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6-09 주일설교
성경이 말하는 예수를 믿어라
(마태복음 11:2~6)
청춘 남녀가 처음 연예를 시작할 때는 안 보면 못 살 것 같습니다. 그러다가 결혼하고 서로에게 익숙해지면 열기가 식고 어느새 권태기에 빠집니다. 상대방에게 기대했던 것이 현실과 맞지 않을 때는 실망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와 비슷한 현상이 신앙생활에도 발생할 수 있습니다. 내가 기대한 예수님 혹은 내가 원하는 예수님과 신앙생활에서 경험하는 예수님이 다를 때 시험에 빠져서 교회를 떠나는 사람도 있고 기쁨 없은 소극적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아 천국에 가는 것은 좋은데 기왕이면 신앙생활을 잘하면 몸도 안 아프고, 혹시 아파도 목사님이 한번 안수기도하면 벌떡 일어나면 좋겠습니다. 예수님 잘 믿으면 사업도 잘되면 좋겠고 목사님이 심방을 다녀가면 대박이 터지면 좋겠습니다.
세상에는 사기꾼이 많은데 신자는 절대로 사기 안 당하고 억울한 누명 쓰는 일 없고 그러면 정말 좋겠습니다. 혹 선거에 나가면 낙방하지 않고 딱딱 붙고 운전하면서 교통사고 한 번도 안 나고 그러면 얼마나 좋을까요? 자녀들도 잘 풀려서 공부도 잘하고 취직도 잘하고 장가도, 시집도 잘 가서 애들도 건강하게 태어나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현실은 어때요? 예수님을 믿어도 잘 풀리지 않는 것도 있고 간혹 몸도 아프고 나쁜 일이 생기기도 합니다. 이럴 때 우리는 이런 고민을 할 수 있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내가 이렇게 억울하고 힘든 것 모르시나? 혹시 나를 안 사랑하시나? 설마 예수님이 무능하신가? 예수님이 안 계신 아냐?
그러다가 여러분은 “나는 왜 믿음이 이렇게 형편이 없나?”하고 자책하게 되죠. 이렇게 점점 꼬이는 문제를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해답이 있습니다. 해결의 실마리는 그런 갈등, 그런 고민은 여러분만 하는 것이 아님을 아는 것입니다.
그 유명한, 그 대단한 세례 요한도 그런 고민을 했습니다. 이 말을 들으니 위로가 되시죠? 감사하게도 요한은 그 문제를 잘 해결했습니다. 요한의 문제와 그의 문제 해결 이야기를 통해 여러분의 문제도 해결될 수 있을 것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요한의 갈등과 해결, 요한의 재헌신을 통해서 여러분도 믿음도 반석 위에 서기를 축원합니다.
요한은 사람들에게 회개를 선포해서 인기가 아주 좋았습니다. 평민은 물론이고 바리새인과 율법학자들도 요한에게 찾아왔습니다. 로마 군인장교도 요한을 찾아와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 인생 상담을 했습니다. 그럴 때 요한은 거리낌 없이 그들에게 회개하라고 외쳤고 그들은 요한 앞에서 새 삶을 다짐하며 세례를 받고 돌아갔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요한은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는 성령의 은혜로 예수님이 인류를 구원하러 오신 메시아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러 오셨는데 말려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세례받고 물에서 올라오시자 하늘이 열렸습니다. 성령이 비둘기같이 내려오시고 하늘에서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요한이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메시아라고 소개하자 요한의 제자 중에 수제자 몇 명이 예수님의 제자가 되겠다고 따라갔습니다. 마음이 좀 허전했지만, 요한은 그것이 더 좋은 일이라고 생각하고 보내 주었습니다.
그 후에 예수님이 하시는 일을 소문으로 들었는데 예수님은 요한보다 더 위대한 일을 많이 하셨습니다. 그 소식을 들으면서 요한은 진심으로 기뻐했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 이야기를 보고했을 때 요한은 “그분은 흥하고 나는 쇠하여야 한다”라는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요한은 꿋꿋하게 자기에게 맡겨진 일을 계속했습니다.
어느 날 요한은 헤롯 왕에게 가서 책망의 말을 했습니다. 왜냐하면, 헤롯왕이 동생의 아내와 눈이 맞아 결혼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이 모두 요한의 책망을 듣고 회개한 것과 달리 헤롯왕은 요한을 미워하여 옥에 가두었습니다.
옥에 갇힌 요한은 한 가지 기대를 하고 있었습니다. 바로 예수님에 대한 기대입니다. 나병 환자도 고치고 중풍 병자도 고치고 죽은 사람도 살리셨다고 소문이 자자한 예수님은 요한과 각별한 사이였습니다. 예수님은 육신적으로는 요한과 친척이었고 사역적으로는 요한이 세례를 준 관계입니다. 정의를 부르짖다가 옥에 갇힌 요한을 구출하기 위해 그분은 틀림없이 손을 쓰실 것입니다. 만일 헤롯왕이 예수님의 말을 순순히 듣지 않으면 엄청난 능력이라도 사용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기다려도 예수님은 아무런 반응이 없었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임했다고 선포하신 그분인데, 그분은 왜 아무 행동이 없으신지 궁금했습니다. 급기야 요한은 의심이 들었습니다. 예수님이 구원자 메시아가 맞는지 고민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자기 제자들을 보내어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보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요한의 제자들은 예수님을 찾아와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 스승님이 이렇게 여쭈어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기다리던 그 메시아가 맞으신지요? 혹시 메시아로 오실 분이 따로 있는지요?”
