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장 “악령에 홀린 남자”
"제가 매춘부를 찾아가는 건 뭔가에 홀려서 그런 거예요. 전 악령에 씌었어요."(292)
9장의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이번 사례의 주인공 짐은 악령에 홀렸음을 고백하는 남자이다. 이에 프랭크가(마음 속 반문에도 불구하고) 악령의 존재를 받아들이면서 두 사람의 대화는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짐의 증상을 ‘자각형 빙의’로 파악한 프랭크는 환자의 내면에 깃든 악마를 어떻게 몰아낼까에 몰두하며 상담에 집중한다.
짐의 증상: 자각형 빙의
짐은 숫기는 없으나 자신의 생각을 명료하게 표현할 줄 아는, 한참 눈이 마주치면 부끄러워서 눈을 피했으며, 조용한 목소리에 예의바른 20대 후반의 청년이었다. 프랭크는 짐의 사려 깊은 태도에 정이 갔다고 말하면서 그의 사례를 소개한다.
프랭크와 만나기 전 짐은 임질 증상으로 비뇨기과 진료를 받았다. 이전에도 두 차례 임질에 감염된 적이 있고 HIV 위험군으로 분류된 상태였다. 일반적으로 매춘업에 종사하는 여성들은 안전한 성관계를 위해 최선의 노력을 기울인다. 짐이 피임하지 않은 채 성교한 것으로 보아 지식이 부족하거나 자포자기한 매춘부에게서 성을 산 것으로 보였다.
초등학교 교사인 어머니와 전기기사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짐은 지방 소도시에서 성장했으며, 그의 유년기는 평범한 날들로 기억된다. 하지만 열일곱 살에 신경쇠약에 걸린 사건을 계기로 그는 휴학 후 학교로 돌아가지 않았으며, 집을 떠나 런던을 떠돌다 한적한 교외에 정착했다. 프랭크를 찾은 당시 짐은 아파트 야간 경비와 온갖 책 읽기를 병행하며 소외된 남자의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었다(“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요... 그래서 책을 봐요”).
짐의 주요 증상은 매춘부들이 호객 행위용으로 갖다놓은 공중전화 부스 속 명함을 챙긴 뒤 전화를 걸고 그녀를 찾아간다는 사실이다. 이런 행동을 멈추지 못하는 짐은 그 순간 자신이 아니었음을(“마치.... 제가 아닌 것 같아요”, “저도 왜 그 여자들을 찾아가는지....진짜 모르겠어요”), 심지어 섹스를 끝낸 후 그녀들을 착취한 듯 죄책감에 시달렸음을 털어놓는다.
다음 상담에서 짐은 무척 우울한 얼굴로 나타났다. 다시 명함을 들고 매춘부를 찾은 것이다(“그냥 저도 모르게 들어갔어요. 제가 거기 없는 것처럼....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어요”). 이번에는 두통을 호소하며, 자신이 악령에 씌었음을 주장한다. 이 상황은 프랭크가 의도적으로 짐의 호소에 맞장구치면서(“당신은 악령에 씌었군요. 매춘부를 찾아가는 건 악마의 소행이고요”) 편안한 대화로 이어질 수 있었다.
알고 보니 짐은 신경쇠약에 걸린 그 무렵부터 악령에 시달렸으며, 병원에 입원을 해야 할 정도로 매우 심각한 상태였다(“그때 전 감당하지 못했어요. 전혀 감당이 안 됐어요”). 그 당시 편두통이 심했던 예비단계에 대해 이야기를 쏟아내며, 꿈 이야기로 화두를 옮긴다. 성적인 내용을 담은 아주 무서운 꿈을, 동시에 새로운 가족이야기를 기억해낸다.
"엄마는 일요일에 성당에 나가고 아버지도 가끔 같이 갔어요. 독실한 가톨릭 신자 집안은 절대 아니고, 가족이 모여서 기도하지도 않았어요. 집에 성경책이 없었으니까요. 저도 어릴 때 성당에 나가긴 했지만 나이가 들면서 점차 발길을 끊었어요.... 사실은 몇 달 정도 성당에 나가지 않다가 어느 일요일에 성당에 가기로 한 거예요. 그런데 그 냄새, 초랑향 냄새 때문에 속이 울렁거렸어요. 토할 것 같았어요. 거기 더 있지 못하겠더라고요. 쫓겨나는 느낌이 들었어요."(296-297)
짐은 성당을 다니며 기도도 열심히 했지만, 늘 기분이 좋지 않았다. 신부님들과의 불화도 한몫했는데, 지금은 성당을 보기만 해도 울렁거리는 상태라고 말한다. 17세부터 시작된 악몽 이야기를 짐은 이제야 털어놓는 듯 보인다. 그 당시 의사에게 꿈과 악령에 대한 이야기를 전혀 꺼내지 못한 채 약물(항우울제)만을 처방받았기에, 프랭크는 짐의 눈에서 진심어린 고마움을 느낄 수 있었다.
프랭크의 진단: “악마에게 책임을 넘기다” / 망상장애
상담 초기 짐의 증상을 ‘자각형 빙의’로 파악한 프랭크는 짐이 사로잡힌 악마의 실체가 신경과학(“원시적 충동이 표출되려면 전두엽의 억제기제가 작동하지 않아야 한다”)과 정신분석학(“미성숙하고 관대한 초자아”) 두 가지 모두에서 일치됨을 지적한다. ‘아즈고로스’라는 가상의 악마 이름을 말하는 짐의 진지한 모습에서 자신의 환자가 얼마나 두려움에 시달리는지 공감할 수 있었다.
