멸했을 때에는 “스승은 언젠가 아무리 사랑하는 사람일지라도 반드시 헤어질 때가 있다고 설법하셨다. 슬퍼하지 말라. 통곡하지 말라.”고 하여 슬퍼하는 사람들을 위로하는 한편, 아난다에게 명하여 세존의 죽음을 쿠쉬나가라의 말라족 사람들에게 알리게 하였다. 아누룻다는 또 세존의 입멸 후, 교법이 분산되어 없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 개최된 불전결집(佛典結集) 때에도 중요한 역할을 맡아서 수행했다고 한다. 그는 ‘천안(天眼) 제일’이라고 일컬어졌다.
세존의 외아들인 라후라는 그때 나이 어린 동자였다. 그 어머니는 세존이 카필라바스투에 온 것을 알고 라후라를 세존에게로 보내서 남은 재산을 구하게 했다. 그러나 세존은 수제자인 샤리푸트라에게 명하여 자신의 아들을 출가시켜 사미(沙弥)로 삼았다고 한다. 이때 조부인 슛도다나왕은 아들인 세존의 출가에 이은 사랑스러운 손자의 출가를 슬퍼하여 살을 베이고 골수까지 들어내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고 당시의 괴로움을 호소하고 있다.
또 용모단정한 난다가 신혼의 꿈도 채 깨기 전에 사랑하는 아내 순다리를 남겨 둔 채 출가하여 재가생활에 마음을 자꾸 두면서도 세존의 인도에 따라 출가자로서의 생활을 충실히 지켜나가는 설화는 여러 경에서 볼 수 있는 것이며, 도 이 이야기는 불교 미술의 소재로서도 많이 채택되고 있다. 2세기 후반, 큐샨 왕조의 불교 시인 아쉬바고샤(마명, 馬鳴)는 설화시(說話詩 ) 「사운다라난다 카뱌」에서 이때의 내력을 아름답게 노래했다.
세존의 종제인 데바닷타는 후에 세존의 목숨을 빼앗고 스스로 교단을 인솔하려 획책했다는 이유로, 교단의 화합을 파괴하는 반역자의 표본처럼 취급받고 있다. 그러나 세존과 데바닷타 사이에 있었던 대립의 이면에는, 교단 본연의 자세와 비구의 생활 방법에 관한 의견 차이가 숨어 있었던 것이다.
불교 교단의 규율 및 규칙에 정통했으며, 또 계를 지키는데 있어서 매우 엄격했던 우팔리는 ‘지계(持戒) 제일’로 불렸는데, 세존 입멸 직후의 제1차 결집에서는 ‘계율’을 암송해 내고 있다. 우팔리는 샤캬 귀족의 이발사였다. 어느 날 왕족을 따라서 원정에 참가하게 되었는데, 임무를 모두 마친 왕족의 청년들이 군대만 돌려보내고 그 곳에서 출가하려고 하자, 이를 알아차린 우팔리는 자신도 출가할 것을 원했다. 세존은 청년들에 앞서서 우팔리를 출가시키고, 청년들로 하여금 재가자로서의 예를 갖추도록 하여 그들로부터 샤캬의 왕족이라는 교만함을 제거했다고 한다. 이 이야기의 사실(史實) 여부야 어찌 되었던 간에 하루라도 먼저 출가한 사람이 상석(上席)의 위치를 차지하도록 하는 원칙을 세운 불교 교단에서 일개 시민을 왕족보다 상위에 올려 놓으려 한 것은 교단 내부의 평등주의 사상을 표현해 주는 것이다.
샤캬족은 그후 얼마 안가서 코살라국 푸라세나짓트왕을 계승한 비두바다왕에게 멸망당하며, 그 코살라국도 얼마 후 마가다국에 의해서 합병되어 버리고 만다. 경전은 샤캬족 멸망의 사실을 생생하게 전해주고 있지만, 세존을 비롯하여 샤캬족 출신의 비구들이 속세의 비애를 과연 어떻게 받아들였는가 하는 것은 확실치 않다.
