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훈 선생님께 / 000
길을 걷다가, 지하철을 타다가, 멍하니 먼 곳을 바라보다가 드라마의 내레이션처럼 스치는 생각이 있습니다. 그 생각들은 누군가에게 쓰는 편지로 한편의 글이 되었습니다. 예기치 못한 사건과 감정들로 조난선처럼 삶을 방황했던 이십 대에 선생님은 제게 그 편지들을 가장 많이 전하고 싶은 분이었습니다.
대학 1학년 첫 문학수업, 황석영의 '삼포 가는 길'을 아직도 기억합니다. 선생님 수업이 얼마나 재미있었는지 모릅니다. 수학이나 과학처럼 머리 아프지 않고 이렇게 재미있는 수업을 마음껏 들을 수 있는 국어국문학과는 제게 대학이 얼마나 즐거운 곳인지 가르쳐 줬습니다. 소설 읽는 재미를 열정적으로 가르치시는 선생님이 참 멋져 보였습니다. 신입생이었던 저는 '훈이네 집' 홈페이지에서 선생님이 쓰신 글들을 보다가 용기 내어 메일을 썼습니다. 아무도 나를 모르는 곳에서 처음부터 다시 잘 시작해 보고 싶다는 열아홉 소녀의 편지에 선생님은 그것도 좋다며 격려해 주셨습니다. 아마도 그게 시작이었을 겁니다. 선생님은 이십 대에 제 가장 든든한 편지 친구가 되어 주셨습니다.
학과 조교가 되어 선생님을 가까이에서 도왔던 것도 제겐 참 즐거운 일이었습니다. 예민하고 완벽주의 성향에 전에 없던 여자 조교라 불편하셨을 텐데도 교수님들은 어느 한 분 빠짐없이 저를 예뻐해 주셨습니다. 살면서 어려운 분들께 가장 많이 칭찬받았던 시절이었습니다. 제겐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던 백일장 행사를 무사히 마치고 여름방학이 돼서 휴가를 가게 된 제게 선생님은 봉투를 하나 주셨습니다. 우리 조교 휴가 때 차비에 보태라고 선생님들이 주셨다며 건네신 그 봉투를 받고 마음이 얼마나 찡했는지 모릅니다. 그때 선생님 연구실 문을 나섰을 때의 감정이 아직도 어제 일처럼 생생합니다.
조교 생활을 마치고 서울에 올라왔을 땐, 유난히도 이메일을 자주 보냈던 기억이 납니다. 낯선 곳에서 하고 싶은 이야기가 참 많았나 봅니다. 한겨레문화센터에서 글쓰기 수업을 듣고 있다는 소식을 전한 편지에 선생님은 이런 답장을 보내주셨습니다. '네 문장이 참 좋다. 내 퇴임 때 글 하나 써주렴.' 아이들과 학교에 찾아갔던 삼십 대의 어느 날 이미 퇴임하셨단 소식을 듣고 무심히 지나쳐 버린 게 얼마나 아쉬웠는지 모릅니다. 선생님의 퇴임 소식을 듣고 쓴 글은 아마 저렇게 시작했을 겁니다. 선생님께서 제 문장이 좋다고 칭찬해 주셨던 날부터 내내 생각했던 이야기입니다.
어제는 양주 김삿갓문학대회에 다녀왔습니다. 중학생 이후로 백일장에 참가하기는 처음입니다. 일반부 시제는 '강'이었고 저는 홀로 삼남매를 키워내신 시어머님의 크고 깊은 사랑을 주제로 산문을 썼습니다. 요즘은 이렇게 쓰는 것에 용기가 생겼습니다. 아직도 제 문장이 좋은지는 잘 모르겠지만, 읽고 쓰는 일을 마음껏 즐기는 중입니다.
올해도 어김없이 아카시아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5월 중순을 알립니다. 아카시아꽃을 보면 꼭 스승의 날이 생각납니다. 올해는 스승의 날을 핑계 삼아 선생님께 긴 편지를 보내봅니다.
남편에게 선생님과 통화한 얘기를 했더니 아이들 학교에 보내고 한번 찾아뵈라고 합니다. 저는 목요일이 가장 좋습니다. 6월 중 좋으신 목요일 알려주시면 을밀대에서 뵙겠습니다.
5월 평안하게 보내세요.
2023년 5월, 선생님을 존경하는 제자 00 드림.
첫댓글 정말 문장이 좋네요. 멋진 제자를 두셨네요.
선생님은 세상을 참 잘 사셨구나 생각했습니다. 이렇게 따뜻하고 향기로운 편지를 받으셔서 읽는 제 마음도 행복합니다.
와! 을밀대의 냉면이 더욱 맛있어지는 계절이군요. 저는 토요일이 가장 좋습니다. 알려주시면 을밀대에서 뵙고 싶습니다.
이번 주 토요일(20일) 점심에 만날까요? 금요일에 치과에 가는데 이가 시려서 냉면 못 먹지는 않겠지요?
6월 3일에도 시간 납니다.
@이훈 교수님, 6월 10일에는 시간이 되시는지요? 제가 이번 주에는 선약이 있고 6월 3일은 연휴라서 목포에 가야 해서요. 그때쯤이면 냉면이 정말 맛있을 것 같네요.
6월 10일, 17일은 결혼식에 가야 해서 시간이 안 나요.
냉면은 아무 때나 맛있어요!
이런 아름다운 글이 오간 걸 오늘에야 압니다.
교수님이 제자 잘 두셨네요.
부럽습니다.
을밀대의 냉면도 언제나 맛볼까요?
기다리면 언젠가는 이루어지겠지요.
눈물을 글썽이게 만드는 편지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