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亡國~ 1910년, 500년 왕조가 역사에서 사라졌다. 비통함에 귀한 목숨을 버린 이들이 수두룩했다. 을사조약 체결후, 외교권을 빼앗긴 외교관으로 러시아에 남아, 구국활동을 벌인 사내, 헤이그 특사 이위종의 아버지, 이범진, 그는 이국 땅 상트 페테르부르크에서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을 한다. 망국의 그날, 그들의 선택,
이범진役/이상협 아나운서: 폐하, 우리의 조국은 이미 죽었습니다. 폐하께서는 모든 권리를 빼앗기셨습니다. 소인은 적에게 복수할 수도, 적을 응징할 수도 없는, 무력한 상황에 처해 있습니다. 자결 이외에는 다른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소인은 오늘 생을 마감합니다.
*이범진의 유서와 당시 사료를 바탕으로 재구성하였습니다. 권총으로 자결-1911년 1월, 러시아 상트 페테르부르크 이범진 자결 순국.
최원정/KBS 아나운서: 경술년에 닥친 나라의 치욕이라고 해서 경술국치라고 부르는 바로 그날, 망국의 날, 오늘 함께 하겠습니다. 한국병합조약은 1910년 8월 22일에 체결되고, 8월 29일에 공표됐어요.
류근/시인: 화면에 亡國이라는 자막이 뜨는데, 그 단어만 봐도 눈 앞이 캄캄해 지면서 절망감이 엄습을 합니다. 정말, 조선 518년 역사가 이렇게 저믄거네요.
이윤석/방송인: 이범진의 자결 모습을 보니까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무력감 얼마나 힘들었을까.
류근: (이범진이) 우리의 조국은 이미 죽었습니다. 정말 먼 이국 땅에서 조국의 죽음과 운명을 같이 했다는 것이죠.
최원정: 우리 지난번 헤이그 밀사때 막내였던 이범진의 아들인 이위종, 이위종을 다루어 봤기 때문에 이범진의 죽음이 크게 다가 옵니다.
이윤석: 제가 지난번에 브리핑을 한 번 쫙 한 적이 있습니다. 자, 이범진이 俄館播遷의 주역이에요. 그리고 주미공사, 러시아 공사를 역임하면서 해외에서 구국활동을 했던 외교관, 그때도 얘기를 했습니다. 이위종의 애국심은 아버지 이범진으로부터 물려받은 것이다.
이익주/서울시립대학교 국사학과 교수: 이범진은 자결하기 전에 자기재산을 전부 정리해서 미주 그리고 연해주에서 활동하고 있는 독립운동자금으로 모두 보내줍니다. 그래서 남은 가족들은 정말로 생계를 잇기 어려울 정도의 경제적 곤궁에 빠졌다고 합니다. (극도의 빈곤에 시달린 이범진의 유족).
이범진의 독립운동 자금 후원액
미주국민회-5000루블, 무관학교-3000루블, 신문사-2500루블, 미주독립운동 단체에 총1만500루블
연해주청년회-3000루블, 신문사-2000루블 연해주 독립운동 단체에 총5000루블,
최원정: 큰 돈이에요. 대대손손 물려줬으면 후손들이 편하게 살 수 있는 돈인데---,
류근: 말 그대로 순국적 사회활동 아닙니까. 찾아보니까 이범진 열사가 사망할 때가 1911년 1월 이더라구요. 그러니까 경술년에 바로 자결한 게 아니고 그 이후 몇 개월 동안 깊은 고뇌 끝에 내린 결단이라고 하니까 그게 더 마음이 아파요. 얼마나 절망 스러웠을까.
이윤석: 자신의 목숨을 바쳐서 합병에 항거를 했지만 또 그 긴 시간 고뇌를 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남아 있는 이들을 독려를 하면서 조국의 독립에 대한 희망과 기대의 끈을 놓지 않았습니다.
심용환/역사 작가: 아까 화면에 자결한 분들의 성함이 지나갔잖아요. 그 수가 얼마나 된 것 같으세요? 확인된 숫자 라는 걸 전제하고서 46명 입니다.
최원정: (확인 안된 것도 있으니까) 그 이상이 될 수도 있다는 거죠.
류근: 우리가 殉國(순국)이라고 할 때 그 殉자가 따라 죽을 순자예요. 그러니까 순국은 말 그대로 나라를 따라 죽었다는 뜻이에요. 우리는 효심이 아무리 지극해도 부모 따라 죽는 경우가 지극히 드물지 않습니까. 그런데 정말 망국의 심정이 얼마나 애통했으면 스스로 목숨까지 버렸을까.
최원정: 항거에 여러 형태가 있겠지만 자기가 순국한다는 것은 개인의 모든 것을 버리는 거잖아요. 돌아올 수 없는 길을 가는건데--,
류근: 매천 황현의 유서가 참 유명하지 않습니까 (황현(1855~1910)-비사 <매천야록>을 저술한 학자 강제병합이 체결되자 음독자결했다). 나는 조정에 벼슬하지 않았음으로 사직을 위해 죽어야 할 의리는 없다. 허나 나라가 5백년간 사대부를 길렀으니 이제 망국의 날을 맞아 죽는 선비 한명이 없다면 그 또한 애통한 노릇 아니겠는가.
최원정: 우리가 잘 알고 있을 것 같으면서도 어떻게 보면은 한번도 제대로 읽어본 적 없는 문서를 준비했습니다. 함께 보시죠. 한일병합조약서입니다.
한일병합조약
제1조 한국 황제 폐하는 한국 전부에 관한 통치권을 완전히 또 영구히 일본 황제 폐하에게 양여한다.
제2조 일본국 황제 폐하는 전조에 게재한 양여를 수락하고 또 완전히 한국을 일본 제국에 병합하는 것을 허락한다.
제3조 일본국 황제 폐하는 한국 황제 폐하, 태황제 폐하, 황태자 전하와 그 후비 및 후예로 하여금 각각 그 지위에 따라 상당한 존칭, 위엄 및 명예를 향유케 하고 또 이를 지켜나가는데 충분한 세비를 공급할 것을 약속한다.
제4조 일본국 황제 폐하는 훈공이 있는 한국인으로서 특히 표창하는 것이 적당하다고 인정되는 자에 대하여 영예 작위를 주고 또 은급을 준다.
제5조 일본국 정부는 전기 병합의 결과로 한국의 시정을 전적으로 담임하여 해지에 시행할 법규를 준수하는 한인의 신체 및 재산에 대하여 충분히 보호하고 또 그 복리의 증진을 도모한다.
제6조 일본국 정부는 성의 있고 충실히 새 제도를 존중하는 한인으로서 상당한 자격이 있는 자를 사정이 허락하는 범위에서 한국에 있는 제국의 관리에 등용한다.
제7조 본 조약은 한국 황제 폐하 및 일본국 황제 폐하의 재가를 경유한 것이니 반포일로부터 이를 시행한다.
류근: 잠깐만 잠깐만요. 병합조약서라니요? 적어도 한국인이라면 반드시 강제라는 말을 부쳐줘야 합니다.
최원정: 그러니까 병합이라는 말 자체가 문제라는 거지요.