6) 십대 제자(十大弟子)
세존의 제자들 중에서 불교 교단 내의 특히 중요한 역할을 맡은 사람들을 ‘세존의 십대제자’라고 부른다. 이미 앞에서 말한 바 있는 샤리푸트라(Ⓟ사리뿟따 / 사리불), 마우드갈랴야나(Ⓟ마하목갈라나 / 마하목건련), 마하카샤파(Ⓟ마하깟사빠 / 마하가섭), 아누룻다(아나율), 우팔리(우바리), 라후라(나후라), 아난다(아난), 그리고 수부티(수보리), 푸르나 아이트라야니 푸트라(Ⓟ부르나), 카타야나(Ⓟ깟짜야나 / 마하가전연)의 열 사람이다.
이들 가운데서 푸르나(부르나)는 ‘설법 제일’, 카타야나(깟짜야나 / 가전연)는 ‘논의 제일(論議第一)’로 일컬어진다. 이들은 모두 서인도 출신으로 이 지방의 개교(開敎)에 큰 공적을 남기고 있다.
수부티(수보리, 須菩提)는 세존을 위해서 기원정사를 기증한 수닷타 장자(급고독 장자, 아나타삔디까)의 조카로서 ‘은둔 생활을 하는 사람들의 제1인자’라고 불렸던 것 같은데, 후에 ‘해공(解空) 제일’(대승불교 중심 사상인 ‘공’ 사상을 이해한 제1인자)‘로 불리게 되었다.
십대제자가 언제, 어떠한 기준에 의해서 선택되었는지는 분명치 않다. 세존의 초전법륜 상대가 된 카운디누야(Ⓟ꼰단냐) 등의 다섯 비구가 포함되어 있지 않은 대신에 대승 사상의 이해자인 수부티가 선택되어 있는 것으로 미루어, 이것이 대승불교 시대의 소산이라고 하는 설도 있다.
7) 특이한 제자들
세존의 제자들 중에는 특이한 사람들도 많이 포함되어 있다. 이를테면 출가한 형에게 이끌려 불문에 들어왔으나, 어리석고 우매하며 기억력도 없어서 시구(詩句) 하나를 4개월이 걸려도 암송하지 못했던 출라판다카(Ⓟ쭐라반따까 / 주리반특, 周利槃特)는 그 때문에 수도를 단념하려 했다. 그러나 바로 그때 세존이 보여주는 흰 옷감의 더러움을 보고 홀연히 무상함을 느낀 그는 드디어 깨달음의 경지에 들어갔다고 한다.(일설에는 교단 사람들의 짚신 청소가 인연이 되어 깨달았다고도 한다.)
또 앙굴리말라(지만, 指鬘)는 원래 베다의 학습에 열심이던 성실한 학생이었는데, 스승의 아내로부터 유혹을 받아 자신은 비록 절개를 지켜서 깨끗했지만 스승의 오해를 받고 도적이 되었다. 그 후 그는 많은 사람들을 살해하여 그 손가락을 가지고 목걸이를 만들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를 매우 두려워했다. 어느 날, 앙굴리말라는 세존의 손가락을 자르려고 세존을 습격했지만 도리어 세존에게 감화를 받고 개심하여 출가했다고 한다. 앙굴리말라는 그 이전의 악업 때문에 출가한 다음에도 사람들로부터 많은 비난을 받았으며, 심지어는 돌을 던지는 사람조차 있었다고 하는데, 그는 끝까지 이러한 모욕을 잘 참아냈다고 한다.
2. 여성 출가와 비구니들
1) 비구니 교단의 성립
세존은 여성의 출가에 대해서 매우 신중한 태도를 취했다. 따라서 여성출가자, 즉 비구니의 출현과 그 교단의 성립은 상당히 늦어지게 된다. 팔리어 율전(律典)에 의하면, 세존의 양어머니인 마하프라자파티(Ⓟ마하빠자빠띠)는 출가의 뜻을 세워, 처음에 카필라바스투의 니그로다 동산에 체류하고 있던 세존을 찾아가서 세 번씩이나 교법과 계를 베풀어 달라고 하지만, 그때마다 받아들여지지 않아 슬픔의 눈물을 흘리며 그곳을 떠났다고 한다. 그러나 그 후에도 마하프라자파티의 결심은 변하지 않아서, 그녀는 스스로 머리를 깎고 가사를 입은 다음, 같은 뜻을 가진 샤캬족의 여인들과 함께 세존을 좇아 바이살리의 중각강당에 이르러서 정사의 문밖에 선 채로 출가의 허락을 채자 간청했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아난다가 세 번이나 세존에게 그들의 뜻을 전했지만 세존의 태도는 변함이 없었다. 그러나 아난다는 “여성도 출가 수도하면 최후에는 아라한과(阿羅漢果 : 상좌부 불교에서 말하는 성자의 최고 위치)를 얻을 수 있다.”고 한 세존의 말을 방패삼아,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에 자애롭게 보살펴 주신 양어머니의 은혜를 생각해서라도 그들의 소망을 들어주는 것이 올은 것”임을 설득하여 마침내 여성 출가의 길을 열었다. 이때 세존은 비구니는 설령 자신보다 후에 출가한 비구라 할지라도 그를 공경하고 또 비구의 교단에서 떨어진 독립된 장소에서 살아서는 안 된다는 등, 비구니에게만 적용되는 여덟 가지 조항의 규칙을 부과했다고 한다. 후에 제정된 비구의 계는 250조로 되어 있는데 반하여, 비구니의 계는 300조가 넘는다는 사실을 생각해 볼 때, 비구니 교단의 통제가 얼마나 어려운 문제인가 하는 것을 추측할 수 있을 것이다.
