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 화로(火爐)를 닦다 만나는 어머니
남형두
방장님,
"부안"하면 어머니 생각나시죠?
그곳은 제 고향이기도 합니다.
얼마 전 초등학교 동창 녀석이 부안의 한 지역신문(이름도 거창하게 "부안독립신문"이라네요)의 편집국장이 되었다며 글을 청탁했어요. 거절할 수 없었다는 말은 거짓말인 것 같아요.유력 일간지보다 더 쓰고 싶은 마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글 말미에 썼듯 떠난 지 삼십 년이 훨씬 더 지난 고향의 대로를 걸어본 들, 알 사람, 알아줄 사람 하나 없을 테지만, 그래도 고향을 사랑하는 마음은 여전합니다.
어떤 점에서는 짝사랑인 셈인데, 그래도 좋아요. 아무도 저를 알아봐 주지 않아도 상관이 없어요. 그냥 제가 태어났고 자란 곳, 지금은 다른 이들이 그곳을 덮어 살고 있지만, 한 꺼풀만 벗겨보면 추억이 고스란히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참 웃기죠. 저는 문학 근처에도 못 가본 사람인데, 어줍잖은 글 하나 써 놓고 마치 고슴도치 제 새끼 귀여워하듯 다른 일 하다가도 자주 꺼내보게 돼요.그리고 다른 사람한테도 보여주고 싶어집니다.
<빈 화로>
오래 살던 집을 이사하다 녹이 슬대로 슨 놋화로가 나왔다.
사람이나 물건이 젊고 새로울 때는 제 색깔이 있어도 늙고 낡으면 비슷해지는 것 같다.
옛 살림에서 놋그릇이 얼마나 반질반질 한 지는 집안 여자의 부지런한 척도가 되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이 놋화로도 한 때는 제 색을 가졌을 테지만,
어머니가 버리려고 내놓은 잡동사니 속에 묻혀 있으니 한낱 고철덩어리에 불과했다.
이십 오년 전 서울로 이사하면서 넉넉한 살림을 반에 반도 못되는 좁은 곳으로 옮겼으니 나눠주고 버린 물건이 배는 더 되었을 것이다. 그 와중에 버려지지 않고 서울까지 따라 왔던 화로가 이번에는 주인한테 드디어 버림을 받게 된 것이다.
오랜 세월 어머니 곁에 있었던 화로는 어머니에게 무엇이었을까 생각하며 연구실 바닥에 신문지 펴놓고 열심히 닦았다.
어머니는 기왓장 바순 가루를 묻혀 짚으로 닦아야 제격이라고 했지만, 지금 어디에서 기왓장을 구할 것이며 마른 짚을 얻을 것인가. 동네 철물점에서 제조연월일 조차 보이지 않는 금속 광택제를 구한 것은 그나마 다행이었다.
녹을 닦는 것은 세월의 켜를 벗겨내는 일이었다. 한 시간쯤 문지르니 10년쯤 뒤로 간 것 같고, 그렇게 반나절 꼬박 땀을 흘리고 나니 내 기억의 한계인 대여섯 살 시절이 놋 광 속에 흐릿했다.
아무리 닦아도 지워지지 않는 얼룩은 마치 은하수처럼 자연스럽다.
얼룩 하나 하나에 어머니와 할머니의 고단한 삶이 상감(象嵌)되어 있는 것 같다.
화로와 연결된 어머니 기억의 끝자락에는 인두가 있다.
화로에 담겨 있는 벌건 숯 속에 인두를 쟁여 두었다가 할아버지의 한복저고리 동정에 풀을 먹여 빳빳하게 대릴 때 썼다고 한다. 그런데 내게 화로는 고구마와 밤을 구워 먹는 화덕이었을 뿐이다.