류근: 그렇죠. 일제 강압에 의해서 체결된 조약이니까 마땅히 강제를 부치는 것이 옳다고 보는 거죠.
최원정: 그런데 병합 합방 병탄 이런 용어들이 혼재해서 사용되는데 이걸 한번 어떤 게 올바른 표현인지 정리를 하고 넘어가죠.
박준형/서울시립대학교 국사학과 교수: 먼저 이 조약에 쓰인 병합(倂合)이라는 말에 대해서 설명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 놀랍게도 이 병합이란 말이 옛날부터 쓰이던 말이 아니고요. 오히려 조약을 위해서 탄생한 말이라고도 합니다. 그 당시 일본 외무성의 정무국장으로서 이 병합 자체를 추진해가던 담당자가 있는데 그 사람이 쓰는 문서를 이윤석씨가 한번 읽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이윤석: 나는 한국이 완전히 멸망하여 제국 영토의 일부가 되었음을 명확히 하는 동시에 그 어조가 그다지 과격하지 않은 글자를 고르고자 여러 가지를 고려했다. 결국 적당한 문자를 발견할 수가 없었던 까닭에 일반적으로 사용하지 않은 문자를 선택하는 것이 득책이라고 생각하여 倂合이라는 문자를 사용하였다. 이렇게 되어 있는데---,
최원정: 병합이라는 단어 하나를 쓰는데 깊은 고민을 했다는 얘기네요.
이윤석: 뭔가 저항감을 최소화하려는 의도가 보이는데 그런데 왜 굳이 또 병합이라는 단어가 적합한지는 잘 모르겠어요.
박준형: 당시에는 병합이라는 말 보다는 오히려 합방(合邦)이라는 단어가 많이 쓰였죠. 그런데 그 합방이라는 단어의 뜻이 어떤 두 나라가 있으면 대등한 관계에 하나의 나라로 합친다는 뜻으로 이해가 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일본으로서는 한국을 병합하면서 그럴 생각이 없었던 거죠. 그렇다고 대한제국을 강제로 멸망시켜서 식민지로 만들었다 라는 말을 하고 싶지가 않았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신들의 강제성을 한편으로는 숨기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사람들이 대등한 관계에서 나라를 합친 것을 오해하지 않도록 신중하게 고른 말이 병합이었는데 그 당시 굳이 쓰지않던 말을 고름으로서 사람들이 도대체 이게 무슨 뜻인지 알지 못하게 만들었던 거죠.
이윤석: 지금까지도 잘 모르고 있었으니까.
최원정: 정말 머리써서 고른 단어인데 우린 지금 아무 생각없이 일상적으로 쓰는 용어가 돼버린거네요.
이익주: 정리하자면 한일합방, 한일병합, 또는 한일합병 이런 말을 이제 쓰지 않는 것으로 하고 여기서 이제 우리 모두가 기억을 해둬야 하는 거죠. 그러면 뭐라고 부를 건가 이게 중요한 겁니다. 일제에 의한 倂呑, 이 呑이라고 하는 단어에 삼키다는 뜻이 있어요. 그래서 일제가 대한제국을 삼켰다. 또는 강제로 했다는 것을 살려서 강제병합 이렇게 부르는 것이 이 사건의 역사적인 의미를 담는 정확한 용어라고 생각을 합니다.
이윤석: 그러면 한국강제병합, 이런 표현이네요.
이익주: 그렇죠. 그래서 아까 류근 시인님이 지적한 강제 라는 말이 들어가야 된다는 것이 정말 정확했던 거죠.
최원정: 아무튼 이날 이후에는 대한제국이 사라진 건데 이후에 일제에 의한 무단통치가 시작이 되는 거죠.
심용환: 단계적이죠. 러시아 무너뜨리고 우리나라를 보호국 만들고 그리고 의병 다 정리하고 나니까 뭐냐하면 조선의 사법체계하고 경찰체계를 무너뜨리는 일을 하는데 그게 1909~1910년 사이에 벌어진 일인데 군대해산(1907년) 과 경찰해산(1909년)이 다 되고 당연히 이렇게 되면 모든 권력은 조선총독부로 이관될 수 밖에 없는 상황으로 흘러가는 거죠. 당연히 대한제국의 내각도 사라지게 됩니다. 그런데 대한제국이 사라졌다는 것을 느낄 수 있는 상징적인 작업이 하나 있습니다.
류근: 상징적인 작업이라면 태극기를 없앤다?
최원정: 지도에서 Korea를 지우고 Japan 이라고?
심용환: 노골적으로 이때 들어난 게 뭐냐 하면 황실격하작업, 표현을 다 뜯어고치는 거예요. 일본은 대한제국의 황실을 일본 귀족령으로 하게 하고요. 대한제국의 국호도 원래 있었던 조선으로 회귀시켜 버리게 되고,
최원정: 일본이 대한제국을 다시 조선으로 부르라고 했던 거예요?
심용환: 그렇죠. 황제는 왕으로 고쳐 부르게 돼요. 그래서 순종 같은 경우는 창덕궁 이왕, 고종 같은 경우는 덕수궁 이태왕 이라고 불렀습니다. 창덕궁에 사는 이씨왕 이렇게---,
류근: 결국 대한제국을 선포하면서 고종이 그토록 지키고자 했던 황제의 지위를 다시 왕으로 끌어 내린 거잖아요. 그리고 마찬가지로 거기서 이전의 조선으로 되돌아간 거고,
이익주: 이때 결정된 것을 우리가 무심코 쓰는 말이 하나가 있어요. 조선을 이조(李朝)라고 부르는 겁니다. 그래서 이씨조선 이라고 하는 말을 이조라고 하는 건데 그것이 이때 일본 사람들에 의해서 만들어진 겁니다. 이왕의 조선, 이게 이씨 조선이 거든요. 그래서 이것은 반드시 고쳐야 할 식민지의 유산입니다.
심용환: 외국서적들도 보면 Lee Dynasty 라고 쓰는데 이건 일본 영향이 커서 그런 거예요.
최원정: 한국 황실은 일본에 편입된 일개 가문이잖아요. 전적으로 써서는 안될 표현이군요.
심용환: 그리고 중요한 게 뭐냐 하면 이완용으로 상징되는 그 당시의 친일파들은 손해본게 없어요. 왜냐 강제병합의 공이 그들에겐 혜택으로 돌아가게 되는데 그 유명한 귀족 작위를 하나 받게 됩니다.
최원정: 공신대접을 해 준 거네요.
-------------------이상협 아나운서 등장, 지금부터 황실종친과 고위관료 명망있는 정객들에게 일본의 귀족작위를 수여하겠습니다.
먼저 종친 및 황실가족 10명:
후작-이재완 이재각 이해창 이해승 윤택영
백작-민영린 이지용, 자작-이기용 이완용(덕안군의 아들) 윤덕영
다음은 고위관료:
박영효: 후작 작위와 은사금 16만 8천원을 수여한다.
그리고 이완용: 백작작위와 은사금 15만원을 수여한다.
자작: 박세준, 조중응, 고영희, 민병석, 민영규, 송병준--- 길다, 한가하신 이윤석씨 잠깐 도와 주시겠습니까?
이윤석: 너무 많아요?
