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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회 계간 파란 신인상
시 부문 장대성 아스마라 등 10편
평론 부문 당선작 없음
장대성 1998년 광주에서 태어났다. 단국대학교 문예창작과를 졸업했고, 2024년 무등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소설가로 등단했다. tnvrhkehtl1@naver.com
아스마라
국경을 넘어 우리가 이곳에 도착했을 때 멈춘 시계탑 앞에서 광장 가득한 사람의 행렬을 바라볼 때 더는 숨을 내뱉을 필요가 없다고 느낄 때
당신은 우체국에 들어가 금빛 보에 둘러싸인 모래시계를 들고나왔다 이게
내가 여기 있다고 믿을 수 있는 시간이라고
한국의 고원은 대체로 배추밭인데 이곳에는 아름다운 근대식 건물과 극장이 있다 상영 중인 영화는 없지만 이름 모를 영웅을 기리는 특별전이 열리고 있었고
두 세기 전의 혁명가였어
춤을 참 잘 췄다고 당신이 말할 때
모래바람과 함께 귓속에 질문이 스민다 언제부턴가 당신은 나와 죽을 고비를 몇 차례 넘겨 왔고
우리는 서로의 국적도 모른 채 밤하늘 보며 소원을 빌었다 가족, 없고 건강, 그럭저럭 빚, 그건 왜
사랑을
말할 때쯤 당신은 코를 골았다 나는 모닥불 타오르는 사막 한가운데서 나무에 묶인 낙타처럼 하염없이 아침을 기다렸다 당신이 눈을 떴을 때 맑은 하늘이 나타나길 바라는 마음으로
발을 아무리 뻗어도
중심부는 경계 지역이라 들어갈 수 없었다 뿌리를 도려낸 나무를 바라보다가
아픈 걸 알면서도 바깥을 향해 돌아서 걸어야 했다
손이 따뜻한 사람이라 좋았어
말하는 당신을 따라 이어지는 긴 행렬 모두 다른 인종 다른 눈동자 다른 언어를 썼지만
알고 있었다
돌아갈 사람이 누구인지에 대해
마음을 가진 사람과
마음밖에 남지 않은 사람에 대해
나는 문득 당신의 이름이 떠올라 소리치고 싶었는데
모래시계가 멈춰 있다
그렇다면 무엇이 귓가를 간지럽히는 걸까
강을 거슬러 오르니 숲이 나왔다
나무에 상처를 내며 잊히지 않을 길을 걷는다 까마귀 떼가 하늘을 어둑하게 만들고
사람들이 강에 뛰어들고 있다 솟구쳐 오르는 물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는 내게 처음 보는 할머니가 다가와 나 일곱 살 때는, 말하며 앳된 웃음을 짓는다
그 웃음 너머 어두운 숲속에서
울음소리가 들려온다 ■
청진
빨래를 돌린다
나는 너의 생활 방식이 이해되지 않는다
물기가 남은 접시를 바로 찬장에 올려 둔다거나
남향에 살면서 바닥에 닿을 만큼 암막 커튼을 내리는 일
오후 여섯 시면 블루투스 스피커의 볼륨을 높여
죽은 개가 짖는 소리를 듣는 거
족히 삼십 분은 씻으면서도 잠이 들면 더러워 더럽다고 말하며 깨어나는 것도
움직여야 사는데 사는 건 움직임을 가지는 일인데 종일 바닥에 누워
올리브나무의 꽃말은 평화 꽃말은 평화 읊조리는 게
아프면 병원을 가라고
요즘은 마음을 고쳐 주는 사람도 많다고
내가 몇 번을 말해야 너는 겨우 고개를 끄덕인다 알았어 뭘 알았는데 이런 식으로는
어떤 문제도 해결되지 않는 걸 아는데
벌어진 나무 타일 안에 배를 까고 죽어 있는 바퀴벌레를 가만히 바라보는 너의 등이
파도에 살갗이 쓸린 바위처럼 보일 때
이틀 뒤에 오세요, 상담 예약을 잡고 슬쩍 커튼을 올린다 바퀴벌레 옆에 잠든 너의 팔목으로 기어 오는 빛
사는 게 뭔지
밥을 먹고 일을 하고
썼으면 제자리에 갖다 두라고 말하는 게 사는 것이라면
죽으라는 말보다 죽이라는 말이 더 죽음에 가까운 것이라면
죽을 한 숟갈 떠 입에 욱여넣고 다 돌아간 빨래를 건조대에 널어 둔 뒤에
아깐 말이 심했지 그래도 아침에는 함께 커튼을 열자 우리의 생활에서 우리를 잃지 말자
말하는 일이 사는 거면 좋겠다
좋겠다 말하며 너의 옆에 눕는다 죽은 개가 짖는 남향의 집
나는 너의 흰 팔을 살짝 부여잡는다
핏줄에서 박동이 느껴진다 힘을 주면 빛이 새어 나올 것 같다 ■
밤이 오겠지
이 마을의 사람들은
죽은 새의 날개를 엮어 부채를 만들어요
속력을 가졌던 깃털로부터
머리칼을 휘날려 보는 것
영혼이 사라진 몸은 굳어도
날개에는 남은 힘이 있다고 믿는 거예요
집의 어른이 죽고
아이였던 내가 마당을 물려받는 동안
뒷산이 쉬지 않고 타오르면서
옆 산에 번지고
집 앞까지 불길이 쳐들어와
갈 곳이 없다는 이야기
밤에도 낮인 듯 밝아서
잠이 들어도 꿈은 못 꾼다는 이야기를
내내 들었습니다
나는 툇마루에 걸터앉아
목줄을 벗어나지 못하는 개를 보며
산들산들 몸을 흔들어요
산이 거대한 숯처럼 보인다거나
멧돼지가 먹기 좋게 익었다며
실없는 농담을 툭툭 던져도
웃음은 불처럼 번지지 않는군요
꺼지지 않는 아픔이 여기 있습니다
나는 허공에 손을 뻗고
이 마을의 풍습은
슬픔이라도 멀리 퍼뜨리고자 하는
끝의 마음이라고 적습니다
그 축축함을 부채로 부쳐
마당이라도 식게 만들겠다고요
산등성이를 넘듯
대문 너머로
발이 발자국을 따라갑니다
밤이 오겠죠
뒤돌아서 방문을 열 때
어떤 말이 들려도
연기처럼 희미하게 기억하도록 해요
새가 먼 하늘을 따라가요 ■
로그인
푸른 철갑 악어를 무찌르고 우리는 동굴 구석에 주저앉아 가쁜 숨을 고른다 힘든 전투였어 네가 없었으면 나는 저 악어에게 죽었을지도 몰라
마을에 버려진 선풍기로 부메랑을 만들자는 건 정말 좋은 생각이었어, 말할 때
너는 자리에서 일어나 물속에 손을 집어넣는다
아직 무언가가 남아 있다는 듯
조금의 시간이 흐른 뒤에, 너의 손에 들린 것은 푸른 철갑 악어의 새끼였다 그럴듯한 환경과 습도를 조성해 주면 기를 수도 있는,
잘 길러 낸다면 곧 있을 늪지대 전투에서 큰 활약을 할 수 있겠지 우리는 죽지 않고 살아남겠지
그쯤 너는 비밀을 털어놓았는데
바깥세상에서 구 년간 개를 길렀고, 이불 속에서 코를 골며 자는 개가 사람처럼 느껴진 적이 있고, 그 개는
사람은 걸리지 않는 심장사상충과 싸우다 죽었다는 일화
개의 눈물 자국을 지워 주다가
슬픔이 무엇인지 깨닫던 날에 대하여
나는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석회암 사이에 있는 에메랄드 광석을 주워 뒷주머니에 넣는다
물에 비친 너의 얼굴에서 흘러나오는 미세한 빛, 그것은 순식간에 굳어 [투명한 눈물 조각]이 되고
이 문을 열면 바깥으로 나갈 수 있어
돌아오고 싶다면 돌아올 수도 있어
마땅히 해 줄 말이 없어 잠시 로그아웃을 하면 어떻겠냐고 물었는데
너의 패시브 스킬이
{용사의 의지}*라는 것을 나는 몰랐지
너는 물속에 푸른 철갑 악어 새끼를 풀어 주고
다음 던전으로 넘어가자고 했다
이건 내 새로운 모험이 될 거야, 말하는 너의 칼끝에 얕게 서린 빛은 마음을 죄다 베어 버릴 듯 날카로워 보인다
*감정이 스스로 제어되는 효과가 있다. ■
매미성*
해변을 걷다가
이대로 가다가는 멈춰 버릴 것 같아
내가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은
탈탈 털어도 한 알씩 남는 모래알처럼 불쾌해
여기도 있구나
집을 짓고 돌 쌓는 아이들
무너질 줄 알고도 시작하는 마음을 가진 손짓
주먹을 쥐는 것은 놓아야 할 무엇이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순간을 되새기는 일
발끝에 물이 닿을 때마다
뒤꿈치에 힘을 준다
돌아갈 곳은 이미 무너지고 없으니까
여기도 몽돌이 가득해요
사람들은 서로의 몸에 낀 돌을 골라내고
벌어진 틈새로 통하는 길을 바라본다
물이 들어올 때마다 무언가 쓸려나가는 소리
채울 수 없다는 걸 아는 것처럼
어깨는 동그랗게 말려 있다
거제는 해변에도 골목이 있어요
돌과 돌 사이
손가락을 넣어 틈새를 만들어 봐요
안에 뭐가 있나요?
돌을 쌓아 올리는 조개
아가미를 모아 기도하는 물고기
서로를 지겹게도 잘 알아서
한순간 느슨해진 기억
감당치 못할 아픔이 쓸고 간 자리에는
벽을 세우는 사람의 뭉툭한 손이
돌과 구분되지 않게 보이고
견고함은 오래 못 가요
조금씩 허술해야 돼
숨을 고르고
몸에서 골라낸 돌을 힘껏 던진다
*백순삼 씨가 태풍 매미 이후 쌓아 올린 벽. ■
무슨 말이 그렇게 많아
폭설이라는 단어를 좋아합니다
무덤이나 모래도요
떠올리면 금세 파묻히는 느낌이 드는 것들이지요
이대로 죽는구나 싶을 때
떠오르는 하나의 문장을 위해 그러는 겁니다
의지가 약하다는 말과
나약하다는 말을 들을 때의 기분이 다른 것처럼
사랑하는 무엇에 사랑해 말하지 않고
창문 바깥은 폭설이라 하고 싶은 거예요
이게 내 삶의 낙인데
오늘은 물을 너무 마셨더니
몸속에 수영장이 생긴 것처럼 말이 자꾸
어푸어푸 살려 달라고 외칩니다
보고 싶어를
마지막 장이 찢어진 책을 샀다고 한다거나
날이 정말 맑다를
세상에 그림자가 참 많다고 말한 게 그것입니다
양파에게 좋아하는 시의 구절을 읽어 줬더니
멍이 들며 썩어 버린 건 비밀이에요
이처럼 말에는 슬픔이 깃들어 있습니다
내뱉고 싶은 말을 숨기고 감출 때
슬픔은 가지를 뻗어 장면이 되고
마당에 측백나무를 심었는데
엄청난 속도로 자라 지붕을 덮었습니다
집에 그림자가 드리웠어요
창문을 열어 두고 지내는 날에
골목길 걷는 사람들은
와 저 나무 좀 봐 정말 크고 아름다워
그렇게 말하지만
그런 말 들으면 솔직히 기분 좋지만
속은 꼭 그렇지만은 않아서
숨을 참아요
안쪽이 울렁거리며 물결을 만듭니다
나는 어디로 흐르려나요
어디든
흐른 곳에서 나는 있는 것이겠죠
내가 있는 곳이
네가 있을 곳이면 좋겠습니다
이런 말 재밌죠
어감을 활용해 의미를 만드는 것입니다
어딘가에서 잘 지내고 있을 너를
굳이 이곳으로 데려오는 것입니다
바깥은 폭설이에요,
그 말을 하려고
오래 함께 창밖을 바라보려고 ■
메아리
자주 물 마시는 꿈을 꾸다가 깨어나면
입 밖으로 물이 새어 나온다 그런 아침에는 베개가 조금 젖어 있고
적당히 젖은 채 살아야 아주 마르지 않을 수 있다 곰팡이 슬어 있는 행주로 몬스테라 잎을 닦는다 너무 오래 방치하면 바깥부터 멍이 든다
양말을 뚫고 나온 엄지발가락으로 대문을 밀고 가는 사람의 뒷모습을 떠올렸지
그때는 틈이라는 게
바느질 몇 번이면 되는 줄 알았는데
밤새 곰 인형의 눈을 붙이는 사람의 동공은 실핏줄로 붉게 물들었고
나는 가끔 그 사람의 팔목을 끌어안고
자장가를 불러 달라고 했다
눈을 감고 귀에 흘러드는 물을 그대로 두었다 거기에 강을 거슬러 오르는 배가 한 척 있다 나는 영문도 모르고 풀꽃 옆에서 수평선 넘어가는 배를 바라보다가
깜박 졸았다 자장가는 어디로 가고 물속에서 웅얼거리는 목소리만 들려왔다 절대
눈을 뜨지 말라고
달이 지고 햇빛이 문턱을 오르는 동안
옆구리에 곰 인형 하나가 끼어들었다
내가 마주 볼 수 있는 유일한 눈동자에서
