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여행
지은이:벌마로(김윤식)
두 사람은 각자의 집에서 며칠을 보내고 휴가 마지막 날 부천역 앞 광장에서 만나기로 했다.
작은 가방을 하나 들고 집을 나선 영우는 병휘오빠를 만나러 가는 동안 마음에
갈피를 못 잡고 안절부절 했다. 영우가 약속시간 보다 조금 늦게 도착했다. 부천 광장 옆 로열백화점 앞은 늘 사람들로 붐볐다. 그 사람들 대부분은 누군가를 만나기 위해 기다리는 사람들이다. 소개받은 인연을 기다리며 서성이는 사람, 친구들과 만나서 반갑게 이야기하는 사람, 연인들이 데이트를 하는 모습, 처음부터 포장마차에서 술을 마시기 위해 이곳을 약속 장소로 정해서 나온 사람, 이곳은 인간군상의 진정한 모습을 각색 없이 볼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소신여객 차고지 쪽만 바라보고 있던 병휘가 물결치듯 움직이는 군중들 속에서
자기 쪽을 향해 또각또각 걸어오는 영우의 모습을 담방에 알아보고 반가운 표정으로 손을 흔들어 보였다. 영우도 손을 들어 흔들었다. 영우의 눈에 군용 배낭을
메고 많은 군중 속에 묻혀서 영우를 바라보며 서 있는 병휘오빠의 모습이 왠지 쓸쓸해 보였다.
“오빠”
힘없는 목소리로 병휘오빠의 이름을 불렀다. 평소 들고 다니던 핸드백이 아닌 작은 가방을 들고 온 영우의 모습을 보고 병휘가 물었다.
“오늘따라 웬 가방이야?”
영우는 오늘 핸드백 대신 가방을 들고 나왔다. 그 모습이 병휘의 눈에 의아하게
보일 수도 있었겠다.
“그냥 넣을게 좀 있어서,,,”
영우는 자신이 무슨 의도로 핸드백 대신 가방을 들고 나왔는지 자세히 말하지 않으려는 듯 대수롭지 않게 얼버무리고 말았다. 어찌 생각해 보면 영우 스스로도
무슨 목적이 분명하게 정해진 것이 아니어서 얼버무릴 수밖에 없었다.
짧은 휴가 날들이 지나고 내일이면 병휘의 귀대 날이다. 영우는 기약 없는 헤어짐이 싫어서 우울 했고, 병휘는 강원도 산골로 다시 돌아갈 생각을 하니 막막해서 우울했다. 산골마을이라서 막막한 것보다 영우와 헤어지는 게 싫었고 외로움을 어떻게 견뎌야 할지 몰랐다.
오산 비행장에서 강원도 횡계로 전출 명령을 받았을 당시에는 정신이 아찔했었는데, 막상 강원도로 가서 한동안 새로운 근무지 환경에 적응하고 횡계마을 분위기를 파악하느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지내왔었다. 그런데 휴가기간 동안 도시에서
영우와 함께 보낸 행복한 시간들을 뒤로하고 다시 먼 길을 혼자 돌아가려니 서러움이 북받쳤고, 발걸음을 무겁게 잡아당겼다. 헤어짐의 슬픔은 영우도 마찬가지다. 병휘가 오산부대에 있을 때는 수원에서 만나 커피 마시고 데이트를 즐기고
밤이 늦으면 당연히 헤어져서 각자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무렇지도 않았다. 어쩌다 아쉬움이 많이남아 함께 밤을 보낼 경우에도 다음날 아침이면 어김없이 헤어져서 각자의 목적지로 돌아가곤 했었다. 그때는 언제든지 보고 싶으면 만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돌이켜 보면 갑자기 병휘가 강원도 횡계로 전출을 가고, 지난시간 한 번도 보지
못한 채 그리움으로 사무치는 많은 날들이 얼마나 외로웠는지 새삼 떠올랐다. 휴가기간 내내 두 사람은 떨어지지 않고 붙어있고 싶어 했던 심정을 억누르며 오늘
재회했는데 곧바로 헤어지려니 여간 속상한 게 아니다.
