Ⅱ. 우리교회의 현재 모습(1966-2007)
1. 성모병원 이야기
1960년대 초 배두환 마가 주교님께서 천안전도구(천안읍교회, 부대동교회, 병천교회, 봉항리교회, 둔포교회, 백석포교회, 예산교회 등 6개 교회)의 관할사제로 계셨다. 배 신부님은 평소 의료선교에 대해 큰 관심을 가지고 있던 참이었다. 그러던 중에 당시 천안 지역 국회의원으로 당선된 한화그룹 회장 일가인 김동철 의원이 의료 낙후지역인 병천에 현대식 병원을 세우겠다는 공약을 내세웠었는데, 그 김의원이 바로 배신부님의 사모인 김영순(베로니카)님의 작은아버지였다. 그는 국회의원으로 당선된 후에 병원 설립에 대한 일체를 바로 그 지역 관할사제였던 배신부님께 맡겼고, 병원 건립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당시 병천은 유동인구가 많은 장터 임에도 불구하고 천안, 조치원, 진천 등 인근 도시들과의 교통이 좋지 않은 이유로 이곳 사람들이 그곳에 위치한 병원을 이용하기란 무척 힘든 게 현실이었다. 물론 병천에는 ‘송의원’이라는 개인병원이 오래 전부터 있었으나 그 병원은 검사 시설이나 입원실을 갖추고 있지 않은 영세한 개인의원이어서 중환자나 위급환자를 받기에는 항상 역부족이었다. 그래서 이 지역에서는 현대식 시설과 병상을 제대로 갖춘 큰 병원에 대한 필요성이 항상 절실하던 차였다.
병원 신축에 필요한 부지는 교회 바로 앞에 있던 금융조합(현재의 농협) 건물과 그에 딸린 토지를 한화그룹에서 매입해 줌으로써 그 기반이 마련되었다. 그 규모는 대지 600평, 건평 50평이었다. 한편, 배 주교님은 미국 성공회 어머니회 재단의 후원금을 끌어오는데 성공한다. 이 자금은 후에 병원에서 필요한 시설들을 설비하고 그것을 운영하는 자금으로 요긴하게 쓰이게 되었다. 그렇게 해서 병천이라는 작은 읍내에 구급차와 X-RAY를 비롯한 당시로서는 최신 의료검사 장비와 많은 입원실을 갖춘 명실상부한 현대식 병원이 드디어 생기게 되었다. 이로써 1970년 8월 25일 드디어 성모병원이 개원됨으로써 병천교회는 의료선교라는 새로운 장을 열게 되었다.
초창기 성모병원에서는 가난한 환자들에게는 진료비를 받지 않고 무료진료를 해주었다. 가난한 환자들에 대한 무료진료 정책은 성모병원의 기본방침이기도 하였다. 그런데 농촌인 이곳 지역의 대부분 환자들은 가난했기 때문에 병원에는 무료진료를 받는 환자들로 항상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특히 당시에는 생활고 등을 이기지 못하고 농약을 마시고 자살하려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이전에는 이들 대부분이 천안에 있는 큰 병원으로 옮기는 도중에 사망했었다고 한다. 그러나 위세척을 할 수 있는 시설을 갖춘 성모병원이 생기고 난 후부터는 많은 음독환자들을 살릴 수 있었다. 이렇게 응급시설과 검사시설과 입원실을 갖춘 성모병원은 병천 지역민의 큰 자랑거리이기도 하였다.
이 지역에서 우리 성모병원의 덕을 보지 않은 주민은 거의 없었다. 교통이 불편하던 당시에 감기, 배탈 등 가벼운 환자부터 급성맹장, 음독자 등 중환자의 수술은 물론 산모들의 아이를 받아내는 일을 감당하였다. 본 교회 하정숙(클라라) 교우의 장녀 안나를 비롯하여 당시 비슷한 또래의 모든 아이들이 성모병원의 도움으로 출산된 아이들이라고 하니 그 의료 기여도가 감히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뿐만 아니라 우리 교인 및 지역 주민들이 그곳 병원에 간호사 등 직원으로 근무하게 됨으로써 병천 지역의 고용 효과도 높일 수 있었다.
