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장. 거인, 잠을 깨다 (1)

[과하객]

제8장. 거인, 잠을 깨다 (1)

#1. 우주력 7세기. 태양계 제6행성의 위성 타이탄에 대한 어떤 평론. 이번 이야기의 서장

타이탄은 지구가 속한 태양계의 제6행성을 돌고 있는 한 위성에 지나지 않지만 각종 성좌도에 빠짐없이 기록되는 중요한 별이다. 지구의 고대 신화 속에 등장하는 거인을 나타낸 이름을 차용한 별답게 우주의 한 거인 별로 자리 매김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지구계 인류가 우주로 날아오르던 시절에 원정대의 전진기지가 있었던 별 자체의 지리적 위치 때문이기도 하지만, 별에 남아 지구계 인류의 고향을 지키고 있는 제1세대 지구인들의 노력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예를 들어 주점 ‘언제나 장미가 피어 있는 곳’ 같은 경우는 우주력 기원 3년 전부터 존속하고 있는 전통 명가다. 지금은 우주적인 풍경의 하나로 자리 잡고 있는 그 주점은 필자가 자료 수집을 위해 방문했던 10년 전에도 우주력 1세기의 양조법을 준수한 천연 장미주(薔薇酒)를 술손을 위해 준비해 두고 있었다.

그러나 타이탄이 오늘날까지도 명성을 유지하고 있는 이유는 그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우주 유일무이의 비사법지역이라는 희귀성과 함께, 지구계 인류가 최초로 태양계 밖 우주를 향해 출발했던 대원정단의 출발지가 그곳이었고, 원정단에게 공간도약 항법이 가능하게 했던 새로운 추진방식의 동력원이 된 중간물질 인드라의 광산이 그곳에 있었던 탓도 있겠지만, 다른 무엇보다도 타이탄이 유명한 별이 된 이유는 전설적인 해적선 신천지호가 연원을 두고 있는 죄수 호송용 수송 전함 신천지호의 고향이 그곳이었던 때문으로 들고 싶다.

‘타이탄의 유형수들’이 탈출 때에 타고 떠난 죄수 호송용 수송선 신천지호야말로 지구계 인류가 외계를 향해 내딛은 거인의 첫 걸음이었을 것이라는 생각은 필자의 주관적인 판단만은 아닐 것이다.

#2. 우주력 570년. 위의 장면의 100년 전. 타이탄의 장미장원. 수선013의 기도실

우주선교사 수선013은 자신의 신에게 기도를 드리고 있었다. 화성에서 돌아온 후 반년 남짓한 시간동안, 수선013의 기도실은 굳게 닫쳐 있었다. 때때로 방문하는 론773만이 수선013의 유일한 말벗이었다.

“옛 지구시대에 ‘하나를 알면 하나만큼의 번뇌가 더한다’는 말이 있었다더군. 타이탄은 어두운 역사의 표본일세. 알게 된 후 감상이 즐겁던가.”

수선013은 타이탄에 도착한 날 흑장미058을 채근하여 감추고 있던 역사를 알아냈다. 지구계 인류 최초로 외계 우주로 나선 원정대의 출발지라는 타이탄은 알려진 것과는 다른 암흑의 역사를 갖고 있었다.

“나는 선택되었다더군요. 불시에 있을 종말의 증인으로. 무슨 일이 있었으며 무슨 일이 있을 것인지 알고 싶습니다. 내게 결심이 설 만큼의 지혜를 주십시오.”

수선013이 알고 있는 흑장미058은 지구계 인류 모두의 복제 계보 원류였다. 화성에서의 조사로 흑장미058을 처음 보았을 때 여신을 대한 듯 충격을 받았던 이유를 알게 된 수선013인지라 부탁하는 목소리에는 힘이 있었다. 어머니, 혹은 큰 누이를 대하는데 무슨 꺼림이 있으랴! 수선013의 표정은 더없이 진지했다.

흑장미058의 눈가에 슬픔이 스쳤다. 기억의 전수가 시작된 증거. 우주사가 시작되던 시절 타이탄에서 있었던 흑역사가 봉인을 여는 순간이었다.

#3. 지구력 2104년 1월. 타이탄의 주점 ‘언제나 장미가 피어 있는 곳’

“주점을 냈다…… 재미있는 착상이요.”

류우는 흑장미002의 앞에 앉아 술잔을 들며 담담하게 말했다. 류우는 지구연방군 타이탄 주둔군사령관의 보좌관 자격으로 타이탄에 와 있었다.

“당신의 친구 몇 명이 죽어간다는 보고가 있었소.”

