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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은 거란에 농락당한 서희의 담판
거란이 만든 1000년 전 WTO
신군부가 정권을 잡은 그 이듬해(1980년)였다. 시원한 여름을 보냈다.
하늘은 흐렸고, 비가 간간이 내렸다. 추석께 시골에 갔을 때 보았던, 논에 풀어놓았던 소가 기억이 난다.
“행님아, 왜 소가 논에서 벼이삭을 먹도록 놔두노?”
“저 벼는 쭉정이라 타작할 필요도 없는 기라.”
그해의 냉해로 벼농사가 대흉작을 기록했다. 우리 측은 미국 정부를 찾아가 최대한 쌀을 공급해줄 것을 간청했다. 결국 1981년 한 해에 도입한 쌀은 224만5000톤(1559만 석)으로 당시 우리나라 쌀 생산량의 3분의 1을 넘어섰다. 1979년 톤당 240달러였던 쌀값이 두 배가 넘는 550달러까지 치솟았다. 세계적인 흉작이 든 1972년에는 이보다 더 심했다. 곡물 메이저는 톤당 200달러 하는 쌀을 한국에 661달러를 받고 팔았다.
곡물 메이저가 담합해 곡물 값 폭등을 조장한 사례는 비일비재하다. 1972년 세계 곡물 생산량이 약 3퍼센트 감소하자 쌀과 밀의 국제가격은 3배 이상 급등했다. 당시 미국의 곡물창고에 쌓여 있던 밀 재고분의 56퍼센트는 이미 곡물 메이저들이 점유한 상태였다. 1973년 닉슨 정부가 100일 동안 콩 수출 중단 조치를 내렸을 때도 국제가격이 4.6배나 뛰어올랐다. 그들은 창고에 콩 재고분의 91퍼센트를 쌓아두고 있었다.
1970년대의 식량 파동을 경험한 세계 각국은 증산에 나섰고, 1980년대에 들어서 상당 부분 식량 자급을 달성하게 되었다. 우리나라도 통일벼의 개발로 쌀을 자급하는 수준에 이미 도달했다. 국제 농산물 가격이 하락했다. 이러한 상황은 곡물 메이저에게 위협이었다.
세계식량 시장을 뒤흔드는 곡물 마피아
곡물 메이저들은 우루과이라운드UR 협상 당시부터 WTO(세계무역기구) 체제하 국제 농산물 자유무역에 깊숙이 개입했다. 1993년 12월에 타결된 UR 협상을 통해 이뤄진 농산물의 무역자유화를 뒤에서 조종한 것이 바로 이들이다. 예컨대, 1986년 미국이 내놓은 농산물 자유무역안을 실질적으로 작성한 사람은 카길CARGILL 사의 부회장인 대니얼 암스테드였다. 그를 실무 책임자로 한 국제농산물 교역질서 개편 기도는 UR협상이 타결되기 10여 년 전인 1983년 이미 시작되었다고 한다.
2003년 멕시코 칸쿤에서 열린 WTO 농업 협상에서는 아예 카길이 미국 측 의견서를 작성했다. 곡물 메이저는 미국 정부뿐 아니라 세계 농업정책 전반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세계 곡물 시장이 WTO 협정 등 국제사회의 규범과 질서보다는 곡물 메이저의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1990년대 들어 곡물 수입국들 사이에 민영화 바람이 불면서 수요자는 분산되고 있는 반면, 곡물 메이저들은 오히려 인수와 합병 등을 통해 몸집을 키우면서 시장 지배력을 가속화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들이 궁극적인 목적은 농산물의 무역자유화를 더욱 확대해 제3세계 국가의 농업을 서서히 말살하고, 세계 곡물 시장을 독점하려는 것이다.
