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6-04 주일설교
패러다임 시프트, 어떻게 할 것인가?
사도행전 11:1~18
“그런 법이 어디 있어?”, “그러면 안 되지.”
사람들이 종종 이렇게 말할 때가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법은 헌법이나 법률이 아니라 우리 사회가 암묵적으로 모두 동의하는 가치 체계를 의미합니다. 이처럼 한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견해나 사고를 근본적으로 규정하고 있는 가치 체계를 우리는 패러다임이라고 부릅니다.
이러한 패러다임은 일반 세상에도 있고 신앙생활을 하는 교회 공동체 안에도 있습니다. “신자가 그러면 안 되지.”, “목사가 왜 그래?” 등의 말을 하는 이유는 신자라면 모두 동의하는 신앙생활의 패러다임이 있기 때문입니다.
패러다임은 정립되는 데도 오랜 기간이 걸리고 또 변하는 데도 긴 기간이 필요합니다. 만일 우리 사회에 패러다임에 반하는 사건이 발생하면 그것은 혁명적인 사건입니다. 그럴 때 구성원들이 분노하거나 혹은 찬반양론으로 갈라져서 극렬하게 싸우게 됩니다. 우리 사회의 혼란을 막기 위해서 우리는 가치 있는 패러다임을 잘 지켜야 합니다.
패러다임 가운데 잘못된 방향으로 굳어진 것이 있는데 우리는 그것을 고정관념이라고 부릅니다. 그런 고정관념은 혼란이 있더라도 바꾸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어떤 패러다임은 잘 보존해야 하고 어떤 패러다임은 깨뜨릴 고정관념일까요? 그 기준을 알기 위해서 본문 속으로 들어 가 보겠습니다.
베드로가 고넬료의 집을 방문하여 그 집안사람들에게 세례를 준 소식은 오래지 않아서 예루살렘에 전해졌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에게 베드로의 행동은 이해할 수 없는 파격적 행보였습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예루살렘에 오자 유대인은 어찌 이방인과 함께 먹고 자며 교제했느냐고 따졌습니다.
베드로는 당황하지 않고 있었던 일을 차근히 설명했습니다. 욥바에서 기도할 때 환상을 통해 주님이 깨끗하게 하신 것을 속되다고 하지 말라는 말씀이 세 번 있었다는 사실, 때마침 이방인 고넬료가 보낸 사람이 찾아온 것, 바로 그 순간에 성령이 의심 말고 가라고 지시하신 것을 말했습니다. 또, 고넬료의 집에 가서 복음을 전하자 그들에게 성령이 임하셨고 그래서 물세례를 주었다고 말했습니다.
그 설명을 들은 사람들은 하나님이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신 것을 인정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이 사건을 통해 유대인 신자들의 패러다임은 크게 변화되었고 그 후 바울과 바나바가 이방인 선교를 시작할 때 이 문제에 대해 논란이 없었습니다.
사람이 살다 보면 저절로 패러다임이 생기는데 그중에 어떤 패러다임은 잘못된 고정관념이 될 수도 있습니다. 잘못된 고정관념은 혼란이 발생하더라도 고쳐야 합니다. 그런 혼란을 위로하려고 “고정관념은 깨어져도 아프지 않다.”라는 말이 있지만 사실은 아픕니다. 고정관념을 깨면 많이 아픕니다.
고정관념 깨기, 영어로 Paradigm Shift는 꼭 필요합니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 패러다임 시프트가 하나님이 주도하시는 것인지 하나님의 뜻과 반대되게 사람들이 주도하는지 파악하는 안목입니다.
