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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산회 62회 ‘한라산’ 산행기 >
▣ 산행일 : 2007년 6월 16일(토)~6월 17일(일) <1박 2일>
▣ 산행코스 : 숙소-서귀포-성판악-진달래밭대피소-한라산(정상)-삼각봉대피소-관음사-신제주-목욕탕-뒤풀이장소-제주공항
▣ 참석자 : 14명 (기세환, 김종화, 나창수, 남기인, 박형채, 김순단, 신원우, 이원무, 이창우, 전작, 정해황, 조문형, 한양기, 한천옥)
▣ 숙박장소 : 국립수산과학원 종보존연구센터 (관사)
▣ 동반시 : “내가 당신을 얼마나 꿈 꾸었으면”/ 김형명
▣ 뒤풀이(장소) : “용꿈 돼지꿈”(신제주)
2007년 6월 16일(토) 오후 3시에 김포공항에 집합, 아시아나항공으로 제주행. 바쁜 일정을 마치고 애쓴 보람으로 전원이 탑승을 했으나 두 회원이 전날에야 사정으로 불참을 통보해서 기 회장님의 심기가 편하지 않은 눈치였다. 내 눈치가 10단이라고 애들 앞에서 큰소리 치고 있는 형편인데, 맞았는지 궁금한 문제이다.
서울은 찜통 더위인데, 1시간도 안가 도착된 바다 건너 제주에는 비가 오고 있었다. 혹시 이러다가 등산 일정에 차질이 생길까 걱정이 되긴 했으나, 2년 전에 인천항에서 배로 가는 한라산 등반모임에 참석했던 기억을 살려 걱정을 묻어 두었다. 초속 20미터 강풍에도 1,950m 정상에서 비바람 속에서 밥을 먹고 내려 왔으니 말이다.
김종화 산우의 도움이 시작되는 렌트카 업무부터 시작되어 우리가 즐겨 탔던 노란애마처럼 15인승 쌍용 이스타나를 빌려 타고 서귀포로 달렸다. 공항에서 만나기로 약속한 이창우와 한양기는 나타나지 않아 서귀포행 중간에서 우리와 합승을 했는데, 1분도 안 기다리고 갔다는 억지를 두 사람 중에 한 분이 우겨서 낯이 두꺼운 걸 증명해 주는 즐거움을 주었다.
입 반찬이 즐비한 한 양기 산우는 우리의 귀를 즐겁게도 하고 귀찮게도 하는 취미를 가졌다. 하루, 이틀 먼저 와서 관광을 즐긴 일로 이들 두 회원은 진작이라는 분과 비양도행을 꿈꾸는 어처구니 없는 일로 늦었으면서 우리 일행(12명)이 1분도 안기다리고 공항을 떠났다는 억지를 남발했으니 웃기는 마우스가 아닌가 말이야. 이렇게 웃다보니 금방 숙소에 도착하게 되었다.
해안가에 아늑하게 자리 잡고 연근해 어류 연구를 하는 곳이라 매우 마음에 들었다. 비가 오지만 따끈한 숙소에 방이 7개라 잠자는 데는 어려움이 없을 것이라 생각되어 마음이 놓였다.
시산회에 가끔 부부가 뻔질나게 참석하는 나는 부부가 방 하나를 독차지해야 하는 눈총을 받아 피투성이가 되지 않을까 걱정이 되었지만, 그런 시름을 놓을 수 있어 다행이었다. 기 회장이 방 배정을 하는데 조건이 까다롭다.
담배 피워 애국한 회원방, 자면서 코로 노래부르는 회원방, 부부가 자는방, 서로 자고 싶은 회원방, 등등 다양한 방법으로 방 배정을 하여 모두가 만족한 눈치였다.
각 방에 짐을 두고 연구소 시설을 둘러보는 시간, 평소에 바다낚시라도 해 봤더라면 해박한 지식을 나열 할 수 있겠지만, 많은 고기들을 기억하지 못해 기록하기가 어렵다. 감성돔, 돌돔, 참돔 등 많은 바다물고기를 기르는 중인데 종화에게는 미안한 이야기이지만 저 큰 바다 물고기 한 두 마리면 우리 회원들이 오늘 저녁에 배불리 회로 먹을 수 있을 텐데 하는 생각을 갖으며 두루 살펴보았다.