이들은 ‘곡물 마피아’라고 불릴 만큼 그 정체가 베일에 싸여 있다. 특정 국가에 요란하게 진입하지 않으며 진입해도 잘 드러나지 않는다. 자국 정부의 고차원적 곡물 수출정책에 기생하거나 편승해서 독점적 폭리를 취하고, 국내외에 거미줄 같은 정보망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인공위성을 통해 밀·옥수수·쌀 등 세계 주요 농작물의 국가별 작황까지 수시로 파악하고 있다. 한국 내의 작황도 그들이 먼저 알고 있다.
거란군을 내려앉힌 귀주대첩
1000년 전 귀주성 앞 벌판에서 고려군과 거란군이 대진을 했다(1019년 2월 2일). 강감찬과 그의 병사들의 각오는 비장했다. 북소리가 빨라지면서 서로를 향해 돌격했다. 먼지가 하늘을 뒤덮고 유혈이 안개처럼 뿜어져 나왔다. 피를 뒤집어쓰고 싸우는 병사들의 광기 어린 눈에는 생존에 대한 갈망밖에 없었다. 백중세 가운데 행운의 여신은 고려의 손을 들어주었다. 장군 김종현이 이끄는 1만의 고려 원군이 나타났던 것이다.
거란군은 당황했고 고려군은 환호했다. 바람마저 거란군을 향해 불었다. 흙먼지가 거란군의 눈에 들어갔다. 고려 병사들에게 하늘은 자신들의 편이라는 확신을 주기에 충분했다. 순식간에 거란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고려 기병은 추격했다. 거란군이 재정비할 수 있는 시간을 주지 않았다.
광활한 평지에서는 있을 수도 없는 일들이 산악 고려에서는 일어나고 있었다. 달아나는 거란군의 방향이 뻔했다. 거란의 장군 해리·고청명·아과달·작고 등이 여기서 전사했다. 고려를 오랜 세월(24년) 동안 괴롭혀왔던 거란 왕제 친위부대는 이렇게 패배했다(귀주대첩-3차 거란 전쟁).
서희의 담판
처음부터 고려와 거란의 전쟁이 치열했던 것은 아니다. 교섭과 담판으로 끝나기도 했다. 998년, 거란 장수 소손녕이 80만 대군을 이끌고 고려를 침공했다(1차 침공). 거란의 침공에 고려는 군사적 대응을 펼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고려는 거란 기병의 공격에 겁을 먹고 있었다.
거란 기병들도 자신들이 둔중한 고려 기병보다 한 수 위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거란 기병의 활은 동물의 힘줄을 이용하여 탄력의 강도를 높였고, 목제 화살은 적에게 겁을 주기 위해 날아가면서 요란하게 쉭쉭거리는 소리를 내게끔 고안되었다. 유목민인 거란인들이 보기에 농경민인 고려인들은 어딘가 모르게 허약하게 보이는 존재에 불과했다. 태도가 나긋나긋하고 무기도 없이 다니는 고려인 학자나 관리들은 한심한 족속, 즉 봉으로 보였다.
“저렇게 주둥이만 놀리는 놈들이 뭘 하겠어!”
거란 침공 3개월 전, 여진은 고려에 거란이 곧 침입할 거라고 경고했다. 고려 조정은 이를 믿지 않았다. 고려의 방관적인 태도는 거란에게 있어서 확실한 기회였다. 거란 기병대의 속도는 상상을 초월했다. 무방비 상태에 처한 고려 조정의 겁먹은 관리들이 평양 이북의 땅을 거란에 할양하자는 주장을 내세우기 시작했고 이 의견이 우세해졌다. 단 한 사람, 서희가 여기에 반대했다.
서희는 자신이 거란과 강화를 시도하겠다고 주장했다. 청천강 부근의 천막에서였다. 그 안에는 고려의 서희와 거란의 장군 소손영이 앉아 있었다. 적막이 흘렀다. 서희가 의례적인 인사를 거절했기 때문이다. 소손영이 말을 했다.