2) 비구니의 출가 설화
마하프라자파티에 이어서 세존의 아내였던 야소다라를 비롯하여 샤캬족의 많은 여성들이 출가를 했는데, 이들과 그 외 여성 출가자들을 합하여 비구니 교단이 발족되었다. 비구니 중에는 남성 출가자를 능가하는 자질을 가지고 있어서 폭넓은 활동을 하는 자도 나타나게 되었다. 이들 비구니의 설화는 팔리어 경전인 「테리 가타(장로니게, 長老尼偈)」에 기록되어 있는 이외에도 여러 경전과 그 주석서에도 가끔 등장하고 있다.
여성 출가의 원인이나 동기에 대해서는 갖가지 경우를 들 수 있다. 웃자이니의 왕녀 수메다는 어려서부터 세존의 가르침에 접하고, 정신적으로 충실한 생활을 찾아서 결혼식 직전에 풍요로운 검은 머리를 잘라 버리고 집을 떠났다. 또 빔비사라왕의 교계사(敎戒師)의 딸인 소마는 젊은 나이에 출가하여 ‘어둠의 숲’에서 명상을 하던 중, 유혹하러 나타난 악마를 일언직하에 물리치고 있다. 이들 여성은 원래 물질적인 세계로부터 등을 돌려, 이상적인 경지에 마음을 안착시키고자 했던 사람들이다.
한편, 결혼을 해서 가정을 꾸려나가면서도 그 비참한 환경에 절망하여 출가한 여성도 많다. 바라문의 딸인 뭇타는 용모가 괴이한 가난한 남성과 결혼했는데, 그녀는 결국 남편의 폭력에 견디다 못해 출가하게 되었다. 소나와 바다마타는 나이가 들어 늙게 되자 애지중지하여 키운 자식들로부터 버림을 받게 됨으로 교단에 의탁하고자 출가했다.
사랑하는 육친과의 생각지 못했던 이별로 인하여 출가한 여성도 많다. 쉬바라스티에 사는 상인의 딸인 파타차라는 부모의 뜻에 맞지 않는 남자와 결혼하여 집을 나갔지만, 믿고 의지하던 남편이 독사에게 발을 물려 죽고, 또 남은 두 자식도 하나는 독수리에게 채여 가고 하나는 강물에 쓸려들어가 버리자 하는 수 없이 친정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양친과 형제들 모두가 태풍으로 쓰러진 집에 깔려 죽었다는 사실을 알고 슬픔에 몸부림치며 미친 듯이 헤매다가 세존에게 구원을 받아서 출가했다고 한다. 파타차라가 어느 날 항아리에 물을 길어 발을 씻을 때, 흘려보낸 물이 처음에는 조금 흘러갔고 두 번째는 좀 더 앞에까지 흘렀으며, 세 번째는 더 앞에까지 흘러갔다. 그렇지만 언제나 사라져 없어지는 것은 마찬가지라는 것을 안 그녀는 사람의 수명도 비록 장단은 있지만 한계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서 정각의 경지에 도달했다고 한다.
