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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의 어휘력
유선경 지음, 앤의서재 2020.
자료와 근거 제대로 활용하기
신문과 잡지의 도움을 적잖이 받았기에 ‘기레기’라는 신조어를 낳고 만 사정을 생각하면 심경이 복잡하다. 하기는 예전에도 ‘어용’으로 불리는 언론사가 적지 않기는 했다. 취재의 중요성은 사실관계 확인에 있다. 취재하지 않은 기사를 기사라고, 취재 없이 기사 쓰는 자를 기자라고, 또 취재 없이 기사를 쓰도록 지시하는 조직을 언론기관이라고 칭해야 하는지에 대한 의구심을 가진 사람이 나만은 아닐 것이다. 그들을 일컫는 새로운 낱말이 없는 이상 내놓고 말하면, 그런 언론사에서 그런 기자들이 쓴 그런 기사들을 어휘력과 문장력, 서사와 구성을 배우는 교재로 선택하지 말라는 소리다.
기자: (명사) 1. 신문, 잡지, 방송 따위에 실을 기사를 취재하여 쓰거나 편집하는 사람.
언론기관: 1. 세상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사건이나 현상에 관한 뉴스와 정보를 취재하여 기사로 작성하고 때로는 의견을 첨가하여 대중에게 제공하는 공적 기관. 신문사, 잡지사, 방송국, 통신사 따위가 있다.
취재: (명사) 1. 작품이나 기사에 필요한 재료나 제재를 조사하여 얻음.
이 책의 원고를 쓰면서 칼럼과 기사를 스크랩하고 필사해둔 노트를 오랜만에 꺼내 훑어봤다. 1995년에 손글씨로 필사한 일간지 칼럼 중 일부를 소개하고 싶다.
형태가 없으니 만져지지 않고 빛깔이 없으니 보이지도 않는다. 냄새가 없으니 맡아지지 않고 중량이 없으니 손에 얹혀지지 않는다. 한데도 분명히 있는 이것은 무엇일까. 우리 한국 사람의 한국 사람다운 심정의 공통분모요, 없는 것 같으면서 실제로 있는 바로 응어리인 것이다. 한국 사람의 역사의식 가운데 특이한 것으로 이 응어리를 들 수 있다. 역사에서 정치적 불의 때문에 희생당한 사람의 못다 한 원한은 예외 없이 응어리라는 존재 형태로 만인의 공감 속에서 영생하면서 당세나 후세의 위정자들에게 경세를 하게 마련이었다.(중략) 우리 조상들은 관권에 억눌리고 제도에 억눌리고 삼강오륜에 억눌리고 가난에 억눌리고 조상에게 억눌리고. 너무나 많은 억눌림 속에서 참고 살아오다 보니 응어리가 고리고리 맺힐 수밖에 없었다. (이하 생략) −조선일보, 1995년 7월 20일자 <이규태 코너>에서.
쉽게 쓰는 ‘한’ 대신 ‘응어리’라는 어휘를 써 직관적이다. 한국인의 응어리를 이해하지 못하면서 무슨 정치를 한답시고! 하는 일갈이 바투 닿는다. <이규태 코너>는 조선일보에 1983년 3월부터 2006년 2월까지 23년 동안 6,702호까지 실려 대한민국 언론사상 최장기 칼럼 기록을 세웠고 중학교 국어교과서에도 실린 적 있다.
당시 조선일보에는 <이규태 코너> 말고도 <만물상>이 있었고, 동아일보는 <횡설수설>, 한국일보는 <지평선>, 중앙일보는 <분수대>, 서울신문은 <외언내언>, 한겨레는 <아침햇발>이라는 제목으로 각각 칼럼이 게재됐는데 매일 비교해 읽는 흥분이 컸다. 신문사나 논설위원의 정치적 성향이 나와 달라도 읽으면 유익했다. 양질의 인문서적이 귀했던 시절이라 다른 어디서 얻기 힘든 지식과 정보를 취할수 있었기 때문이다.