저녁 먹을 시간인데 시산회 전임 김 회장이 오늘 다금바리 비슷한 회를 사기로 약속했는데, 불참하여 그 기쁨을 맛 볼 수 없을 거라 생각이 들었으나 시산회 회원들이 누군가, 먹산회가 아닌가, 종화가 젊은 시절 근무하면서 은밀하게 감춰 놓은 횟집을 찾아 나섰다.
20년(?) 전이라 주인 마님은 늙어서 딸과 함께 우리의 저녁거리를 만들고 있었다. 나는 서울서 준비해온 3년 숙성한 30도 오가피주를 얼음에 타서 한잔씩 돌리고 기회장이 재미난 구호로 건배 선창을 하였다.
꼿꼿하게! 꼿꼿하게! 꼿꼿하게! 세우세! 세우세! 세우세! 우리의 기상을 세우자는 건지 거시기를 계속 세워보자는 건지는 유일한 여성 산악회원 땜시 기 회장의 설명은 듣지 못했으나 필시 후자려니 생각된다.
우리학교 나 또래 여선생 시아버님께서 충남 당진에 사셨고, 80이 넘어서도 가끔 젊은 다방아가씨를 불러 커피를 마셨다는데 이사하면서 보니깐 성인 용품이 깊숙한데서 나왔다고 남자의 성적 편력이 그렇게 오래 지속되는지 몰랐다나 하면서 시아버지 흉을 본 일이 있었다.
우리도 그런 점에서 예외일 수 없을까. 성 싶기도 하니 등산으로 열심히 체력을 증진 시키자는 구호로 여겨진다. 횟집 두 여자 주인은 부지런히 오고가면서 그 회집에 있는 거 없는 거 다 동원하여 우리의 주린 배를 불룩하게 채워 주었다. 맑은 공기와 바닷바람을 맞으며 숙소로 와서 우린 내일을 위해 행복한 꿈나라로 날라 들었다.
아침 5시가 조금 넘어 하나, 둘 잠자리를 벗어나와 모기타령들이다. 엊저녁에 모기에 많이 뜯긴 모양이다. 난방을 뜨끈뜨끈 하게하여 더운 관계로 모두들 모기에 알몸을 헌납하였던 모양이라 한마디씩이다. 종화와 문형이가 헌신적으로 왕 컵라면에 계란을 풀어 아침 식사를 준비해 맛있게 먹고 난후에 갖가지 개인용 간식거리-해황표 모시떡, 바나나, 초코렛 등을 배급받고 점심용 김밥을 배낭에 넣은 다음 숙소를 7시경 떠났다.
여전히 비는 내려서 7시 40분경 성판악 휴게소에 도착, 비옷 3천냥을 투자하여 착용한 결과 흰색이 많아 마치 겨울 산악 스키부대 모양 한 줄로 정상을 향해 전진하였다. 아니나 다를까, 앞이 터지지 않은 우비라 더웠던지 20분이 지나자 하나 둘 우비를 벗기도 했다.
어찌하랴! 비를 맞아 감기들지 모르니 그냥 입고 가는 인내파가 대부분이었다. 걷다가 쉬다가 또 걷고 걸어서 사라악 약수터까지 5.1킬로 목표를 삼고 열심히 걸어 10시경 도착하여 맛있는 산속 삼다수를 마음껏 먹고 병에 가득 채워 또 정상을 향해 걸었다.
중간 기착지인 진달래 산장에는 지금 공사 중이고 아마 대피소를 짓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기 회장의 커피 선물을 한 잔씩 마시고 걷기를 시작, 한참 가는데 햇살이 우리를 기쁘게 했다. 왜냐하면 백록담을 볼 수 있는 기적을 선사하리라는 기대감 때문이다.
안개비는 그래도 추적추적 내려 우리의 체온을 조절해 주었고, 무사히 한라산 정상에 오르게 해 주었다. 그 동안 닦은 등산 실력으로 한사람의 낙오자 없이 12시경 정상에 도착하였다. 백록담 전망대에 자리를 펴고 김밥으로 점심을 시작하면서 막걸리를 한 잔씩 부어 우리의 소원을 위하여 건배하였다. 15분쯤 지났을까, 누군가가 구름이 거친다! 외쳐서 밥먹다 말고 백록담 쪽으로 고개를 내밀었더니 과연 기적이 일어났다.
모두들 기뻐서 사진을 찍는 등 기쁨의 아우성으로 몇 분 동안의 기적을 맛보았다. 우리에게 기쁨도 잠시 백록담은 안개 속으로 사라져 내려올 때는 날씨 변덕 때문에 눈인사도 못하고 내려오게 되었다. 시산회 역사 중에 가장 검소한 점심을 먹고 모두 서서 김순단 님의 가냘픈 목소리로 한라산 등반시 김영명의 '내가 당신을 얼마나 꿈꾸었으면'을 낭송하였다. 자신들의 천국을 향해 서로의 꿈을 꾸면서 자신들만의 세계를 갖고자하는 사랑의 시(詩)였다.