아무것도 비치지 않았다
부스스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물을 벌컥벌컥 마시고 잔잔한 노래를 골라 재생한다 노래는 방 모서리부터 차오르고
허밍을 한다 입 밖으로 터져 나올 듯한
목소리
화장실에서 손에 물을 가득 받아
깊게 들여다볼 때
오래도록 나 혼자인 얼굴로
세수하고 거울 앞에서 명치를 꾹 누른다
아이 러브 유
아이 러브 유
넘쳐흐를 때까지 ■
복원
쓰다 만 일기는 자고 일어나면 잊히고
다음 장을 넘길 때
마지막도 없이 끝나 버려
그리고 다시 시작되는
그러면 다시 시작해야 하는
찬장에서 컵을 꺼내 물을 따르는 일
팔다리를 펴고 허리를 돌리며
충돌하는 뼈마디의 소리를 듣는 일도
국에 소금을 더 넣고
숟가락으로 냄비 속을 휘휘 젓다가
주걱에 붙은 밥알을 떼어 입에 넣는다
딱딱하구나 과거라는 건
바깥에 오래 머물러 있어서
돌아갈 수 없게 굳어 버린
다짐 같아
그것의 피부를 쓸어내리면 이런 느낌일까
따뜻할까 내 손은
매일 좋아질 거라고 말해 준 올리브나무가 죽었어
밑바닥에서 물이 넘칠 때 알았지
여기 있는 것은 이제 아무것도 아니라고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은
나도 마찬가지였는데
나 사실 숨겨 둔 자식이 있어요
그렇게 말하는 막장 드라마가
더는 막되었다는 생각이 들지 않아
거울 앞에서
나는 내가 숨긴 마음이다
나는 내가 훔친 물건이야
드러내려고 하지 않는
굳이 찾을 필요가 없는
발에 먼지가 가득 달라붙어 있어
저녁이구나 내가 아는 어두움이라는 건
익숙한 냄새가 코끝을 찔러서
불을 켜고
일기장을 넘긴다
내가 있다 아주 오랫동안
공전하고 있다 ■
힘이 닿는 한 좋은 마음*
두꺼운 이불이 아니고선 견딜 수 없는 밤을 지나왔습니다
안대를 벗고 커튼을 활짝 여니 잇몸이 밝아져요
컵을 씻는데
아무리 세게 닦아도 우유 때가 벗겨지질 않아서
나는 나빠지고 있습니다
노트북을 켜 인터넷 창을 열면
당연하다는 듯 사람이 죽어 있고
금값이라는 사과 대신 사과 향 젤리를 씹으며
먼 나라의 전쟁과 폭격과 증오를 봅니다
아파트는 여러모로 높고
제대로 묶인 줄은 쉽게 풀어지지 않고
살아 있어야 살릴 수도 있다는 말은
아직 잘 이해되지 않아서
창가에 둔 식물에 물을 줘요
기다리던 연락은 올 기미조차 안 보이고
핸드폰에 스팸 문자만 쌓여 가
목이 축 늘어진 옷을 가위로 잘라
접이식 탁자를 닦습니다
일 분이면 되는 일이죠
회사 홈페이지에 들어가 새로 고침 누르기
머리띠 두르고 광장에 모인 사람들의 영상을
두어 번 돌려보는 것도
죽으란 법 없다는 말이
더는 장난처럼 들리지 않을 때
어둠을 밀어내고 방에 들어서는 햇빛
창가에서 좋은 하루를 다짐할 때
몸에 깃든 어둠이 빠져나가며
바닥에 그림자가 만들어지는 것 같고
어떻게 지내냐고 가족에게 온 연락은
조금만 더 나중에 답하기로 합니다
잘 죽은 사람의 사연은 채택되지 않고
좋은 사랑도 드라마 마지막쯤 등장하잖아요
애초에 내게 가족이란 게 있었을까요
우리는 어떤 믿음으로 세상에 묶여
아파트 계단을 오르는 건지
지금도 누군가는 죽거나
몸의 밝은 부분이 어두워지고 있겠죠
노트북을 닫고 자리에서 일어납니다
거울은 나를
죽으란 법 없는 사람처럼 반사하고
잘은 몰라도
또 떨어지지 않았을까요
*하현상, 「Good Night」. ■
축
우리는 아직이라고 말하네
서랍 안에 뭐가 있는지 몰라서
고양이가 튀어나올 리는 없어
슈뢰딩거는 피자집 알바생처럼
너무 많은 상자를 접고 닫고 열어 보면서도
자신에게로 뛰어드는 상상 속 고양이를
안아 줄 수조차 없었잖아
아무래도 미래일 거야
손잡이를 몸쪽으로 당기면
미래가 도래하듯 서랍 안의 어둠이
서서히 밝아질 테니까
그런 설정이라면 미래는
서랍이 아닌 우리의 손아귀에 있는 것이네
빛이 굴절하여 형상을 만들고
눈물이 볼을 타고 슬픔을 드러내듯
불을 끄고 누워 반짝이는 말들 속삭이던 밤은
우리를 넘어 방을 마음으로 만들었네
그걸 고양이라고 할까
아니 개라고 하자
꼬리를 세차게 흔들어도 괜찮을 만큼
튼튼한 몸을 가질 수 있도록
입추 지나 처서 오고
얇은 옷을 개어 장롱 안에 두고
아 더워 아 추워
이랬다가 저랬다가 해도
서랍이 있다면
열 수 있는 문이 남아 있다면
비슷한 시간에 잠들지 않더라도
같은 햇빛을 맞이할 수 있을 거야
그럼 이제 열어 볼까?
구름 걷히고 어둠 몰아내며
바깥의 빛이 집으로 도래할 때
아직
우리는 아직이라는 마음을 가지네
당선 소감
이번 겨울은 관측 이래 가장 많은 비가 내렸다고 합니다. 그래서인지 언젠가부터 비가 내린다, 말하지 않고 비가 온다, 말하는 사람이 되었어요. 그간 나는 얼어붙지 않기 위해 빠른 속도로 떨어지는 빗물의 의지를 생각하고, 팔을 벌리고 품을 만들어 내게로 오는 것들의 너비를 헤아려 보며 지냈습니다. 대학을 졸업하고, 다시금 다이어트를 결심하고, 사랑하는 사람의 이야기를 경청하는 귀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슬프고 아픈, 그러나 아름다운 문장을 적어 냈다고 생각하면 기쁜 표정을 감출 수 없게 되기도 했어요. 무릇 곁이라는 말의 다정함을 짐작할 때쯤
내게 이다지도 많은 사람이 당도하고 흩어졌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돌이켜 보면 나는 내가 좋아하는 일만 하며 살았던 것 같아요. 나의 좋음을 위해 누군가는 생활의 아픈 구석을 감추고, 풍등을 날리며 기도하고, 새벽부터 몸을 일으켜 하루를 견디고 있다는 것을
알았던 날 함박눈이 내렸는데요. 그때 금방 녹고 잊히더라도 선명한 문장을 적어 보자는 다짐을 했습니다. 그런 생활을 살아야겠다는 의지를 갖게 되었습니다. 나의 쓸모와 아름다움이 그저 사람의 것이기를 바랐습니다. 일단 사람이 되어서 사람 아닌 것들을 생각하는 마음을 갖게 되기를요.
고마운 사람의 이름과 마음을 여기에 다 남기지는 못하겠지만, 그럼에도 민호 형과 웅기 형의 그늘 아래에서, 태훈, 병헌, 아영의 눈으로, 주성, 재민, 준섭, 형초에게 곁을 배우며, 천수호 선생님, 이병철 선생님, 안도현 선생님의 다정을 기억하고, 광주 친구들의 웃음으로 기쁨을 알고, 윤겸과 가족에게 오래라는 말의 지속력을 느끼며
나는 끝끝내 쓰는 사람으로 남고 싶습니다. 어느 밤에는 시를 포기하겠다는 생각을 했고, 사람으로 살아가야만 하는 당위를 찾으려 노력했고, 술에 잔뜩 취해 한탄도 하고 헛소리를 내뱉고 그랬는데요.
시는 대단한 무엇이 아닌 그저 살아가는, 살아온 우리의 생활과 그 속에 깃든 사랑을 기억하기 위한 것임을 조금씩 알아 가는 중이에요. 오늘 날씨는 구름 한 점 없고 적당한 바람이 불어요. 다음의 우리가 지금의 우리를 사랑하길 바라요.
심사 경위
제4회 계간 파란 신인상에 응모한 분들은 시 부문 199명, 평론 부문 6명이었다. 시 부문의 심사는 3차에 걸쳐 진행하였으며, 평론 부문의 심사는 예심 없이 곧장 본심을 가졌다.
시 부문 1차 예심은 1월 19일까지 진행하였는데, 심사 위원들이 모든 응모작을 읽고 각자 10명씩 추천하기로 했다. 그 결과 복수 추천을 포함해 34명이 1차 예심을 통과했다. 아래는 1차 예심 통과자 명단이다.
김기숙, 김다은, 김보배, 김서현, 김승빈, 김용희, 김원호, 김윤지, 김태훈, 김현우, 바아림, 박정효, 부영우, 서윤배, 송서월, 송승훈, 오혜란, 윤다미, 윤루, 윤상호, 윤채유, 윤초롬, 이건효, 이율, 이한, 이희석, 장대성, 정미라, 정아희, 정이서, 채두리, 하늘빛, 함정재, 홍수림(이상 가나다순).
시 부문 2차 예심은 1차 예심을 통과한 34명을 대상으로 1월 26일까지 진행하였는데, 심사 위원들 각자 5명 내외를 추천하여 11명을 선정했다. 아래는 2차 예심 통과자 명단이다.
김승빈, 김용희, 김윤지, 박정효, 윤채유, 장대성, 정아희, 정이서, 하늘빛, 함정재, 홍수림.
이상 11명을 대상으로 2월 2일 최종심을 진행하였으며, 장대성의 「아스마르」 등 10편을 신인상의 당선작으로 결정하였다.
평론 부문의 심사는 2월 2일 시 부문 최종심과 함께 진행하였는데, 아쉽게도 당선작을 뽑지 못했다.
아래는 부문별 심사 위원 명단이다.
시 부문 심사 위원 김건영 송현지 이찬 이현승 장석원 정우신.
평론 부문 심사 위원 송현지 이찬.
심사 총평
올해로 네 번째를 맞는 신인상, 응모작이 예년보다 늘었다. 여전히 시를 쓰고 싶어 하는 자발적인 목소리들이 많았고, 이는 그만큼 시가 필요하고, 시가 할 일이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 오래된 시형에 기대거나 감상적인 수준을 벗어나지 못한 시들도 상당했다. 아직 시에 본격적으로 입문하지 못한 분들이며 기성의 시단에 대한 불신을 가지고 있는 분들도 있을 것이다. 올해 응모된 원고들을 이슈의 측면에서 다양하게 검토해 볼 수 있겠으나 코로나19의 여파가 느껴졌던 작년처럼 팬데믹이나 사회적 참사 같은 두드러진 이슈가 보이지 않은 것이 특기할 만한 지점이었다. 눈에 띄는 이슈가 사라졌다는 것이 어쩌면 최근 우리 시단 전체가 가지는 문제점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분명 소재도 감성도 더 다원화되었는데 왜 시단이 더 비좁아졌다고 느껴지는 것일까? 비단 신인상 심사의 문제와 떨어져서 다시 숙고할 만한 문제라고 생각한다. 시의 소재나 목소리가 다원화되었지만 주도적인 이슈가 보이지 않는 것이 차라리 지체(기성의 문인들이 새로운 감성을 따라가지 못하는)의 문제라면 그리 놀랄 일이 아니지만 반대로 현실에서 어떤 숨 막히는 문제가 커져 가고 있는데 이것을 주도적으로 의제화하고 돌파할 수 있는 출구를 찾지 못하고 있다면 이것은 우리 시단 전체가 한 번쯤 심각하게 고민할 문제일 것이다. 혐오의 정치와 사회적 대참사의 시대, 입이 틀어막히는 권력의 횡포 속에서 너무 오래 유지되고 있는 분노가 앞으로도 유지될 것 같다는 유의 정치적 무기력과 피로로 가라앉아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문예 진흥 정책의 축소나 문화 소비의 주류 플랫폼의 변동에 따른 사양화, 세대 변화와 감성의 변화, 문단의 폐쇄성 등 우리 시와 문학에 부여된 여러 문제들 앞에서 느리지만 또 하나씩 풀어 가야 할 문제들일 것이다. 이러한 문제들과 함께 눈길을 끌었던 작은 것은 심사를 하는 원고들 속에 ‘빛’의 이미지가 많이 등장하는 것도 특기할 만했다.
전체적으로 보아 응모된 원고들은 크게 세 그룹으로 나누어 볼 수 있었다. 암중모색의 초심자들이 있었고, 이미 자신의 목소리가 일정한 시적 형식을 얻은 분들이 있었으며, 막 피어나기 시작한 신예가 있었다.