류우는 잔을 홀짝 비웠다. 비취빛깔 술잔에 황금색 장미주가 넘치도록 따라졌다. 흑장미002는 화성생명법인의 식구들을 거느리고 타이탄에 도착한 후 장미를 기를 수 있는 화원을 만들어 꽃을 피우고, 장미꽃의 꿀과 꽃가루를 원료로 한 술을 빚어 주점을 열었다.

“우리 집안은 대대로 민속주의 제조법을 이어왔습니다. 막걸리라는 이름의 서민용 술을 빚는 술도가였는데, 별로 화려하지도 않은 술을 정성껏 빚는 아버지를 보고 어린 마음에 속으로 맹세를 하였습니다. ‘기왕 일생을 걸고 사업을 하려면 보다 아름다운 쪽을 택하리라’하고. 이모님의 장미주를 보니 철부지 적 일이 생각납니다.”

그 옛날 지구의 만주벌 심양 땅의 장미장원에서 김진욱은 ‘이모님’에게 말했었다. 흑장미가 장미주를 빚는 마음은 ‘이모님’의 기억을 이은 것이었다.

“덩굴장미를 아치형으로 올려 꽃문을 만들고, 사랑하는 사람을 기다리는 여인을 그리워하는 꿈을 꾸곤 했습니다. 나 스스로 환상극 속의 주인공이 될 때에……”

김진욱이 ‘이모님’과 나누던 대화가 어제의 일인 양 흑장미002의 가슴을 쳤다. 흑장미002는 눈앞에 앉아 있는 류우와 사랑을 나누었던 첫 번째 흑장미의 시절을 다른 사람의 기억인양 아스라이 멀게 느끼고 있었다.

류우는 다시 잔을 비웠다. 화성생명법인의 ‘교수’가 조형한 인조 식물 ‘화성의 검은 장미1000’을 원료로 한 장미주(薔薇酒)는 마시는 사람의 마음을 읽는 술이었다. 술에게 마음을 주어버린 주객들은 제풀에 서러워져서 통곡을 했다.

류우는 거푸 석 잔을 비운 후 잔을 놓았다. 그의 눈빛에는 비감이 짙게 실려 있었다.

“인드라 광산에서의 평균 수명은 1년 6개월이오. 기록을 보니 2년 7개월을 버틴 죄수도 있었던 모양이지만, 그가 광산을 나왔을 때의 모습은 연체동물의 시체였다고 하오.”

중간물질 인드라, 기왕의 우주에 대립되는 반우주(反宇宙)의 빗장을 벗길 열쇠로 알려진 타이탄의 특산물. 류우의 설명이 아니더라도 타이탄 세계에 넘쳐나는 부랑자들을 보면 인드라의 해독을 짐작하는 일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초기에 인드라의 보석으로서의 가치에 눈독을 들여 황금의 별을 찾아왔던 광부들은 인드라를 매각한 돈을 사용해 보기도 전에 백세 노인이 되어 무덤행의 순서를 기다려야 했다.

“욕심이 동해 자멸의 길로 달리는 인간 말종들 따위에는 관심도 없소. 문제는 우리 친구들인데……”

인드라의 해독은 보석 목걸이로 만들어 목에 걸고 다니던 여인들에게도 같은 정도의 피해를 주어 지구 세계에 널리 알려졌다. 정식 학명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구 어느 나라의 고대 종교 뇌격(雷擊)의 신의 이름을 대명사로 받게 된 이유는 그 때문이었다. 인드라에 중독된 사람들이 벼락을 맞은 것처럼 새까맣게 탄화되어 죽는다는 데 착안한 작명이었다.

“나와 흥정하지 않겠소?”

흑장미002는 고개를 들어 류우를 보았다. 류우의 목소리에는 진정과 비아냥거림이 두루 섞여 있었다.

#4. 지구력 2104년 1월. 타이탄의 지하 인드라 광산

이런 기분이 죽음일까. 죽음은 무의식의 세계라고 하는데 의식과 무의식을 구별하고 있으니 아직 죽음에 덜한 모양이다. 오히려 이 기분은…… 평화, 안온함, 모태에 있을 때의 내가 이랬겠지.

김진욱은 망각이 시작되기 전의 어둠을 보고 있었다. 어둠 저편의 무한한 심연을 향해 허위허위 헤엄쳐 가고 있는 자신을 느꼈다. 어둠이 깨트려져 빛이 시작되었다지만, 빛 이전의 세계에는 사랑이 있었다고 생각했다. 어둠이 존재하기 이전에도 사랑은 거기 있었고, 창조의 행사를 극적인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 어두움과 더불어 탈출했을 것이었다.

