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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아 일어나라! / 왕상 17:17-24, 눅 7:11-17
죽음은 공평하다. 죽음은 모든 사람에게 찾아온다. 세상에 태어나는 데는 순서가 있지만 세상을 떠나는 데는 순서가 없다. 보통은 나이들어 수명이 다하고 죽지만, 누구나 불의의 사고로 죽음을 맞이할 수 있다.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죽음 앞에는 무력하다. 복음서에는 예수께서 죽은 사람을 살리는 부활의 기적을 일으키신 기사가 기록되어 있다. 영혼이 그 육체를 떠났다가 예수님의 역사하심으로 소생한 경우는 세 번 있었다. 화당장 야이로의 어린 딸과 오늘 본문의 나인성 과부의 아들, 그리고 마르다와 마리아의 오라비 나사로가 그들이다. 어린아이도, 청년도, 장년도 모두 죽음의 대상이 된 것을 볼 수 있다. 예수님께서 이 세사람을 살리신 사건을 통해, 죽음이 누구에게나 찾아오듯이 부활도 주 예수를 믿는 자에게 다 해당된다는 것을 보여주신다.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세대의 사람들에게 소망이 되신다. 세가지 부활의 기적 가운데 특별히 나인성 과부의 아들의 부활 사건을 살펴보면서, 예수께서 부활의 은총을 주신 이유를 살펴보도록 하겠다. 예수께서 죽은 자를 살리신 이유를 네가지로 말씀드리겠다.
1.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을 알리기 위해서이다.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의 아들이 되어 이 땅에 오신 이유는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기 위해서이다. 예수께서는 인간을 죄에서 구원하시려고 이 낮고 천한 세상에 오셨다. 죄는 인간을 죽음에 이르게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죄에서 구원을 얻을 때 사만의 문제도 해결된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아들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 영생과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준다고 하셨다. 오늘 모두 언젠가는 죽는다. 하지만 예수께서 이 땅에 다시 오실 때 부활의 몸을 입게 된다. 오늘 본문 말씀 속에는 한 극적인 장면이 전개되고 있다. 나인이라는 작은 성(마을)을 향해 들어가는 행렬과 반대로 성 안에서 성밖으로 나오는 행렬이 있다. 성을 향해서 들어가는 행렬은 기쁨의 소식을 전해주는 예수님과 제자들로 구성된 행렬이요, 성에서 밖으로 나오는 행렬은 슬픔이 뒤범벅이 된 나인성 과부의 독자를 메고 장지를 행해가는, 상여를 맨 죽음의 행렬이다. 성서에 보면 이 두 행렬이 극적으로 만나게 되는데, 이 만남에서 이루어지는 생생한 사건이 오늘 우리에게 중요한 말씀을 전해주고 있다. 본문을 보면 외아들의 상여를 따르면서 대성통곡하는 과부를 예수님게서 만나신 것이다.
죽음은 인간의 슬픔 중 가장 큰 슬픔이다. 잠언에 보면 ‘슬픔은 고통 중의 고통을 낳는다’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배고픔이 아닌 슬픔, 육체의 아픔이 아닌 마음의 아픔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의 가장 큰 슬픔은 대체로 죽음과 관련되어 있다. 죽음과 관련되지 않은 슬픔은 그런대로 견딜만 하다. 그러고 보면 생명의 문제에서 가장 큰 기쁨이 생길 뿐 아니라 가장 큰 슬픔도 생기는 것 같다. 이 땅위에 한 새로운 생명이 태어나게 될 때 기쁨이 있지만, 또 반면에 생명이 죽어가게 될 때 괴롭고 아프고 천지가 캄캄해지는 슬픔을 느끼게 된다. 인간의 슬픔 중 가장 큰 슬픔은 바로 사망이다. 이별 중의 가장 슬픈 이별은 사별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내야 하는 마음이 얼마나 아픈가는 말로 표현할 수가 없다. 사별은 가장 어려운 이별이다. 다시는 그 얼굴을 볼 수가 없고, 그 음성을 들을 수가 없고 같이 생활할 수가 없다. 마음 속으로 미워했던 상대가 죽었다고 하는데도 그대로 미움을 갖고 있다면 그는 사람이 아니다. 사별이 얼마나 사람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가는 성서는 역력히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다. 그렇다면 독자를 잃은 과부의 슬픔과 고독을 하늘 아래 누가 위로할 수 있겠나?