신인상에 응모된 원고들에는 여전히 시는 읽지 않지만 시를 쓰고 싶은 충동에 못 이긴 원고들이 상당하다. 시의 자생성이랄까 자발적 충동이랄까 이런 것을 생각하게 한다. 그러나 더 잘 말하고, 더 정교하게 쓰기 위해서는 잘 읽고, 잘 들어야 한다. 따라서 응모하셨던 많은 분들이 당선자의 원고나 심사평을 먼저 읽어 주시기를 바란다. 나보다 못한데 왜 뽑았을지, 이 정도면 나는 백 편도 쓸 수 있을 것 같다는 불평들을 함께 쏟으면서 읽어도 좋다. 부탁 말씀대로 몇 번을 읽어도 여전히 수긍이 안 간다면 거기에 또 좋은 씨앗이 하나 자라고 있다고 믿어도 좋을 것이다. 참 좋은 신인을 뽑았다고 생각된다면 낙선자로서는 당선이 멀지 않았다는 뜻으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다들 겪어 온 일들이다. 모두가 입버릇처럼 말하지만, 시나 문학에 정답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 형식이 갖추어진 말은 어떤 필연적인 구조를 동반한다. 완성된 시는 아주 분명한 발견과 자기주장을 갖는다. 그래서 이렇게 읽어도 되고 또 어떻게 읽어도 되지만, 어느 쪽으로 읽든 분명하고 확실하다. 그러한 확실성은 아마도 충분한 읽기를 통해서 수련되는 것일 터이다. 따라서 여러 차례 말씀드리지만 못마땅하고 화가 나서든, 적극적으로 공감하고 지지하는 마음에서든 눈앞의 원고를 꼼꼼히 읽고 거기에서 일종의 질문을 꺼내는 연습을 게을리하지 마시라고 권한다.
다른 그룹의 원고들은 시 쓰기가 일정한 자기 개성의 단계에 도달한 작품들이었다. 소품형의 작품에서 가벼운 여행이나 일상의 경험을 아이러니컬한 배음으로 결합하는 서정시들. 응모된 작품을 읽으면서 이상하게도 원고가 꽤 많을 것 같다는 느낌을 주는 분들이 있었다. 최선의 경우라면 시 쓰기의 일신을 통해서 오래된 원고들은 혁신될 필요가 있겠지만, 몇몇 분들의 원고는 시집 투고 같은 것을 생각해 보면 좋겠다 싶었다. 시집을 꾸리는 작업을 통해서 자기 시를 객관화해 보는 것도 자기를 일신하는 시 쓰기의 한 방법이다. 다작과 시집의 출간을 노리는 방법이 아니더라도 대기만성의 시들이 이 원고의 묶음 속에서 자라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세 번째 묶음의 원고들은 대체로 3차의 심사 최종심에 올라와 있었다. 이분들은 신인에게 첫 번째로 요구되는 개성이 충분하고, 다음으로 그 개성을 떠받치는 최소한의 언어적 수련이 일정 정도 도달해 있었다. 이번 계간 파란 신인상 최종심에는 총 열한 분의 신인이 이름을 내밀었고, 그중에 넓은 지지를 등에 업고 마지막까지 결정을 다투었던 분들은 김승빈, 김용희, 박정효, 장대성, 정아희, 홍수림 이상 여섯 분이었다(이상 가나다순). 물론 어느 최종심 심사의 원고도 비슷하겠지만 가려 놓은 원고들 속에서는 계간 파란이 무엇보다 개성적이고 자유분방한 목소리에 많은 지지를 보내고 있으며, 그러한 개성을 더욱 사회적인 방향으로 개방하는 작품들을 응원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신인의 개성이란 어쩌면 당연하게도 기성의 세계에 대한 응전과 저항의 목소리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니 그 개성이 조금은 더 일관된 목소리로 정련될 필요가 있다.
「갠지스강」 등 10편의 김승빈의 시는 “식성과 이성”의 유비 위를 미끄러지면서 활강한다. 식민성과 조난과 악천후와 선악의 오류에 낭만과 폭력의 주석을 붙이는 그의 목소리는 패기로 가득하다. 하지만 더 정교해지는 데는 시간이 조금 더 필요해 보였다. 「달방의 자몽」 등 10편의 박정효는 가족 알레고리를 모형으로 일상의 상처와 폭력을 여러 몽상으로 펼쳐 보인다. 형은 물에 잠기는 반지하 달방에서 계속 아랑곳하지 않고 자몽을 씻는 모습으로 나타나고(「달방의 자몽」) 남동생의 죽음이 얼비치는 시 「아무개 이야기」에서는 화자의 가족이 “철장에서 나고 철장에서 지는” 개의 모습으로 제시된다. 개미가 죽은 참새의 눈알을 물고 가는 이미지가 선명한 「자작나무숲」, 그 밖의 작품에서도 훼손된 신체 이미지가 일상에 만연한 폭력의 이미지와 그로테스크하게 뒤섞인다. 이런 기괴한 이미지들은 만연한 폭력과 공포, 이로 인한 억압에 대한 적극적 응전으로서 환영할 만한 것이겠지만 더욱 깊은 매혹을 위해서는 흔히 ‘힘을 좀 빼라’는 조언이 필요해 보였다. 「괜찮아, 당신의 개그가 지구를 지켜 줄 거야」 등 10편의 정아희의 시들은 톡톡 튀는 서사의 재치로 무장된 작품들이었다. 단 한순간의 지루함도 견딜 수 없다는 듯이 다국적 인물들의 전사와 내세를 종횡무진 넘나드는 이 은하수 히치하이커 서사에는 그러나 태풍의 눈처럼 조금 더 위협적인 구심점이 필요해 보인다. 「로라」 등 10편의 홍수림의 원고도 활달한 상상과 재치 아래에 현실의 난폭성과 비극을 절제된 목소리로 배치하는 재능을 가지고 있다. 특별히 안타까운 상실의 자리를 메꾸는 텅 빔의 이미지를 다채로운 빛의 이미지로 변주하는 장면들이 눈길을 끌었다. 아직은 만개했다고 보기 어려웠다. 더 성장할 여지가 많아 보였다.
「아스마라」 등 10편의 장대성을 신인상 당선자로 뽑은 심사 위원들에게 가장 많은 미련을 안긴 분은 「잔상」 등 10편의 김용희였다. 김용희의 원고는 활달하고 리드미컬한 언어가 압도적이었다. 여름밤 잠에서 깨어나 붙잡은 잔상으로부터 찰나처럼 아름답고 다정한 꿈의 입구를 발견하는 「잔상」이나 빈대가 들끓는다는 뉴스로부터 도시와 회사와 밤을 곤충의 모티프로 통합해 가는 상상력을 보여 주는 「충」은 활달하고 유연했다. 최저시급에 격주 토요일에도 근무해야 하는 선박 부품 제작 업체(광명기업)가 내놓은 외국인 노동자 구인 광고를 환한 아이러니의 언어로 균열시키는 「<구인> 광명기업」, “만약/기차를 타지 않았다면” “이 가정은 없었겠지”라며 가정(假定)과 가정(家庭)을 유쾌하게 횡단하는 「가정」에서 보듯 김용희의 시들은 개인의 내면 깊숙한 심미적 세계에서부터 사회와 노동의 현장에 이르기까지 그의 활달한 아이러니와 리드미컬한 언어의 성찬을 보여 주었다. 묶음 원고의 후반부에 놓인 시편들에서 조금 힘이 빠졌는데, 이 원고들의 감상성이 극복된다면 김용희의 시재 또한 지금의 시단에 반드시 필요한 것임을 의심할 나위가 없었다.
‘시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의 답변은 ‘시를 어떻게 써야 하는가’라는 답변을 포함한다는 분명한 예시가 장대성의 시에는 있었다. 장대성의 시들은 마음의 보폭과 시선의 보폭이 비슷해 보였다. 그만큼 시선의 언어가 섬세하고 기민하다. 그의 원고들은 목숨을 걸고 국경을 넘을 때나, 나고 자란 고향 마을에서나, 가족이나 친구, 연인과의 거처에서나, 심지어는 게임 속 공간에서조차 일정한 생각의 보폭을 유지하고 있다. 그만큼 갈고 닦았다고 생각된다. 편편의 작품에서 서술들은 개성적이면서도 전체를 아우르는 일관성이 충분하다. 예측 가능한 지점에서 예측 가능하지 않은 보폭으로 나아가지만 조금도 억지스럽거나 무리하지 않는다. 발상과 진행이 낯설지만 또한 흥미를 잃지 않는다. 신인다운 신인의 등장이다. 이러한 점들이 시작부터 끝까지 이 신인을 쳐다보게 만드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고 할 것이다. 최종심에서 맨 처음 언급된 작품도 장대성의 것이었고 마지막 언급된 작품도 장대성의 것이었다.
경험과 인식 사이에는 시차가 있고, 다시 그 인식과 표현 사이에도 시차가 있다고 할 때, 뛰어난 자질을 가진 시인은 경험의 내용을 인식이라는 해석적 판단 이전에 언어화하는 기민한 자기만 방법이 있다. “보고 싶어를/마지막 장이 찢어진 책을 샀다고 한다거나/날이 정말 맑다를/세상에 그림자가 참 많다고 말한 게 그것입니다//양파에게 좋아하는 시의 구절을 읽어 줬더니/멍이 들며 썩어 버린 건 비밀이에요//이처럼 말에는 슬픔이 깃들어 있습니다”에서 보듯 이 신인은 서두르지 않고 경험을 그 자체로 보는 훈련이 되어 있었다. “나는 내가 숨긴 마음이다/나는 내가 훔친 물건이야”라고(「복원」) 말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을 가장 섬세하고 예민하게 바라보는 사람일 것이다. 「메아리」 같은 작품에서 묘사되는 가족의 유니크함, 아니 가족에 대한 유니크한 묘사(“양말을 뚫고 나온 엄지발가락으로 대문을 밀고 가는 사람의 뒷모습”이나 “밤새 곰 인형의 눈을 붙이는 사람의 동공은 실핏줄로 붉게 물들었고”)는 이 신인이 지극히 익숙한 대상을 바라볼 때에도 그 익숙함에 눌리지 않도록 말을 고유하게 벼리는 사람이라는 믿음을 주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주걱에 붙은 밥알을 떼어 입에 넣는다/딱딱하구나 과거라는 건”이라고(「복원」) 이어 붙일 때의 엉뚱하고 유머러스한 보폭에도 넉넉한 깊이가 도사린다. 반려동물이든 피붙이든, 가족의 죽음 이미지가 어른거리는 「청진」이라는 작품에서 슬픔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너’를 어쩌지 못하는 화자가 “너의 생활 방식이 이해되지 않는다”고 쓰지만 그것이 타박이 아니라 속 깊은 걱정과 연민이라는 것을 재확인하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는다. “죽으라는 말보다 죽이라는 말이 더 죽음에 가까운 것이라면/죽을 한 숟갈 떠 입에 욱여넣고 다 돌아간 빨래를 건조대에 널어 둔 뒤에/아깐 말이 심했지 그래도 아침에는 함께 커튼을 열자 우리의 생활에서 우리를 잃지 말자/말하는 일이 사는 거면 좋겠다”에서(「청진」) 보이는 삶의 자세도 미덥다. 같은 죽음일지 모르겠지만, 시 「로그인」에서도 게임 속 공간에서 ‘너’에게 전해 들은 말은 날카롭게 읽는 사람의 폐부를 찌른다. “그쯤 너는 비밀을 털어놓았는데/바깥세상에서 구 년간 개를 길렀고, 이불 속에서 코를 골며 자는 개가 사람처럼 느껴진 적이 있고, 그 개는/사람은 걸리지 않는 심장사상충과 싸우다 죽었다는 일화//개의 눈물 자국을 지워 주다가/슬픔이 무엇인지 깨닫던 날에 대하여”와 같은 구절에서 엿보이는 슬픔의 깊이도 넉넉하다.
‘내’게 친절하지도 않고, 환대하지도 않는 세상에서 한 줌의 응답을 기다리는 오늘날의 청춘의 모습이 담긴 「힘이 닿는 한 좋은 마음」에서도 “죽으란 법 없다는 말이/더는 장난처럼 들리지 않을 때//어둠을 밀어내고 방에 들어서는 햇빛/창가에서 좋은 하루를 다짐할 때/몸에 깃든 어둠이 빠져나가며/바닥에 그림자가 만들어지는 것 같고//어떻게 지내냐고 가족에게 온 연락은/조금만 더 나중에 답하기로 합니다”와 같이 힘겨움과 그것을 견디고 살아 내려는 의지의 비등함이 그 경험에 한껏 생기를 부여한다. 응모된 작품들이 모두 진지하고 유연하며 감각적이다. 시업을 오래 밀고 나갈 재목이라 생각한다. 축하의 인사를 거듭 건넨다. (이현승 시인)
시 부문 심사 소감
올해로 벌써 네 번째의 신인상 심사를 진행하게 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익숙해지지 않는 상황 앞에 놓여서 원고를 마주하게 된다. 최선을 다해 자신의 세계를 언어로 구현해 내려는 노력이 가득한 원고들 앞에서, 언제까지 이 귀한 일을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오래 했다. 응모자들의 원고에 대한 고민과 함께 스스로의 시적 방향성에 대해서도 깊게 고민하게 된다. 과연 시를 왜 쓰는 것일까. 습작 시절에 랭보와 베를렌의 이야기를 어디선가 읽고 충격을 받은 기억이 있다. “당신은 시를 어떻게 쓰는지 알지만, 나는 시를 왜 쓰는지 안다.”라는 랭보의 말이었다. 출처가 어디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그 말이 좋았다. ‘어떻게’보다 ‘왜’가 더 중요한 순간이 있는 것이다. 그러다 보면 ‘왜’가 ‘어떻게’를 추동하기도 한다고 믿는다.
최근 몇 년간 습작 원고들을 살펴보며 크게 느낀 점 중 하나는, 기술적 측면의 완성도가 높은 원고들이 많았다는 점일 것이다. 유려하고 실험적인 언어를 사용하여 요즘 유행하는 스타일의 시인을 닮은 원고가 많았다. 매 심사 소감마다 하는 이야기이지만, 이런 원고들 앞에서 등단 후에는 무얼 하고 싶은 것일까를 묻고 싶어졌다. 언어예술이 아무리 주관적인 예술 양식이라고 하더라도, 아니 예술은 모두 주관적인 감상에 의존해야 하기 때문에 이 불완전한 신인상 제도를 운영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결국 이 제도가 원하는 것은 개성 있고 밀도 있는 시편 열 편이 아니다. 열 편의 시편을 통해 한 새로운 세계관을 가진 시인을 정식으로 호출하려는 의도가 신인상 제도의 목적이다.