이상협: 녹화시간이 모자라기 때문에 일본 귀족 수락자 총인원수만 발표하였습니다. 끝에서부터 여기까지 총76명이나됩니다. ---너무 많은데, 이 정도면 카페수준인데---, 우리 한번 꼭 밟아보고 갈까요?
최원정: 처음 시작 했을 때 이름을 다 기억했는데 76명까지는 다 못외우겠네요.
이윤석: 명단 밑에 보면 작작작작 작작해서—친일도 작작 좀 하지~
박준형: 작위 중에서 가장 높은 지위가 후작인데요. 후작에는 전주 이씨 종친, 아니면 임금의 사위라든가 아니면 왕의 장인이 여기에 속하게 되고요. 후작 아래에 백작과 자작이 있는데 이 사람들은 울사5적, 정미7적이라는 사람들이 여기에 모두 포함됩니다. 이완용과 같은 사람은 을사5적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정미7적이기도 한 사람인데, 이 사람은 백작 3명중에 한명으로 작위를 받게 되는 거죠.
최원정: 이런 작위가 주홍글씨가 되어야 하고 은사금도 다 환수해야 되는데---,
심용환: 실제로 작위를 받은 사람 중에 억만장자가 된 사람도 있다고 합니다. 이완용을 말씀하셨으니까 말씀드리는 건데 고종퇴위-정미7조약 이때 기여한 대가로 받은 10만원을 포함해서 다 긁어서 땅을 삽니다. (10만원+귀족수작 은사료 15만원->땅 매입), 땅을 사는데 말하면서도 일제 초기 그가 소유한 땅이 얼추 봤을 때 여의도 면적의 1.9배, 어마 어마하죠. 이걸 나중에 팔아요. 팔아서 현금으로 바꿨을 때 그 당시의 돈 300만원 정도가 되는데 추정치로 봤을 때 현재 약 400억대 되는 돈입니다.
류근: 나라를 판 돈으로 땅을 샀군요. 망한 나라에서 부동산 투기 라는게 말이 됩니까.
심용환: 머리 속에는 권력, 재테크, 두개 밖에 없는 거잖아요.
류근: 이완용 말고도 자작작위 받은 사람중에 윤덕영 이라는 사람이 있어요. 윤덕영에 당시 소유한 땅이 옥인동 전체 면적의 54% 였다고 합니다. 제가 서촌에 자주 놀려가거든요. 이 사람이 서촌에 아주 의리의리한 대저택을 지었다고 해요. 벽수산장이라고 하는건데, 이 사람의 대저택의 총면적이 약 1만 6천평에 저택 크기만 약 800평입니다. 이 8백평이 실감이 안되는데 논이 네마지기에요.
심용환: 감이 안와요.
류근: 그래서 제가 사진을 가지고 왔어요. 이게 윤덕영의 집입니다.
심용환: 으리 으리 하다.
이윤석: 난 서양 베르사유 궁전인 줄 알았어요. 밑에는 초가집이에요. (초가집과 대조되는 윤덕영의 대저택),
최원정: 으리 으리한데 아직 남아 있어요?
류근: 이 집은 지금 사라졌지만 그가 딸에게 주었다는 집은 지금 있어요. 그게 어느 집이냐 하면 윤덕영의 대저택 아래에 바로 이 집입니다. 윤덕영의 딸의 집, 이 집이 요즘 서촌 투어를 하면 만날 수 있는 서촌의 명소 박노수 가옥입니다. 1973년도에 박노수 화백이 구입해서 이게 지금 남아 있는 거죠. 참고로 박노수 화백은 탤런트 이민정씨의 외할아버지입니다. 아무튼 엄청난 규모의 집을 가지고 떵떵 거리며 살고 있었는데, 그런데 일제 덕분에 나팔분 사람들이 진짜 많다는 거예요.
최원정: 일제가 돈과 권력으로 회유한 거잖아요.
류근: 그럼요. 황실은 격하돼도 관리들은 잘 먹고 잘 살수 있다는 확신을 주고 있는 거죠
최원정: 그런데 저는 놀라운 게 작위 수여자가 76명이나 되는지, 그만큼 대한제국의 고위층이 부패했다고 봐야 되는 건가요?
심용환: 다만 모두가 그러지는 않았다는 그걸 집고 넘어갈 필요가 있습니다. 아까 시작했을 때 봤었던 46명의 자결 순국자의 명단이 있었잖아요. 거기에 보면 김석진이라는 분 같은 경우는 작위를 받은 걸 수치로 여겨서 자결하는 계기가 됩니다. 그리고 대원군의 둘째 사위였던 조정구도 자결을 시도했구요. 작위를 반납한 이들도 있습니다. 윤용구, 한규설, 민영달, 홍순달, 조경호는 작위를 반납했습니다.
최원정: 우리가 오늘 국권이 피탈된 그날 바로 그들의 선택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자결순국 하신 분들, 일제에 협력해서 작위를 받은 사람들, 또 한 부류의 또 다른 그들이 있습니다. 망국을 앞두고 무려 백만명의 서명을 받은 성명서 하나를 준비했는데요. 요거는 류 시인님이 읽어주세요. 아마 부들부들 떠실 거 같애요. 저거 읽으시면서~
류근: 일본은 우리를 러시아 사람들에게 한 덩어리 고기를 먹히는 것을 면하게 하고 동양의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이게 뭐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한제국은 헤이그 문제를 만들어 냈고 정국의 변동을 일으켰다. 을사보호조약을 체결한 것 또한 우리 스스로가 초래한 것이다. 이게 뭐죠? 무슨 뜻입니까?
최원정: 남아 있는 내용도 읽어주세요.
류근: 문제의 해결은 법에 기초한 양국의 합방에 있다. 이게 뭐예요? 이런 엉터리 같은 성명서 백만명 서명을 받았다는 게 무슨 뜻입니까?
이윤석: 한국인이 쓴 게 맞나요? 아닌 것 같은데~,
최원정: 우리가 살 길은 합방이라고 말한 사람이 누군가요?
박준형: 그거는 一進會 라고 하는 단체가 1909.12.04에 발표한 합방성명서의 일부 내용입니다. 1910년 8월에 강제병합이 되는 거니까요. 그 이전에 그 보다 훨씬 이른 시기에 8개월전에 일진회 라는 단체가 합방을 청원했다는 건데요. 그래서 일본의 일부 극우세력 중에는 이것을 근거로 해서 한국이 식민지가 되는 것을 청했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형태로 병합이 이루어졌다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는 거죠.
이윤석: 일단 그 문서 자체도 아 우리 책임이다. 우리가 잘못했다 이런 내용으로 돼서 화가 나는데~,
류근: 노골적 매국 성명인데 이런 걸 가지고 우리가 병합을 주장했다는 자체가 말 그대로 견강부회 라고 하는 거죠. (牽强附會-가당치도 않은 말을 억지로 끌어다 부쳐 조건이나 이치에 맞추려고 함),
최원정: 조작의 냄새가 나지 않나요? 백만 서명을 할 수가 있어요? 어떻게 백만 서명을 받아요?
