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것은 제작기법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철불은 만드는 과정에서 외형틀을 조합할 때 틀과 틀 사이에 쇳물이 새어 나와 분할선이 생긴다. 실상사 철조여래좌상은 외형틀 분할선이 안면과 가슴에는 없고, 신체 측면이나 옷주름에 배치되어 있으며, 형지 역시 안면과 가슴 같은 부위는 피해서 설치되어 있다<Table 3>. 실상사 철불의 이러한 주조 특징은 이 불상이 시원적인 형태의 철불임을 알 수 있게 한다. 금동불 제작이라는 전통의 연장선상에서 실상사 철불은 철이라는 재료적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심혈을 기울인 것이다. 이러한 실상사 철불 제작기법은 왕실 발원인 보림사 철불과도 유사하다.
따라서 실상사 철불은 보림사 철불과 인접한 시기에 조성했을 것이다. 실상사는 洪陟(?~?)이 829년 창건했다고 추정하며, 830년경부터 興德王(재위 826~836)을 통해 왕실과 연결되었다. 그러나 선종이 사회·정치적으로 주목을 받고 왕실이 집중적으로 관심을 보인 시기는 閔哀王(재위 838~839) 이후이다. 당시는 많은 선승이 귀국하여 지방에 정착하고, 다양한 단월을 받아들여 지방에 영향력과 세력을 확장하였기 때문에, 왕실은 선사를 통해 지방지배력을 강화하고자 하였다. 흥덕왕 이후 민애왕, 神武王(재위 839)까지 왕위쟁탈전이 있었으며, 이 혼란을 진정시키고 왕이 된 文聖王(재위 839~857)은 나라의 안정에 주력하였다. 문성왕은 지방세력에 의해 왕이 되었으므로, 지방지배 강화에 관심이 많았다. 문성왕은 선종을 지원하여 실상사 외에도 惠哲(785~861)의 大安寺, 無染(800~888)의 聖住寺를 추인하였으며, 실상사 뿐아니라, 대안사, 성주사에도 철불이 존재했던 흔적이 있다. 이러한 상황을 통해 문성왕이 선종을 후원할 때, 대형 금동불 조성은 사회·경제적 부담이 컸기 때문에 대형 철제 불상을 조성한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63 9세기 중반의 실상사 철불 양식, 문성왕의 선종에 대한 열의, 840년 이후로 추정하는 홍척의 입적 연대를 통해 실상사 철불 조성은 840년 즈음으로 생각된다.
Table 3.
<통일신라 철불의 외형틀 분할선>
삼화사 철불 역시 큰 얼굴, 얼굴 대비 신체 폭이 좁거나 길어지는 비례, 다수의 도식적이고 구불거리는 선 형태의 옷주름이 표현되었다(Fig. 5). 구불거리는 등간격의 형식적 옷주름은 봉화 축서사 석조불상(867년)과 유사하다(Fig. 6). 명문에는 석가불 말법 3백여 년에 조성한 내용과 화엄종 고승 決言이 나오므로, 명문과 불상 양식을 종합해 볼 때 景文王(재위 861~875)대 조성했을 것이다. 제작기법도 앞선 두 불상과 다름을 알 수 있다. 삼화사 철불은 21개의 외형틀로 제작했다고 추정한다<Table 3>. 실상사나 보림사 철불의 치밀한 주조계획에 비해 삼화사 철불은 신체 정면에 분할선이 있으므로 섬세함이 떨어진다. 도피안사 철불은 경문왕 6년(865) 조성했다는 조상기가 있으며, 얼굴 크기에 비해 좁은 동체부 폭, 상체 길이에 비해 좁은 하체 폭, 등간격의 층단식 옷주름과 작은 손의 표현 등은 9세기 양식과 동일하지만 조형미가 떨어지는데(Fig. 7), 도피안사 철불은 왕실과 관계없이 향도 1,500명이 발원하였기 때문이다. 이를 반영하듯 도피안사 철불은 외형틀 7개로, 삼화사 철불에 비해 제작이 더 간소화되었다<Table 3>.
한천사 철불은 도드라진 인중이나 긴 상체 표현이 9세기 불상과 같다(Fig. 8). 한편 다리 앞 옷주름은 불국사 금동불이나 보림사 철불과 같이 非定型이며, 해인사 법보전 비로자나불상의 다리 앞과 허벅지의 옷주름 형태가 유사하다<Table 2>. 옆으로 넓은 얼굴, 오른쪽 겨드랑이와 가슴 표현방식도 해인사 비로자나불상과 비슷한데(Fig. 9), 해인사 불상은 中和 3년(883)의 묵서명이 있어, 한천사 철불도 9세기 후반에 만들어졌을 것이다. 한천사 철불은 실상사나 보림사 철불처럼 분할선을 가슴부위에 두지 않고 삼도나 옷주름을 따라 구성하고 있다. 복식과 가슴을 나누는 외형틀은 편단우견의 주름에 감춰져 있으며, 옷주름이 복잡한 전면부는 외형틀을 다수로 조성하였는데, 섬세한 조성기법은 실상사 철불의 제작기법과 유사성이 있다<Table 3>.