물론 모든 예술가가 새로운 것을 추구해야 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뻔한 것들로, 익숙한 것들로 잘 만든 작품이 더 사랑받는 경우도 많기 때문이다. 독자들에게 사랑받는다는 것이 문학적 성취와는 별개인 경우도 많다. 그리고 많은 이들에게 사랑받는 작품의 탄생 배경에는 수많은 실험과 예술적 영역에 대한 확장 시도가 있다. 다양성은 풍요를 불러온다. 최근 문학계의 흐름과는 반대라고 생각한다. 비슷한 언어 운용과 모호하고 풀어진 언어들에 대한 찬사로 가득 찬 잡지를 보면서 한동안은 내가 잘못된 것은 아닐까 하면서 많은 고민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천천히 동료들, 뜻이 맞는 선배 후배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내가 완전히 틀리지는 않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물론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나도 그 비슷한 언어들과 모호성에 기댄 풀어진 언어로 시를 쓰고 있는 일단의 세대에 같이 넣어도 무방하다고 생각한다. 자기 갱신 의지의 부족함, 비슷한 작법으로 시를 양산하는 시인이라고 혹자는 나를 평가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러면 어떠하리.
우리는 이미 서열화에 익숙한 세계에서 오래 안온하게 살았다. 대학 서열화에 대기업 중심의 사회. 문학계는 뭐가 다를까. 등단자를 많이 배출한 학교를 따지는 학생들이 있다. 유명 출판사 출신의 등단자와 혹은 등단 지면이 약하더라도 유명 출판사에서 시집을 낸 시인들이 더 우대를 받는다. 시인들도 그렇지 않은가. 유명 문예지에 더 좋은 작품을 내려고 하는 것은 당연하다. 이미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시집을 성공적으로 내 온 출판사들의 권위는 도전받지 않는다. 입에서 입으로, 눈 밝은 독자들이 아껴 읽어서 주목받게 된 시집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유명한 것으로 유명하다(Famous for being famous)’라는 말이 있다. 시인의 아우라는 저것에 기대야 하는 것인가? 이미 땅에 떨어진 지 오래지만, 이 흙 묻은 아우라를 다시 쓴 자들이 있다. 어쩌면 그렇게도 정성스러운지 모르겠다. 시로 일등 해서 일등 출판사에서 일등 판매 부수를 기록하면 진짜 시인이 되는 것일까? 어떻게 쓰면 그렇게 될 수 있는 것일까.
동시대의 젊은 시인들을 반성이나 육화를 거치지 않고 무조건 따른 원고들이 많다는 사실은, 사실 응모자의 잘못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도전받지 않는 권위가 지속된 문학계가 받은 성적표 같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국적인 공간이나 사람의 이름을 호명하면서 감각을 구축하는 경우가 눈에 많이 띄었다. 동시대의 젊은 시인들이 이미 많이 하고 있는 창작 방식인 데다, 그것이 새로운 효과를 불러오지 못하는 공허한 호명인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모호한 풍경을 제시하고 그 안에서 망설이는 화자를 통해 정서와 감정적 내면을 보여 주고자 하는 경우, 이제는 시인 개인의 감각을 구체적 풍경이나 소소한 정황 안에서 섬세하게 다룬 수많은 시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기계적으로 답습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당연한 의문이 들 수밖에 없다. 이국적인 것은 반드시 좋은가?
카페에 앉아서 소소하게 친구와 마음을 나누느라 저 바깥에 세계가 무너지고 있는 것을 외면하는 것은 과연 아름다운 일인가. 물론 이 고통스러운 현실 안에서의 도피에 대한 감각일 것이라고 읽어 줄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을 우리는 이미 너무 많이 지독하게도 읽고 있다. 당연히 세상은 지옥이다. 그러나 우리는 언제까지 저 지옥을 차단하고 마음 안에서 편히 놀 수 있을 것인가.
이 실패들 또한 응모자들의 한 유려한 궤적일 것이라고 믿는다. 흐름은 또 금세 바뀌기도 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흐름을 타고 그대로 흘러가는 것보다는,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할 실력이 있는 많은 응모자가 조금만 더 나아갈 것을 믿는다. 흐름의 맨 앞에서 나아가기를.
각자의 사유로, 어쩌면 시인 개인만의 유일한 방식으로 나아가려고 시도하는 원고들도 많았다. 새롭다는 것은 기존의 것과 완전히 다르다는 말이 아닐 것이다. 대부분의 기괴하고 낯선 것은 새롭다. 새롭기만 한 것이 모두 좋을 수 없는 이유이다. 시인이자 인간 안에서 자신만이 본 풍경을 언어의 추상성을 극복하고 그려 내려는 시도를 하는 일 자체가 바로 새로운 감각을 탄생시킨다.
박정효는 생경한 풍경을 섬세하게 포착하는 솜씨가 무척 기꺼웠다. 단문과 장문을 잘 운용하면서, 리듬감을 잃지 않는 부분도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다만 아쉬운 것은 작품의 편차가 크다는 것이었다. 특정 시인의 소재와 진행 방식을 너무 빼닮은 시가 눈에 띄었고, 분량적으로도, 내용상으로도 모자라는 시가 섞여 있어 아쉬움을 남겼다.
홍수림의 원고는 경쾌함과 우울한 감각이 뒤섞인 문장들이 눈길을 사로잡았다. 참신한 소재를 앞세운 시들은 성공적이었지만, 일상적이거나 개인의 내면을 이야기하는 경우에는 부족함이 느껴졌다. 섣부른 감정적 진술을 중심으로 시를 이끌어 가느라 감정을 스스로 발설해 버리면서 긴장감을 떨어뜨리는 실수가 잦아서 아쉬웠다. 이것이 작품들의 편차를 느끼게 하는 큰 단점이었다.
정아희의 원고는 어디로 튈지 모르는 도무지 말이 안 되는 정황들이 이어지는 장면이 매력적인 시편들이 좋았다. 여러 장르의 혼합이 즐거움을 유발했으나, 그 즐거움의 끝에서 펼쳐 놓은 이야기를 수습하느라 급급하다는 인상을 받았다. 여러 형식을 차용한 시편들이 모두 그 소재에 잘 맞는지도 의문이었다. 형식과 내용이 따로 논다면 굳이 형식의 독특함에 집착할 이유가 있을지 궁금했다. 더하여, 연갈이에서 한 행을 띄운 경우와 두 행을 띄운 경우, 거기에 굳이 3행까지 띄운 것을 구분했는데, 그것이 좋은 효과를 발휘했는지도 묻고 싶었다.
개인적으로 최종 선택 앞에서 오래 고민한 원고는 김용희와 장대성의 원고였다. 김용희의 원고는 일상 안에 내재한 여러 감각들을 차분한 언어로 구현하는 솜씨가 뛰어났다. 노동자의 신분인 화자가 가만히 들려주는 현실의 날카로움은 차분한 어조와 상반되면서도 무척이나 잘 어울려 마음을 저미는 구석이 있었다.
장대성은 균형이 매우 잘 잡힌 시편들로 이루어진 원고가 매력적이었다. 소재적 측면이나 시의 형식적인 행갈이나 연갈이까지도 섬세하게 각 시편에 맞는 방식으로 펼쳐 낸 것이 신뢰를 주었다. 높은 안정성 대신에 감각적이거나 파괴적인 순간이 부족하여 조금 아쉬운 감이 없지 않아 있었지만, 앞으로 나아갈 작품 활동에서 그러한 부분은 충분히 보여 줄 역량이 있다는 판단을 하였다. 두 원고 모두 충분히 아름다웠지만, 많은 고민 끝에 장대성을 올해의 당선자로 선택하였다. 시인의 언어가 더 멀리 나아가기를 바란다.
비록 최종까지는 오르지 못했지만 예심에서 무척이나 즐겁게 읽은 원고들도 있다.
정미라의 원고는 서정적인 언어와 지금은 잘 쓰지 않는 영탄법과 돈호법이 기묘하게도 낡은 감각보다는 새로운 감각을 전해 주는 신선함이 좋았다. 자칫 잘못하면 촌스러울 수 있는 언어들이었지만, 다양한 사물과 생물들, 오감이 가득한 명사들을 통해 시 자체가 가지는 감각의 환기에 충실하여 눈에 띄었다. 다만 소재가 다양하지 못한 것이 큰 약점이었으며, 동시대 시인들이 어떤 시를 쓰고 지금은 어떤 시가 읽히는지 읽고 체득할 필요가 있다고 느꼈다.
오혜란의 원고는 일상적이며 가볍고 적확한 문장으로 시적 세계를 탄탄히 구축해 내는 솜씨가 매력적이었다. 다만 잘 구축된 정황들 사이에서 직접적으로 감정을 표현하는 추상어들이 시편들의 긴장감을 매우 떨어뜨려서 아쉬웠다.
바아림은 독특한 정황과 언어 선택이 매력적이었다. 다만 드문드문 완성되지 않은 문장들이 운율을 살리기보다 정황을 모호하게 만들고 문장이 단정하지 못하다는 인상을 주는 데에 더 많은 기여를 한 인상을 주었다. 몇몇 문장들은 기본적인 조사 사용도 틀린 것이 무척 아쉬웠다. 특별한 이유나 커다란 효과가 없다면 대부분은 바른 문장으로 쓰는 것이 옳을 것이다. 본인이 감각적인 문장과 좋지 않은 문장을 아직 완전히 구분하지 못하는 것으로 보인다. 더 깊은 고민과, 많은 독서를 통해 본인의 장점을 잃지 않으면서 더 나아가기를 바란다.
수많은 아름다운 문장들이 있었지만, 모두 마음을 전할 수 없는 현실이 무척 서글프다는 생각을 한다. 그러나 이름이 불리는 것은 기쁜 일이면서도 매우 무거운 일이라는 것을 나 역시 등단 제도를 통해 겪었다. 누군가는 재빨리 손을 털 것이다(좋은 일이다). 그리고 누군가는 화가 날 것이다(이 또한 좋은 일이다). 분노를 통해서도 타인을 괴롭히지 않고, 나를 채찍질할 수도 있는 것이다(좋은 일인지는 모르겠다). 내부에서 보는 풍경과 외부에서 보는 풍경은 다르다. 위치가 풍경을 결정한다. 문학은 완전히 망하지 않을 것이지만, 영영 망해 갈 것이다. 무언가에 취한 자들은 자주 막차를 탄다. 제도가 있는 곳에는 매일 막차가 다닌다. (김건영 시인)
신인 시인을 선정하는 일, 특히 계간지에서 새로운 시인을 뽑는 일이란 어떤 것일까. 다시 읽어 보고 싶은 시와 그렇지 않은 시를 분류하고, 읽으면 읽을수록 새롭게 다가오는 시와 점차 납작해지는 시를 분류하는 일, 그리하여 궁극적으로는 잡지의 정체성을 새로이 조각할 수 있는 목소리를 내어놓는 일. 외부에 있었을 때 나는 문예지의 신인 심사란 그런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파란’의 일원으로 처음 심사에 참여하며 적어도 계간 파란에서는 선택에 앞서 포용하는 작업이 최우선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결과적으로는 약 200분의 응모자 중 한 분을 선택하는 것으로 귀결되었지만 그 과정만큼은 시를 향해 내뱉는 어떠한 목소리도 모두 끌어안는 과정으로 여겨졌다는 말이다. 응모된 약 2,000편의 작품을 심사 위원들은 모두 함께 읽으며 우선은 각자가 저 목소리들을 다 감당하려 했다. 이는 단지 서로의 심사 결과를 보완한다는 의미만이 아니라 지금껏 듣지 못했던 목소리들을 각자가 모두 듣는 시간을 마련함으로써 한정된 자신의 시적 영역을 넓히는 기회를 갖는 것이기도 했기에 우리는 저마다 조금씩 넓어진 품으로 ‘좋은 시’에 대한 생각들을 새로이 공유할 수 있었다. 그 결과 다섯 분의 작품을 한자리에 모았다.
김승빈은 이미지들을 겹쳐 제시하는 특장을 가지고 있는 응모자였다. 제출된 「갠지스강」 외 아홉 편은 거듭 읽히게 하는 힘이 있었고 읽을 때마다 다른 장면들을 상상하게 했다. 그의 원고에서 내가 가장 인상적으로 읽었던 작품은 「베이스캠프」였다. “캠프 밖 말뚝에 묶인 좁교”에 대한 생생한 묘사와 “울음과 등/울음 또는 등/울음 아래 등”과 같이 감각의 움직임을 세심하게 따라가며 쓴 문장들은 그의 시에 온전히 몰입하게 했다. 또한 각 시편들마다 사용되는 기법과 상상의 방향이 다양하여 원고를 넘길 때마다 계속 그다음 작품이 기대되기도 했다. 다만 몇몇 작품의 경우, 미래파 시를 읽었을 때의 기시감이 느껴진다는 평들이 오갔고 특히 원고의 제일 처음에 묶은 「갠지스강」의 장소성이 전형적이라는 점에서 다음을 기약하게 되었다. 조금 더 자신만의 장소를 찾는 시간을 갖길 당부드린다.