자료와 근거가 8할을 차지하고 주장은 2할 내외다. 그 2할을 주장하기 위해 8할을 총동원했고 읽는 이들이 승복하게끔 순서를 배치한다. 여기서 유의할 사항은 그 8할이 질적으로 편향돼 있거나 양적으로 지나치게 적은 표본을 취해 일반화의 오류를 범하면 유치해진다는 거다.
질적으로 균형 잡혀 있고 양적으로 충분한 자료와 근거를 걸맞은 어휘로 압축해 뒷받침하는 주장은 설령 수신자의 성향이나 믿음과 달라 끝까지 수긍할 수는 없다 해도 증오심은 생기지 않는다. 적의 의견이지만 존중한다는 마음은 이럴 때 생길 것이다.
누군가의 말에 반감을 넘어 증오심까지 생기는 이유는 질적으로 편향돼 있고 양적으로 적은 표본을 취해 자료나 근거랍시고 들이대며 앞뒤 안 맞는 논리와 저질의 어휘력으로 자기가 옳다고 우기기 때문이다. 이렇게 나오면 감정을 자극해서 옳고 그름을 떠나 절대 승복하고 싶지 않다는 강다짐만 하게 만든다.
일찍이 문자가 미디어이자 클라우드가 될 수 있으며 권력과 부로 맞바꿀 수 있음을 알아차린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문자를, 지식과 정보를, 권력과 부를 독점했다. 사실을 왜곡하고 진실(이라 불리는 것)을 창조했다. 문자는 오랫동안 위치재의 속성을 지니고 있었다. 누구나 읽고 쓸 수 있는 문자의 민주화는 불과 백여 년 사이에 벌어진 일로 저절로 열린 것이 아니라 쟁취된 것이다.
이제 웬만한 지식과 정보는 인터넷 검색으로 찾을 수 있다. 위키피디아(Wikipedia)를 비롯해 한국에서 나무위키, 위기백과 등의 이름으로 운영되는 온라인 백과사전은 가히 혁명적이다. 이러한 환경에서 자료와 근거가 빈약한 주장은 글쓴이의 게으름을 대변할 뿐이다. 그래서인지 반대로 부지런함과 유식함을 입증해보일 요량으로 방대한 자료와 근거를 취합해 나열하는 경우도 있다. 전자는 일기에 가깝고 후자는 글이 아니다.
한겨레 1995년 5월 3일자 <아침햇발>에 김금수 논설위원이 ‘메이데이’와 관련해 쓴 칼럼과 2020년 온라인 백과사전 위키백과에 노동절이라는 검색어로 찾은 텍스트를 비교해보려 한다. 1995년에 내가 이 칼럼을 스크랩한 이유는 2020년에 인터넷으로 검색하는 이유와 다르지 않다. ‘메이데이‘가 궁금했기 때문이다. 1년 전부터 가정의 달 5월에, 그것도 첫날이 난데없이 ‘근로자의 날’로 지정됐는데 부르는 명칭이 노동절, 노동자의 날 등으로 제각각이고 왜 기념해야 하는지 알고 싶었다. 이 칼럼은 나의 궁금증을 많지 않은 분량으로 명쾌하게 풀어주었다.
5월 초하루, 메이데이는 세계 노동자들이 함께 기념하는 축제일이자 자신들의 단결과 투쟁을 다짐하는 날이다. 노동자들이 ‘만국 노동자의 단결’과 ‘모든 착취와 억압의 철폐‘라는 일치된 목표를 내걸고 세계 노동절을 기념하는 것은 노동자들의 인간다운 삶을 이루고자하는 소망을 실현하기 위해서다. 메이데이의 유래가 그런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두루 알려진 대로 메이데이는 1889년 프랑스 혁명 100돌을 맞아 세계 여러 나라 노동 단체 대표들이 파리에 모여 국제조직인 제2인터내셔널을 만들고 거기서 5월 1일을 세계 노동절로 정한 데서 비롯되었다. 그 다음 해인 1890년 5월 1일부터 치르게 된 메이데이는 올해로 106번째 기념일을 맞는다. 5월 1일을 세계 노동절로 삼게 된 것은 1886년 5월 1일에 벌어졌던 미국 노동자들의 8시간 노동제 쟁취를 위한 대규모 파업과 피로 얼룩진 시위 투쟁을 기리기 위한 뜻에서였다.