“당신들 말이요, 송나라와의 교역량이 거대하다고 들었소. 그런데 우리와는 왜 교역에 그렇게 인색하시오?”
서희가 대답했다.
“그건 당신도 잘 알고 있을 것 아니오. 사실 우리 고려는 당신들에게 사올 것이 없어요. 유목민인 당신들이 생산하는 가축들이 있지만 그것은 동북만주에 있는 여진인들에게 구입하면 되고, 비단과 자기는 송에서 가져오면 되지만……, 소 장군! 그러지 말고 이야기의 핵심을 말하시오. 당신들이 원하는 것은 나도 짐작하고 있소이다.”
“음. 서희 장군 지금 우리가 송나라와 전쟁 중이라는 것 아시지요?”
“예, 나는 송에 직접 가서 황제를 만난 적이 있소.”
“그러면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잘 아시겠군요. 여진은 지금 말의 최대 수출국이요. 우리도 매년 말 1만 필을 여진에서 들여오고 있지요. 그런데 여진이 우리에게만 말을 판매하는 것이 아니오. 송에 매년 대량의 말을 수출하고 있어요. 그 말들은 송나라 기병 육성에 핵심이 되고 있어요.”
“잘 알고 있습니다. 여진 말은 압록강 입구를 통해서 산동의 등주로 수출되고 있지요. 그러니까 소 장군께서는 우리 고려가 압록강 입구까지 북진하여 이 부근에 있는 여진족을 몰아내기를 원하시는군요.”
“맞소. 압록강 이남의 땅은 고려의 것으로 인정해주지요.”
991년 거란은 압록강 부근에 위구, 진화, 내원 3개 성을 축조했다. 특히 내원성의 축조는 전략적으로 커다란 의미를 지닌다. 내원성은 압록강 건너편 평안북도 의주에 있었다. 의주 앞의 강가는 유속이 느려 토사가 퇴적해 광범위한 범람원과 하중도가 형성되었다. 여러 개의 하중도들이 일종의 징검다리 구실을 하므로 물살은 더욱 느려지고, 수심은 얕아진다. 갈수기엔 도보로 건널 수도 있었다. 이러한 지리적 환경은 여진의 대송 말무역의 최적의 도로였다.
거란의 책략에 넘어간 서희
소손영은 군사를 돌이켰다. 그 직후 거란 왕제의 허락을 받아 고려가 압록강 동쪽 280리의 땅을 차지하는 데 동의하는 서신을 보내왔다. 서희는 994년부터 3년간 압록강 동쪽의 여진족을 몰아낸 뒤 흥화진·용주·통주·철주·구주·곽주 등의 강동 6주에 성을 쌓아 고려의 영토로 편입했다.
서희와 담판으로 거란군이 물러나고 고려는 영토를 넓힐 수 있었다. 이는 우리 국사교과서에도 서희의 성공적인 외교로 서술하고 있다. 하지만 장기적인 안목에서 보았을 때 그것은 거란 전술가들의 책략에 넘어간 것이었다. 강화 체결 후, 거란은 의주(내원성)를 확실하게 확보하게 되었고, 고려·송 사이의 공무역을 단절시켰다. 이로써 말이 송나라로 들어가는 모든 길이 막혔고, 송의 기병 전략에 치명상을 주었다.
이제 거란은 송에게 두려운 강적이었다. 화북평야 중앙, 송의 수도 개봉과 거란의 국경 사이에는 시야에 들어오는 것이란 평야뿐이며, 거란의 기병을 방어할 수 있는 자연장애물이라고는 전혀 없었다. 1004년 거란군이 하북성을 남하해 송이 건설한 소택지의 방어시설을 깨고 황하의 북안에 도달했다. 송 조정은 거란 기병의 공격에 속수무책이었다. 수도를 개봉에서 양자 강남으로 옮기자는 소리도 나왔다. 하지만 재상 구준의 의견에 따라 사기를 고무시키고자 송군은 황하를 건넜다. 저항의 의지를 보이면서 사절을 거란군 진영에 보냈다. 협상이 성립돼 송이 매년 비단 20만 필과 은 10만 냥을 거란에 증여하는 조건으로 거란군이 물러갔다.