달리고 달려서 빛은 오늘에 왔고, 먼 미래를 향해 달려가는 중이었다. 빛이 쫓는 것은 미래를 향해 달리고 있는 어두움이었다. 김진욱은 어두움을 쫓는 한 줄기 빛이 되어, 오로지 어두움 속에 몸을 숨긴 사랑을 쫓아, 정해진 행로가 없는 우주를 달리고 있었다.

미래는 축복받은 세계만은 아니었다. 미지를 향한 여행에 대한 두려움은 다시 만날 사랑에 대한 열망으로 극복했다. 그러나 어두움은 끝이 없을 듯 이어졌고, 김진욱이 소유한 빛은 어두움의 세력의 그것에 비해 너무나 작은 존재였다. 달리고 또 달려도, 김진욱이 찾고자하는 사랑은 더욱 멀리 있었다. 장미꽃으로 장식된 관 속에 누워 있을 그의 사랑은, 그가 다가가는 것보다 더욱 빠른 속도로 멀어졌다. 김진욱은 절망감으로 가슴을 졸이다가 어느 순간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이 친구, 이렇게 약해서야……”

친구 간디의 소리를 듣고서야 김진욱은 눈을 떴다. 눈을 뜨고서야 자신이 처해 있는 현실을 올바로 인식할 수 있었다. 그는 중간물질 인드라의 해독으로 죽어 가고 있었다. 반년 전에 수감된 간디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김진욱은 진작 죽음을 맞았을 것이었다.

중간물질 인드라는 무색무취에 무중력인 ‘그 무엇’이었다. 흔히 ‘무중력 공간처럼 가볍다’라는 표현으로 가벼움을 표시하는 것이 상식이지만, 실은 무중력의 공간에도 극소량의 수소 원자가 있어서 무게가 있다는 것은 알려진 사실이었다. 인드라는 무게와 형체가 없었다. 존재하고는 있지만 물질계의 상식선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기이한 존재…… 학자들은 존재하지 않는 물질 인드라가 존재의 증거로 빛을 나타내는 이유를 상물질과의 접촉으로 중화를 일으키는 탓의 에너지 변환으로 보았다.

인드라의 경계면이 일으키는 물질변환을 보는 것으로 존재를 짐작하는 것이 물질계에서의 인드라의 정체였다. 학자들은 반물질계에서의 인드라의 위치가 물질계에서의 그것과 다르지 않을 것이라는 계산으로 그 가치를 높였다. 인드라는 금단의 열매인 반물질의 에너지화에 대한 길을 열어줄 ‘마법사의 돌’이 될 것이었다.

타이탄은 태초에 중간물질로 이루어진 별이 아니었나 하는 것이 학자들의 생각이었다. 상물질의 세계와 접촉하여 외부 대지는 물질화 되었지만 내핵은 아직 중간물질의 세계일 터였다.

어딘가에 반물질만으로 이루어진 우주가 있으리라는 계산은 20세기 초부터 있었지만, 중간물질만으로 이루어진 우주에 대한 이론은 아직 등장하지 않은 터여서 학계의 관심은 컸다. 새로운 에너지원 발굴과 차원이 다른 무기의 개발에 대한 기대…… 지구정부가 타이탄에 관심을 갖고 수인들을 보내어 광산을 연 이유였다.

“죽지 말라구. 우린 죽을 수 없는 이유가 있는 사람 아니던가.”

사경을 헤매는 김진욱에게 간디가 한 말이었다. 화성의 크류세 요새에서 코넬과 더불어 일단의 나그네족을 이끌고 탈출했던 간디가 지구우주군에게 붙잡혀 타이탄으로 온 것은 반 년 전의 일이었다.

간디는 ‘이모님’이 탄 타임캡슐을 찾으러 트로이 행성군으로 가던 중에 소행성지대에 매복해 있던 지구우주군의 공격으로 체포되어 종신 유형을 선고받고 타이탄의 지하 광산으로 끌려왔다. 이미 한 해 전에 광산에 투입되어 있던 김진욱과 오신, 알렉산더를 비롯한 나그네족들이 인드라에 중독되어 폐인이 되어 가고 있을 때였다.

“살자구. 살지 않으면 안 돼. 우린 살아야 할 이유가 있지 않나?”

간디는 인드라의 해독에 대항할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었다. 그는 인드라에 의해 폐인이 된 사람들을 치료했던 화성생명법인의 전 주인 ‘교수’가 인정한 단 하나의 후계자였다.

간디는 실제로 ‘교수’가 남긴 비방을 광산 안으로 숨겨 들여왔다. 간디가 가져온 비전의 약은 ‘화성의 검은 장미1000’의 추출액으로 만든 알코올이었다. 예의 알코올에는 장미주(薔薇酒)라는 대명사와 ‘화성의 검은 장미1000’이라는 상표명이 이름으로 붙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