메이데이는 어느 나라에서나 초기에는 가혹한 탄압을 받는 가운데 치르는 수난을 겪어야만 했다. 우리나라의 경우는 더한층 기구한 편이었다. 일제통치 아래서는 1920년대 초기 몇 년을 빼고 메이데이는 ‘금기’의 대상이었다. 일제 패망 이후 부활된 메이데이는 1959년부터 이승만의 지시에 따라 대한노총 결성일인 3월 10일로 바뀌게 됨으로써 제자리를 잃었다. 그러다가 5.16 쿠데타 이후 1963년 4월 ‘근로자의 날 제정에 관한 벌률‘이 만들어져 노동절이란 형식마저 빼앗기고 말았다.
87년 노동자 대투쟁 이후, 89년부터는 5월 1일을 기해 전국 각지에서 메이데이 행사가 해마다 치러졌다. 이런 추세에 밀려 지난해 3월 국회에서 5월 1일을 ‘근로자의 날‘로 한 법률 개정안이 통과됨으로써 메이데이는 되살아난 것이다. 법률상으로 ‘근로자의 날’이란 더께가 남아 있지만 메이데이는 무려 35년 만에 제 날짜를 찾은 셈이다.
메이데이가 세계 노동절로 정해진 지 백 년이 넘는 아득한 세월이 흘렀다. 그동안 세상은 많이도 변했다. 노동자들의 처지나 의식 그리고 투쟁방식까지도 엄청나게 바뀌었다. 그런데도 어두운 노동 현실은 도처에서 목격되고 있다. 메이데이에 비친 노동 현실은 나라 안팎을 막론하고 노동자들의 굳건한 단결과 끈질긴 투쟁을 촉구하고 있는 형편이다. 가까운 데서부터 짚어보기로 하자. 지난 한 해 동안 산업재해로 목숨을 잃은 사람이 2천6백78명이었다. (이하 생략) −한겨레, 1995년 5월 3일자 <아침햇발>에서.
2020년에 1995년의 칼럼을 읽으니 무엇보다 ‘노동’이라는 어휘가 주는 맛이 많이 변화했음을 실감한다. 당시에 ‘노동’은 사회주의자의 용어이거나 머슴이 하는 일을 낮잡아 이르는 말이라는 부정적인 어감이 상당했다. − 지금도 전혀 아니라고 할 수 없다. − 이런 사회적 분위기에서 필자의 논지는 분명하다. 메이데이는 근로자의 날이 아니라 노동자의 날이다. 이를 피력하기 위해 시종 근로자 대신 노동자라는 어휘를 썼고 제 날짜를 찾은 것을 자축하면서도 “법률상으로 ‘근로자의 날’이라는 더께가 남아 있지만“이라는 문장으로 ‘노동자의 날’임을 재차 강조한다.
‘노동’이라는 어휘를 사전에서 찾으면 어디에도 사회주의자의 용어라거나 신분 사회에서 머슴이 하는 일을 낮잡아 이르는 말이라는 풀이가 없다. 표준국어대사전은 ‘노동‘을 다음과 같이 풀이한다.
노동: (명사) 1. 몸을 움직여 일을 함. 2. (경제) 사람이 생활에 필요한 물자를 얻기 위하여 육체적 노력이나 정신적 노력을 들이는 행위.
새마을운동과 함께 유년을 보낸 나에게는 ‘근로’라는 어휘 역시 좋은 어감이 아니다. 초록색 작업복을 단체로 챙겨 입고 땀 흘려 일해야 할 것 같은 압박을 주기 때문이다. 표준국어대사전에서 ‘근로’를 찾으면 그런 어감이 전혀 없지 않다.
근로: (명사) 부지런히 일함.
사전적 풀이만 놓고 보면 노동이 근로보다 도리어 온건하다. 그런데도 노동자의 날이 아닌 근로자의 날로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 대한민국에서 사회주의자들이 쓰는 어휘를 쓸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런 사례가 적지 않은 걸 보면 어휘도 선점이 중요한 모양이다.
