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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족 이야기 O: 반남박씨 문과 급제자
부록1: 과거와 관련된 뒷이야기 1
조선 시대 관리 등용 방법에는, ①시험을 통해 선발하는 과거(科擧)와 취재(取才), ②가문(家門)의 음덕(蔭德)으로 선발하는 음서(蔭敍), ③추천에 의해 선발하는 천거(薦擧) 등이 있었다. 이 중에서 대표적인 방식은 음서와 과거였다. 음서란 아버지 또는 할아버지의 공음(功蔭: 공적)에 따라 관리로 등용하는 제도로 유족들의 기득권을 보장해 주는 인사제도였다.
음서가 가문과 혈통을 중시하는 제도인 반면, 과거는 자질과 능력을 중시하는 제도로 시대가 뒤로 올수록 음서보다는 과거의 비중이 커지고, 나아가서 음서보다는 과거로 벼슬길에 오르는 것을 당당하고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경향이 짙었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과거제도는 고려 광종 9년(958) 쌍기(雙冀)의 건의로 도입되었으며, 조선 시대에도 지속되었다. 조선 시대 기본 법전인 『경국대전』에 의하면 과거는 문과(文科)ㆍ무과(武科)ㆍ잡과(雜科)의 세 종류로 능력주의에 근거한 관리충원제도였다.
문관을 선발하는 문과는 대과(大科)와 소과(小科: 생진과生進科 또는 사마시司馬試라고도 함)로 구분되어 있었으나, 무관을 선발하는 무과와 기술관을 선발하는 잡과는 대 ㆍ소과 구분 없는 단일과였다. 과거는 매 3년마다 식년(式年: 60갑자 가운데 자(子)ㆍ묘(卯)ㆍ오(午)ㆍ유(酉)가 드는 해)에 정기적으로 실시하는 식년시(式年試)를 원칙으로 하였다. 과거 중에서도 출세의 지름길은 역시 문과였다. 문과고시는 소과의 초시(初試)와 복시(覆試) 2단계, 대과의 초시ㆍ복시ㆍ전시(殿試) 3단계, 모두 5단계를 통과해야 비로소 '급제(及第)'(합격)할 수 있었다.
조선 시대 문과는 식년시 외에도 부정기적으로 실시된 경우가 많았는데, 증광시(增廣試)ㆍ별시(別試)ㆍ정시(庭試)ㆍ춘당대시(春塘臺試) 등이 있었고, 성균관 및 4학(四學: 中ㆍ東ㆍ南ㆍ西學)의 유생을 위해 시행한 반제(泮製), 즉 알성과(謁聖科) · 응제(應製) · 절일제(節日製) · 황감제(黃柑製)ㆍ도기과(到記科) 등이 있었다. 조선 시대에 행해진 과거 회수는 『국조방목』에 따르면 식년시 162회(5,996명), 증광시 68회(2,734명), 각종 별시 574회(6,405명)로 총 804회에 걸쳐 15,135명의 급제자를 배출하였다(한국학중앙연구원).
이 통계에서 드러나듯이 매 3년마다 시행하는 정기 시험인 식년시(162회)보다 부정기적으로 실시되는 각종 특별 시험이 무려 642회나 되었고 급제자가 9,139명에 이르렀다. 비정기적인 과거는 시대가 내려갈수록 잦아졌는데 이는 과거가 정기적인 식년시보다는 비정기적인 특별시로 무게 중심이 이동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비정기 문과는 명종(明宗)때 이전까지는 서울 거주자를 위주로 이루어졌고, 시험 방식도 식년시와는 달리 제술(製述)을 주로 하였다. 비정기 과거는 공고 기간이 짧고, 녹명(錄名:과거에서 응시자의 신원, 예비 시험 통과 여부 등을 확인하고 응시 자격을 부여하는 절차)도 철저히 하지 않아 신분이 보장되는 일부 계층에 유리하였다. 문과가 일반 양인에게도 개방되어 있었다고는 하나 실제로는 양반 관료층(특히 서울과 경기 지역 거주자)에 훨씬 유리하였음은 분명하였다(원창애. 한국학중앙연구원).
문과 급제는 그야말로 '가문의 영광'이요 출세의 출발점이었다. 양반 가문도 여러 대에 걸쳐 문과 급제자를 배출하지 못하면 양반으로서의 대접을 제대로 받을 수 없었기 때문에 문과 급제자를 배출하는 것이야말로 양반 가문의 지상 목표가 되는 일이 예사였다. 이와 같이 많은 가문들이 과거(문과) 급제에 목을 매다 보니 과거를 둘러싼 갖가지 협잡이 일어나게 되었다. 즉 과거 부정행위가 속출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조선 시대 초기에는 과거가 비교적 엄정하게 시행되었으나 중기 이후 후기에 들어오면서 온갖 기상천외한 부정행위('커닝') 방법이 등장하여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기도 하였다. 특히 숙종 25년(기묘년: 1699년) 단종 복위를 축하하며 시행된 증광과(增廣科) 전시(殿試)에서 벌어진 부정 사건, 숙종 28년(임오년: 1702년) 봄에 있었던 알성시(謁聖試)의 부정 사건, 숙종 38년(임진년: 1712년) 정시에 일어난 부정 사건은 악명 높은 과거 부정이었다. 과거 부정 사건은 옥사(獄事)를 야기하기도 하였으며(기묘과옥己卯科獄ㆍ임진과옥壬辰科獄), 붕당(朋黨)끼리 충돌하는 정치적 사건으로 비화하기도 하였다.
참고: 기묘과옥과 임진과옥에 대해서는 <https://encykorea.aks.ac.kr/>(『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의 해당 항목을 참조할 것. 기묘과옥은 반남박씨 응시생이 연루되어 큰 물의를 일으키기도 하였다. 이와 관련된 이야기는 다음 글을 보라. 임진(1712년 숙종 38) 정시 때에도 반남박씨 급제자로 박사익(朴師益: 금양위 박미의 장현손)이 있었으나 부정에는 연루되지 않았다. 임진 정시는 19명의 급제자를 배출하였으나 시험 부정으로 4명이 파방(罷榜)되었다가 경종(景宗) 때 복과(復科)하는 일이 있었다. 終
2020.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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