"내가 당신을 얼마나 꿈꾸었으면" / 김형명
내가 당신을 얼마나 꿈꾸었으면
당신은 말을 잃고 내게 오는가.
사랑이라는 말
죽음이라는 말
내가 당신을 얼마나 꿈꾸었으면
당신은 내가 부를 이름도 없이 내게 오는가.
보이지 않는 당신
보이지 않는 육체
그럼에도 당신은 살아 있다.
어둠 속 깊이깊이
내 마음 속 깊이깊이
내가 당신을 꿈꾸는 것처럼
당신은 나를 꿈꾸고
우리는 우리만의 세계를 가지리.
사랑의 힘으로
죽음의 힘으로
다시는 깨어날 수 없는
시간의 힘으로
천국이 있다면
우리가 그 천국을 가지리.
이제는 관음사 쪽 코스로 향해 아쉬운 하산을 할 시간이 왔다. 또 언제 이곳을 찾아 소원을 빌어 볼 날이 올 것인지 생각하며 걸음을 옮겼다. 마침 새싹이 돋아난 구상나무 군락지가 앞에 전개되고 기묘한 석회암으로 마치 석부작을 연상케 했다. 성판악 오름과는 다른 능선길이라 시야가 트여 신선함을 보여주었다.
죽은 고목은 새 생명을 지켜주는 수호신인 양 군데군데 꿋꿋하게 서 있었다. 햇살이 나오고 안개 구름이 산위에서 계곡 쪽으로 소리없이 내려오는 모습이 동양화가의 붓놀림 같아 잠시 넋을 놓고 감상했다. 신이 만들고 있는 작품이려니 초단위로 새로운 풍경화를 연출하는 위대함이란 여기 아니면 또 어디서 찾아보겠는가! 조금 더 내려오니 계곡에 능선을 향해 사진 찍기 좋은 휴게소가 있어 이리저리 모두 다 사진을 찍었다.
관음사까지 빨리 가야 일정을 마칠 수 있어 쉬지 않고 걷고 걸어 관음사휴게소에서 거의 10시간 동안의 한라산등반 대장정을 마쳤다. 잠시 우리의 애마가 오는 동안 지친 몸을 씻고 관음사 휴게소에서 나 원장이 제공한 히테 맥주를 한 꽝씩 들이키고 난 후 목욕탕으로 이동하여 사우나도 하고 한양기 산우 누님조카가 운영하는 용꿈식당에서 저녁을 맛있게 먹고 공항으로 직행 8시50분 제주발 서울행 아시아나에 몸을 실었다.
참 짧지만 의미 있는 여정의 산행으로 우리의 기억에 남으리라. 좋은 곳에서 즐겁게 지낼 수 있게 배려해 준 김종화 산우께 심심한 감사의 말을 우리 모두 드리고 싶네. ㅉ ㅉ ㅉ
시산회원 들이여! 처음 마음처럼 영원하라! 그리고 사랑의 시를 읽는 마음으로 서로 사랑하고 가꾸어 가자! 끝으로 무사히 한라산 등반하도록 일정을 도와준 이경식 총장과 기세환 회장의 노고에 대해 참석한 모든 산우들이 감사의 박수를 보내네. ㅉ ㅉ ㅉ
2007년 6월 18일 박형채 씀.
< ※ 김종화 산우의 산행기를 추가합니다. >
약 10여년 전의 일이다. 국립수산과학원 본원(부산)에서 외국과의 과학기술협력 업무를 담당하고 있을 때가 생각난다. 외국 손님들이 국립수산과학원에 오면 스케쥴을 짜고, 입국시 공항에서 부터 출국 때까지 안내를 해 주는 것이 나의 주요 업무 중의 하나였다.
한번은 일본 농림수산성에서 귀중한 손님이 왔었고, 2박 3일간의 모든 일정을 잘 마치고 귀국하던 날 내 차로 해운대 G호텔에서 김해공항까지 바려다 주었던 일이 있었다. 출근시간이라 차가 막힐 걸 예상하고 공항까지 2시간이면 충분할 걸로 예상하고 예정된 출국시간 보다 약 1시간의 여유를 두고 3시간 전에 해운대 숙소에서 출발 하였다.