또 같은 쉬라바스티의 가난한 가정의 딸 키사고타미는 어쩌다가 자신의 아이가 죽자, 죽은 아이를 가슴에 안고 그 아이를 소생시킬 수 있는 약을 구하러 다니다가 세존을 만난다. 세존은 이제까지 아무도 죽은 사람이 없는 집을 찾아가 겨자씨를 얻어 오면 아이를 소생시켜 주겠다고 한다. 그녀는 필사적으로 그러한 집을 찾아다녔지만 물론 조건에 맞는 겨자씨를 얻지 못하니, 마음에 느끼는 바가 있어 슬픔을 극복하고 비구니 교단에 들어갔다고 한다.
여성 출가의 설화는 이밖에도 많이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남성 출가자에 비해서 지켜야 할 계율이 엄격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성의 출가에 진력한 아난다가 나중에 비난을 받는 등, 불교 교단 통제상의 갖가지 문제를 야기시킨 일을 기술한 문헌도 있다.
3. 재가신자와 후원자들
이상으로 수많은 불제자 중에서 남성과 여성 출가자 가운데 주요한 사람들의 윤곽을 대략 더듬어 보았는데, 한편으로는 세존에게 귀의하여 세존과 그 교단을 경제적으로 뒷받침하면서 여러모로 편의를 제공해온 많은 재가신자의 이야기도 전해지고 있다. 당시의 사회 정세에 비추어 볼 때, 이 시대에 출현한 부호나 왕족들이 귀의는 세존에게 큰 힘을 북돋아 주고 교화의 진전을 위한 커다란 원동력이 되고 있었다. 여기서는 그와 같은 귀의자와 후원자 몇 사람을 살펴보기로 한다.
1) 왕들의 귀의
세존 시대의 마가다 국왕은 처음에 슈레냐 빔비사라로서 라자그리하(왕사성, 지금의 라지기리)에 도읍을 정하고 있었다. 세존은 출가 후 곧 라자그리하로 가서 빔비사라왕과 만나, 성 밖의 판다바 산 앞에 있는 동굴 속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다.
세존이 성도한 후에 – 아마도 앞에서 말한 카샤파 삼형제의 귀의 직후에 – 제자들을 이끌고 라자그리하를 찾아가 장림(杖林)에 머물렀을 때, 빔비사라왕은 많은 사람들과 함께 세존을 찾아와서 가르침을 듣고 곧 귀의했다. 그리고 성의 북문에 인접한 죽림원(베누바나)을 기증하고, 영취산 등 세존이 체류하는 곳으로 통하는 길을 만들었다. 한편 이 왕의 이름은 자이나교의 문헌에도 나오고 있는데, “자이나교의 개조인 마하비라의 먼 친척이 되는 처녀와 결혼한 슈레냐 밤바라사”라고 불리고 있다.
빔비사라왕의 아들 아자타사트루(Ⓟ 아자뚜삿뚜)는 부왕을 투옥하고 데바닷타와 공모하여 세존을 해치려 하는 등, 사악한 행동을 자행하고 있었다. 그러나 개심하여 세존에게 귀의한 다음에는 브리지족과의 전쟁에 대해서 의견을 묻기도 했고, 또 세존의 입멸 후에는 유골의 분배를 요구하기도 했다.
또한 당시의 또 하나의 대국이었던 코살라국의 푸라세나짓트왕(빠세나디왕)도 원래는 바라문교의 신자였지만, 후에 왕비 말리카의 권유에 따라 세존에게 귀의했다. 그리고 카우샴비(Ⓟ꼬삼비)의 우다야나왕(Ⓟ 우데나왕)도 왕비의 영향을 받아 고시타아라마(Ⓟ고시따라마 승원)를 방문하고, 욕망의 제어에 대해서 비구와 문답을 교환하고 있다.
2) 장자의 귀의
한편, 세존의 신자 중에는 이 시대의 활발한 상업적 경제활동을 통해서 사회의 전면에 대두된 상인 자산가도 포함되어 있었다. 먼저 세존에게 귀의한 바라나시의 장사 야샤스(Ⓟ 야사)가 그 한 예이다. 기원정사를 기증한 쉬라바스티(사밧티)의 수닷타 장자(아나타빈띠가, 급고독장자)는 때마침 볼 일이 있어서 라자그리하의 친척집에 체류하고 있었는데, 세존의 이야기를 듣고 밤이 채 새기도 전에 교외의 한림(寒林 : 시체를 화장하는 곳)으로 세존을 찾아가 신자가 되고, 뒤이어 쉬라바스티로 세존을 초대하여 정사를 지었다고 한다. 그는 급고독 장자(給孤獨長者. 아나타빈띠까 : 고독한 사람에게 먹을 것을 주는 사람)라 불리며, 보시행을 실천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이밖에도 카라카 장자는 사케타 거리에 카라카 아라마(園林)를 건립, 기증하고, 또 캬우샴비(꼬삼비)의 고시타 장자 등 유명한 세 금융업자들도 제각기 정사를 기증하고 있다.