홍수림은 어떠한 언어를 사용해야 독자를 낯선 시・공간으로 데려갈 수 있는가를 분명히 알고 있는 응모자였다. 「로라」 외 아홉 편에서 그의 좋은 시들은 동화적 이미지를 철학적 사유와 연결시킨다. 그럴 때 시의 겉은 유연하고 부드럽지만 그 안에는 쉽게 부서지지 않는 단단한 사유가 버티고 있었다. 하지만 「싸구려 행운」을 포함하여 원고 뒤편에 배치된 시들은 상대적으로 문장의 유려함만이 강조된 인상이었으며 분명 아름다운 문장들로 이루어져 있음에도 읽고 난 뒤에 별로 남아 있는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 응모작 대부분의 문체와 분위기가 비슷하여 어느 한 작품이 오랜 여운을 남기지 못했다는 점이 그의 시를 당선작으로 뽑는 것을 망설이게 한 결정적 이유였다. 이는 최근 시에서 자주 보이는 문형들, 예를 들어 “생각이 든다. 생각이 듭니다. 생각이 들었나요?” “나는 그걸 안다. 압니다”(「심장보다 낮은 곳으로」), “잊힌다. 잊히고 있다”(「우리는 무엇이 되어 버린 사람」) 등을 그가 자주 사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그러했다. 문형에서부터 조금 더 다양한 시도를 해 볼 것을 권하고 싶다.
심사 과정에서 가장 여러 번 읽었던 원고는 박정효, 김용희, 장대성의 것이었다. 심사장에서의 대화는 김용희와 장대성의 시를 중심으로 이어졌지만 정작 나는 박정효의 「달방의 자몽」 외 아홉 편을 쉽게 놓지 못했다. 서로 어울리지 않는 이미지들을 배치하여 낯선 장면을 연출하는 탁월한 능력이 돋보였기 때문이다. 특히 「달방의 자몽」 은 한번 읽어 본 사람이라면 쉽게 잊지 못할 만큼 강렬한 경험을 하게 만드는 작품이다. 그래서 그의 상상 세계에 오래 머물고 싶었다. 하지만 「자작나무숲」 등 다른 작품의 경우, 강렬한 한 장면을 제시한 후 그 주변을 묘사하는 비슷한 방식의 구조가 반복되어 「달방의 자몽」과 같은 긴장이 없다는 것이 아쉬웠다. 작품마다 편차가 컸고 특히 뒤에 배치된 작품들에 불필요한 서술들이 있다는 점 역시 그의 작품을 선정하지 못한 주요 이유 중 하나다. 왜 이 문장이 필요한지, 왜 이 이야기를 장시의 형식으로 써야 하는지를 스스로가 납득할 수 있을 만큼 더 골몰하는 시간이 있었으면 좋겠다. 이러한 시간을 충분히 갖는다면 곧 지면에서 만날 수 있으리라 믿는다.
반면, 김용희는 가장 고르고 안정된 10편의 작품을 보내온 응모자였다. 기성작가와 견주어 보더라도 크게 빠지지 않을 정도로 능수능란하게 말을 사용하는 그의 좋은 시들은 하나같이 현실과 시가 밀착되어 있다는 특징이 있다. 그러나 그것만이 전부는 아니다. 가령, 「충」은 도시에 빈대가 출몰한 사회적 이슈에서 시작하되 현실을 다루는 데 그치지 않고 아주 작은 연결 지점을 통해 새로운 시공간을 접합함으로써 재미를 준다. 하지만 김용희의 시를 당선작으로 선정하는 데 오래 망설였던 이유는 현실과 밀착되지 않은 시들의 경우 시의 매력이 급감한다는 점 때문이었다. 이미 그가 시 쓰기에 숙련이 되어 있다는 점에서 이는 그의 시 세계가 이미 고정된 것은 아닌지 의구심을 갖게 했고, 신인을 고르는 이 자리에서는 시의 안정감을 떠나 새롭고 다양한 시를 쓸 가능성이 있는 응모자를 선택하는 것이 옳다는 데 마음이 기울었다. 시의 넓지 않은 보폭이 기-승-전-결이라는 틀을 시에 고수하려는 데에서 발생한 문제는 아닌지 생각해 보기를 권하고 싶다. 또 하나 짚어 두고 싶은 것은 시의 핍진성이 단어 하나, 시적 설정 하나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예컨대, ‘안녕하세요’를 뜻하는 몽골어와 ‘양고기’라는 소재를 사용했다고 해서 독자를 몽골로 데려갈 수 없으며(「새응배노」), 화자가 법의학자라는 설정을 살리기 위해서는 조금 더 자료 조사가 필요하다(「법의학자 K의 하루」). 독자들이 이미 알고 있는 정보와 사유를 재확인하는 것 말고 새로운 감각을 자극시키고 사유를 심화하게 할 수 있는 다른 통로를 고민해 보면 좋겠다.
「아스마라」 등 10편을 제출한 장대성은 앞선 네 응모자들의 장점을 골고루 갖추고 있었다. 작품들 간의 편차가 크지 않았고 각각의 시편들이 서로 다른 상상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에서 안정감과 가능성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보기 드문 신인이라는 생각을 했다. 상대적으로 완성도가 떨어지는 작품이더라도 이야기적 상상력이나 무심히 던지는 문장들이 그 빈틈을 메워서 묘한 균형을 이루고 있기도 했다. 특히 내가 그의 시에서 눈여겨보았던 점은 시에 다뤄지는 장소들의 매력과 읽는 이를 그러한 장소로 곧장 데려다주는 기술이었다. 물론 이것은 「아스마라」와 같은 시에서처럼 그가 다루는 장소가 단지 동아프리카라는 이국적 도시이기 때문이 아니라 정교하게 계산하여 구축된 서술들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라 더욱 믿음이 갔다. 이외에도 「밤이 오겠지」와 같은 시는 그가 사물에 힘을 부여하는 능력이 있음을 실감하게 하기도 했다. 결국 우리는 장대성의 사유와 매혹적인 문장들을 오래 보고 싶다는 결론을 내렸다. 당선자에게는 축하와 아쉽게 당선되지 못하신 분들에게는 응원의 마음을 전한다. (송현지 문학평론가)
이번 시 부문 심사 과정에서 당선을 염두에 두고 최종적으로 검토된 응모자는 김용희, 박정효, 장대성 세 분이었다. 김용희의 응모작들은 오랜 세월에서 길어 올린 ‘쉰내’ 나는 목소리를 깔고 있었으며, 이른바 ‘삶의 체험 현장’에서 오는 흠뻑 젖은 ‘도시의 피로’와 덕지덕지 쌓인 ‘먼지 같은 비애감’, “작업복을 벗고/나로 깨어나는/밤이 찾아옵니다”(「충」) 같은 혼곤한 이미지로 명치 끝을 찌르고 들어온다는 점에서 흔치 않은 신뢰감을 주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당선의 기쁨을 돌려 드릴 수 없었던 데서 김수영이 오래전 일갈했던 ‘우리만의 비애’ 같은 것을 느낀다. 이는 어쩌면 ‘신인상’이라는 제도 자체에 주름진 숙명적 한계요, 필연적 모순인지도 모르겠다. 나아가 우리 시대의 미학적 규범으로 자리한 특정 스타일의 대유행이 이 응모자의 등단을 더디게 하는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으로 잠시 머뭇거렸다.
특히 “꿈을 만나기 위해, 기억하기 위해선 얕은 잠이 필요합니다” “악몽인 줄 알았는데 길몽인 꿈도 있다는군요 해몽되지 않을 꿈들이 아직도 나에겐 무궁무진 자라납니다”(「잔상」), “악몽의 무대는 장소를 가리지 않지/앰블런스가 요란스레 질주하는 도로 곁/인파 속에서 누가/악당이지 아직도 의문인 질문 앞에서/무덤덤한 심장이 뛰고/또 뛴다면”(「스릴러」), “화내는 고함, 체념한 듯한 음성을 듣지만 침묵 그것이 바로 죽음의 진실이라는 듯 온기를 잃어 가는 방식으로 마음을 잃고 굳어 가는 형식으로 작별 인사를 하는 이를 만나면 입안으로 씁쓸한 쇠 맛이 납니다”(「법의학자 K의 하루」) 같은 구절들을 보라. 이들은 “꿈”과 “현실”, “의문”과 “질문”, “침묵”과 “진실” 사이에서 끊임없이 떠도는 우리 생의 속절없는 비애감, 나날의 몸에 주름진 무수한 번뇌와 집착과 망상을 생생하게 소묘하면서도, 이를 둔중한 무게감으로 짓누르는 고단한 육체성의 촉감과 숨비 소리를 살아 꿈틀거리는 이미지로 번뜩이게 하면서, 시인의 빼어난 솜씨를 선명하게 예증하는 듯했다.
어쩌면 응모자 스스로가 ‘밀운불우(密雲不雨)’의 시간 속에 갇혀 있다는, ‘불우(不遇)’ 시절의 한탄과 신산한 절망의 메아리만을 품게 될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스치듯 지나갔다. 그러나 ‘기우기처(旣雨旣處)’ 혹은 ‘호우시절(好雨時節)’이 곧 도래하리라는 믿음을 가져도 충분하다는 후기를 돌려 드리고 싶다. 그리하여 시와 예술엔, 그 참된 수련의 길엔 ‘영원한 지금’이라는 현재진행형의 시간밖엔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는 ‘마음공부’의 길을 권해 드리고 싶다. ‘등단’이라는 공식 절차와 제도적 과정으로 회집(會集)된, 어떤 ‘사건’이 시와 예술에 깃든 ‘본래면목(本來面目)’의 자리를 가릴 순 없을 것이 자명하기 때문이다. 응모자의 “몸”에 얼룩진 저 무수한 심상(心象)의 협곡과 예술적 비늘들의 이행 과정을 밑바닥까지 신뢰하고, ‘온몸으로’ 그야말로 ‘온몸으로 밀고 나가’면서, ‘계속하시오’라는 한 철학자의 충실성 명제를 더더욱 힘껏 실행하길 당부드리고 싶다.
박정효의 응모작들은 ‘오직 시만이 할 수 있는 것’, 또는 우리 시대의 시가 놓치고 있는 강렬하면서도 진중한 체험의 요소들을 거죽 위로 끌어올리고 있다는 점에서, 몇몇 심사 위원들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그리고 당선작 후보로도 심각하게 거론되었다. 그러나 문제는 역시 응모작들의 고른 수준과 더불어, 다양한 모티프를 창조적인 필법으로 갈무리할 수 있는 예술적 사유의 풍요로움에 있었다. 뒷부분에 배치된 시편들에서 우리가 발견하게 된 것은, 작품의 전체적 차원과 부분적 형상들의 일관된 이미지 지력선을 이루지 못할뿐더러, 작품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원격감응’의 저릿한 공명 효과가 느껴지지 않는다는 사실에 있었다. 따라서 이미지 조각술이나 시적 구성과 행간 배치의 원근법에서도 그 예술적 정수를 제대로 터득하거나 충실하게 체화하지 못했다는 심사 위원들의 공통된 느낌과 견해가 곳곳에서 표출되었다. 이는 그만큼 후반부에 배열된 시편들이 당선작의 수준에 다다르지 못했다는 명확한 사실을 가리킨다.
응모자에게 좀 더 많은 시간과 공력을 들여 ‘붕우강습(朋友講習)’의 도를 터득하라고, 그리하여 저토록 절절한 체험의 내용과 어그러진 생의 모티프들을 어떤 예술적 방법과 인생론적 사유의 깊이로 마름질할 것인지를 ‘상우(尙友)’의 시간과 함께 공부하면서, 훨씬 더 깊은 형이상적 차원을 마주 볼 수 있는 ‘신독(愼獨)’의 시간, 그것을 숙고하라는 말을 전하고 싶다. 그럴 수만 있다면, 그야말로 경이로운 도약의 빛살이 도래하는 순간을 그 언젠간 마주치게 될 거라고, 그리고 이 현재진행형의 믿음을 끝까지 밀고 가라는 조언을 드리고 싶다.
박정효의 응모작들에서 소묘된 “어제도 내일도 비가 내린다 라디오에선 달방 사내의 부고가 흘러나오고/빗소리는 귓바퀴를 메어치는데 형은 마치 고여 있듯 빙빙/박제된 것 같아, 내 말에도 묵묵히 자몽을 씻고”(「달방의 자몽」), “어느덧 발바닥까지 기어 온 갈대/나는 오래 핥아요 알큰한 지린내 풍기며 입안에서 이리저리 굴리지요/젖이 돌려나 봐요 정수리가 저릿저릿하니/댕댕하게 부푸는 가슴 질펀하게 달아오르는 나의”(「아무개 이야기」), “삼촌은 양을 치는 사람 두 손으로 받은 핏덩이 수건으로 구석구석 말려 털옷 입히지요”(「밤의 고리」) 같은 이미지들을 보라. 이들은 숨 막힐 듯한 긴 가족사의 얼룩진 비늘들이나 비릿한 생의 모티프들은 그 자체로 전율 어린 실감을 선사한다. 나아가 최근 젊은 시인들에게서 거의 목도되지 않았던, 그야말로 산산이 부서지고 깨어진 삶의 진상들이 우리 심장을 직접 겨냥하고 날아드는 듯한 감응 효과의 강렬함을 내뿜는다고 느꼈다.