사별 후에 따르는 또 하나의 슬픔은 고독이다. 사별 후의 적막감은 참으로 표현하기 어렵다. 장례가 끝난 후 텅 빈 집에서 적막감에 목놓아 우는 유족들을 많이 본다. 사별 뒤에 오는 고독은 인간 고독의 극치이다. 인간의 슬픔 중에 가장 큰 슬픔은 사랑하는 자가 내 곁을 떠나 더다 볼 수 없는 것이다. 나인성 과부의 슬픔, 울음, 그의 비애는 인간이 느낄 수 있는 비애 중에 가장 절정에 달하고 있다는데 대해 동정이 간다. 가장 큰 소망이었던 남편을 사별한 후 남편 삼아 하늘같이 믿었던 그 아들이 죽었다. 독자가 죽은 과부의 슬픔, 하늘 아래 어떤 말로 위로 받을 수 있겠나? 인간의 행렬은 결국 장례 행렬이다. 인간은 모두 죽음을 행해 가고 있다. 그러나 죽음의 행렬과 만난 예수님의 행렬은 생명의 행렬이다. 예수께서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라고 말씀하셨다. 이 생명의 행렬은 장례행렬의 슬픔을 기쁨으로 바꾸었다. 나인성 과부의 아들을 다시 살리신 이유는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중요한 사명을 알리기 위해서이다.
2. 사랑하는 사람을 다시 만날 수 있게 하기 위해서이다.
사랑이 부활의 은총을 맛볼 수 있게 했다. 13절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 하시고’ 죽은 청년은 과부의 아들이었다. 과부와 외아들의 관계는 남달리 더 끈끈하고 애틋한 정을 나누는 관계이다. 인생을 외롭게 사는 과부 여인은 단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을 금지옥엽으로 여겼을 것이다. 그런데 그 아들이 죽었다. 이보다 더 큰 슬픔과 절망이 어디 있겠나? 꼭 독자여야만 이렇게 슬픈 것은 아니다.
옛날 다윗을 보라. 다윗은 자기 아들 압살롬을 위해 얼마나 울었나? 하늘 아래 수많은 자식 중 압살롬과 같이 못된 자식이 또 어디 있나? 세상에는 참 고약한 자식들이 많다. 부모의 재산을 강탕하는 자식, 부모를 매질하는 자식, 심지어는 부모를 죽이는 자식도 있다. 압살롬은 아버지의 왕좌를 빼앗기 위해 신하들을 갖은 감언이설로 이간시켜 자기 편으로 돌려놓고 드디어 아버지를 향해 쳐들어갔다. 아들에게 쫓겨 신발도 신지 못한 채 도망가는 어버지를 죽이겠다고 수만 군사들을 모아 왕궁으로 쳐들어간, 천벌을 받아 죽어 마당한 자식이었다. 그런데 전세는 역전되어 다윗의 군대가 압살롬의 군대를 치려할 때, 다윗이 요압과 아비새와 잇대를 불러 명하기를 ‘내 아들이 불효자식이지만 잡거든 나를 생각해서 죽이지 말라’고 간곡히 이르는 부모의 마음을 볼 수 있다. 전쟁에 패한 압살롬이 도망가다가 머리가 상수리나무에 매달린 것을 다른 신하가 보고 알려주니 요압이 창으로 찔러 죽였다. 압삭롬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아버지 다윗을 보라. 천하에 고약한 자식, 불효자식이 죽었다는 말을 듣고서 ‘내 아들 압살롬아! 내 아들 압살롬아! 내가 너를 대신해서 죽었더면, 압살롬아 내 아들아, 내 아들아!’ 이렇게 목놓아 울었다고 삼하 18장에 기록하고 있다. 천하에 불효막심한 아들이 죽었어도 그 아버지는 차라리 대신 죽지 못했다고 목놓아 울었는데 이것이 부모의 사랑이 아닌가?