류근: 우리나라 국민이 전체 인구가 약 2천만명 됐을텐데 백만명이 서명했다는 게 지금도 쉽지 않아요. 이건 조작된 것 아닙니까?
박준형: 당시의 신문에서도 백만명에 대해서는 자칭 이라는 말을 붙여서 얘기하는 경우가 많이 있었습니다.
이익주: 이게 주최측 추산이라는 거지요.
이윤석: 그나 저나 일진회는 많이 들어 봤습니다. 하지만 정확히 뭘한 단체인지는 사실은 잘 몰라요.
류근: 이윤석씨 같은 경우는 학교에서 많이 들었을 거에요. 친일파-매국노의 상징이잖아요.
이윤석: 거기까지는 제가 알고 있는데 그 이상은 몰라요. 이완용이 모은 단체라는 느낌이긴 한데~
이익주: 일진회가 1904년에 만들어집니다. 러일전쟁(1904~1905)에 협력하면서 자기들의 입지를 키워나가요. 그리고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고 포츠머스 조약(1905)이 맺어지니까 일본에 보호국을 자칭하는 그런 선언서를 발표했고(1905년 포츠머스 강화조약-러일전쟁 이후 러일간 체결된 조약, 한국에 대한 일본의 우월권 승인), 이때 일본의 보호국을 자청하는 선언서 발표, 통감부가 설치된 다음에는 일제 침략단체인, 흑룡회 라고 하는데와 손을 잡고 한일합방운동을 추진합니다. 지금 류근 시인이 읽으신 저 글이 한일합방을 청원하는 글이잖아요.
이윤석: 흑룡회는 드라마 미스터 션사인에 등장하는 걸 봤어요. 무시 무시한 일본 낭인집단으로 나오던데요.
최원정: 요것도 오해가 있을 수 있어요. 구동매로 열연을 하셨던 유연석씨가 바로 흑룡회 소속이었는데, 그런데 친일을 미화할 수 있다는 이유로 시청자들이 많은 항의를 했데요. 그래서 무신회 라는 가상의 조직으로 다시 바꾸었다구요.
이윤석: 맞아요. 역사를 바탕으로 드라마를 만들 때는 저런 명칭도 신중해야 되는데 빠르게 시청자의 얘기를 잘 수용한 거 같애요.
최원정: 조금 멋지게 나오잖아요. 유연석씨가~,
이윤석: 제가 알기로는 흑룡회 상부조직이 명성황후 시해사건과 연관되어 있다고 알고 있거든요.
박준형: 바로 그 흑룡회 수장인 우치다 료헤이 라는 일본사람이 바로 일진회의 고문으로 들어가거든요. (우치다 료헤이(1874)-흑룡회 수장이자 일진회 고문, 이토 히로부미와 함께 한국에 들어옴), 우치다 라는 사람은 이토 히로부미가 통감으로 부임할 때 데리고 온 사람인데요. 이 사람은 일진회의 고문으로 있으면서 배후에서 조종하는 역할을 하고 있었습니다. 실제로 일진회 출신 송병준 이라고 하는 사람은 고종의 폐위에 다른 사람들 보다도 앞장서고 나서서, 결국에는 그것을 관철시키는 일을 하게 되는 거죠. (송병준(1858~1925)-헤이그 특사 사건이후 고종퇴위 운동을 벌인 친일 정치가 친일인명 사전에 등재),
이윤석: 그러니까 일진회는 최악의 친일집단이다. 더 이상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 같은데요.
최원정: 조금 더 집고 넘어갈 부분이 있습니다. 자, 일진회 의외의 진실, 우리 같이 맞춰 보도록 하겠습니다.
일진회의 중심 축은 ( ① )이었다.
일진회와 이완용은 ( ② )였다.
일진회는 ( ③ )단체였다. 일진회는 어떤 단체였을까?
류근: 저거 너무 쉽죠.
최원정: 그래요? 얘기해 보세요.
류근: 일진회의 중심축은 당연히 (①친일파 세력) 이었다?. 일진회와 이완용은 (②공생관계)였다? 일진회는 (③친일단체)였다? 저거 보기에 세 개를 딱 묶어서 너무 쉬운 거예요.
최원정: 그렇게 뻔한 문제를 냈을까요? 일진회의 중심축은 (동학/독립협회 세력)이었다. 일진회와 이온용은 (적대관계)였다. 일진회는 (애국/계몽운동)단체였다.
류근: 이런 친일적 반동이었단 말예요?
이윤석: 일진회가 동학 독립협회 세력이라구요?
최원정: 애국계몽운동을 했다구요? 대혼란에 빠졌습니다.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거예요?
이익주: 자, 먼저, 일진회의 중심축은 동학과 독립협회 세력이었다. 이건데요. 일진회가 1904년에 만들어질 때 이걸 만든 사람들은 우리 전에 다루었던 독립협회 있죠? 이걸 이끌었던 사람들이 처음 일진회를 만드는 주축이 됩니다. 그리고 이 사람들이 러일전쟁을 할 때 일본군 통역으로 왔던 송병준을 통해서 일본과 접촉을 하게 돼요. 또한 동학은 민회를 조직해서 활동을 재개하기 시작해요. 이용구 라는 사람이 주도하게 되는데 진보회를 조직합니다. 그런데 일진회와 진보회가 세가지 점에서 일치하는 점이 있었어요. 첫째는 황실을 존중한다, 둘째 인민의 생명 재산을 보호한다, 셋째 일본군에 대해서 협조한다. 이 세가지 강령이 거의 비슷했고 그러다 보니까 우리 합칩시다.
이윤석: 우리는 동학-독립협회 하면은 민중이 중심이 되는 운동으로만 알고 있었는데 일진회 하고 저렇게 연결이 되어 있는지는 꿈에도 생각을 못했어요.
최원정: 一進會 라는 뜻이 무슨 뜻이에요?
박준형: 한 一자에다 나갈 進자인데요. 여러가지 해석은 가능하겠지만 함께 나아가다 라는~
최원정: 의미는 참 좋은데---,
이윤석: 나는 일진회가 일본 日자인줄 알았어요.
심용환: 규모가 굉장히 큽니다. 그리고 대한제국 당시 최대 규모 단체였습니다. 지금으로 말하면 정당이라고 부를 만큼 규모를 자랑했고, 어찌됐건 스스로 독립협회를 계승할려는 의식을 뚜렷이 했구요. 실제로 그 단체의 본거지 같은 경우도 독립관에다 자리를 마련할려고 했으니까 우리의 예상과는 다른 거죠.
박준형: 또 하나의 반전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일진회가 우리가 친일파라고 얘기를 많이 하지만 이들이 가장 강조했던 것은 자주와 권리 라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권리가 보호된 국민들로 구성된 자주독립국가를 건설하자 라는 것을 주장했다 라고 하는 데, 그러니까 이들이 독립협회계열과 동학계열이 합쳐져서 만들어진 단체라고 생각하면 이게 그렇게 이상한 일은 아니라는 얘기죠. 독립협회나 동학이나 양반의 지배에 대해서 어떤 강한 불만들을 품고 있어서 그것을 개혁해야 된다는 주장을 많이 했던 것인데 민권을 어떻게 하면 더 향상시킬 수 있을까 그에 대한 많은 관심을 갖고 있었습니다.