매년 막대한 돈이 거란으로 들어갔고, 그것은 거란의 경제 발전과 군비 증강의 자양분이 되었다. 송이 증여한 돈을 받은 거란은 그것을 고려 침공의 비용으로 사용했다. 전쟁의 목적은 송과 고려의 교섭을 완전히 근절하는 것이었다. 1010년 거란의 성종은 40만 대군으로 통주 부근에서 고려의 주력을 대파했고, 수도 개경까지 쳐들어가 철저히 유린했다(2차 거란전쟁). 그것은 송과의 무역을 단절하고 거란을 통해 송의 물품을 구입해가라는 강력한 경고였다. 무역전쟁이었다. 거란은 고려·송·여진 삼국의 교역로를 거란의 초원 교역로에 편입시켜, 중계무역 차익을 얻어내고자 했다.
자본의 지배는 영원하다
거란에 무력으로 눌린 송은 응주·패주·안숙군·광신군의 하북 4곳에 시장을 개방했고, 거란은 신성·역주·삭주 3곳에 시장을 설치했다. 송나라 상인들은 고려행의 공빙公憑을 받아 중간에 거란으로 방향을 돌리는 불법을 감행하면서까지 거란 무역에 열을 올렸다. 매년 송에서 거란으로 들어오는 거액의 비단과 돈은 상인들을 유혹했다(20만 냥, 비단 30만 필로 증가됨).
현재 식량, 원유, 원자재와 같은 자원 문제가 심각하게 대두되고 곡물 메이저들이 맹활약할 수 있는 무대가 제공되는 근본적 배경에는 WTO 체제가 있다. 거기에 가입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세계 각국이 처한 현실이다. 자유무역에 기반을 둔 수출산업이 수많은 사람에게 일자리를 제공하고 있는데, 만약 WTO의 규정을 어기면 그 나라의 수출산업이 파괴될 것이 뻔하다.
1000년 전 세 번째 전쟁에 승리했지만 고려는 거란의 돈과 비단에 굴복했고, 결국 그 교역권에 편입되었다. 『요사遼史』 「식화지 食貨志」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남쪽 송과 서북의 초원에서 모든 부가 모였다. 동북의 고려·여진·철리에서 나는 재화와 금·비단·베·꿀·밀랍과 모든 약재가 포함됐다. 말갈의 궐등부가 진주와 청설모·담비·아교를 가져와 소·양·낙타·말 털로 짠 그물과 바꾸어갔다. 모든 도로가 요(거란)를 중심으로 끈처럼 엮여 있었다.”
기존의 무역체계를 무너뜨린 거란은 자신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무역체계를 만들어냈다.
130여 년 전 마르크스가 지적한 것처럼 자본의 세계 지배는 영원할 수도 있다. 자본은 끊임없이 진화할 것이고, 영향력을 행사하여 유리한 환경을 창출할 것이다. 1000년 전 거란이 만들어낸 무역체계는 그 나라가 망한 후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에게 계승되었고, 무역으로 고려에서 유럽까지 이어지는 교역망을 확보한 칭기즈칸과 그의 후손들이 세운 원제국에 의해 완성되었다. 원이 사라지자 고려도 사라졌다.(147~156)
〔출처〕 전쟁기획자들
서영교 지음, 2014 글항아리
첫댓글 잘읽었어요 ㅎ. 우크라이나에서도 비옥하고 광대한 농토와 식량, 천연자원 에너지 시장 쟁탈전이 미, 러 간에 전쟁으로 발발...
물론 서유럽은 우크라이나의 전쟁 난민 노동력을 아주 싸게 자본축적으로
네. 전쟁 난민..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