그런데 이 불쌍한 나인성 과부는 유일한 소망이었고 자기 생명보다 더 귀중히 사랑하는 외아들이 죽었으니 천지가 캄캄했을 것이다. 가눌 수 없는 괴롬과 슬픔과 아픔을 그 과부는 입술을 깨물며 참았지만 터져나오는 울음을 막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여인을 보신 것이다. 예수님은 이런 슬픔의 행렬을 도저히 그대로 지나쳐 버릴 수가 없으셨다. 이 여인을 예수님은 불쌍히 보셨다고 했다. 이 여인을 불쌍히 보신 예수님은 상여를 멈추게 했다. 예수님은 이 청년을 살려야 한다는 의지 깊은 심정에서 불쌍히 여기시고 ‘그 여인을 향해 울지 말라’고 하셨다. 이 말씀은 곧 ‘울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다. 주님의 말씀은 한번 내보내진 후 열매 맺고 돌아오지 않는 법이 없다고 일찍이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말씀하셨다. ‘울지 말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은 울지 않도록 하실 능력이 있어서, 울지 않도록 하실 수 있기 때문에 그 청년을 다시 살려내지 않고는 이 여인의 울음을 그치게 할 수 없다. 다시 말해서 이 과부에게 참 위로는 독자의 부활 하나 밖에 없다. 그 과부를 불쌍히 여기신 예수님은 그 아들을 살려내어 어머니에게 돌려주었다. 그래서 그 어머니와 아들은 다시 만났다.
죽음이 우리를 슬프게 하는 이유는 죽음으로 우리와 세상을 떠난 사람의 관계가 단절되기 때문이다. 다시 만날 수도 없고 함께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부활은 다시 만나는 기쁨을 나누게 한다. 외아들을 살리시어 과부에게 돌려주시며 다시 만나게 하신 은총은 장차 우리에게 일어날 일을 예증한다. 부활의 환희는 사랑하는 사람들을 다시 만나는데 있다. 살전 4:13절 ‘형제들아, 자는 자들에 관하여는 너희가 알지 못함을 우리가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소망 없는 다른 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불신자들은 ‘소망없는 자들’이다. 죽음으로 영영 이별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살전 4:14절의 ‘우리가 예수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심을 믿을진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그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는 말씀대로 주께서 다시 오시는 날, 우리보다 먼저 세상을 떠난 사람도 만나게 된다. 부활은 우리가 사랑했던 사람들과 다시 만나는 사건이다. 그날의 감격과 흥분을 상상해 보라. 주께서 우리에게 부활의 은총을 주시는 이유는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다시 만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3.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을 계시하기 위해서이다.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나님께서 천지만물을 창조하실 때도 말씀으로 모든 일을 하셨다. 말씀으로 무에서 유를 창조하셨다.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이 죽으면 그것으로 모든 것이 끝이라고 생각한다. 사망에 무슨 위로가 있나? 인생무상에 무슨 위로가 있나? 부활 생명에만 참 위로가 있고 부활의 소망 속에서만 위로가 있을 뿐이다. 예수님은 이 여인의 울음을 그치게 하실 수가 있었다. 예수님은 장지로 향하는 성여를 멈추게 하시고 그 청년의 관에 손을 대시고 그 시체를 향하여 ‘청년아, 일어나라’고 명령하셨다. 초상집에 가면 우리들은 상주들과 대화를 한다. 그런데 관 속의 시신과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나 예수님은 죽은 시체와 이야기 하셨다. ‘청년아, 일어나라.’ 장례행렬을 따라가던 제자들과 많은 사람들은 깜작 놀랐다. 시체를 향하여 ‘청년아, 일어나라.’ 할 때 큰 구원의 역사가 일어났다. 그 호령의 능력이 얼마나 큰지 청년의 시체가 벌떡 일어나 말도 했다. 과부의 참 소망과 위로는 곧 외아들이 사는 것, ‘사랑의 대상’이 살아나는 것이었다. 요 5:25-29절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 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고, 또 인자됨으로 말미암아 심판하는 권한을 주셨느니라. 이를 놀랍게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죽은 자들이 주님의 음성을 듣고 다시 산다고 했다. 이 음성은 명령의 말씀이다. 그 본보기가 되는 것이 나사로의 부활사건이다. 예수께서 ‘나사로야 나오라’고 말씀하시자 나사로가 살아났다. 그때 주님이 나사로의 이름을 부르지 않으셨다면 모든 시체가 다 일어나 나왔을 것이다. 우리는 마지막 날에 동일한 말씀의 권세로 죽은 자들을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보게 될 것이다.
4. 부활의 능력으로 살아가는 삶의 가능성을 보이기 위해서이다.