류근: 그쯤 되면 대중에게 인기를 끌만한데요.
최원정: 친일-매국하고는 이미지가 좀 다른데요.
심용환: 예를 들면 이완용 같은 경우는 상류층을 대변하는 집단이다. 우리는 중-하층민을 대표하겠다 이런 컨셉으로 보면 좋을 것 같구요. 일진회와 이완용은 적대관계 였다고 말하잖아요. 실제로 이완용 같은 경우도 어떤 일진회가 하층 무뢰배 출신이라고 냉소했다는 기록까지 아직 남아 있습니다. 반대로 일진회 같은 경우도 그 이완용 내각을 가족내각이라고 비판을 했었고, 일진회측과 이완용측 간에 엄청난 매국경쟁이 일어나는데 엄청나게 경쟁을 했던게 사실입니다.
류근: 매국경쟁 이란 말?
이윤석: 너무 혼란스러워 가지고~
이익주: 여기서 혼란스러우시죠. 우리가 이 시기의 역사를 한국과 일본의 일대일의 관계로 보게되면 이런 부분이 설명이 안돼요. 그런데 한국내의 신분의 문제가 있고,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의 갈등이 또 존재하고 있어요. 그런데 한국 뿐 아니라 거의 모든 나라들이 그나라 안에서 신분제를 폐지하고 근대국가로 나아갈려는 노력을 하는 한편에 외세의 침략을 또 받아서 이 두가지 문제가 복잡하게 얼키게 되는데 바로 일진회의 이 문제가 거기에서 서로 교차되는 부분이 있는 거죠.
이윤석: 그런데 모르겠어요. 전 아무리 설명을 들어도 느끼기에는 그냥 친일 세력들간의 각축전이에요. 이완용은 뭐 저런 것들이 라고 하는 것 같고 일진회는 야 너희들이 다 해 먹냐 이런 것 같고, 저는 그렇게 생각이 돼요.
최원정: 친일은 내가 할게, 어디 저런 것들이 친일이야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이익주: 바로 그거예요. 같이 친일을 하는데 누가 친일을 하느냐 그걸 이제 신분별로 다르게 하는 거예요. 그러면 이해가 되는 거죠.
최원정: 일진회의 입장에서는 대한제국의 중하층민을 대변하면서 사회개혁을 내세우는 거잖아요. 친일만 안했어도 좀 멋질 뻔 했는데 왜 친일을 선택한 건가요?
박준형: 일단 그러면 일본이 내세운 논리가 뭐였기에 친일을 하게 되었는가, 당시 일본이 내세운병합의 논리, 한마디로 말하자면 동양 평화론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한국이 항상 동양평화론의 화근이 되는 존재이기 때문에 한국을 일본에 병합시킴으로써 그 화근을 없애고 그를 통해서 동양 평화를 영구적으로 실현하겠다 라고 하는 논리를 내세우고 있었던 겁니다. 서양, 백인들의 침략에 대해서 황인종이 연합을 해서 그에 대응하자 라고 하는, 당시에 그 인종색이 섞인 세계인식에 근거를 하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가 있고 이 내용이 식민지화의 단초를 제공할 수 있는 얘기인데도 불구하고 당시 일진회는 이 내용을 크게 공감하고 있었다 라고 합니다.
심용환: 너무 이해가 안된다 라고 생각하면 안되는게 이거잖아요. 조선왕조에 대한 절대적 충성을 전제로 하면 이건 말도 안되는 얘기지만 내가 지금 쌍놈으로 태어나서 지금도 지옥인데 일본애들하고 새로운 나라를 세우겠다 하면 시간이 지나서 지금 보면 잘못된 것이지만 그때는 설득력이 있는 거죠.
이윤석: 이제 뭔지 조금 감이 잡혀요. 아까 구동매 같은 경우도 백정의 아들이잖아요. 계급모순을 안고 있지만 민족 앞에서는 결국은 무릎을 꿇게 되는 거구 그런 것들 끼리 모순들이 있었다는 거죠. 그리고 지금 교수님 말씀은 황인종들끼리 똘똘 뭉쳐 가지고 세계를 주무르는 백인종들에 대항하자 그럴려면 한중일 3국중에 그래도 힘이 있는 일본이 리더가 되어야 하지 않겠느냐 뭐 이런 논리인 것 같은데요.
최원정: 저는 지금 정신이 없습니다. 굉장히 혼란스러워요. 마찬가지실 거예요. 정신 똑바로 차리고 진실을 향해 가야합니다.
류근: 그러고보면 일본의 주장에 대해서 중국은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지 그것도 궁금해지지 않습니까?
최원정: 그렇습니다. 그래서 저희가 이 분을 모셨는데요. 중국분이신데 국립외교원 주임강사로 계시는 천리 교수님께 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 교수님, 안녕하세요?
천리/국립외교원 전임강사: 안녕하세요?
최원정: 오늘 굉장히 예쁜 옷을 입고 오셨네요. 그게 청나라 옷인가요?
천리: 네, 맞습니다. 오늘 주제에 맞춰서 제가 신경을 좀 썼습니다.
최원정: 역사저널 그날 좋아하신다고~?
천리: 저는 애청자입니다. 한국역사에 높은 관심을 가지고 방송 다 보고 있습니다.
최원정: 한국말 굉장히 잘 하시네요. 저희가 지금 강제병합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데요. 한중일 3국이 모여서 황인종의 힘을 보여주자. 이런 일본 주장에 대해서 중국은 당시 어떤 입장이었나요?
천리: 사실은 한국합병 당시에 이미 일본에 대해서는 약간 경계하고 있는 입장이었어요. 특히 만국평화회의에 참석했잖아요. 그 당시에 청나라 정부가 참석하여 보니까 거기서 일본이 중국을 남미국가보다 더 낮은 3등국가로 만들려고 노력하고 있는 것을 보면서 더욱 일본에 대해서 더 경계해야 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특히 그때 중국 언론에 난 기사 하나 읽어 드릴까요? (중국말로 신문기사를 읽음).
최원정: 교수님, 한국말로 좀 해석해 주세요.
천리: 중요한 중국 정보 드릴려고 중국어원문을 읽었는데요. 한국어로 읽어드리겠습니다.
-----------------무릇 일본이 원하는 것은 만주를 삼키는 것인데 이를 위해서는 반드시 대한제국부터 멸망시켜야한다. 대한제국은 일본이 만주로 건너가기 위한 다리이다. 일본 황제가 대한제국으로 천도하거나 해마다 한번씩 행궁할 것이다. 이는 장차 일본 황실이 만주로 천도할 것이라는 소문이다. 일본제국은 기필코 대륙국가가 되려고 한다. ----<신주일보> 1910년 8월 30일자.
이윤석: 그러니까 중국도 한국강제병합 사건 때문에 일본을 더 경계하게 됐다. 이런 얘기 같네요.
천리: 네, 맞습니다. 그래서 중국에서 이런 말이 있는데요. 순망치한(脣亡齒寒)~
일동: 어디선가 들어본 듯한 사자성어~~?!