문성왕대부터 정치·경제적인 이유로 철불을 조성하였고, 주조기술도 중국과 상관없는 신라의 기술로 보인다. 현존하는 철불 가운데 가장 이른 시기로 볼 수 있는 실상사 철불과 그 뒤를 잇는 보림사 철불은 주조할 때 외형틀 분할선이 최대한 드러나지 않게 만드는 특징이 있는데<Table 3>, 중국 철불은 외형틀 분할선이 등간격으로 나타나므로 조성방식이 다르기 때문이다(Fig. 10). 중국은 이른 시기부터 철불을 만든 것으로 보이지만 현존하는 상은 당대 이후부터이며, 그마저도 다른 재질의 불상에 비해 매우 적고, 현존하는 철불 대부분은 송대 이후의 것이다. 현존하는 상이 많지 않아 다수의 사례를 비교할 수는 없으나, 현존하는 당대 철불인 중국 山西省 大云寺 철불, 山東省 濰坊市博物館 철불, 開花寺 철불(Fig. 10)과 나한상을 통해 보면 촘촘한 등간격의 외형틀 분할선이 나타난다. 陝西省 西安博物 館의 靜法寺 철불은 외형틀이 촘촘하지는 않지만 일정한 간격으로 상·하·좌·우 외형틀이 나뉜 것을 볼 수 있다. 한천사 철불 역시 실상사와 보림사 철불과 마찬가지로 외형틀 분할선을 옷주름 등에 숨기는 방식으로 조성되었다. 그러나 삼화사 철불 및 도피안사 철불의 경우 실상사나 보림사 철불에 비해 외형틀 분할선이 정면에도 배치되며, 비슷한 크기의 한천사 철불보다 외형틀 개수가 줄어드는 등 제작 방법이 단순해지는 경향이 나타나는데, 이러한 단순화 경향은 고려시대 철불에서 더욱 가속화된다<Table 3>.
철불 조성 시기를 토대로 철불의 의미가 변화하는 과정을 살펴보고자 한다. 실상사 철불은 문성왕이 관여한 것으로 보이고, 보림사 철불은 憲安王(재위 857~861)의 후원으로 조성하였으므로, 초기 철불이 왕실과 관련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실상사 철불은 선문이 개창되었을 당시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보림사의 경우 859년 보림사 철불을 조성했을 때 體澄(804~880)은 武州 黃壑蘭若에 있었고, 859년 겨울 왕이 가지산사(보림사)로 옮기기 청한 후에야 보림사에 주석하였으므로, 체징이 없을 때 철불은 조성되었다.75 이를 반영하듯 보림사 철불 명문에 체징은 언급되지 않는다. 신라 왕실은 원활한 지방 지배를 위해 지방의 선종 사찰을 지원한 것으로 보이는데, 왕실의 후원을 드러내기 위해 대형 불상을 조성한 것으로 생각된다. 이 때 청동제품 수요의 증가와 주석 수급과 같은 경제적인 요건으로 인해 대형 불상의 조성은 신라가 충분히 보유하고 있던 철을 이용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장흥 보림사 보조선사탑비」에는 노사나불 1구를 주조하여 절을 장엄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신라 왕실은 거대한 불상으로 장엄한 도량을 만들려는 의도를 가지고 후원한 것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이후 왕실의 위엄과 장엄한 도량이라는 철불 조성의 목적은 조금씩 변화하였고, 선종의 인식도 달라진다. 경문왕이 秀澈(817~893)에게 禪·敎에 대해 묻자 수철은 선과 교가 다르지 않다고 답한다. 이러한 선사의 유연한 사고의 전환을 반영하듯 선승이 철불을 주도적으로 만드는 모습이 점차 나타난다. 都憲(824~882)은 왕실의 端儀長翁主(?~?)의 후원으로 864년 사찰을 만들었고 철불을 주조하여 절을 수호하고 망자를 저승으로 인도하고자 하였다.78 망자 추복 및 내세 기원은 전통적인 불상 조성의 이유이지만 절을 수호한다는 새로운 조성 이유를 밝히는 것이 독특한데, 앞선 시기 철불의 장엄함에 대한 느낌이 “수호”의 의미를 철불에 추가적으로 부여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경문왕 즉위(861년) 이후 만든 삼화사 철불은 명문을 통해 화엄종과 관련이 있음을 알 수 있다. 