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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순절 성령강림의 교훈 / 욜 2:28-32, 행 2:1-13
오늘은 성령강림주일이다. 보통 해마다 지키는 성령강림절은 두가지 말로 나타난다. 오순절이라는 말을 사용하기도 하고, 성령강림절이라는 말을 사용하기도 한다. 오순절이라는 절기는 구약성서를 배경으로 하는 절기이다. 성령강림절은 신약성서, 특히 사도행전을 중심으로해서 지키는 절기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구약 전통인 오순절과 성령강림절을 체험한 날짜가 같기 때문에 오순절 성령강림절이라고 많이 사용하고 있다. 성령강림절은 8월 마지막 주일까지 지킨다. 오늘 아침은 오순절 성령강림에 대한 역사적인 이야기, 그때의 의미, 그리고 그 사건이 주는 교훈에 대하여 말씀드리고자 한다.
첫째, 오순절과 성령강림절의 관계를 말씀드린다.
오순절은 이스라엘 백성이 지키는 맥추감사절로서 큰절기 가운데 하나이다. 특별히 출 12장을 중심으로 읽어보면. 맥추감사절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해방된 유월절을 지키기 시작하는 둘째날로부터 오십일째 되는 그 날을 오순절이라고 말한다. 다른 말로는 맥추절, 또는 칠칠절이라고도 한다. 다시 말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키는 하나의 감사절이라고 말씀드릴 수가 있겠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모세를 시켜 이스라엘 백성을 재앙으로부터 모면시키고, 압제당하던 애굽에서 탈출하여 해방됨을 기념하는 절기가 바로 유월절이며, 유월절로부터 시작해서 50일째 되는 그때를 오순절이라 말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전통을 지닌 유대사회, 유대인들에게 예수님께서 오셔서 전도하시다가 십자가에 달려 고난을 당하시고 죽으신 후 3일만에 부활하셔서 40일 동안 이 땅에 계시다가 승천하신 후 10일 만에 성령이 강림하신 것이다. 그래서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부활하신 날부터 50일째 되는 날이 바로 성령강림의 절기가 된 것이다. 그날이 오순절을 지키는 유대인의 절기와 성령강림의 체험이 만나는 날이다. 그렇기 때문에 구약 전통에 따라서 오순절이라고 말하기도 하고, 성령강림이 체험되었다고 해서 성령강림절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래서 이 두 단어를 함께 사용하여 오순절 성령강림절이라 말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사실을 우리가 생각할 때 구약의 해방과 감사의 절기가 십자가를 통한 구속과 승리, 그리고 약속에 대한 보장으로서의 성령강림절과 함께 만나게 되는 것을 여기서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이런 차원에서 ‘하나님이 역사는 언제나 우리를 건져주고 있다’는 사실을 깊이 깨달아야 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유월절과 오순절,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성령강림, 이 두가지를 병행 논리로서 이해하면 우리의 신앙에 큰 도움이 되는 것이다. 곧 두 큰 절기가 만나서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고 있으며, 그런 의미를 부여하는 절기가 오순절 성령강림절이라 생각할 수 있겠다.
둘째, 성령강림절의 의미를 몇가지로 나누어 말씀드린다.
1. 약속이 성취되었다는 의미이다.
예수님이 이 땅에 계실 때 제자들에게 ‘내가 가면 너희를 위하여 보혜사 성령을 보낼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내가 너희에게 일러준 말씀을 깨닫게 되리라’고 하셨다. ‘너희는 성령이 임하기까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아라. 그런 후에는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고 말씀하셨다. 요 14:18절에서 우리는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고 약속하신 말씀을 보게 된다. 예수님은 지금 승천하셔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계신다. 그러나 하나님 아버지의 영이요, 예수 그리스도이 영인 성령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 역사 속에, 이 자리에 오셔서 우리와 함께 계시며, 우리의 마음을 주관하신다는 사실을 믿기 바란다. 그러기에 성서는 성령을 보혜사라 말하기도 한다. 보혜사라는 말에는 ‘도우는 자’라는 뜻이 있다. ‘보호한다’는 뜻도 있다. 헬라어로 ‘파라클레토스’라고 하는데 ‘곁에 계셔서 돕는자’라는 뜻이 있다. 하지만 곁에 게셔서 우리를 돕는다는 뜻보다는 우리가 그와 함께 있어서 그의 안에서 도움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가 깊이 깨달아야 할 것이다. 나 혼자 있는 것이 아니다. 성령이 우리와 함게 계시고, 내 마음 속에 계시고, 또한 여러분의 마음 속에 계셔서 시시각각 도우시며 보호하신다는 사실을 우리가 잊지 않아야 하겟다. 다시 말하면 약속된 보헤사 성령이 임하신 날이 바로 성령강림절이라는 것이다.