그러자 예수님은 요한의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하셨습니다. “너희는 가서 내게서 보고 듣는 것을 전하거라. 곧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 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못 듣는 자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거라. 나 때문에 시험들지 않는 사람은 복이 있느니라.”
이 대답을 들은 요한의 제자들은 아리송하였습니다. “이런 이야기라면 우리 선생이 이미 다 아는 이야기인데 왜 이런 말씀을 하실까?” 하지만 그 말씀 그대로 요한에게 전했을 때 고개를 끄덕였고 잘 알겠다고 했습니다. 역시나 요한은 제자들과는 달랐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뭔가 깨달아지십니까?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요한이 깨달은 것은 무엇일까요?
요한이 깨달은 것은 이렇습니다. “예수님이 병을 고치고 죽은 사람은 살린 것은 기적이 아니라 표적이다.” 기적이 아니라 표적이라는 말이 무슨 뜻일까요? 기적이란 뭔가 신기한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하지만 표적은 그 기적을 통해 무엇인가를 알려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기적을 행하신 것은 그가 신비한 능력을 가진 초인이라는 표시가 아닙니다. 예수님의 기적은 그가 메시아임을 증명하는 사건, 즉 표적입니다. 일찍이 선지자가 장차 메시아가 오면 이런 일을 할 것이라고 예언했기 때문입니다. 700년 전에 선지가 이사야는 이렇게 메시아를 예언했습니다.
(사 29:18) 그날에 못 듣는 사람이 책의 말을 들을 것이며 어둡고 캄캄한 데에서 맹인의 눈이 볼 것이며
(사 35:5~6) 그때에 맹인의 눈이 밝을 것이며 못 듣는 사람의 귀가 열릴 것이며 그때에 저는 자는 사슴 같이 뛸 것이며 말못하는 자의 혀는 노래하리니 이는 광야에서 물이 솟겠고 사막에서 시내가 흐를 것임이라
(사 42:7) 네가 눈먼 자들의 눈을 밝히며 갇힌 자를 감옥에서 이끌어내며 흑암에 앉은 자를 감방에서 나오게 하리라
(사 61:1) 주 여호와의 영이 내게 내리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며
예수님은 겉보기에는 아픈 병자를 치료하고 슬픈 사람을 위해 죽은 가족을 살려주시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하지만 사실은 이사야가 말한 메시아 예언을 성취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지금까지는 요한도 예수님이 능력이 많은 분, 기적을 행하는 분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당신이 메시아가 맞느냐는 질문에 예수님이 이런 일을 행하고 있다고 대답하실 때 번쩍 깨달음이 생겼습니다.
예수님이 메시아가 확실하다면 요한을 옥에서 구출해주지 않아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요한이 옳은 일을 한 것, 그가 정의를 부르짖다가 옥에 갇힌 것은 하나님이 따로 상을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요한은 잠시 동안은 자기가 필요한 예수님, 자기가 원하는 예수님을 기대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성경이 말씀하신 메시아인 것을 확인하자 더는 고민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요한은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감옥 생활을 견딜 힘이 생겼습니다. 그러다가 결국 요한은 순교하였습니다.
오늘날 성도들도 이런 마음이 생길 수 있습니다. 나를 구원하신 예수님이 내가 돈이 필요하면 돈을 주고 시험을 치면 합격하게 해 주시고 몸이 아프면 건강을 바로바로 주시는 그런 예수님이면 좋을 것 같습니다. 한 마디로 도깨비방망이 같은 예수님이면 좋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성경이 말하는 예수님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그렇게 믿으면 기독교는 미신 종교, 샤머니즘이 됩니다. 기독교가 미신 종교가 되면 목사는 예수님을 이용해서 돈을 버는 박수무당이 됩니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은 자신이 원하는 예수님을 믿지 말고 성경이 말하는 예수를 믿는 신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물론 우리는 육체를 입고 있기에 건강도 필요합니다. 성공과 명예도 필요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언제나 우리가 원하는 대로 다 주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언제나 예수님이 주시는 것보다 좀 더 원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필요를 채워주시나 욕심을 채워주시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아굴처럼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나로 가난하게도 마시옵고 부하게도 마시옵소서.”
그러면 우리가 성경이 말하는 예수님을 믿으면 영적인 복만 주시고 땅에서 필요한 것은 안 주신다는 말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추구할 때 예수님은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다 주시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마 6:31~33)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첫댓글 https://youtu.be/ISgrOk1jkQY?si=FkLVRy2axywVetH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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