류근: 발음 좋으시네~
천리: 네, 맞습니다. 바로 순망치한인데요 (脣亡齒寒-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리다는 말로 서로 떨어질 수 없는 밀접한 관계를 의미), 중국에서도 대한제국에 이어서 중국도 바로 멸망한다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사실은 한중일 3국 황인종들이 힘을 합쳐서 힘을 같이 키우자는 자세에 대해서는 중국 지식인들도 상당수 공감하고 있지만 군국주의-제국주의를 주장하고 있는 일본이 리더 라고 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최원정: 병탄에 대해서 중국이 당시에 별다른 대항을 하지 않았지요?
천리: 별다른 대응을 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때 청나라 상황이 좋지 않았습니다. 한국인들도 잘 알고 있는 서태후가 한국병합(1910년) 2년전에 사망했습니다(1908년). 그때 두살인 푸이제가 즉위했습니다 (푸이 溥儀(1906~1967)-淸의 마지막 황제인 선통제로 2세의 어린 나이에 즉위),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로 다음해 1911년은 청나라는 신해혁명으로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최원정: 우리가 기댈 수 있는 상황은 절대 아니었다는 거~, 오늘 중국에서 바라본 한국 강제병합에 대한 이야기 잘 들었습니다. 천리 교수님, 잘 들었습니다. 우리가 지금 일진회의 의외의 진실 3가지를 보셨잖아요. 1. 일진회의 중심축은 동학/독립협회세력이었다. 2. 일진회와 이완용은 적대관계였다. 3. 일진회는 애국계몽단체였다. 두 개는 어느 정도 이해가 됐어요. 그런데 애국계몽단체였다?
류근: 애국이 좀 걸려요.
최원정: 애국이 뭡니까, 이게?
이윤석: 불법-매국만 생각했었는데~~
이익주: 우리가 1910년 이전에 국권을 침탈당할 때 거기에 저항한 운동이 두 종류가 있었어요. 하나는 전에 우리가 살펴본 의병전쟁, 다른 하나는 저 애국계몽운동입니다. 애국계몽운동이라는 것은 우리가 이렇게 일본으로부터 침략을 당하는 것은 우리의 힘이 없기 때문이다. 힘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라고 생각을 해서 그렇다면 힘을 길러야 되는 것 아니냐. (애국계몽운동(=자강운동)-민족의 힘과 실력을 양성하여 국권을 회복하려는 운동). 우리가 스스로 강해지자 하는 뜻에서 자강운동이라고 하는데 일진회는 사실은 갑오개혁 그 이전에 그리고 독립협회 이전 전통을 잇는 애국계몽운동 연장선상에 있었다는 이야기죠. 그런데 여러분들이 지금 말씀하시는 것처럼, 그게 어떻게 애국이냐 하는 비판이 있어서 요즘은 애국계몽이라는 말 대신 그냥 계몽운동 또는 자강운동 이런 말을 많이 쓰죠.
이윤석: 애국계몽운동은 펜으로 싸우고, 의병은 총으로 싸운다. 이렇게 이해를 했고 아까 드라마에서도 대사가 나와요. 한 언론인이 나는 쓰겠소 그대는 쏘시오.
류근: 결국은 애국계몽운동의 키워드는 학교 설립, 해외유학생파견, 신문잡지 발간, 그 다음에 산업진흥으로 정리가 되잖아요. 그런데 이런 것들이 일진회와 어떻게 통한다는 것인가요? 구분을 해서 설명을 들어야 되겠습니다.
이익주: 네, 힘을 키운다는 것과 우리가 자주독립을 한다는 것을 가지고 우선순위를 다르게 생각을 하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독립을 하기 위해서 우리의 힘을 키워야 한다. 그러니까 선실력양성 후독립 이렇게 되는 거죠. 그런데 사람들은 독립을 잃은 상태에서 힘을 키우는게 무슨 의미가 있느냐 먼저 독립을 한 다음에 실력을 키워야 한다. 이래서 애국계몽운동계열의 사람들이 두 갈래로 갈라지게 되는데 먼저 실력을 양성하고 독립은 뒤에 한다고 하는 쪽에 아주 극단적인 형태가 저런 일진회 같은 조직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심지어는 우리가 실력을 키우는게 급선무고 실력을 키우기 위해서는 일본의 도움을 받아야 된다고 까지 생각을 한 거죠.
최원정: 우리가 애국계몽 운동하면 학교 다닐 때 배운 대표적인 게 국채보상운동, 경제적으로 실력을 양성해서 국권을 회복하자 이런 것을 달달 외웠던 기억이 있는데요.
이익주: 애국계몽 운동의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국채보상 운동 이죠.
심용환: 가장 유명한 사례죠. 1907년 년도부터 외우죠. 대구 갑부 서상돈이 기부하면서 시작된--- 양기탁과 영국인 베델이~ 대한매일신보 황성신문 제국신문이 주도 했고, 시험이 어디서 틀리느냐 하면 이거 탄압해서 실패하잖아요 총독부가 탄압 했을까요? 통감부가 탄압 했을까요?
1.다음 중 국채보상 운동을 탄압한 기관은? ①통감부 ②조선총독부
이윤석: 아, 나 또 틀리겠는데~ 통감부?
심용환: 통감부죠. 1907년 이니까.
류근: 오늘 우리가 망국을 얘기하고 있기 때문에 총독부가 왔을 것 같은 느낌이 있단 말이에요. 학생들이 그것을 헷갈리면 안될 것 같애요.
심용환: 국채보상 운동은 1907년에 시작됐고요. (국채보상 운동 1907-국채 1300만원을 갚아 경제력을 기르고 국권을 회복하자는 애국계몽 운동), 일본에서 도입한 차관 1300만원, 쉽게 말하면 나라 빚을 갚아서 제발 좀 우리가 자주주권을 찾자 라고 주창하는 운동이고요.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계층별로 다 참여했고 가장 이상적이었던 것이 무엇이냐 하면 이것은 어떻게 보면 뛰어다니고 총도 쏘고 이러는 게 아니라 가지고 있던 패물이나 돌반지 같은 걸 모아서 자산을 모으는 운동이었기 때문에 부녀자들, 우리 역사에서 여성이 주체가 되어서 시작된 운동으로 굉장히 높게 평가를 받아요. 그리고 금주단연 운동이라고 해서 술을 끊고 담배를 끊고 그 돈을 모아서 나라의 빚을 갚자 라는 운동으로 유명하죠.
최원정: IMF 때 금 모으기 운동과 굉장히 많이 비교가 되면서 이슈가 됐었어요 (금 모으기 운동-IMF 경제위기 당시 대한민국의 빚을 갚기 위해 국민들이 자발적으로 약 227톤의 금을 모아 세계적 이슈가 됨), 세계적으로 유래없는 모금활동 운동이었잖아요.
이윤석: 그때 결혼반지, 돌반지, 연예인들은 트로피에 받은 금부치까지 빼 가지고 내기도 했습니다.
최원정: (이윤석씨를 향해) 혹시~?
이윤석: 저는 금 붙은 건 못받아봤어요.
최원정: 죄송합니다.
이윤석: 어쨌거나 유래가 없는 백성인 것이 전쟁이 나면 의병이 모이고, 부도가 나면 의연금이 모이고, 이승철씨가 이런 노래 불러야돼요-그런 백성 또~ 없습니다.