만일 하나님이 주도하시는 패러다임 시프트라면 혼란스럽고 아프더라도 고집부리지 말고 바꾸어야 합니다. 본문에 나오는 유대인 신자들이 그랬습니다. 3절에서 베드로를 향해 “네가 무할례자의 집에 들어가 함께 먹었다”라고 비난하던 사람들이 18절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
만일 그런 패러다임 변화가 없었다면 이방인 전도는 하지 못했을 것이고 그랬다면 온 인류를 구원하러 오신 예수님의 계획은 성취되지 못하고 우리 같은 이방인들은 영영 구원받지 못하고 지옥의 땔감이 되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패러다임 시프트는 무조건, 항상 좋은 것은 아닙니다. 이정현의 노래처럼 “바꿔, 바꿔, 모든 걸 다 바꿔”하는 것이 항상 옳지는 않습니다. 패러다임 시프트가 하나님이 아닌 사람들이 주도하는 것이라면 그것을 거부해야 합니다. 우리는 온 몸을 던져 파괴적인 변화를 막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란 잘못된 고정관념보다는 보존해야 할 귀중한 가치관을 깨뜨리기를 잘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는 두 가지 상반된 특징이 있습니다. 한 편으로는 배타성과 고정관념이 강한 특징이 있습니다. 또 한편으로는 선동에 약하고 쏠림현상이 심합니다. 광우병 이야기에 속아 휘둘리던 사람들이 요즘 미국산 소고기 없어서 못 먹습니다. 또 새로운 유행에 경쟁적으로 앞장섭니다. 우리는 잘못된 고정관념을 고집해서도 안 되고 너무 쉽게 시류에 편승해서도 안 됩니다.
배타성과 고정관념이 너무 강했을 때는 이런 말이 필요했습니다. “나와 다른 것은 다를 뿐이지 틀린 것은 아니다.” 그때는 그것이 멋진 말이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다원주의 시대이고 기존 질서는 뭐든지 깨려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특히 오늘날은 “모든 금지를 금지한다.”라는 슬로건을 내세운 프랑스 68혁명의 여파가 세상의 기존 질서를 허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는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는 패러다임 시프트를 거부하고 반드시 보존해야 할 가치관을 사수해야 합니다.
요즘 들어 우리에게 부쩍 익숙해진 개념이 있습니다. 이혼, 낙태, 산아제한, 동성애, 비대면 예배 등입니다. 하지만 이 모두는 하나님이 주도하시는 변화가 아닙니다. 이런 것들은 하나님이 좋아하기는커녕 허락하신 적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혼하는 것을 미워한다고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말라기 2:16). 또, 동성애는 하나님이 가증하게 여기는 것이며 나라가 망하는 원인입니다.
낙태는 성경에서 개념조차 없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낙태라는 말은 자연 유산을 의미하며 이는 저주받은 결과입니다(출애굽기 23:26). 사람이 하는 낙태는 명백한 태아 살해행위입니다. 이는 살인하지 말라는 제6계명을 범하는 것입니다.
비대면 예배는 어떻습니까? 이는 극심한 감염병을 피하기 위한 임시방편일 뿐 정상적인 예배 방법이 아닙니다. 그것을 새로운 정상, New Normal이라고 부르면 안 됩니다.
그러면 산아제한은 어떨까요? 하나님은 사람에게 생육하고 번성하라고만 하셨지 “덮어놓고 낳다 보면 거지꼴 못 면한다.”라고 하신 적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공중의 새도 먹이고 들꽃도 아름답게 하시는 하나님이 너희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이 책임지신다는 믿음이 부족합니다. 애 낳으면 고생한다는 현실론과 내가 좀 더 안락하게 살고 싶다는 이기심,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명령에 순종할 믿음이 부족해서 출산을 거부합니다.
그래서 집마다 아기 소리 대신에 무슨 소리가 들리는지 아시죠? “야, 개 소리 좀 안 나게 해라.”는 유튜브에서 유명한 영상이죠. 오늘날 출산율 급감은 전 세계적인 문제입니다. 특히 우리나라는 출산율이 0.81%밖에 안 됩니다. 그래서 영국 옥스퍼드 인구문제연구소는 인구 부족으로 지구에서 가장 먼저 사라질 나라로 대한민국을 꼽았습니다.
우리가 믿음과 헌신이 부족해서 많은 자녀를 낳지 못하는 것을 송구하게 여길 문제입니다. 이는 New Normal도 아니고 New Paradigm도 아닙니다. 불신자들이 출산을 거부하는 이런 시대에 신자들이 기쁜 마음으로 자녀를 많이 낳아서 경건한 후손을 더 많이 남기는 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올바른 패러다임입니다.
이혼하지 않고 가정을 보존하는 것, 생육하고 번성하는 것, 태아를 살해하지 않는 것, 음란과 동성애를 끊어버리는 것, 신앙 공동체가 함께 모여서 예배하는 것 등은 깨뜨려야 하는 고정관념이 아니라 믿음으로 헌신하며 보존할 소중한 가치들입니다.