그날따라 차가 워낙 많이 막혀서 공항 출국장에 도착하니 불과 30여 분 밖에 시간이 남질 않았다. 겨우 비행기표를 티켓팅하고 곧장 탑승수속을 밟는 시간 밖에 없었다. 오랜만에 한국에 와 면세점에 가서 가족이나 친지, 직원들의 선물도 사야 할텐데... 외국손님에게 그런 실례가 있을 수 있겠는가? 너무나 죄송하여 백번 사죄하고 미안함을 표하였지만, 그 사람의 입장에선 얼마나 황당하고 기분이 어떠 하였겠는가?
그 후 약 3년 전에 일본에 출장 갈 일이 있었는데, 일본 동경의 한 만찬장에서 바로 그 사람을 만나 옛날에 있었던 그 창피한 사건을 이야기 하였였지. 그 사람도 이해는 한다고 했지만, 아직까지 출퇴근시간에 교통정체는 어떻게 해결해야 될지? 지금도 그때의 일을 생각하면 미안하고 창피해서 고개를 들지 못할 심정이었다.
그런데, 이번 제주도 한라산 등반과 관련하여 나에게 불행하게도 비슷한 일이 일어났다. 3시에 공항에서 만나기로 친구들과 약속하고 2시간이면 성남 집에서 공항까지 충분히 도착할 것으로 예상하고 잠실에서 공항버스를 탔었는데, 토요일이라서 그런지 차가 막혀 예정시간보다 30분이 더 소요되었다.
기다리던 기 회장과 친구들은 얼마나 애가 타서 안절부절 기분나빠 했겠는가? 물론 출발시간도 잘 못 알고 갔었지만, 제주도에서 약 5년간을 생활 하였었기에 누구보다도 비행기를 많이 타 보았고, 해서 최소한 15분전 까진 좌석배정을 받아야 하는데 버스 안에서 안절부절 속을 태웠던 내 심정이야 오죽하였겠는가? 출발 10분 전에 도착, 겨우 탑승을 하고나니 이마와 등에 땀이 배였다.
이 자리를 빌려서 애태우게 했던 기 회장과 친구들에게 다시 한번 사죄하고 다음부터는 그런 일이 없도록 각성 할 테니 용서를 해 주시기 바랍니다.
금번 한라산 등반에 김정남 전회장이 불참한 관계로 기 회장께서 산행기는 제주도를 잘 알고 한라산도 몇 번이나 등반을 한 나에게 부탁한다. 글 쓰는 재주가 시원치를 않아 극구 사양했지만, 글 솜씨가 남다른 형채와 상의해서 필히 “시산회” 블로그에 올리라고 해서 잠시 시간을 내어 생각나는 대로 몇 자 적어본다.
제주공항에 오후 4시 반경에 도착하니 일기예보대로 주적주적 비가 내린다. 이번 산행엔 14인이 동행하게 되었다. 당초엔 정남이가 고소공포증이 있어 비행기 타기를 꺼려함에 따라 두 부부가 육로로 해서 목포나 완도에서 배를 타고 오기로 했었는데, 불행하게도 불참하였다.
아마도 월요일에 아침 일찍 회사일 등의 개인사정이 있는가 보다. 그동안 정남인 몇 번이고 한라산 등반을 시도했건만 아직까지 정상에 한 번도 못 올라봤다고 한다. 섭섭한 점도 있지만 본인 심정이야 오죽하겠는가? 모두들 이해를 해야지.
이미 사전에 예약해 놓은 봉고(15인승)를 렌트하여 12인(세환, 형채, 순단, 기인, 창수, 천옥, 해황, 문형, 원우, 원무, 전작, 종화)의 산우들은 제주대학교 입구에서 하루먼저 도착한 양기와 창우 산우를 태우고서 5.16도로로 가다 산굼부리가 있는 남조로로 해서 숙소(위미리)를 향하였다. 숙소는 내가 약 20여년 전에 젊음을 불태웠던 남제주군 남원읍 위미리에 있는 국립수산과학원 종보존연구센터(제주해역 해산어류 종보존)의 관사를 활용하기로 하였다.
숙소로 오는 도중 김순단 선생은 날씨도 좋지않고 구불구불한 길에 차멀미를 하여 잠시 휴식을 요청한다. 내일 아침에 가야 할 5.16도로는 이 길보다도 더 구불구불하여 어지러울 텐데, 심히 걱정이 앞선다. 숙소로 들어와 방 배정과 짐을 풀고 오늘과 내일 산행일정에 대하여 간단히 상의하고 종보존연구센터의 시설견학과 사무실 앞과 야자수나무를 배경으로 기념촬영도 하였다.