할아버지는 밤을 구울 때 화로 주변에 있으면 타닥타닥 튀는 밤 껍질에 눈을 다칠 수 있다고 하여 가까이 못 오게 했다. 지금도 길가에서 군밤 장수를 보면 다가서지 않고 피해가는 버릇은 그때 생긴 것이다.
화로로 시작된 어머니의 말씀은 늘 그렇듯이 고단했던 옛이야기로 흘러간다.
어머니의 얘기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멀찌감치 갔는데, 어머니 손을 놓친 아이처럼
내 기억은 풀 먹인 저고리 동정을 고리로 풀 먹인 차가운 이불에 멈춰 섰다.
형제가 많다보니 한둘은 타지에 있기도 했지만 방학 때는 모조리 한 이불을 덮기도 했다. 풀 먹인 이불 속의 차가움이 새벽까지 이어졌다면 지금껏 불쾌한 기억 속에 있었겠지만 그리움으로 남아 있는 것은 그 순간이 너무나 짧았기 때문이다.
서로 이불을 차지하려 발질도 하고 장난도 치다보면 따뜻해서 잠이 오는 건지,
잠이 와서 차가움을 잊는 건지 지금도 잘 모르겠다.
간혹 출장 중에 호텔방의 가지런한 침대시트에 들 때 비슷한 찬 느낌을 받지만,
형제들의 이불 속 발질이 있는 행복한 잠의 모퉁이에 찾아오는 그 날카로운 쾌감에 어찌 견줄 수 있을까.
화로구이 식당에 화로가 있긴 하다. 그런데 그 안에는 구멍 난 차콜이 담겨 있고
위에는 누에같이 생긴 주름 연통이 흉하게 자리하고 있을 뿐이다.
아궁이에서 타다 남은 장작으로 숯을 만들고 그것을 옮겨 담은 옛날 화로 곁에는
늘 식구들이 있었고 맛있는 먹을거리와 정겨운 이야기가 있었다.
녹을 벗겨낸 어머니의 화로에는 더 이상 군불이 담겨 있지 않지만 그 옛날 차가운 윗목을 덥혀주었듯 내 마음을 따뜻하게 한다.
고향을 떠난 지 꽤 오래되었다. 이제는 부안초등학교에서 제일극장 가는 그 길을 걸어도 누구 하나 알아볼 사람이 없겠지만,그래도 내게 고향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설레어 지는지 모른다.
앞으로 몇 번의 글을 통해 나는 그 길의 녹을 닦아낼 것이다.
옛 건물이라곤 찾아보기 어렵지만 내 마음의 녹을 벗겨내면 그 속에 오롯이 드러날 고향의 모습이 벌써부터 그리워진다.
<남형두/연세대 법대 교수>
旅愁 (Dreaming Of Home And Mother )
賈鵬芳<二胡>
|
첫댓글 남형두의 신문사 칼럼이 6개월로 필진이 교체되었답니다.
특별히 특실(남형두 칼럼방)을 마련 해 주신 지기님과 열정회원님께 감사하는 마음에서.....
공백(빈방)으로 둘수없어 다른 까페에 올라온 글이라도 옮겨봤습니다.
다음 고정필진으로 어떤 신문사의 칼럼을 쓰게될지는
아직 미정....발견 되는 대로 방을 비워 두지 않겠습니다.
어렸을 때 뛰놀던 고향 동네,, 고향은 곧 추억이지요,
옛 생각에 한참 머물러 있었던 것 같습니다,
놋 화로는 열심히 닦아 논 후의 것인 것 같군요......
불이 없지만 잘 닦아진 빈 놋 화로가 더욱 빛을 發散 하네요.
適材適所에 배치한 사진자료와 "旅愁"연주곡,
그리고 글, 三位一體 하나(원초)님 감사합니다.
왜, 코끝이 찡하지.
변산반도의 부안은 조선팔경의 하나로
山, 江 그리고 바다가 한곳에 모여 있습니다.
좋은글 가슴으로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왜 마음이 찡한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