그렇다면 깨뜨려야 하고 바꾸어야 하는 패러다임은 무엇일까요? 제가 이 문제를 놓고 기도하는데 하나님이 제 마음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행위는 차별하되 사람은 차별하지 말아라.”
오늘날 세상은 행위와 사람을 구별하지 말고 모두 차별하지 말자고 합니다. 바로 그것이 일부 국회의원이 발의한 차별금지법의 문제점입니다. 사람과 행위를 구분해야 하는 것은 동성애 문제만이 아닙니다. 음행, 도둑질, 폭행, 거짓말 등 모든 죄가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죄는 미워하고 끊어버려야 합니다. 다른 사람도 그런 것을 하지 않도록 말려야 합니다. 사람이 죄를 지으면 그 죄에 합당한 벌을 받아야 합니다. 현재 일부 세력이 제정하려는 차별금지법은 죄를 죄라고 하지 말자고 하고, 정죄하는 사람을 오히려 벌주려고 하기에 문제가 심각합니다.
하지만 죄는 차별하더라도 사람을 차별하면 안 됩니다. 죄를 지었다고 사람을 차별할 것 같으면 우리 가운데 아무도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없습니다. 죄를 가장 미워하시는 하나님은 죄인을 가장 사랑하십니다. 오죽하면 하나님이 사람이 되어 오셨을까요? 오죽하면 십자가에서 고난을 받으시고 죽어 주셨을까요? 오죽하면 성령 하나님께서 죄인들 속에 들어와서 내주(內住) 동행(同行)해 주실까요?
행위는 차별하되 사람은 차별하지 않는 이 엄청난 비밀을 깨달은 사람은 이렇게 기도합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그런데 우리의 본성으로 원수를 어떻게 사랑할 수 있습니까?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행위는 차별하되 사람은 차별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은 우리는 이제 패러다임을 바꿔야 합니다. 원수는 반드시 갚아주어야 한다는 고정관념을 깨뜨려야 합니다.
제가 이 문제를 고민하고 있는데 우연히 제 컴퓨터에 저장해 놓은 영화를 볼 마음이 생겼습니다. “사비나 웜브란트” 여사의 실화를 바탕으로 만든 영화인데, 제목은 “사비나”, 부제는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입니다.
루마니아에 살던 유대인 사비나는 원래 무신론자였는데 남편이 폐결핵에 걸려 요양하다가 예수님을 만나고 사비나도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 후 나치에 의해 유대인들은 극심한 모욕과 박해를 당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이웃에게 사랑과 복음을 전했습니다.
어느 날 사비나의 남편이 가족을 죽인 나치 청년에게 하나님이 살아계시는 것을 증명하겠다며 사비나에게 그 청년을 소개했습니다. 그때 사비나는 그 청년을 부둥켜안고 용서하며 그에게 음식을 대접합니다. 이것이 바로 죄는 차별하되 사람은 차별하지 않는 모습입니다.
그런데 세월이 흘러 러시아군이 루마니아로 진격해오자 나치는 사냥꾼에서 사냥감으로 처지가 바뀌었습니다. 이럴 때 보통 사람이면 러시안 군에게 나치가 숨은 곳을 알려 줄 텐데 사비나는 오히려 나치를 숨겨주고 먹여줍니다. 나치에게 학대받던 사비나가 나치에게 왜 이런 자비를 베푸느냐고 묻자 사비나가 자기 인생 스토리를 들려주면서 영화가 시작됩니다.
무신론자 사비나가 운명적인 사랑을 만나 결혼하고, 무신론자 남편이 결핵에 걸린 이후 예수님을 만나고, 결국 사비나도 예수님의 사랑에 깊이 빠진 이야기, 그 사랑 때문에 가족을 죽인 청년도 용서하고 악랄한 나치도 보호해주는 이야기, 이 모두는 역사적인 사실입니다.
행위는 차별하되 사람은 차별하지 않는 것을 곰곰이 생각할 때 하나님은 저에게 이 영화를 볼 마음을 주셨습니다. 죄를 가장 미워하면서도 죄인을 가장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은혜, 그 사랑을 깨닫고 죄인과 원수를 사랑하는 사비나의 모습, 이것이 바로 저와 여러분이 죄인과 원수를 바라보는 패러다임을 고쳐야 할 모습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