당초 계획은 제주시 동문시장에서 광어회에다 저녁을 하면서 쐬주를 한잔하기로 되었으나 그것보단 기왕 제주도에 모처럼 왔으니 숙소 가까운 곳에 바다가 보이고 자연산 회를 시식하는게 좋을 것 같아 기 회장님과 상의하여 곧장 숙소로 왔었다.
그 옛날 제주도에서 약 5년 동안 생활하면서 느낀 점은 제주도는 약 1~2년은 이국적인 느낌으로 그런대로 괜찮지만, 그 이상은 마치 유배생활을 하듯 답답하기 그지없는 곳이었다. 제주도 사람들은 다 그러하지는 않지만, 옛부터 고려시대 몽고족의 침입이나 이조시대 왜적의 침입, 근년에 와서는 4.3 제주도민 학살사건 등으로 항상 피해의식이 잠재해 있었다.
저녁식사는 숙소에서 가까운 위미항 근처에 있는 어촌계장이 운영한다는 곳을 내가 종보존연구센터 직원을 통하여 소개받아 찾아 갔다. 그날따라 비도오고 받아놓은 고기가 없어 갯돔과 아나고, 쥐노래미(게르치) 등 횟감이 별로 시원치가 않았지만, 순수 자연산이라는 것과 형채와 김순단 선생께서 정성들여 담아 가져온 그윽한 향기의 오갈피술 맛으로 만족해야만 했다.
이번 산행에 동행한 친구들은 개인적으로 몇 번씩 제주도 여행을 하였겠지만, 아마 상당한 기대감을 가지고 왔었을 줄로 믿는다. 숙소의 환경이나 맛있는 저녁만찬, 등등. 내가 주선한 이런저런 것들이 친구들의 기대에 충분히 부응치 못해 죄송스럽기 그지없었다.
숙소로 들어오는 길에 농협마트에 들러 내일 아침식사용 컵라면과 달걀, 막걸리, 과일, 초코렛, 물 등을 준비해 아침 6시 반경에 출발하기로 하고 취침에 들어갔지만, 코고는 소리, 엥엥거리는 모기소리와 잠자리가 바뀌어서 신경이 예민한 친구들은 잠을 설치는 것 같았다.
제발 비가 그치길 염원했었건만 아침 5시경에 일어나 창문을 열어보니 부슬비가 소리없이 계속 내린다. 컵라면에 달걀을 넣어 간단히 아침요기를 하고 개인별로 아침에 준비한 김밥, 과일, 초코렛과 막걸리 등을 분담하여 배낭에 넣고서 오늘 산행의 들머리인 성판악을 향하였다.
성판악휴게소에 도달하니 벌써 먼저 온 등산객들이 일회용 비닐을 입고서 산행준비에 분주하다. 일기예보에 오늘 비가 계속 온다고 하니 벌써 몇몇 친구들은 “적당히 오르다 하산하여 고스톱이나 하던지, 발맛사지나 받고 말지” 하고 걱정스러운지? 실망스런 푸념을 한다. 하지만, 우리가 누군가? 약 두 달 전부터 계획을 세워서 기다려 왔고, 비가 오나 눈이 와도 산이 좋아 여기까지 오지 않았던가. 모두들 우의나 일회용 비닐을 입고서 07시 40분에 성판악(해발 750 m) 휴게소를 출발하였다.
성판악에서 정상까진 9.6 Km, 1 Km도 오르지 않아 벌써 빗물인지? 육수인지 이마와 머리가 물에 흠뻑 젖었다. 비가 조금 그치면 비닐우의를 벗어 배낭에 걸치고. 다시 비가 오면 또 입기를 몇 번 반복하고, 약 1시간 간격으로 쉬엄쉬엄 막걸리도 한잔, 초콜렛과 과일도 먹으면서 오르니 ‘진달래밭대피소’가 보인다.
잠시 비가 멎고 구름이 걷히면서 햇살이 보이기도 한다. 겨울철 등반객을 위해 대피소를 한창 수리중이다. 이곳에서 휴식을 취하면서 커피도 한잔, 기념사진도 한 장 찍고 나니 기분이 한결 새로워진다.
정상까지는 이제 약 3 Km, 2/3 이상을 올랐다가고 생각하니 그렇게 힘들지가 않았다. 다만 등산로가 거의 돌이나 나무로 만든 계단이어서 발목과 무릎관절이 시큰거린다. 나 원장이 힘이 드는지 자꾸만 뒤로 처진다.