그러나 이와 같은 가족사의 에피소드를 벗어난 응모작들에선 저 마음의 기괴한 얼룩과 소름 돋는 전율이 긴장의 리듬을 타고 흐르기보다는, 다소 평범한 감각의 테두리에 갇힌 것만 같은 느낌을 주었다. 물론 가족사의 에피소드를 알레고리 기법으로 구성한 시편들에서도, 표제작 「달방의 자몽」을 제외한다면 불필요한 진술들과 범상한 묘사들이 장황하게 얽혀 있다는 어색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적어도 벤야민이 일러 준 ‘알레고리’ 표현 양식이 왜 처절한 신음과 산산이 부서진 체험의 조각들을 이지러진 거죽과 깨어진 짜임새로 드러내면서, ‘우리의 뒤통수를 후려갈길 수’밖에 없는지를 좀 더 깊이 성찰해 보고, 훨씬 더 기나긴 시간의 안목에서 ‘절차탁마(切磋琢磨)’의 오롯한 시간을 만들어 가길 당부드리고 싶다.
장대성의 응모작들은 모든 심사 위원들에게 지지를 받았다. 감탄을 표하는 목소리들도 간간이 들려왔다. 그를 당선자로 결정하는 데 사실상의 큰 이견은 없었다. 그만큼 당선자는 ‘세계의 개진과 대지의 은폐’, ‘시론과 시작’, ‘내용과 형식’ 사이에서 절묘한 균형감과 예술적 신비감을 휘감는 예술적 기교를 충실하게 터득하고 있는 듯 보였다. 당선을 축하한다는 말과 더불어, 계간 파란과 함께 나아갈 저 ‘뉴프런티어’의 길 위에서 “힘을 주면 빛이 새어 나올 것 같”은, 그 “핏줄에서 박동”을 느낄 수 있을(「청진」) ‘기운생동(氣韻生動)’의 세계, 그 역동적인 이미지 협주곡을 활발하게 펼쳐 주길 기대한다.
심사 과정에서 몇몇 위원들이 상찬했던 자리 역시 섬세한 이미지 조각술과 그 지력선의 명민한 짜임새에서 기원할 것이 틀림없으나, 당선자의 응모작들엔 ‘시가 태어나는 자리’, 그 원초적 터전 자체를 시적 차원으로 묵중하게 가라앉히기 위해 반드시 요청되는, “밤새 곰 인형의 눈을 붙이는 사람의 동공은 실핏줄로 붉게 물들었고”(「메아리」) 같은 핍진한 ‘몸의 세계, 세계의 몸’이 또한 충실하게 스며 있었다. 가령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는 내게 처음 보는 할머니가 다가와 나 일곱 살 때는, 말하며 앳된 웃음을 짓는다”(「아스마라」) “달이 지고 햇빛이 문턱을 오르는 동안/옆구리에 곰 인형 하나가 끼어들었다” “오래도록 나 혼자인 얼굴로//세수하고 거울 앞에서 명치를 꾹 누른다//아이 러브 유/아이 러브 유//넘쳐흐를 때까지”(「메아리」), “나는 내가 숨긴 마음이다/나는 내가 훔친 물건이야//드러내려고 하지 않는/굳이 찾을 필요가 없는”(「복원」), “지금도 누군가는 죽거나/몸의 밝은 부분이 어두워지고 있겠죠”(「힘이 닿는 한 좋은 마음」) 같은 형상들을 보라. 이들은 장대성이 왜 당선자의 영예로 빛날 수밖에 없는지를 묵시적 어법으로 명시할뿐더러, 그가 시인으로 거듭날 수밖에 없는 이유와 배경을 비교적 명징하게 예시한다.
물론 이 형상들에선 시와 예술의 본원적인 ‘불가능’의 자리, ‘풍크툼’의 다이내믹한 감염력이나 ‘활발발(活潑發)’ 이미지의 불붙는 파토스가 다소 희끄무레하고 가느다란 지력선으로 얼비치는 것 같은 느낌이 새어 나오기도 한다. 그러나 이는 시인 장대성의 예술적 비늘이 품은 고유한 세공의 밀도에서 오는 것이자, 시적 수련 과정의 첨예한 충실성을 반증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아니, 이 시인의 예술적 특이점으로 여러 사람에게 회자(膾炙)될 것이 틀림없다. 그리하여, 그야말로 “오래도록” 만인의 뇌리에 새겨질 기념비적 시인으로 성장하길 바란다. 계간 파란의 신인상 당선자의 한 사람이자 시인의 이름으로 우뚝 설 장대성의 나날의 삶 속에서, 비록 고독하더라도 그야말로 신실한 예술가의 길이 ‘영원한 지금’으로 펼쳐질 수 있길 고대한다. 「메아리」에서 휘날려 온 “오래도록 나 혼자인 얼굴로”가 불러일으키는, 저 ‘오래된 미래’의 파문과 잔상처럼. 아니, “거울은 나를/죽으란 법 없는 사람처럼 반사하고//잘은 몰라도/또 떨어지지 않았을까요”(「힘이 닿는 한 좋은 마음」)가 찔러 오는 섬뜩한 느낌의 슬픔과 전율 어린 리듬감이 그러하듯. (이찬 문학평론가)
장대성을 계간 파란의 네 번째 신인으로 선정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논란의 여지가 없었다. 압도적이었다. 예심과 본심 과정 내내 편집 위원들의 추천에서 장대성이 빠지는 경우는 없었다. 가장 많은 추천을 받은 것. 이전 심사에서 단점이 없기 때문에 지목되는 예가 종종 있었지만, 장대성은 그렇지 않았다. 월등했다. 빼어난 작품이라는 심사 위원들의 이구동성. 완벽한 기교와 미려한 수사와 전율을 불러오는 이미지…… 탄복. 그런데 최종 단계에서 나는, 주저했다. 장대성의 작품에 조금이라도 흠이 있었으면 좋았을 것이다. 무결점 백자 같았다. 선택의 순간 나는 다른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 파열 없는 논쟁이 잠깐 있었지만 작품의 완성도 면에서 파란의 자랑과 기쁨이 되기에 충분한 장대성. 나는 이상하게도 그의 시에서 결(잉)여를 느끼지 못했다.
이번 파란 신인상에 응모하신 예비 시인들. 아파트 관리사무실에서 일하시는 분, 수십 년 초등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시던 분도 있었다. 생물학적 나이와 상관없이 이분들은 젊디젊은 문학청년이다. 화란과 독일에서도 응모가 있었다. 이삼십 대 청년들이 다수였다. 오십 대 이상 장(노)년들의 작품도 많았다. 원숙한 삶에서 길어 올린, 인생의 기쁨과 고통이 넘실거리는, 시를 읽으면서 나는 배우고 배웠다. 삶의 길은 멀고 거칠고 어둡다. 앞으로 살아갈 날들을 환하게 비춰 줄 성찰이 가득한 작품들이 고마웠지만, 그분들의 삶 자체가 시이지만, 나는 예술로서의 시가 보지(保持)해야 할 필수 요건을 보고 싶었다.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현실 이야기가 절실하게 마음에 파고들었던 김서현을 기억한다. 기계 또는 가전(家電)을 제재로 삼은 한귀연의 연작시는 새로웠고 그래서 자극적이었고 재미가 가득했다.
대다수의 서정시는 자연과 가족과 이별로 점철되었다. 나쁘다고 할 수는 없지만 결코 좋지도 않았다. 시는 원래 그러한 것이지만, ‘그러한 것’이 우리의 일부이지만, 시는 언어예술이라는 점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예술 작품이 기본적으로 갖춰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 인식해야 한다. 다른 편에는 예술에 대한 자의식이 팽만한, 난해함으로 가장한 무질서가 법석이는, 기본기 없는 실험성을―세련이라는 포장지를 뒤집어쓴 채―자폐와 절연으로 분식(粉飾)한 작품들이 있었다. 쓸데없이 잘게 토막 내어 시를 연신(延伸)하는 행갈이의 유행. 형식이 무엇이고, 그것이 어떤 역할을 맡는가에 대한 치열한 고민이 필요하다. ‘문예 창작 기술’을 직업적으로 수련하는 일군의 에콜 교습생들은 자신들이 민감하게 여기는 소위 ‘트렌드’의 변화 양상을 면밀하게 살펴보기 바란다. 포만(飽滿)한 문장. 비대한 수식어. 격렬한 어휘가 시적인 것이라고 믿는 클리셰의 지뢰. 나는 지칠 수밖에 없었다. ‘그 지겨운’ 서정이 더 좋게 느껴졌다. 좋은 시는 보편성(서정성)과 추상성(난해성)을 호환한다. 등단에 가까운 시들은 세련된 표현과 잘 다져진 시적 전개를 이루어 냈다. 하지만 서로서로 유사함에 함입(陷入)되는 시들이 대부분이었다.
1차 예심 통과자 중에서 내 마음에 짙은 그림자를 남긴 홍수림, 김승빈, 박정효, 정아희의 작품을 기억한다. 김용희의 시를 잊을 수 없다. 최종 2인 중에서 나는 김용희가 지닌 변화―진화가 어울릴 것이지만―가능성에 본능적으로 끌렸다. 결핍 속에서 내가 보려고 했던 것은 ‘고통과 어둠’일지도 모른다. 점수로 따진다면 장대성이 몇 점 앞서겠지만, 시가 학점을 받는 전공필수가 아니기에, 나는 이번 심사 과정에서 어떤 시인이 더 좋은 시인으로 성장할 수 있는가를 질문하게 되었다. 「충」과 「<구인> 광명기업」은 등단이라는 절차의 부질없음을 확인하게 만들었다. 「가정」과 「오래달리기」 역시 독자를 새로운 세계로 이동시키는 지진 같은 힘을 갖고 있었다. 그 역능(力能)이 부러웠다. 「스릴러」와 「울음로 24번지」 같은 작품을 응모 과정에서 뺄 수 있는 안목과 결단이 필요하다. 시집을 엮는다면 문제가 없겠지만, 10편으로 승부하는 신인상 응모의 작전은 가장 좋은 작품 10편을 꾸려 내는 것이다. 유치한 비유를 들자면, 신인은 선발투수 같다고 말해도 될 것이다. 강력한 구종 한두 가지로는 살아남기 어렵다. 장대성은 세기의 야구선수 오타니 쇼헤이 같다. 투타 겸업하는 천재. 장대성은 소설로 먼저 등단했다. 그의 신춘문예 등단 소감은 인상적이었다. 꼰대다운 말 하나를 얹는다. 둘 다 잘하면 좋겠지만, 그가 한 말처럼, 시에 전념하기를 원한다. 그리고 시보다 더 엄혹한 삶에서 패배하지 않기를 간절하게 기원한다. 때로는 문학 때문에 삶이 망가지기도 한다. 응모 작품 맨 앞에 자리 잡은 「아스마라」. 내가 장대성이라면, 나는 이 작품을 첫 번째 작품으로 선택하지 않을 것이다. 「로그인」의 하단 “감정이 스스로 제어되는 효과가 있다” 같은 설명은 사족이 아닐까. 장대성이 파란의 신인이 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 그의 시에는 찬란한 표현이 가득하다. 광휘로운 이미지의 천변만화가 펼쳐진다. “핏줄에서 박동이 느껴진다 힘을 주면 빛이 새어 나올 것 같다”(「청진」), “속력을 가졌던 깃털로부터/머리칼을 휘날려 보는 것”(「밤이 오겠지」), “돌을 쌓아 올리는 조개/아가미를 모아 기도하는 물고기”(「매미성」), “오늘은 물을 너무 마셨더니/몸속에 수영장이 생긴 것처럼 말이 자꾸/어푸어푸 살려 달라고 외칩니다” “숨을 참아요/안쪽이 울렁거리며 물결을 만듭니다/나는 어디로 흐르려나요”(「무슨 말이 그렇게 많아」), “나는 내가 숨긴 마음이다/나는 내가 훔친 물건이야” “내가 있다 아주 오랫동안/공전하고 있다”(「복원」), “구름 걷히고 어둠 몰아내며/바깥의 빛이 집으로 도래할 때//아직/우리는 아직이라는 마음을 가지네”(「축」). 그리고 독자를 압도하는 작품 「메아리」. 읽은 후 숨을 멈추고 허공을 바라보게 만든 작품이었다. 감응. 이 한 작품으로 충분했다. “화장실에서 손에 물을 가득 받아/깊게 들여다볼 때//오래도록 나 혼자인 얼굴로//세수하고 거울 앞에서 명치를 꾹 누른다//아이 러브 유/아이 러브 유”. 시의 마지막 구절 “아이 러브 유”의 반복에서 나는 바닥에 떨어진 물풍선처럼 터져 버렸다. 시 속의 ‘나’는 견딜 것이다, 살아서 남겨질 것이고, 다시 살아갈 것이다. “장대성 시인 축하합니다.” 이제 그는 등단 제도를 통과한 시인이다. ‘파란’의 가족이 되었다. 나는 장대성이 좋은 시인의 모든 자질을 갖추고 있다고 판단한다. 날개를 활짝 펼치고 멀리멀리 날아가기를 바란다. 20년 후에도, 시집 다섯 권 이상을 간행한 후에도 장대성이 「메아리」 같은 작품을 써낼 것이라고 믿는다.