자료에 따르면 19세기 말 파리에서 악령에 들린 많은 사람들이 치료를 받았다고 한다. 이는 그 당시 심령술이나 신비주의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현상과도 일치하는데, 흥미롭게도 심령술이 동력을 얻은 이유는 과학기술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죽은 사람과 소통하는 강신회가 사후세계의 증거가 아니라 인간의 뇌를 들여다보기 위한 통찰로 연결되면서 신경과학자들은 영매와 다중인격 환자의 유사성을 지적하는 연구를 전개시킨다. “영혼의 안내자와 악마는 한데 묶여서 정체성을 부여받은 무의식적 기억을 의미할까?” 프랭크의 진단이 정리되는 질문이다.
"우리는 뭔가 고백하고 싶을 때 직접적으로 고백하지 않는다. 모호하게 에둘러서 속내를 전달한다.... 사실 아쉴은 출장 중에 아내 몰래 불륜을 저질렀다. 자네는 이런 결론에 이르렀다. “이 환자의 병은 악마를 생각하는 것이 아니다. 악마는 부차적인 문제이고, 미신을 믿는 생각이 낳은 해석이다. 환자의 진정한 병은 회환이다.” 자네는 아쉴에게 아내가 용서해줄 거라고 거듭 안심시켜서 병의 궁극적 원인인 죄책감과 불안을 잠재울 수 있었다."(309)
프랭크는 19세기 말 프랑스의 대학자 자네가 악령에 들린 아쉴을 치료한 사례를 통해 짐의 증상을 해석한다. 즉 아쉴이 아내를 배신한 책임을 감당하지 못했고, 도덕적으로 불편한 마음을 덜기 위해 모호한 대상인 악마에게 책임을 넘겼다는 말이다. 비단 아쉴이나 짐 뿐 아니라 우리는 스스로 용납할 수 없는 행동을 초자연적 존재의 탓으로 돌리며(“내가 뭐에 씌었었나 봐”, “내가 제 정신이 아니었어”), 죄의식에서 벗어나는 동시에 다시 죄책감에 시달린다.
프랭크는 짐의 악령 역시 비슷한 목적을 수행한 것이라 판단한다. 짐이 자신의 부도덕한 행위에 대한 책임을 벗어나는 매개로 악마를 호출한 것이라고. 마침내 프랭크는 정신과 의사의 충고대로 짐에게 항정신성 약물을 처방한다. 곧이어 약에 심각한 부작용을 보이는 짐의 반응에 더욱 확신에 차 ‘불특정형 망상장애’라는 진단을 내린다.
상담 종결 및 질문들
프랭크가 관찰한 짐의 문제는 망상이었다. 무서운 수면마비를 경험하면서 악령의 이미지로 형성된 환자의 망상은 스트레스와 불안 관련 증상을 악마의 탓으로 해석하면서 유지될 수 있었다. 오랫동안 짐이 시달려온 편두통의 원인은 불안에서 비롯되었으며, 지속적인 두통은 환자의 머릿속에 악마가 산다는 믿음을 확인해주는 징표로 작동해왔다. 짐이 매춘부를 찾는 이유 역시 악마의 명령으로 뒤바뀌면서, 그는 죄책감을 덜어내는 행위를 반복한 것이다. 사실상 악령에 홀린 경험은 수면장애에 불과한 셈이었다.(과연 그런가?)
“인간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사건이 아니라 사건을 보는 관점이다.” 프랭크는 스토아학파의 철학자 에픽테토스의 문장으로 짐의 문제를 정리한다. 그는 상담을 통해 짐의 성격과 행동이 재구성되기를, 그가 자신을 덜 유별나게 바라보고 좀 더 평범한 존재로 살아갈 수 있기를 기대했다. 상담 후반에 바이오피드백 실험을 진행하면서 짐의 두통은 완화되었고, 그는 매춘부를 찾아 가지 않았다. 동시에 두통의 원인이 악마 때문이 아니라는 것은 인지하면서 더 이상 상담실을 찾지 않았다.
앞선 사례들에서 그랬듯이 짐의 경우에도 프랭크는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지 못한다. 애초에 짐은 왜 자신이 악마에게 사로잡힌 상태라고 생각했을까? 그의 가족은 말한 것 이상으로 더욱 종교적이었을까? 그는 왜 성적 일탈에 대한 책임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았을까? 상담 기간 내내 집중했던 이 질문들은 상담이 종결된 후에도 여전히 풀리지 않은 채 남아있다.
동서양 문화에서 악마나 유령, 귀신 등의 기표는 그것을 보는 자에게만 말을 걸고 메시지를 전한다. 이들 악령의 존재는 억압된 과거나 '못 다한 말'의 있음을 표지하는 전령으로 작동한다. 귀신은 문제를 제기할 뿐 해결하지는 못한다. 보는 자로 하여금 문제를 해결할 것을 요구한다. 프랭크의 말대로 악마에 사로잡힌 상태가 억압된 성욕의 완벽한 은유라면(억압된 것들은 반복적으로 회귀하기에), 이 질문들은 더 긴 시간 짐의 이야기를 통해 재해석되어야 할 듯싶다.
첫댓글 악령, 귀신, 돈, 쾌락 우리는 뭔가에 홀린채 살아가는게 정상 아닌가? 프랭크는 악령이라고 믿는 것이 성욕에 빠진 자신을 그렇게 믿어 싶었던것 같습니다. 발제문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