그러나 병원에 환자들이 몰려들면 들수록 수지 적자는 더 늘어만 갔다. 그래도 병원 운영을 가능하게 했던 것은 미국에서의 선교자금 지원 덕분이었는데, 그것마저도 70년대 말에 전 세계에 불어닥친 오일쇼크로 인해 중단되기에 이르렀다. 병원으로서는 최대 위기를 맞이하게 된 것이다. 그렇잖아도 농촌 지역에 내려와서 적은 사례를 받으며 의술을 펼치고자 하는 의료진을 구하기란 참 어려운 일이었는데, 그 적은 사례마저도 제대로 못 줄 딱한 형편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래서 교회에서는 고심 끝에 병원을 의료진에게 무상임대로 내어주는 큰 결단을 내리게 된다. 그렇지 않다면 병원 문을 닫아야만 하는데 그렇게 하면 병천은 물론 인근 지역 주민들에게 큰 불편을 줘야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해서 성모병원은 더 이상 교회에서 운영하는 병원이 아닌 것이 되었다. 무상임대를 받은 의료진은 수지를 맞추기 위해 그동안 실시해오던 무료진료를 중단하기에 이른다. 병원의 운영은 최초 병원이 설립될 될 때의 의료선교 정신은 사라지고 철저하게 경제적 논리로 접근하게 되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병원의 경영난은 조금도 좋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으며, 교회는 교회대로 하느님의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다는 자책감을 갖기에 이른다. 이에 교회는 다시 병원 운영을 직접 하기로 결정하고 그 책임자로 박광희(안드레) 교우를 임명하기에 이른다.
애당초 병천이란 곳이 모든 의료시설을 갖춘 큰 병원이 수지를 맞추며 운영될 수 있는 규모의 동네는 아니었다. 그렇다고 해서 병천교회가 재정이 넉넉하여 병원을 운영할 수 있도록 넉넉하게 선교 지원을 해줄 수 있는 그런 형편도 아니었다. 애시 당초 병천에서의 의료선교가 미국에서의 선교자금 후원을 믿고 시작된 일이었던 것만큼, 그 지원이 중단된 상태에서의 운영이란 불가능하다고 봐야 할 것이었다.
또한 전문직인 의료진의 높은 급여 부담은 운영을 더욱 힘들게 했고, 또 도시에서 병천 지역까지 적은 급여를 받고 올 수준 높은 의료진도 없었던 것이 사실이다. 한마디로 경영난을 겪고 있는 마당에 실력 있는 의료진의 수급은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병원의 수지적자는 경영악화로, 경영악화는 질 낮은 의료서비스로 악순환이 반복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심각한 자금난과 의료진 수급의 어려움 등으로 곤란을 겪어오던 성모병원은 의료선교라는 큰 꿈을 안고 시작한 지 15년만인 1983년도에 문을 닫기에 이른다.
우리는 이 성모병원의 운영이라는 의료선교를 통해서 몇 가지 교훈을 얻을 수 있었다. 아무리 좋은 일이라도 그 사업에 대한 충분한 사전 준비와 이를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이 되어 있지 않은 상태에서는 그 소기의 성과를 얻기 힘들다는 것이다. 열정과 의지만을 갖고는 어느 정도의 열매를 맺을는지는 몰라도, 결코 이를 지속시킬 수는 없다는 것을 알았다. 열정과 의지가 없는 힘과 능력은 그 방향성을 잃고 또 도로(徒勞)이기 일쑤이지만, 그 반대로 힘과 능력이 없는 열정과 의지는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다는 것을 몸소 배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병천교회의 성모병원은 적지 않은 기간 동안 이 지역에 명실상부한 현대식 의료서비스를 제공함으로써 의료선교를 했다는 큰 자부심을 갖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