류근: 선독립 후양성론을 주장한 대표적인 주자 가운데서 단재 신채호 선생님이 계시지 않습니까? 그 분이 이런 주장을 펼쳤다고 해요. 제가 거칠게 정리를 해보니까, 결국 뭐냐 하면 “국가가 망하면 민족의 보존이 불가하다 민족없는 황인종 보종론이 어떤 의미가 있는가” 이런 거예요.
박준형: 당시 신채호는 1900년대말에 논의상황이란 것을 보국론-보종론으로 구분하고 있었던 건데요. 保國論이란 것은 말 그대로 국가를 더 보존해야 된다는 거고 保種論이란 것은 인종, 황인종을 더 우선시해야 한다 라는 이야기입니다. 망해가는 시기에 보종론을 주장하는 것은 미래에 외계인이 침략하는 것을 지금부터 벌써 걱정하는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라고 비유를 해서 설명하기도 했습니다.
류근: 그때 100여년전에 외계인의 개념이 있었단 말에요?
박준형: 외계인이라기 보다는 他星(=다른 나라별)인 거죠.
최원정: 일진회가 애국계몽운동을 했다고 했잖아요. 실력양성 운동을 위해서 뭘 한 게 있어요?
박준형: 실력양성 운동에 있어서 핵심적인 것 중에 하나가 학교, 교육의 문제인데요. 일진회도 사실은 교육활동 등을 해나가고 있었습니다. 서울서 광무학교를 세워 가지고 거기서 교육활동을 했던 건데요. 거기에서는 일본어를 중심적으로 가르치고 여기서 졸업한 학생들은 탁치부, 경무청, 취득국 등 관청에 하급관료로서 취직을 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이윤석: 그러면 이게 일종의 통감부의 식민통치를 위해서 필요한 곳에 인원들이 배치되는 그런 것인데요.
심용환: 심지어 언론사도 설립을 합니다. 이게 중요한 게 뭐냐하면 한 단체가 운영하는 재정이, 돈이 어디서 나왔냐 하면 통감부, 그리고 군부, 결국 일본의 지원을 받으면서 운영했던 단체니까 일본의 지배정책의 하수적인 기구로 쓰였던 거죠.
최원정: 말이 좋아 애국계몽운동이지 이건 다 어용학교, 어용신문사, 애국 뺀 계몽운동이잖아요. 그런데 그 계몽운동이라는 게 자체도 우리가 지향하는 바와 완전 반대, 우리 민족을 위해서는 아닌 거잖아요, 뭐예요?
이익주: 초기에 시작할 때는 계몽운동이라고 할 수 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친일로 변질이 돼요. 그러다 보니까 동학내부에서 이거는 아니다 라는 자각의 목소리가 나옵니다. 동학의 3대 교주이고 실질적으로 동학을 지도하고 있었던 손병희가 이때 천도교 라고 하는 새로운 이름으로 개명을 해요. (1905년). 그러면서 이용구 같은 일진회 회원들을 전부 제명을 시킵니다. 그러면서 일진회와 동학의 주류가 완전히 결별을 하게 되는 거죠. 그만큼 일진회의 성격이 변했던 것입니다.
최원정: 그들을 제외한 건 너무 상식적인 거예요. 선을 그어야죠.
이윤석: 잘 했죠.
최원정: 일진회는 이제 대놓고 친일의 길을 걷는 거네요.
심용환: 결정적인 계기가 뭐냐 하면 이제 한국강제병합이 이루어져 버렸잖아요. 사람들한테 아예 친일단체로 각인이 되어 버립니다. 친일단체로 각인이 됐다는 건 누구에게 표적이 됐을까요? 단발하고 도리우치를 쓴 사람은 모두 일진회 회원이다 아예 단정해 버리고 공격을 하게 됩니다.
최원정: 뭘 썼다구요?
심용환: 도리우치,
이윤석: 도리우치가 좀 낯선 분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오늘 처음으로 뭘 꺼내드네요.
최원정: 도리우치를 준비하셨어요?
이윤석: 자, 일단 단발을 위해서 상투를 잘라야 됩니다. 제가 상투를 잘라 볼게요.
최원정: 당시 단발령을 했으면 상투부터 잘랐을 테니까.
이윤석: 자, 이렇게 해서 자릅니다. 왼손으로 상투 꼭대기를 잡고 오른손으로 상투를 자릅니다. 이게 쉽지가 않아요. 아유, 손가락에 쥐가---,
류근: 왜 그렇게 험한 일을 시켰어~
최원정: 단발 드디어 다 왔습니다. 도리우치 설명하다.
이윤석: 이렇게 상투를 자르면, 머리 자른 틈 사이로 텅 빈 정수리가 드러납니다. 왜 그러냐 하면 머리 숫이 많은 분들은 상투를 예쁘게 틀어야 되는데 상투가 커지거나 잘 틀어지지가 않는 거예요. 그러니까 숫을 좀 치고 밀었어요. 정수리 부분은 소갈머리 라고 하죠. 그러니까 상투를 자르고 나면 민망하고 보기가 좀 그러니까, 이걸 가려야 돼잖아요. 그때 이 도리우치(민망함을 가려주는 모자)를 쓰는 겁니다. 도리우치는 일본말,
류근: 일본 앞잡이는 꼭 도리우치를 쓰더라구요.
최원정: 이런 모자 쓰고 다니면 의병의 표적이 되어서 일진회는 생명의 위협을 느꼈다는 거잖아요.
심용환: 1907년 7월부터 1908년 5월까지 약 11개월 동안 의병에게 살해된 일진회 회원이 무려 9260명이라고 기록이 나와 있습니다.(1908.6.16.일자 대한매일신보).
최원정: 그렇게 많이요?
심용환: 정말 표적이 된 거지요. 그래서 방법이 뭐냐하면 안되겠다 싶어서 일진회 자위단을 설립해서 스스로 지키는 방안을 또 만들어요. 결과적으로 뭐냐하면 자위단을 실질적으로는 통감부나 친일내각이 주도를 해서 운영하는 형태로 하니까 실질적으로는 일본헌병이나 군인, 경찰이 장악을 하니까 완전히 이용만 당하고 버림받게 되는 모습이 되는 거죠.
류근: 어쨌든 일본이 무조건 다 받아주는 것도 아니네요. 일본에 팽당한건데~ 제가 망신 스럽습니다.
최원정: 매국경쟁하다가 토사구팽당한 거잖아요.
박준형: 이토가 신뢰했던 것은 양반계급이었던 이완용이었던 거지, 하층무뢰배로 간주되어 있었던 일진회가 아니었다는 거죠. 이완용이라고 대표되는 양반내각의 취약성을 일진회 라고 하는 대중조직을 통해서 보완하려고 했던 것이지, 그 이상의 역할을 바라고 있던 것은 아니었던 거죠. 그래서 결국 일진회는 병합 이후에 더 출세를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을 수 모르겠지만 사실은 병합과 동시에 다른 단체들과 마찬가지로 해산되고 맙니다.
이윤석: 일진회는 이름만 일진회지 역사 앞에서 한 발자국도 나가지 못한 거네요.