경문왕은 왕권강화를 위해 불교계의 도움이 필요했으므로, 선종뿐 아니라 화엄종을 통해 지방 사찰에 불상 조성을 독려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선종과 마찬가지로 왕권강화를 위한 왕실의 불교지원 확대와 9세기 화엄 사찰의 확산 속에서 화엄종에서도 철불을 조성했다. 다만 경문왕대부터 왕실의 후원은 왕실 사람이나 승려를 통한 간접적인 방식으로 진행된 것으로 보이는데, 왕의 바람과 결언으로 말미암아 시방의 단월이 발원했다는 삼화사 철불 명문을 통해 실상사·보림사 철불과는 달리 다수의 단월이 발원했음을 알 수 있다. 명문에 왕이 언급되어 있음에도 삼화사 철불의 크기가 줄어든 점이나 제작기법이 기존과 달리 세밀하지 않은 점이 이를 반영한다. 도피안사 철불은 865년에 조성되었는데, 크기는 신라 하대 철불 가운데 제일 작다. 이 철불은 향도 1,500명이 발원한 것으로 왕실과 상관이 없다. 이것은 지방민이 동으로는 시도할 수 없던 금속제 불상을 철로는 만들 수 있었음을 보여주는 금속제 불상 대중화의 일례이다. 현존하지는 않으나 장안사에서 862년 철불이 조성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를 통해서 860년대에는 철불이 종파나 후원 세력과 관계없이 확산하고 있음을 파악할 수 있다. 동불에 비해 저렴한 철불이 기층사회에 퍼져나간 것이다.
이러한 일반화된 철불 조성은 880년부터 의미의 변화를 보인다. 도헌은 봉암사를 만들면서 철불 2구를 주조하여 절을 호위하도록 하였다. 이 내용 때문에 철불을 풍수비보와 연결하는 의견이 있었는데, 이러한 관념은 앞서 살핀 철불 조성 배경을 볼 때 철불의 시작과 동시에 발생했다고 볼 수 없다. 880년 憲康王(재위 875~886)은 신하들과 태평성대라고 자축하였는데 이것은 왕경에 한한 것이며, 879년 信弘의 반란 등으로 보아 870년 후반에는 국가가 혼란스럽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진성왕 3년(889년)에 이르러 지방에서 공물과 조세를 보내지 않아 국가가 궁핍해지고 도적이 벌떼처럼 일어났다 . 혼란이 889년 시작한 것처럼 기록되어 있으나, 그 이전부터 왕실이 지배력을 상실하여 889년 전국에 난으로 촉발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도헌이 880년대 조성한 철불에 투영된 호위에 대한 인식은 9세기 말 혼란스러운 사회를 경험하면서 생긴 인식이 철불의 위엄있는 형상에 반영된 것이다.
Ⅴ. 맺음말
본 논문에서는 철불을 만들기 시작한 원인이 “주석”의 수급 문제와 관련이 있을 가능성을 추정하였다. 주석은 청동제품을 만들 때 소량이지만 반드시 필요한 금속으로, 지금도 다량 수입하고 있다. 신라에 동이 충분하더라도 주석 때문에 왕경 내의 불상 및 각종 청동제품 제작 수요를 감당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한편 왕실이 지방지배를 위해 선종에 관심을 가지면서 문성왕은 지방에 대형 불상을 조성하여 왕실의 권위를 높이고자 하였고, 자체 조달이 가능한 철로 철불을 조성한 것으로 보인다. 제작기법을 통해 봤을 때 신라의 철불은 중국 철불 제작 기술과 상관없이 자체적으로 조성하기 시작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신라의 철불은 도량의 장엄을 위한 것이었고, 선종 외의 종파에서도 만들었다. 철불이 만들어지기 시작한 무렵의 선승은 불상에 큰 관심이 없었고, 왕실과 같은 후원 세력과 결부되어 조성되었으나, 시대가 흘러 선승의 인식이 변화하면서 선승도 적극적으로 조성하기에 이르렀다. 사찰 장엄과 망자 추복을 위해 만들었던 철불은 사회 혼란기를 경험하면서 사찰의 수호와 호위라는 의미를 갖게 되었다. 따라서 철불을 통해 신라 하대의 경제·정치·전쟁 등 사회 모습에서의 변화 양상을 알 수 있으며, 또한 사회의 흐름에 따라 신라인이 철불에 투영했던 인식과 의미도 변화하고 있음을 검토하였다. 이 연구를 통해 신라 하대 철불 조성 배경에 대한 새로운 의견을 제시하고, 새로운 시각으로 철불을 바라보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