2. 모든 사람이 하나되었다는 의미이다.
‘일치되었다’고 하는 이 사실을 대단히 중요시해야 한다. 세계교회협의회 총무인 콘라드 라이저 교수는 오순절 성령강림 메시지를 이렇게 전했다. ‘우리의 세계는 아직도 부서지고 갈라져 있습니다. 가난하고 약한 사람들은 여전히 착취를 당하고 억압받고 있습니다. 민족 종교 언어 인종 사회전반의 불확실한 경제 사정 때문에 그러한 사정은 더욱 악화되고 있습니다. 금년에도 성령께서 이 역사 속에 개입하게 됨을 축하드립니다.’ 평화의 분위기가 익어가고, 세계에는 자유화이 물결이 일고 있지만, 갈등과 분열과 사기와 냉대는 아직도 우리 세계 속에 도사리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초대교회는 함게 모였다. 한마음을 가졌다. 함께 기도하였다. 그랬기 때문에 일치하는 가운데 성령의 임재가 있었던 것을 우리가 깨닫게 되는 것이다. 마음을 같이 하여 하나가 된다.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한곳에 120명의 성도가 모여서 기도했다는 것을 성서를 통하여 알게 된다. 가정의 배경이 다르다. 지식 수준도 다르다. 문화권도 다를 수 있다. 그러나 그처럼 남녀노소의 삶의 배경이 다르다 할지라도 그리스도를 중심하여 함께 모여서 공동체를 이루게 되었던 것이다. 함께 모여 한마음이 되었을 때에 성령이 임재하신 다는 것을 여기서 느끼게 된다. 사실 한마음을 가진다는 것은 대단히 어렵다. 그런데 참으로 하나될 수 있는 길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뿐이다. 예수님께서 기도하시기를 ‘그들을 하나되게 하옵소서’ 하셨다.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에 제자들은 다 함께 모여 한마음을 가지고 예수 중심으로 모였다. 그리고 나눔의 공동체가 되었다. 서로 가진 것을 나누어 먹고, 살림을 통용하였고, 재산을 똑같이 가지고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면서 서로 섬길 수가 있었던 것이다. 섬김의 공동체요, 나눔의 공동체였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은 예수라는 사람에 대한 간증으로 꽃을 피웠던 것이다.
베드로 같은 사람은 ‘내가 예수를 세 번이나 부인했는데도 그는 갈릴리까지 찾아오셔서 나를 지켜주시고 격려하시고 다시 불러주셨다. 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 내 남은 생애는 절대로 실패를 되풀이 하지 않으리라. 내 생명 다하기까지 복음을 위해 살겠다’라고 다짐을 했을 것으로 상상해 볼 수도 있다. 무덤 앞에 찾아갔던 막달라 마리아 외에 다른 여인들도 주님을 만난 체험을 간증했을 것으로 믿어진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열심히 기도했다. 마음을 같이하여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전심전력을 다하는 기도를 드리게 되었다. 이때 성령님이 강림하셨던 것이다. 사도행전을 기록한 누가는 어떤 표현을 해야 좋을지 몰랐다. 불의 혀와 같은 것이 꽉 찼다. 흔들렸다. 바람이 부는 것 같았다라고 여러 가지로 표현하였다. 분명한 것은 하나님이 영이 살아계셔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확증을 주셨다는 사실이다. 그 중거가 언어로 소통되었다. 열여섯 이상의 많은 나라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 설교를 하게 되었는데, 모두가 각자 자기 나라 말로 들을 수가 있었다.
여러분, 성령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면 말이 통한다. 하나가 된다. 남을 이해할 수가 있게 된다. 다른 사람의 말을 들을 수가 있게 된다. 사랑할 수 있게 된다. 성령이 우리와 함께 계시면 변화가 온다. 마음과 마음이 통한다. 서로 다른 사람들이 모였지만 하나가 될 수 있다는 것, 다양성 속에서도 일치가 가능하다는 것을 믿기 바란다. 우리 교회에 나오는 분들의 가정환경, 출신, 학력, 경험 등은 다 다를지라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한 형제요 자매인 것을 고백할 수 있다. 곧 성령의 역사는 일치를 가져온다. 창 11장에 나오는 바벨탑 사건을 보면 한 언어가 흩어져서 말이 통하지 않게 되었다. 우리가 탑을 높여서 하늘에 닿도록 쌓아보자 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교만을 아시고 언어를 흩어 놓았다. 창 11장과 행 2장을 비교하면서 읽어보기 바란다. 교만한 사람의 마음속에, 교만한 사람의 공동체에 성령의 역사는 없다. 하나되어서 높은 자는 낮아지고, 낮은 자는 높여주는 일치의 공동체 속에 성령은 임한다. 일치되려면 한마음이 되어야 한다. 함께 기도하고 함게 나누는 이런 공동체 속에 성령은 역사한다는 것을 여기서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특별히 행 2장에서 발견되는 것은 최초 성령강림절에 체험의 역사가 공동체 속에 임하셧다는 것이 중요한 사실이다. 하나라는 개체도 중요하다. 그러나 공동체가 대단히 중요한 것이다. 가정도 공동체이다. 교회도 공동체이다. 직장도 공동체이고 나라도 공동체이다. 일치가 있을 때, 감사가 있을 때, 기도와 감격이 있을 때에 성령의 역사는 임재하는 것이다.