라자그리하에 정사를 기증한 지바카는 유명한 의사였는데, 그 역시 당시의 상류 사회 계층에 속해 있었으므로 장자들 중의 한 사람으로 봐도 무방할 것이다.
3) 여성 신자들
앞서 말한 바 있는 마하프라자파티나 야쇼다라와 마찬가지로 출가를 하여 세존을 따른 여성들 외에도, 속세에 머물러 있으면서 세존에게 귀의하여 신자가 된 여성들이 많이 있다. 쉬라바스티의 수닷타 장자의 며느리인 수자타는 처음에 자기의 가문이나 미모를 내세워 부모나 남편에게 반항적이었으며 세존을 공경하지도 않았다. 그렇지만 세존이 이를 타이른 후에 좋은 아내가 되었다.
또 스무스말라 기리 근처에 살던 나크라의 아내는 남편이 중병에 걸렸을 때, 설령 남편이 죽는다 해도 세존의 가르침을 지키고 마음을 평온하게 가지면 아무 걱정도 할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그라자 이 말을 들은 남편은 마음이 편안해져서 병이 회복됐다고 한다.
쉬라바스티(사밧티)의 부호 므리가라(Ⓟ 미가라)의 며느리가 된 비사카(위사카)는 세존을 자신의 집에 초대하여 가르침을 듣고, 자이나교의 나체행자(裸體行者)에게 귀의하고 있던 시아버지를 불교 신자로 개종시켰다. 세존의 가르침을 따라 사는 기쁨을 알게 된 장자는 비사카가 며느리이지만 신앙의 어머니라고 하여 어머니를 대하듯이 그녀를 공경했고, 세상 사람들도 그녀를 므리가라 마트리(미가라마따, 鹿子母 : 므리가라(미가라)의 어머니)라고 불렀다. 비사카는 불교 교단에 옷과 식품, 의약품을 평생 동안 보시할 수 있도록 허락을 받았으며, 또 막대한 금액을 투입하여 쉬라바스티 동문 밖에 토지를 매입하여 정사를 건립해서 기증했다. 공사는 마우드갈랴야나(목갈라나) 비구 등의 지휘 아래 완성이 되어 ‘동원녹자모강당(東圓鹿子母講堂)’이라 명명되었다. 그리하여 남부의 기원정사와 더불어 이제 두 곳의 정사가 설립된 것이다.
그 가운데는 한 가족이 모두 세존의 신자가 되어 자비의 가르침을 지킨 사람도 있다. 라자그리하에 사는 푼나라는 가난한 사나이는 그의 아내와 딸인 웃타라 등과 함께 세존의 가르침을 굳게 믿고, 탁발하러 온 샤리푸트라(사리뿟따)에게 자기의 점심을 드리고 또 세존을 초대하는 등, 보시행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웃타라는 얼마 후 시집을 가게 되었는데, 세존과 그 제자들에게 보시 공양을 못하게 된 것을 슬퍼하여 일정 기간 동안 어떤 부인에게 남편의 뒷바라지를 부탁한 다음 반달 동안 매일같이 세존을 초대했다. 남편의 시중을 드는 부인은 자기가 고용되었다는 사실을 망각한 채, 마치 자신이 이 집의 여주인이나 되는 듯이 행동했지만 웃타라는 이를 꾹 참고 견뎠으며, 마침내는 그 부인도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세존에게 귀의했다고 한다.
경전에는 이밖에도 세존에게 귀의하고 세존이 가르침에 따라 살아 간 수많은 남녀가 등장한다. 그러면 이들에 대한 세존의 가르침에 과연 어떠한 것이었는가와, 또 그 가르침에 따른 사람들은 어떠한 나날을 보냈는가 하는 것을 살펴 보기로 한다.
(출처 : 佛陀의 世界 / 中村元 著, 金知見 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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