어휘로서 ‘노동’은 비교적 자유로워졌다. 무엇보다 행정부처명이 ‘고용노동부’다. 동시에 ‘근로복지공단’이라든가 ‘근로기준법’처럼 ‘근로’도 함께 활발히 쓰인다. 이런 사실은 우리 사회의 가치관의 변화를 시사한다. 노동이라는 어휘를 쓰기 싫은 계층과 노동이라고 칭하는 것이 취지에 맞는다는 계층 간 대립은 끝나지 않았지만 이런 대립이 무색하게 ‘노동’이든 ‘근로’든 반대말은 모두 ‘휴식’이다.
이번에는 2020년의 온라인 백과사전 위키백과에서 ‘노동절‘을 검색해본다. ’근로자의 날‘로 검색해도 같은 같은 내용이 뜬다.
노동절(勞動節, 로동절, 국제로동절, 메데절, Labour Day, Labor Day) 또는 메이데이(May Day)는 노동자의 권익과 복지를 향상하고 안정된 삶을 도모하기 위하여 제정한 날이다. 전 세계적으로 노동자의 연대와 단결을 과시한다. 1886년 5월 1일 미국의 총파업을 노동절의 시초로 본다. 1889년에 제2인터내셔널은 5월 1일을 노동자운동을 기념하는 날로 정하였고, 이후 전 세계로 확산되었다.
1886년 5월 1일 미국 시카고에서는 8만 명의 노동자들과 그들의 가족들이 미시간 거리에서 파업 집회를 열었다. 이들이 집회를 연 이유는 장시간 노동에 대항하여 8시간 노동을 보장받기 위해서였지만, 경찰과 군대의 발포로 유혈 사태가 발생하였고, 결국은 자본가들은 단결투쟁하는 노동자들의 요구를 들어주었다. (중략) 8시간 노동이라는 노동인권을 단결투쟁으로써 쟁취했다는 의미가 있는 노동운동 역사에서 중요한 사건이다. 20세기 초부터 미국 정부가 매년 5월 1일이 사회주의의 냄새를 풍긴다는 이유로, 노동절을 9월 첫 번째 월요일로 바꿔 놓았다.
한국에서는 일제강점기 조선 시기인 1923년부터 노동절 행사가 조선노동총동맹의 주도로 시작되었다. 독립직후에는 2차 세계대전이 끝난 시점인 1945년 결성된 전평과 1946년 결성된 대한노총이 1946년에 각각 노동절 행사를 치르게 되었다.
대한민국에서는 근로자의 날이라고 부른다. 역사적으로는 1958년 이후, 대한노총 창립일인 3월 10일을 ‘노동절‘로 정했으며, 1963년 4월 17일에는 ’근로자의 날‘로 이름을 바꾸었다. 이것이 1973년 3월 30일에 제정·공포되었으며, 1994년 다시 5월 1일로 바뀌었다. 노동절은 노동자의 날로서 노동자의 휴일로 지정되어 있으며, 유급휴가로 인정된다. 하지만, 이주공동행동은 대한민국에서 일하는 이주노동자들이 노동절에도 쉬지 못하고 일을 한다고 밝혔다. −위키백과, ‘노동절’ 문서 참조
위키피디아는 2001년, 한글 위키백과는 2002년 10월에 온라인 서비스를 시작했다. 앞서 예시로 든 칼럼이 7~8년 먼저 나왔지만 취한 자료와 순서가 거의 동일하다. 같은 틀과 구성을 썼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의의를 간략히 소개하는 것을 시작으로 유래, 극적인 전환점, 현재의 사례와 문제점을 짚고 이에 따른 개선사항 등을 제시하는 순이다. 그런데 같은 틀과 구성이라도 예를 들어 논술이나 프레젠테이션에서 둘 중 어떤 글을 택하고 싶냐 묻는다면 대부분의 사람이 위키가 아니라 논설을 택할 것이다. 자료를 아무리 잘 구성해도 자료일 뿐 글이 아니다. 그 차이는 논지와 어휘력에 있다.(217~2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