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은 1850~ 1913년 어간에 서양의 물질문영 개방을 두고 각 지방의 번 사이에 무수한 충돌이 있었다.
개화를 해야 하느냐의 진보와 쇄국을 해야 하느냐의 보수 사이에 치열한 암투와 전투가 있었다.
사카모토 료마는 최초에는 존왕양이론자(尊王攘夷論者)였으나 서구의 발단된 문물을 보고 개화를 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느끼고 대정봉환론(大政奉還論) 등의 구상을 담은 선중팔책(船中八策)을 입안하여 일본의 봉건시대(封建時代)를 종식하고 명치유신(明治維新)을 통한 중앙집권적 근대국가로 발전시킨 큰 디딤돌 역활을 하였다.
사카모토 료마는 1835년) 11월 15일(음력), 오늘날의 고치현 하급 무사인 사카모토 가문에서 아버지 사카모토 나오타리(坂本直足)와 어머니 사카모토 고(坂本幸)의 사이에서 차남으로 태어났다.
사카모토 가문은 하사(下士)였지만, 분가시 많은 재산을 분여받아 매우 유복하였다. 료마가 열두 살이 되는 해인 1846년, 어머니가 향년 49세에 병사했다. 료마는 그 뒤 새어머니 이요의 손에서 자랐는데, 이요는 료마의 교육에 매우 엄격했다.
료마는 열네 살 때부터 히네노벤지(日根野弁治)가 가르치는 히네노 도장에 다녔다. 그러다가 열아홉 살이었던 료마는 히네노에게서 小栗流和兵法事目録을 하사받자 더욱 심도있게 검술을 연마하기 위해 1853년 에도로 유학했다. 료마는 도장에서 검술을 배우면서, 한편으로는 에도의 존왕양이론자(尊王攘夷論者)들과 사귀었다.
1854년 료마가 고향으로 돌아오자 유학자이자 화가인 가와다 쇼료로부터 서양에 대해 배웠다.
료마는 쇼료에게서 외국 배를 구입해 동지를 모아 운송업을 하며 배에 드는 비용을 조달하고 항해 기술을 터득하라는 충고를 들었고, 이는 훗날 료마가 걷게 될 해운의 길에 발을 내딛는 계기가 되었다.
료마가 탈번한 해 1862년, 개화파이자 가쓰 가이슈(勝海舟)를 만나고 그의 견식에 감복해 그 자리에서 그의 제자가 된다.
가쓰로부터 서양 문물을 배운 료마는 양이(攘夷)에서 개화(開化)로 생각이 크게 바뀌며, 1만석 이상의 소출을 내는 영토를 보유한 봉건영주인 번(藩)이라는 작은 나라가 아니라 일본국으로서 미래를 준비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료마는 당시 외국인이 많이 모이던 나가사키에서 외국인과 접촉할 기회가 늘어남에 따라 영어와 네덜란드어 공부를 시작했다
그리고 8월엔 나가사키의 토머스 블레이크 글러버가 운영하던 글로버 상회로부터 미니에 총 4,300정, 게벨 총 3,000정을 사쓰마 번의 명의로 조슈 번에의 매입 알선에 성공했다. 또, 곤도 조지로(近藤長次郎)의 활동으로 사쓰마 번의 명의로 영국제 증기군함 유니온 호, 잇쵸 마루'(乙丑丸)의 구입에 성공하였고, 조슈 번과 사쿠라지마 조약을 체결, 선박의 운항은 가메야마 조합이 맡게 되었다.
당시 일본 세력의 중심은 가고시마 현과 야마구치 현이었다.
사쓰마 번(가고시마 현)은 조정과 손을 잡아 막부(幕府)를 일으켜 세워야 한다는 중도파(中道派)였음에 반해, 조슈 번(야마구치 현)은 막부를 타도하고 왕정(王廷)을 부활시켜야 한다는 급진파(急進派)로서 두 번 대립하며 사이가 매우 나빴다.
료마는 이를 조정하기 위해 1867년 도쿄로 가는 배에서 료마는 대정봉환론(大政奉還論) 등의 구상을 담은 선중팔책을 입안했다.
선중팔책(船中八策)은 에도 막부 말기 도사 번의 사카모토 료마가 1867년에 기초한 신국가체제의 여덟 가지의 정치 구상으로 대정봉환, 상하의정국 설치, 인재 등용과 관제 개혁, 외교혁신, 법전의 제정, 해군 확충, 어친병 설치, 폐제 개혁으로 구성되어있다.
1) 천하의 정권을 조정에 봉환하고, 새 정령을 조정에서 세워야 한다.
2) 상하의정국(上下議政局)을 설치하고 의원(議員)을 두어 만기를 시기에 맞게 공의로 결정해야 한다.
3) 유능한 공경제후(公卿諸侯)와 천하의 인재를 고문으로 삼아 관직을 내리고 종래 유명무실한 관직을 폐지해야 한다.
4) 외국과의 교류를 확대하는 공의(公議)를 모으고 새롭고 지당한 규약을 세워야 한다.
5) 옛 율령(律令)을 폐지하고, 새롭고 무궁한 대전(大典)을 제정해야 한다.
6) 해군을 확장해야 한다.
7) 어친병(御親兵)을 설치하여 제도(帝都)를 수비(守衛)하게 한다.
8) 금은시세(金銀物貨)를 외국과 균형을 맞추는 법을 제정해야 한다.
대정봉환의 구상은 료마가 속했던 도사 번의 번주인 야마우치 도요시게가 도쿠가와 요시노부(德川慶喜)에게 건의하여 채택되었다.
도쿠가와 요시노부(徳川慶喜:1837-1913년)는 제15대 에도 막부 정이대장군으로 도쿠가와 막부의 마지막 쇼군이다.
반 막부세력과의 대립 끝에 1866년 제2차 죠슈정벌을 끝으로 패배당하여 더 이상의 정권 유지는 불가능해졌음을 깨닫고, 1867년 국가 통치권을 메이지 천황에게 반환하는 대정봉환을 승인한다.
료마는 동향인 나카오카 신타로와 함께, 두 번을 중재하여 1866년 삿초 동맹(사쓰마와 조슈 동맹)을 결성하는 데 공헌했다.
그러나 삿초 동맹이 체결된 바로 다음날, 료마를 포함한 지사들이 모여있던 데라다야(寺田 : 현재 교토 후시미 구)여관에서 료마 일행을 암살하려는 사건이 발생하여 33세의 료마는 사살당했지만 암살법은 밝혀지지 않았으나 삿초 동맹에 위협을 느낀 막부의 소행이라는 설이 있다.
이후 천황이 이를 받아들여 실제로 대정봉환이 이뤄졌고, 정권은 막부에서 천황 중심의 조정으로 평화적으로 넘어갔다.
이로써 일본은 왕정복고(王政復古)가 이루어져 부국강병의 기치 하에 봉건시대(封建時代)를 종식하고 근대화를 추진하는 명치유신(明治維新)을 통한 중앙집권적 근대국가로 발전하게 되었다.
" 진보와 보수의 투쟁길 위에 어떤 정책이 나올 것인가? "
"一中兩生의 중심점 확립의 그 길이 있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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