3. 변화된 자들이 전적으로 선교사역에 자발적으로 투신했다는 사실이다.
많은 사람들이 예루살렘을 중심해서 여러 곳으로 흩어져 교회를 세우고 개척하여 괸리하며 열심히 전도하는 사람들로 바뀌었다. 예수를 멀리했던 그들, 십자가 앞에서 도망갔던 그들은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셨고, 그를 믿으면 우리가 구원을 받게 된다는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탄식하며 회개하게 되었다. 예수를 믿고 영접하여 구원을 받은 모든 교우들은 개인개인이 전도자로서 출발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교회사를 쓴 그린이라는 사람이 ‘초대교회의 교인들은 한사람 한사람이 다 전도자이다’라는 말을 했던 것처럼, 우리는 성령임재 후 변화된 초대교회 사람들이 선교로 할성화되었던 것을 알게 되는 것이다.
셋째, 성령강림절의 교훈을 말씀드린다.
1. 죄로부터 해방된 사실에 철저하게 감사하며 회개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여러분, 오순절은 해방된 절기로부터 시작해서 감사하는 절기로 연결이 되어 있다. 오늘 성령강림절을 맞이하여 우리는 죄로부터 해방이 되었다. 금년에 성령께서 우리 한국교회를 향하여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으로 생각된다. ‘성령이 충만한 교회가 되었다면, 성령이 충만한 그리스도인들이 되었다면 왜 이 사회가 비리와 부정부패로 가득 찼느냐?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하고 책망하시는 듯 하다. 성령이 임하면 성령의 역사는 죄를 용납하지 않는다. 성령은 회개를 촉구하고 탄식하시며 이 민족의 거듭남을 기다리고 있는 줄로 믿는다. 민족적인 현실 속에서 금년의 성령강림절은 안일하게 생각할 수가 없다. ‘저희들이 잘못했습니다. 한번만 더 용서해 주시고 이 민족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옵소서’ 이렇게 기도해야 할 것이다. 나를 위해 주님이 죽으셨던 유월절의 의미를 깊이 생각해 보아야겠다. 죄와 허물로 죽었던 우리를 피로 값주고 사셨으니 이제는 내가 그리스도의 것이다. 그렇게 고백하면서 범죄할 수 있는가? 이렇게 우리는 성령강림절을 맞아 회개하는 자가 되어야겠다.
2. 성령충만으로 사랑과 나눔과 헌신과 친교의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한국교회가 많이 가졌고 축복도 많이 받았다. 어느 교회에 가보든지 아름답게 장식되어 있다. 그러나 좋은 교회가 되려면, 많이 가지는 것보다 많이 나누어주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아직도 사회와 믿지 않는 자들을 향하여 우리가 손을 뻗칠 일이 너무나 많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우리는 나누는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가지기 위해서 모이는가? 주기 위해서 모여야 한다. 복받기 위해서 모이는가? 헌신하기 위해서 모여야 한다.
3. 성령충만으로 선교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열심히 전도하고 열심히 봉사하는 우리가 될 때 하나님이 기뻐하신다. 전도하고 봉사하려면 성령으로 거듭나서 새로워져야 한다. 하나님이 보셔도 내 마음에 부끄러움이 없을 정도로 성숙한 그리스도인들의 수가 많을 때 그들을 통하여 이 세상은 빛날 것이다. 밝아질 것이다. 썩어가지 않을 것이다.
4. 성령이 우리의 주인이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성령이 우리의 주인이 되는 것, 이것이 신앙인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면 성령이 내 마음 속에 오신다. 그리스도의 영이 아니고는 예수를 주로 시인할 수 없다. 예수님이 내 마음 속에 오시면 영이 우리 마음속에 계시는 것이며 그때 우리 삶의 주인은 성령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자칫 우리는 성령을 지배하려고 할 때가 있다. 그러나 ‘성령께서 말씀해 주옵소서. 성령이여, 내가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하고 늘 의지하면서 그가 주인되고, 그가 스승되고, 그가 안내자되고, 그가 결정권자가 되게 하기를 바란다. 성령의 역사는 그리스도를 바로 깨우쳐 주시는 것이다. 성령충만한 가운데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성도가 되자, (1995-0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