청년이 다시 살나남으로써 하나님께는 영광이 되고 그리스도께는 능력을 드러내는 기회가 되었다. 16절 ‘모든 사람이 두려워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이르되, 큰 선지자가 우리 가운데 일어나셨다 하고, 또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셨다 하더라.’ 성경은 예수께서 재림하실 때 일어날 부활의 소망만 강조하지 않는다. 장차 죽은 자를 살리실 그 부활의 능력을 지금 우리가 누릴 수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엡 1:18-20절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그의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편에 앉히사’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부활의 능력을 소유하신 하나님께서 우리가 부활의 권세와 능력을 가지고 하루하루를 살아가게 하신다. 빌 3:10절에 바울의 소망이 기록되어 있다.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바울은 그리스도와 부활의 권능을 알기 원했다. 죽은 자 가운데서 예수님을 살리신 하나님의 능력은 대단히 위대하다. 우리는 그 부활의 위대한 능력을 소유한 분을 믿고 있으므로 우리가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할 때나 하나님의 말씀을 따를 때 그분의 능력을 의지할 수 있다. 늘 승리하며 살 수 있다. 우리는 십자가 고난 너머에 있는 부활의 능력과 영광을 간과하면 안된다. 그런데 우리는 때때로 십자가만을 생각하는지, 세상의 온갖 고뇌를 다 짊어진 듯 어둡고 우울한 표정으로 살아간다. 여러분은 예수께서 다시 사셨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있지 않나? 부활하신 주님, 살아계신 주님이 늘 여러분 곁에 계시다는 사실을 믿는다면 날마다의 삶이 힘차고 복될 것이다.
오늘 이 말씀 속에서 ‘독자(외아들)’는 무엇을 말하나? 이 독자는 과부에게 믿음의 대상이요, 사랑의 대상이요, 소망의 대상이다. 이 아들을 남편처럼 믿고 의지하면서 사랑하고 온갖 기대를 걸었기 때문에, 이 과부는 모든 대상을 잃어버린 것이다. 오늘의 현실, 이것이야말로 죽은 독자의 상여행렬이 아닌가? 공동묘지로, 절망의 수렁으로 빠져가고 있지나 않은지 생각해 보라. 복음서 기자는 이 나인성 사건을 통하여 현실을 말해 주고 있다. 속은 썩어가는 송장이지만, 겉만을 화려하게 꾸며놓은 이 시대를 드러내며, 결국 이 시대는 멸망을 향해 가고 있는, 묘지를 향해 가는 절망적 상황이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정치는 정치대로, 경제는 경제대로, 종교는 종교대로, 그 속을 들여다보면 썩을 대로 다 썩어버린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교회 역시 겉으로는 그 아름다움을 과시하고, 날마다 경쟁적으로 높이 솟아오르고, 수많은 교인들이 쏟아져 나오지만, 그 속을 들여다보면 어느 하나 정상적인 교인이 없고, 교권주의, 미신적인 신앙, 기복신앙 때문에 썩지 않은 데가 없다. 그것은 한창 일하여야 할 나이, 꿈을 가지고 성정하여야 할 나이에 죽어버린 청년처럼, 한창 미래를 꿈꾸고 소망 속에서 일하여야 할 교회와 교인들이 물질주의, 쾌락주의, 이기주의와 교만 때문에 죽어 썩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롬 8장에 있는 말씀과 같이 하늘이 통곡하고 땅이 소리쳐 온통 슬픈 탄식에 잠긴 오늘의 이 현실 정치가 부패해서 관만 남았으니 백성이 통곡하고, 경제 역시 상도덕이 썩었으니 노동자가 통곡하고, 농민이 울고, 교인들의 신앙양심이 죽은 관처럼 되었으니 성령이 탄식하는 것이다.
오늘 이 현실은 사랑이 죽고 의가 죽어 있고 양심이 죽었다. 양심이 있는 자가, 의롭게 살려는 자가, 사랑을 실천하려는 자들이 울고 따라가는, 슬픔의 행렬을 멈추시던 주님께서 오늘도 우리 앞에서 멈춰 서라고 명령하신다. 울지 말라 하신다.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슬픔을 기쁨으로 바꾸고, 죽어 냄새나는 인간성을 다시 살리시려는 것이다. 발걸음을 멈추고 주님께서 명하시는 음성을 들어야 한다. ‘청년아, 일어나라.’ 바로 여기에 사는 길이 있고 위로이 길이 있다. 육체의 부활은 장차올 것이지만 우리는 이미 영적인 부활의 능력을 지금 이 땅에서 소유하며 믿음과 소망 가운데 살 수 있다. 이 말씀 위에 굳게 서서 부활의 위로를 받으며 험한 세상 속에서 승리하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란다. (1996-0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