마지막 밤을 보낸 두 사람이 부천 지하상가로 향했다. 군부대 장병들에게 줄 선물을 사려는 거다. 바둑판과 담배, 최신 유행가가 수록되어 있는 카세트테이프,
실장갑, 몇 권의 책을 가방에 담았다. 영우는 옆에서 묵묵히 보며 이런 것들이 왜
필요한지 궁금했지만 묻지 않았다. 이제 몇 시간 뒤면 헤어져야 한다는 착잡함에 다른 생각을 머릿속에 담을 여유가 없었다.
병휘가 메고 온 배낭은 휴가기간 갈아입으려고 가져온 옷들이 가득 찼는데, 여기에 부대에 가져가려고 이것저것 선물을 구겨 넣다 보니 공간이 부족했다. 가방에
물건을 꺼냈다 담았다를 반복하던 병휘가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는 영우를 난감한 표정으로 올려다보며 물었다.
“어떡하지?”
“,,,,,,,,,,,,”
자신의 물음에도 아무 대답 없이 서 있기만 한 영우에게 병휘가 확신 없는 의견을 내놓았다.
“가방을 한 개 더 사야 되나,,,?”
“,,,,,,,,,,,,,”
이번에도 대답이 없자 가방을 하나 더 사는 건 무리라고 생각한 병휘가 꾸역꾸역
물건을 집어넣고 있다. 진땀을 흘리며 가방정리를 하고 있는 병휘의 행동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영우의 머릿속은 온통 병휘오빠와 헤어져야 하는 서러움과
현실 사이에서 머릿속을 정리하느라 넋 나간 사람처럼 서 있었고 그녀의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심지어 병휘오빠가 무슨 말을 하는지 조차 들리지도 않았다. 그래서 아무 대답도 못하고 있었던 거다. 그러다 느닷없이 자신이 미리 마음먹은 생각을 병휘에게 말했다.
“오빠! 나,,, 오빠 따라갈까?”
“뭐라고?”
“,,,,,,,,”
“그건 안 될 말이야”
영우의 갑작스러운 제안에 눈이 휘둥그레 커진 병휘가 놀란 표정으로 영우를 바라봤다. 그런 병휘의 모습을 빤히 쳐다보며 영우는 큰 염려 없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영우의 담담한 모습을 보며 병휘는 어이없어하며 안 된다고 했다. 병휘의
대답에 영우는 오히려 더욱 대담하게 말했다.
“오빠가 어떻게 지내는지 보고 싶어,,, 그리고 나 하루만 있다가 올게. 집에도 적당히 둘러대고 나온 거야,,,”
병휘는 그제야 영우가 핸드백 대신 가방을 들고 나온 이유를 알았다. 영우는 이미 횡계까지 따라갈 요량으로 엄마한테는 시골사시는 친구 외할머니네 놀러가서
하루만 자고 내일 올 거라고 하고 옷가지 몇 벌 만을 챙겨든 채 집을 나온 상태
였다. 하지만 영우의 마음도 그다지 편한 것만은 아니다. 말로는 하루만 있다가
온다고 했지만, 그게 뜻대로 될는지, 아니면 예상치 못한 일로 더 늦어질지, 정말 모를 일이다. 게다가 더욱 머릿속을 복잡하게 만드는 것은 대학 진학이다. 지금껏
병휘와 연애를 하느라고 공부를 게을리 했는데, 지금부터라도 공부를 열심히 해서 대학을 가야 되는 건지, 어차피 안될 것, 일찌감치 포기를 하는 게 맞는 건지,
지금 이 순간 무엇이 옳은 판단인지 모르는 상태다.