지난 2월 24일 용인시의 서농도서관에서 ‘백비몽시화’의 첫 번째 대중 강연이 있었다. 청중의 절반이 시인들이었다. 노춘기 시인의 강연은 솔직하고 담백했다. 시에 묻어 두었던 기억을 독자에게 솔직하게 드러내는 과정이 신비롭기까지 했다. 시의 비밀이 서서히 드러나는 순간 배움의 행복과 가치가 경이로 다가왔다. 가슴을 저릿하게 했던 노춘기 시인의 말. 시 쓰기는 독자나 타인뿐만 아니라 쓰는 사람 ‘나’에게 치유 기능이 있다는 것. 그는 끊임없이 기억 속의 ‘나’를 ‘너’로 대상화하면서, 삶의 곡절(曲折)에 묻혀 있던 ‘나’에게 불멸하는 이미지를 부여하여, ‘나’의 동일자 ‘너’를 어둠에서 빛 안쪽으로 끌어내고 있었다. 그것이 아름다움이고 그것이 시라는 생각에 젖어 창밖을 내다봤다. 토요일 오후의 고적 속에서 시의 기적을 발견했던 것 같다. 시의 마지막에 이르러 우리가 손에 쥐는 것은 이미지뿐이지만, 비유와 수사와 감각과 기교를 뛰어넘는 그 어떤 것이 시에 숨겨져 있다고 나는 믿고 있다. 그것을 ‘리듬’이라는 포괄적 용어를 사용하여 표현할 수밖에 없지만, 그것을 개념으로 환원하기 어려운 신비나 비밀 같은 단어를 동원하여 지시할 수밖에 없지만, 나는 시 속에서 ‘스파이스’ 같은 그것을 채굴할 때, 시의 위의(威儀)를 체감한다. 이번 신인상 심사 과정에서 내가 바랐던 것이 그것이었을지도 모른다.
감동은 어디에서 시작되는가. 정동(情動)은 어떻게 다가오는가. 정지용은 시론 「시의 위의」([문장], 1939.11)에서 시의 감정 범람을 경계하는 취지로 “예지(叡智)의 수원(水源)이 붕괴되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나는 정지용의 의도를 곡해하기로 한다. “어느 한순간의 육체적 지진”이 ‘우리’의 시에 필요하다. 한 사람에게는 보였고 다른 사람에게는 희미했던 것. 나조차 보유하지 못한 것이 그것이다. (장석원 시인)
우리가 시를 쓰는 이유는 다양할 것이다. 마음속에 있는 그 무언가를 말로 표현할 수 없거나 표현하지 않으면 마음에 고여 병이 될 것 같을 때, 삶을 살아가면서 만나는 장애물을 어찌하지 못할 때,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아무리 채우거나 비워도, 마음의 공백이 자꾸 커져만 갈 때, 자신의 경험 공간이 위태로워서, 새로운 상상을 끌어와 덧칠하지 않으면 무너질 것만 같을 때 등. 물론 이미 쓰고 있는 사람에겐 쓰지 않아야 할 이유를 찾는 것이 더욱 힘들 것이다. 쓰는 사람은 풀리지 않는 저주나 알 수 없는 운명에 놓여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당장 직면하여 있는 삶을 언어로 바꾸지 않으면 안 되는 삶들도 있다는 것을, 이번으로 네 번째 파란 신인상에 응모된 작품들을 읽으며 다시 깨닫게 되었다.
‘시를 왜 쓰는가?’라는 질문을 되새기며 시작한 심사는 ‘시인은 어떻게 탄생 될까?’라는 또 다른 질문을 생성하였다. 개성과 고유성은 단기간에 형성되지 않는 듯하다. 응모작의 시적 경향이나 완성도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시적 언어가 너무나 균일화되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는 이미 그다음을 요구하고 있는데, 우주의 대문을 활짝 열고 언어의 꽃을 피우고 있는데, 왜 우리는 동시대라는 이데올로기의 함정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을까. 스스로를 반성하며 응모된 작품을 읽어 나갔다.
먼저 홍수림, 정미라, 바아림의 작품에 눈길이 갔다. 홍수림의 언어는 기본적으로 산뜻하다. 특히 표제작 「로라」를 비롯하여 전반부에 배치된 작품들이 매력적이었다. ‘인간-동물’의 구도에서 발생되는 감각들을 섬세하게 그려 내는 장면이 인상적이었다. 이미 일어난 사건에 대해 해석하거나 해결하려고 하기보다는, 빗나가거나 묵히는 방식으로 새로운 여백을 만들어 내는 모습이 미적이었다. 다만 후반부의 작품에서는 그 여백이 다소 희미해서 힘을 받지 못하여 아쉬웠다. “짐승과 평행한 침묵 속에 잠겨” 있는 순간을 구체적으로 보여 주면 좋을 듯하다. 정미라의 작품은 이미지가 거침없이 전개되고 있었다. 하나의 이미지와 그다음 이미지의 틈이 잘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빽빽하게 배치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화자의 목소리가 흐트러지지 않고 선명했다. 이미지의 연쇄가 피곤하게 느껴지지 않고 진심으로 들리는 것은 아마도 언어가 시인의 육체에서 오랫동안 숙성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시적 주체가 세상을 바라보는 자신만의 렌즈를 가지고 있으니, 미세한 조정을 한다면 더욱 완성도 있는 작품을 쓸 것이라 믿는다. 가령 식물과 함께 이야기가 전개될 때 화자의 감정을 서서히 늦추거나 숨겨 본다면 지금과는 또 다른 행간을 확보할 수 있을 듯하다. 바아림의 작품은 유려했다. 특정한 분위기를 잘 만들어 내는 재주를 지녔다. 구와 절을 효율적으로 운영하면서 그 분위기에 맞는 리듬도 적절하게 구축하고 있었다. 「규격 외 조명으로 모두 사소해진 뒤」 「눈 속의 병」 「눈속임 그림」 등을 비롯하여 「클로즈드 아웃」 「시네마틱 낭비」 모두 작품이 안정적이고 묘했다. 바아림의 작품을 보며 오랫동안 고민한 것은 어떻게 바아림만의 목소리를 더욱 돋보이게 표현할 수 있을까였다. 시가 전개되는 형식을 다른 방식으로 구축하면 좋을 듯하다. 지금의 방식대로 가기엔 비슷한 계열의 작품들이 발목을 잡을 것이라는 괜한 걱정이 들었기 때문이다. 잘 만들어 낼 수 있는 분위기와 내면으로부터 어찌할 수 없이 발생하는 분위기의 차이에 대해 고민해 보면 좋을 듯하다. 지금까지 시적이라고 믿었던 것들을 의심하는 것부터 시작해 보면 어떨까.
다음으로 주목한 작품은 박정효, 송서월, 김윤지의 작품이다. 박정효의 작품은 우선 파토스가 강렬했다. 「달방의 자몽」과 「아무개 이야기」의 언어는 돌올하다. 다소 거칠고 한 방향으로 흘러서 예측이 가능한 서사가 될 것 같았지만, 가족과 세계의 관계에서 비롯되어 소환되는 자연물을 표현해 내는 방식이 탁월했다. 최종 작품으로 논의할 만큼의 매력을 지니고 있었다고 밝힌다. “비는 목까지 차오르고 머리통만 한 자몽만 동동 떠오르던” 한 가족의 다음 이야기가 궁금하였다. 이러한 긴장감이 뒤에 배치된 작품들에서도 느껴질 수 있었다면 더욱 좋았을 것이다. 언어의 끓는점과 냉각점에 대해 생각하여 본다면, 지금까지와는 다른 종류의 파토스도 끌어낼 수 있을 듯하다. 송서월의 작품들은 형식이 내용을 파먹고 있는 듯한 인상을 받았다. 현실에서 대상을 살며시 건져 올리는 능력이나, 독특한 시점으로 대화를 풀어내는 방식 모두 자연스러웠다. 그러나 그것들을 지탱하고 있는 형식이 불안정하게 느껴졌다. 한 가지 그릇만을 고집하지 말고 내용으로부터 기원하는 그릇을 빚어서 사용하여 보길 추천한다. 구절을 지우고 남은 흔적에서 빛나고 있는 무엇을 발견하였으면 좋겠다. 김윤지의 「열대야」의 언어는 굉장히 예리하다. 투명한 빛을 머금은 솜뭉치 같은 느낌을 받았다. “여우야 부르면/볼 아래로 하얀 흉곽이 부푼다”고 발화하는 화자의 심정으로 부드럽게 빠져들었다. 그러나 열 편의 수준이 고르지 못하여 안타깝게도 작품을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느끼는 감각을 단발적으로 휘발시키지 말고 그것들이 시라는 형태 안에서 뚜렷하게 드러날 수 있도록 시적 장치에 대해 연구하여 보면 좋을 듯하다.
정아희, 유채유, 서윤배의 작품은 이미 수준급이라고 말해 주고 싶다. 다른 지면을 통해 곧 만날 분들이라고 믿는다. 작품을 읽는 내내 즐거웠다. 본인 스스로 생각할 때 잘되는 작품이 있고 몸에 맞지 않는 형식의 것들이 있을 것이다. 조금 돌아가거나 헤매더라도 지금까지 썼던 방식과 정반대의 성격의 작품들을 써 보면 어떨까. 깡패나 형사 역할만 하다가 코미디나 로맨스의 배역도 잘하는 배우처럼, 언어의 다양한 층위를 확보하고 난 이후 다음 작품을 써 내려간다면 언어의 스펙트럼이 넓어질 듯하다.
마지막까지 결정이 어려운 원고는 김용희, 장대성의 작품이었다. 두 분 모두 완성도가 높고 빈틈이 잘 보이지 않았다. 신인상에 응모된 원고는 어쩔 수 없이 비판적 요소를 먼저 찾게 되는 경우가 많은데, 두 분의 원고를 볼 때는 비판보다는 감동이 커서 한동안 그저 감상하였다. 김용희의 작품은 최근 젊은 시인의 작품에서 잘 보이지 않는 소재와 경험을 바탕으로 시를 구축하고 있어서 소중하였다. 언어의 토질이 단단하고 믿음직하였다. 표제작보단 중후반부의 작품들이 울림이 컸다. 한 권의 시집으로 발간된다면 어떤 건축물이 될지, 그곳을 드나드는 사람들은 어떤 표정을 지을지 기대가 되었다. 다만 시가 시작되고 끝맺는 과정이 미적으로 조금은 익숙하게 보였다. 새로운 표제작 몇 편이 추가된다면 중후반부의 작품들이 시너지를 얻을 것이라 생각한다. 신인상이라는 이름으로 원고를 검토하여 아쉬운 부분을 찾아낼 수밖에 없다는 점을 이해하여 주길 바란다.
장대성을 제4회 계간 파란 신인상으로 추천한다. 장대성은 세계를 바라보는 눈이 남달랐다. 미시와 거시를 동시에 보고 현실과 비현실을 자연스럽게 엮고 풀어내었다. 사유를 이미지로 옮겨 놓는 과정이 아름다웠다. 마음의 움직임에 따라 이미지와 이미지가 분할되거나 엉키면서 새로운 장면이 나타났다. 언어의 이면에서 참신한 에너지가 들끓고 있었다. ‘시를 왜 쓰는가?’에 대한 질문의 답이 들리는 듯하였다. “힘을 주면 빛이 새어 나올 것 같”기 때문에, “그 웃음 너머 어두운 숲속에서/울음소리가 들려”오기 때문에, “어딘가에서 잘 지내고 있을 너를/굳이 이곳으로 데려”오기 위해, “감당치 못할 아픔이 쓸고 간 자리”를 느끼기 위해 시인은 시를 쓴다. 시를 쓰는 순간을 영원히 맞이하게 될, 쓰는 것보단 쓰지 않을 이유를 찾기가 힘들게 된 시인의 탄생을 축하한다.
응모작이 도착한 순간부터 심사평을 쓰는 기간까지 거의 한 달 남짓 응모 작품과 동거하였다. 심사평에 언급하지 못하였지만 여전히 나의 마음속을 유영하는 언어들이 있다. 지도에 없는 언어들, ‘별이 빛나는 창공’을 보고 삶의 방향을 찾을 수 있는 시대가 다시 도래하기를 꿈꾼다. 이제 199명의 시인들과 작별하여야 할 시간이다. 늘 그렇듯 배움이 컸다. 응모하여 주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 여러모로 어려운 시대에도 여러분과 함께 시를 쓰고 읽고 있다는 생각에 긴 위로를 받은 듯하다. 새로운 작품으로 향하는 길, 골목을 헤매다가 불쑥 만나 따듯한 차 한잔 마시기를 소망한다. (정우신 시인)
평론 부문 심사 소감
이번 계간 파란 신인상 평론 부문에는 총 6편이 응모되었다. 1990년대 중반 이후부터 불거진 비평의 위기가 매년 다른 맥락에서 증폭되고 있지만 지금도 누군가는 꾸준히 평론을 쓰고, 평론가가 되기 위해 시간과 노력을 들이는 분들이 있다는 사실은 결코 저 위기 앞에 굴복하지 않은 채 새로운 활로 찾기를 다짐하게 한다. 비평(가)의 역할과 자리에 대한 고민이 최근 문단의 중요한 화두로 제시된 지금, 단순히 작품만이 아니라 비평에 대한 근원적인 고민을 한 후 작성하였을 것이 분명한 세 분(안은석, 푸름, 배하나)의 응모작을 본심에 올렸다.