이익주: 저는 이 사람들한테서 가장 없었던 것이 역사의식이라고 생각을 해요. 자기의 행동이 긴 역사 속에서 어느 한 싯점에 있는 것이라고 생각을 안했기 때문에,
이윤석: 오늘이 2018년 마지막 방송인데, 그날 대한제국의 마지막 날을 다루고 있다고 생각하니까 기분이 묘해요 망국의 날, 1910년 8월 22일 이죠. 그날을 살았던 사람들이 오늘이 108년 뒤이 거든요. 108년 뒤에 역사저널 그날이란 프로그램에서 본인들 얘기를 할까 짐작이나 했을까 오늘 역사 앞에서 이범진은 살았고 이완용은 죽었다. 그런데 아마 또 지금으로부터 108년 후에 또 다른 누군가가 이 자리에 앉아서 우리에 대해서 얘기를 할 거란 말이예요. 그래서 저도 그렇지만 중요한 자리에 있는 분들은 긴 호흡을 갖고 역사를 보면서 살아야 한다 라는 생각을 다시 한 번 했습니다.
최원정: 뼈 있는 한 마디네요.
심용환: 우리가 친일파 다 나쁘잖아요. 나쁘다고 얘기하고 저도 나쁘다고 생각하고 여기서 중요한 건 친일파를 우리가 나쁘다고 규정할 순 있지만 이게 역사로 계속 있었던 사람들 이거든요. 천도교에서 이용구를 쫓아냈지만 이용구가 거기서 끝난게 아니에요. 시천교를 만들었고, 간도 얘기하면 간도에 무장투쟁만 얘기하지만 바로 그 자리에 만주보민회, 간도협조회 같은 수많은 친일단체들이 있었어요. 1936년에 보면 간도협조회 회원수만 7000여명이예요. 그말은 무슨 얘기냐 하면 친일파를 좋다 나쁘다를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나뻐! 나뻐! 그런데 그 사람들이 왜 생기느냐는 것이죠. 역사 속의 악은 실제하는 거고 그 악이 발생하지 않도록 우리가 그냥 나뻐하고 덮기 보다는 이것을 우리가 처음 역사 저널에서 한국방송사상 최초로 일진회 이야기를 자세히 한 것 같은데 악을 물리친 추적자들이 되는 것도 좋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같이 해봅니다.
최원정: 2019년은 굉장히 뜻 갚은 해예요. 뜻 깊은 해의 첫 방송은 3.1운동 및 대한민국 임시정부수립 100주년을 기념하면서 3.1운동 그 후 100년으로 찾아 뵙도록 하겠습니다. 한 해의 마무리 잘 하시고요. 시청자, 여러분 새해 복 많이 받으시기 바랍니다. 끝. (KBS 역사저널 그날 42화, “1910년 망국의 그날, 경술국치”에서 정리).
① 庚戌國恥, 亡國의 날, 1910년 8월 22일 한국병합조약에 의해서 한국이 일본에 병합됩니다. 한국이라는 나라는 지구상에서 없어졌습니다. 경술년에 닥친 나라의 치욕이라고 해서 경술국치라고 부릅니다. 조선 518년 역사가 막을 내렸습니다. 이 소식을 듣고 러시아 공사 이범진이 자결을 합니다. 이범진은 자결하기전 전재산을 독립운동자금으로 모두 보내줍니다.
② 경술국치를 당하여 애통, 충격으로 자결한 사람이 46명, 나라가 죽었으니 나라를 따라서 殉國한 것임. 매천 황현은 유서에서, 나는 조정에 벼슬하지 않았음으로 사직을 위해 죽어야 할 의리는 없다. 허나 나라가 5백년간 사대부를 길렀으니 이제 망국의 날을 맞아 죽는 선비 한 명이 없다면 그 또한 애통한 노릇 아니겠는가 라는 유언을 남겼다.
③ 일제는 노골적으로 조선황실격하 작업시행, 대한제국의 황실을 일본 귀족령으로, 대한제국의 국호도 조선으로 회귀, 황제는 왕으로 고쳐 부르게, 순종은 창덕궁 이씨왕, 고종은 덕수궁 이씨태왕, 이때부터 일본이 조선을 이조(李朝)라고 부르는데, 이는 이씨조선 이란 말을 이조라고 하는 건데 일본인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으로 반드시 고쳐야 할 식민지 유산, 전적으로 써서는 안될 표현,
④ 한국강제병합으로 친일파들에게 공신대접, 귀족 작위, 종친 및 황실가족 10명: 후작-이재완 이재각 이해창 이해승 윤택영, 백작-민영린 이지용, 자작-이기용 이완용(덕안군의 아들) 윤덕영, 고위관료: 박영효: 후작 작위와 은사금 16만 8천원을 수여. 이완용: 백작작위와 은사금 15만원을 수여. 자작: 박세준, 조중응, 고영희, 민병석, 민영규, 송병준,------귀족 수락자 인원수만 총76명입니다. 이 사람들 중 이완용은 을사5적이기도 동시에 정미7적이기도 한데, 백작 3명중에 한명으로 작위를 받음.
⑤ 이완용은 고종퇴위-정미7조약 대가로 10만원+귀족수작 은사료 15만원으로 땅을 사는데 여의도 면적의 1.9배, 이걸 나중에 팔아서 현금으로 바꿨을 때 그 당시의 돈 300만원 정도, 현재 약 400억대 돈, 자작작위 받은 윤덕영이 당시 소유한 땅이 옥인동 전체 면적의 54% 였다.
⑥ 46명의 순국자 중에는 76명중 작위 받은 걸 수치로 여기고 자결한 김석진이 있고, 대원군의 둘째 사위 조정구도 자결시도, 작위 반납하였고, 윤용구, 한규설, 민영달, 홍순달, 조경호도 작위 반납, 국권이 피탈된 그날 바로 그들의 선택에 순국 하신 분들과, 일제에 협력해 작위를 받은 사람들, 또 한 부류의 다른 사람들이 있다. 그건 1904년에 만들어진 一進會라는 악명 높은 친일 매국단체였다.
⑦ 나중에 이범진의 남은 가족들은 정말로 생계를 잇기 어려울 정도로 경제적 곤궁에 빠졌다고 한다. 8.15 해방이 되고 대한민국 정부가 이범진의 후손들을 얼마나 도움을 주었는지 그들이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궁금하다. 젊었을 적에 독립운동을 하면 삼대가 망한다는 말을 많이 들었다. 오늘 역사 앞에서 이범진은 살았고 이완용은 죽었다. 국가의 중요한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역사의식을 갖고 공직에 충실해야 한다.
⑧ 2015년 7월 민족문제연구소에서 광복회 회원 전원에게 설문지를 보냈는데 1115명 응답자의 의견을 분석한 결과, 독립운동가 가족 75%가 월소득 200만원 미만이고, 본인들 보다 자식들, 손자녀들, 증손자녀들이 월소득이 200만원 미만 이하 비율로 더 높게 나타났다고, 이는 국가보훈정책이 62년부터 시작이 되었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대한민국이 잘 되려면 모든 독립운동가들을 국가가 기억해 주고 잘 대우해 주어야 함은 두 말할 필요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