부모님께 거짓말을 한 것도 죄송하고 병휘오빠와는 서로 사랑하는 사이라지만 아직 결혼을 생각하거나 약속을 한 것도 아니고 병휘오빠 말고는 아는 이 하나 없이 연고도 없는 산골 마을을 무작정 따라간다는 것이 맞는 행동인지도 깊게 고민해보지 않은 채 따라가겠다고 보채는 중이다. 그것도 병휘오빠의 생각은 염두에도 두지 않은채, 혼자 내린 결정이기 때문에 어제부터 계속 머리가 어수선 했었다. 그런데 지금 병휘오빠는 단호하게 안 된다고 했다. 그래서 영우는 오기가 생겨서 더욱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으려 한다.
난처해진 병휘가 영우를 바라보며 찬찬히 이유를 설명해 주었다. 오늘 자신을 따라가 봤자 하룻밤 자고 아침이면 자신은 출근을 해야 하는데, 그러면 영우혼자
하루종일 방안에만 있어야 하고 답답해할 거란다. 더욱 걱정스러운 거는 군부대라는 것이 언제 비상이 걸릴지 모르는데 갑자기 비상이라도 걸려서 본인이 집에
못 오는 경우가 생기면 그때는 혼자서 어떻게 견디고 있을 거냐는 거다. 병휘가
안 된다는 이유는 이것 말고도 많았다.
병휘의 말은 구구절절이 옳은 말이다. 또다시 고민에 빠진 영우가 일단은 용산
시외버스 터미널까지만 동행하기로 하고 전철을 탔다. 영우는 지난밤 고민에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한 탓인지 병휘의 어깨에 얼굴을 기댄 채 잠이 들었다. 병휘의 손길에 눈을 떴을 때 기차는 용산역에 도착했다.
용산 시외버스 터미널은 사람들로 붐볐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도 저마다의 사연과 목적이 있어서 버스를 타려는 거겠지?’ 하지만 영우는 마땅히 사연도 목적도
찾을 수 없었다. 억지로 무슨 이유라도 찾으려고 해도 생각이 떠오르지 않는다.
그저 핑곗 거리라도 찾는다면 오지탐방? 또 다른 이유를 억지로 찾는다면 초등학교 시절 시골에서 전학 온 아이들한테 들었던 산골풍경 견학? 그때는 상상 속에
산촌을 동경했었던 적이 있기는 했다. 하지만 그 정도의 이유만으로 어린 나이의
영우가 횡계라는 곳이 어디 붙어있는지도 얼마나 먼 길을 가야 하는지도 모른 채
단지 사랑이라는 이유만으로 아직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게 더 많은 한 남자를 따라가려는 이유로는 부족했다. 더구나 확실하게 미래를 약속한 사이도 아닌 남자하고? 도무지 말이 되지 않았다.
갈팡질팡 결정을 못하면서 막상 계획을 포기하고 병휘오빠를 보내고 혼자 집으로
돌아올 생각을 하니까 갑자기 슬퍼졌다. 횡계까지 따라가서 조금이라도 더 같이
있다 오고 싶어졌다. 어쩌면 병휘오빠도 말로는 안 된다고 하지만 마음속으로는
영우와 함께 가고 싶어 할지도 모를 일이다. 아니 병휘오빠는 그것을 더 간절히
원하고 있을게 분명하다. 잠시 고민하던 영우는 모든 것을 병휘오빠에게 맡기기로 마음먹고 한번 더 졸랐다.
“나 오빠따라 갈래”
이쯤에서 병휘오빠가 거절하면 더 이상 보채지 않기로 마음먹고 병휘의 팔에 살그머니 팔짱을 끼었다. 영우의 눈을 지긋히 바라보는 병휘의 눈에 부드러운 이슬이 맺혔다.
“그래 같이 가자. 가서 경포 앞 바닷가 모래도 밟아보고 횡계 산골마을이 어떤덴 지 구경도 하고,,, 우리 그렇게 하자,,,”
“와아! 그럼 동해 바다도 볼 수 있는 거야? 횡계에서 가까워?”
“응 가보면 좋을 거야”
더는 고민을 길게 하지 않기로 마음먹은 병휘가 횡계행 버스표를 두 장 샀다. 길게 줄지어선 버스들 끝에 횡계행이라는 표지가 있고 그곳에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버스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