하지만 나 원장은 디카가 아닌 접사렌지가 있는 큼직한 사진기를 가지고 오면서 간혹 피어있는 야생화와 좋은 풍광을 담는 것 같았다. 날씨만 좋았으면 나 원장이 찍은 멋진 사진을 우리 시산회 홈페이지에서 구경할 수 있을 텐데 날씨가 좋질 않아 아쉬운 일이다.
해발 1,000 m의 고지에서부터 동능 정상까지는 구름에 묻혀서 보이질 않았고, 이슬비는 계속 내린다. 마지막 100 m 의 가파른 길은 나무로 만든 계단이 설치되어 있어서 편하게 오를 수가 있었다.
12시경에 정상에 도착, 전망대가 있는 곳에 자리를 잡고 김밥으로 허기진 배를 채우며, 막걸리를 한 잔씩 마셔 우리들의 건강과 시산회 무궁한 발전을 위해 건배를 하였다. 잠시 구름이 걷히는가 싶더니 갑자기 날씨가 맑아진다. 모두들 김밥을 먹다말고 백록담을 향하여 고개를 내밀었더니 잔뜩 끼어있는 구름사이로 어렴풋이 백록담의 바닥이 보인다.
모두들 사진을 찍는 등 아우성이다. 그러나 무심한 하나님은 잠시 동안만 백록담의 일부분의 모습을 보여줄 뿐 전체의 전경은 볼 수가 없었다. 아쉬움을 남긴 채 모두 일어서서 오늘 홍일점으로 참석한 김순단 선생님이 등반시('내가 당신을 얼마나 꿈꾸었으면'/ 김형명 시인)를 낭송한 후 시간관계상 하산을 서둘렀다.
정상(백록담)에서 관음사로 내려오는 길은 앞봉우리와 주변산세가 정말 환상의 절경이었다. 언제 또다시 이곳에 오를 수 있을 것인지? 그땐 제발 날씨가 맑아 좋은 풍광을 기대하며 가파른 길을 조심스럽게 내려왔다. 약 1시간을 내려오니 햇볕이 나고 구름이 거친다. 계곡의 능선에 나무로 시설해 놓은 대피소인지? 휴게소가 있는 곳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며 단체사진을 찍고 다시 출발이다.
한 참을 내려오다 우리들이 내려왔던 정상 부근을 쳐다보니 한라산의 뒷모습이 아름답기 그지없다. 조 산우와 난, 우리가 공항까지 타고 가야 할 렌트카를 성판악에 두고 왔기에 그곳에 가 가지고 와야만 하기에 먼저 앞서 나아갔다. 오름 길과 달라서 하산 길은 숲이 욱어진 천연림이다. 쉬지 않고 곧장 걸어오니 관음사휴게소가 보인다. 성판악에서부터 약 10시간 동안의 금년들어 가장 긴 산행이었다.
조(문형) 산우가 차를 가지고 오는 동안, 우린 휴게소에서 나 원장이 제공한 맥주를 한 캔씩 마시니 갈증도 해소되고 피로가 다소 가신다. 다들 산행의 여독을 풀기위해 목욕 후에 뒤풀이를 하잔다. 옛날 함께 생활했던 직원에게 문의하여 신제주에서 목욕을 하고, 마중나온 직원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뒤풀이 장소로 이동하였다.
뒤풀이 장소(“용꿈 돼지꿈”)는 사전에 그 곳 직원과 협의 하였던 곳인데, 마침 양기 산우의 친척이 운영을 한단다. 저녁식사를 함께한 소,맥주 한 잔은 달콤하고 행복하기 그지없다. 뒤풀이를 즐겁게 하고 곧장 공항으로 이동, 비행기에 탑승하니 산행의 피곤함과 배도 부르고 몇 잔 마신 술기운 탓에 김포공항에 도착할 때까지 단잠에 빠졌다.
제주도에서 약 5년 동안을 있으면서 매년 1~2회 한라산을 등반하였지만, 가을철에 다시 한번 와야겠다는 생각이 앞선다. 오늘 산행에 참석하지 못한 김정남 전회장님을 비롯한 여러 산우들께 우리만 다녀와서 죄송하기 그지 없아오니 다음 기회에는 꼭 함께 하시길 기원하며, 어렵게 다녀온 한라산 산행기를 맺는다.
2007년 6월 18일 김종화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