안은석의 「그럼에도 불구하고 퀴어, 작품 속 몸의 감정들」은 한국문학에 나타난 퀴어적 상상력에 주목하는 글이다. 최근 몇 년간 한국문학장에서 이루어진 퀴어에 대한 실로 대단한 관심을 생각해 볼 때 이러한 주제 선정은 응모자가 현재 문학장의 동향에 귀를 기울이고 이에 예민하게 반응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그러나 담론의 한복판에 뛰어들 때에는 기존의 비평들과의 차별점에 조금 더 각을 세워 보는 일이 필요하다. 그렇지 않고서는 퀴어적 상상력을 몸통으로 하는 n번째 비평을 쓰게 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응모자가 그러한 각으로 내세운 것은 ‘몸’이겠지만 이것이 충분히 벼려졌다고 판단할 수 없었던 것은 가장 정치하게 서술되어야 할 3장의 논의가 작품에 대한 간략한 해설에 그쳐 문제의식이 느슨하게 제시된 데에 일정 부분 기인한다. 이러한 느슨함은 작품들을 단순 나열하는 구성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것이기도 하다. 기형도, 이원, 황병승, 김멜라 등의 작품을 가져와 장르와 시대를 넘나들며 폭넓은 작품 읽기를 시도하고 있는 점은 이 글의 장점이 될 수 있지만 이러한 읽기가 힘을 얻기 위해서는 작품과 작품 사이를 논리로 촘촘하게 잇는 작업과 개개 작품에 대한 정치한 해석이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반면, 푸름의 「초월의 신화, 관계의 인간성―김선우의 [녹턴] 읽기」는 한 권의 시집에 초점을 맞춘 글이었다. 비평이란 대상 작품과 내밀한 대화를 나누는 일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김선우의 시가 현대의 샤먼으로서의 역할에 충실하다는 점을 작품을 통해 차분히 풀어내고 있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특히 우파니샤드와 연계하여 시를 해석한 부분이 설득력 있게 다가왔다. 다만, 종종 평면적이거나 주관적인 해석들이 보이기도 했다. 가령, 「상냥한 지옥」에 대해 응모자는 ‘너’를 ‘나’로, ‘나’를 ‘너’로 읽어 보는 과감한 시도를 하는데 여기에는 더욱 분명한 근거와 세심한 서술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러한 문제는 이 글이 많은 부분 부버의 이론에 기대어 있다는 것에서 비롯된 것처럼 보인다. “부버의 이론을 확장하였을 때 의미 있게 적용될 시로 김선우의 시만 한 것은 없을 것이다”와 같은 문장은 글의 목적이 김선우 작품 분석에 있기보다 부버 이론을 시에서 확인하는 데 있는 것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는 무엇인가?’ ‘-이다’와 같은 확인하는 문장들이 반복되는 것 역시 이러한 인상을 더욱 짙게 남게 했다. 동일한 구조로 반복되는 문장은 비평의 가독성을 확보하는 리듬으로 작용할 때도 있지만 과도할 경우 고정된 사고방식을 노출하고 그 한계를 드러낼 수 있다는 점을 유념하면 좋겠다. 무엇보다 이 작품을 당선작으로 선정하지 못했던 이유는 2016년도에 발간된 김선우의 시집을 지금 왜 주목해야 하는가에 대한 응모자의 시선이 드러나지 않는다는 데 있다. [녹턴] 이후 발간된 [내 따스한 유령들](창비, 2021)을 포함하여 김선우의 전체 시 세계를 다루지 않은 까닭 역시 설득력 있게 다가오지 않았다. 그의 시를 지금의 문학장에서 어느 좌표에 놓아둘 것인지도 고민해 보아야 할 문제다. 조금 더 시야를 확장해 보면 좋겠다.
세 편의 글 중 내가 가장 오래 쥐고 있었던 원고는 배하나의 「폭로하는 현상학에서 생활세계 현상학으로―현상학적 견지에서 본 이수명론」이었다. 이 글은 ‘현상학’이라는 키워드로 이수명 시의 방법론을 통시적으로 조감하려는 시도다. 이수명의 시를 초현실주의로만 바라보거나 정신분석학에 기대어 독해한 기존 평들의 문제를 지적하는 가운데 자신의 주장을 관철하는 서두의 서술을 특히 인상적으로 읽었다. 그러나 끝내 당선작으로 선정하지 못했던 여러 이유가 있었다. 먼저,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 시인의 작품을 이야기하기에는 다소 어색한 표현으로 여겨지지만) 응모자의 분류에 따라 초기, 중기, 후기로 이수명의 시를 구분해 본다면 초기, 중기에 대한 상세한 논증과 달리 후기 시들에 대한 분석이 다소 거칠고 소략하여 이를 가리키는 “생활세계의 현상학”이라는 개념이 크게 설득력 있게 다가오지 않았다. 둘째, 장 구분 없이 글을 이어 나가는 것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70매 정도 분량의 글이 구분 없이 산발적으로 서술되어 있어 자주 글의 초점이 흐려졌다. 글의 구성과 함께 가독성에 대해 고민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이 글의 가독성을 방해하는 또 다른 요인은 하이데거 이론에 대한 잦은 원용에 있는 것이기도 했다. 이론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는 평론가에게 좋은 무기지만 그것이 때로는 대상 텍스트나 평론가의 고유한 사유를 공격하기도 한다는 점에서 요령 있는 활용과 배치를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 그러나 작품을 보는 눈이 밝은 응모자인 만큼 이론적 지식을 시의 해석적 지평을 넓히는 방안으로 활용한다면 비평의 외연을 확장할 수 있는 평론가로 지면에서 만날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오랜 논의 끝에 내린 결정이었지만 평론 부문의 당선작을 내지 못했다는 사실에 지금도 마음이 무겁다. 그러나 계간 파란이 당선작을 내는 일만큼 중요한 것은 한국문학이 비평의 위기를 타개하는 데 힘을 보탤 수 있는 평론가를 세상에 내는 일이며, 무르익지 않은 순간 당선되는 일이 당선자에게도 얼마나 위험한 일인가를 잘 알고 있기에 어려운 결정을 할 수밖에 없었음을 덧붙인다. 혹여 ‘당선작 없음’이라는 결과가 (내가 평론을 쓰기로 결심하기 전 그러했듯) 비평가가 무언가 대단한 자이기 때문이라고는 받아들이지 않았으면 한다. 자신이 가지지 않은 것만을 생각할 때 평론의 성은 높고 견고하게만 보이지만 자신이 이미 가지고 있는 것에 조금 더 보태어 충분히 사유할 시간을 갖는다면 비평의 길은 언제든 열려 있다고 말하고 싶다. 분명 오랜 시간과 노력을 들여 작성하였을 원고를 보내 주신 모든 분들께 깊이 감사드리며 지금도 어디선가 문학평론을 쓰고 평론가가 되기를 소망하고 있을 분들과 지면을 통해 대화를 나눌 시간이 오기를 기다리며 아쉬움과 죄송한 마음을 전한다. (송현지 문학평론가)
2024년 계간 파란 신인상 평론 부문에 응모한 6편 가운데서 우리가 최종적인 검토의 대상으로 삼은 것은 푸름의 「초월의 신화, 관계의 인간성―김선우의 [녹턴] 읽기」와 배하나의 「폭로하는 현상학에서 생활세계 현상학으로―현상학적 견지에서 본 이수명론」이었다. 이 두 편의 글을 비롯한 대부분의 응모작은 예전과는 달리, 당선작의 수준에 육박하는 구성의 밀도와 분석의 설득력과 해석의 타당성을 펼쳐 보였다. 따라서 평론 부문에서도 조만간 응모자들에게 기쁜 소식을 돌려 드릴 수 있는 시절이 곧 도래하리라는 좋은 예감과 부푼 기대를 전한다.
푸름의 응모작은 김선우의 [녹턴]을 “현대의 샤먼으로서의 역할에 충실한” 시인의 위상을 밝히는 자리에 집중되었다. 이러한 측면이 이 시집에 깃들어 있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겠지만, 평론이란 특정한 담론의 체계를 대상 텍스트에 들씌우는 자리에서 탄생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숙지했으면 한다. 평론 또는 비평이란 텍스트 마디마디의 소리 없는 여백이 풍기는 뉘앙스의 움직임과 더불어, 다양한 이미지들의 일관된 지력선과 현란한 엇갈림이 상호 교차하면서 이루어 놓는 ‘개진과 은폐’의 변주곡을 독창적인 시각으로 풀이하는 자리에서 출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동시에 그 자리에서 새로운 의문을 창안하고 다시 제시하는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평론가 또는 비평가에게도 대상 텍스트에 대한 분석과 해석을 통해, 그 누구도 하지 못한 말이나, 여태껏 없었던 세계를 처음으로 현시하려는 창조적 열정은 필수 불가결한 것이라 하겠다. 이는 보이지 않는 진실을 새롭게 현시하거나, 아직 드러나지 않은 세계의 이면을 발굴하려는 모험적 시도를 뜻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를 망각할 때, 평론은 이런저런 기성 텍스트를 뒤따르는 부차적 존재에 지나지 않거나, 그저 단순한 사후 분석 보고서에 머무르게 될 것이다.
푸름의 응모작이 대상 텍스트 분석의 차원에서 나름의 설득력을 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평론 자체의 독창적 스타일을 마련하지 못하고, 한국시의 현주소에 대한 통찰적 시선이나 원근법적 미래 전망을 갖추지 못한 것 역시, 이와 같은 테두리에서 오는 것으로 추정된다. 응모작의 도입부와 마무리에서 엿보이는 논의의 단순성이나 기술 내용의 소략함도 문학평론의 기능과 그 존재 가치에 대한 충실한 이해의 부족, 또는 그것의 창조적 스타일을 새롭게 이루어 보려는 의욕과 비전의 결여에서 비롯하는 것처럼 보인다. 좀 더 오랜 시간의 수련 과정과 함께 고유한 스타일의 개발 및 체화 노력이 필수적이라는 조언과 당부를 드린다.
배하나의 응모작은 심사 위원들이 한결같이 최종적인 검토의 대상으로 삼은 글이었다. 그것은 이수명의 시를 “현상학적 견지”에서 파악하려는 일관된 문제 설정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다른 응모작들을 압도하는 차원 높은 담론의 수준과 이론적 전문성의 깊이를 명시적으로 드러냈다. 그러나 평론의 기능 또는 비평의 가치란, 결코 특정 이론의 정교한 이해나 치밀한 논증을 통해 확보되는 것이 아니라는 고언(苦言)을 전하고 싶다. 그것은 철학과 정신분석, 또는 수많은 인문・사회 담론을 도입・활용한다고 하더라도, 그것 자체의 정확한 이해나 세부적 파악을 주요 목적으로 삼을 수는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니, 평론이라는 글쓰기 양식에서 훨씬 더 중요한 문제는, 대상 텍스트에 대한 예리한 통찰력과 섬세한 심미안에 있으며, 이를 고유한 스타일로 표현하는 자리에서 자기 존재 가치를 확보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렇듯 평론의 기능 혹은 비평의 진가란, 대상 텍스트의 적확한 분석이나 그에 합당한 해석으로 제한되진 않을 것이다. 오히려 그것을 기본 골자로 삼으면서도, 그것을 넘쳐나는 ‘신성한 잉여’의 자리에서 그 진가가 오롯이 발휘되는 것처럼 보인다. 비평은 시 또는 다른 예술 작품과 마찬가지로, ‘아무도 하지 못한 말’을 새롭게 현시하고 창안하는 자리에서 비로소 가치론적 자기 함량의 최고치를 발휘하는 것으로 파악되기 때문이다. “비평은 창작과 더불어 한가지로 창조적 예술이며, 작품의 단순한 판단자가 아닌 산 증거다”라는 표현으로 집약될 수 있을, 1938년 4월 제시된 임화의 ‘창조적 비평’과 ‘신성한 잉여’의 담론에서 우리가 여전히 참조해야 할 것 역시, 이와 같은 테두리를 이룬다. 좀 더 예리한 심미안으로 대상 텍스트의 갖가지 무늬들과 그 미세한 결들을 감수하는 동시에, 좀 더 본질적인 문제화의 차원에서 한국시의 현주소와 ‘다른 미래’를 위한 새로운 전망을 제시할 수 있는 문제작들 역시, ‘창조적 비평’과 ‘신성한 잉여’라는 담론의 테두리에서 탄생할 것이 자명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우리 모두를 전율케 하면서 기존 평론의 통념과 상식에 구멍을 뚫어 버리는, 하나의 비평사적 ‘진리-사건’을 도래케 하는, 이른바 ‘문제적 주인공’으로서의 신예 평론가가 우리 계간 파란에서 배출되는 경이로운 일이 일어난다면 참으로 좋겠다. 물론 우리는 이 바람과 기대가 너무 큰 것임을 잘 알고 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우리의 한계이자 모순일 것이다. 그러나 그러함에도, 우리는 그것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또한 그것을 구부리는 그 어떤 타협도 시도하지 않을 것이다. 계간 파란은 한국시의 ‘뉴프런티어’를 자청하기 때문이다. 이는 한국시의 새로운 비전을 제시하면서, 그것의 ‘다른 미래’를 여는 창조적 진화 운동을 멈추지 않으려는 예술적 기백과 실천적 충실성을 여전히 존숭하려는 자리에서 온다. 아니, 저 부단한 실천 운동 과정이야말로 ‘불가능’이라는 사실을 명료하게 자각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향한 ‘형이상적 그리움’, 그 현재진행형의 수행 과정을 결코 멈출 수 없다는 데서 비롯할 것이다.
이러한 계간 파란의 실천 명제와 미래 전망에 온몸으로 감응할 수 있다면, 네 차례의 신인상 심사를 치르고서도 당선작을 낼 수 없었던 우리의 깊은 고민과 난처한 심경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의 ‘본원적인 그리움’, 한국시의 ‘다른 미래’를 열어 나갈 문학적 동지이자 그 삶을 함께 나눌 참된 벗을 만나기 위한 그 ‘간절한 기다림’을 우리가 필수 전제 조건으로 삼으려 하는 데서 오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리하여, 우리는 ‘영원한 지금’이라는 문제의식을 품고 우리와 함께할 평론 부문의 당선자, 그야말로 ‘문제적 주인공’일 수밖에 없을 계간 파란의 신예 평론가를 하염없이 기다릴 것이다. 한결같은 ‘기다림의 자세’로, 언제나 늘……. (이찬 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