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회와 정신건강
/ 전현수 신경정신과의원)
나의 진료실을 찾아오는 환자들로부터 자기는 그러고 싶지 않은데 자꾸만 어떤 생각이 떠오르거나 하고 싶지 않은 행동을 자신도 모르게 하게 된다는 하소연을 자주 듣는다.어떤 학생은 책을 읽고 있다가 자기 코가 보이면 다시 처음부터 읽어 코가 안 보일 때까지 몇 번이고 반복해서 읽어야 된다고 한다. 그래서 심한 경우는 글 한 줄을 읽는데 몇 시간이 걸린다고 한다.
그런 행동을 하고 싶지 않은데도 자꾸만 그렇게 하고 그것 때문에 자기가 최고로 중요하게 생각하는 공부에 지장이 생겨 인생을 망칠 것 같은 절망감에 빠져 있다고 한다.또 독실하게 한 종교를 믿는 정숙한 중년부인은 종교모임에만 가면 성적인 난잡한 장면이 자꾸 떠올라 괴로운데 그 생각을 떨쳐 버릴 수가 없다고 호소한다.이 같은 현상은 꼭 환자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일반인에게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이를테면 지나치게 자꾸 손이나 몸을 씻는 행동, 물건들을 특정한 위치에 특정한 순서로 정돈하지 않으면 불안해지고 정돈이 되어 있더라도 자꾸만 확인하는 행동, 책을 읽을 때 책 종이가 조금이라도 구겨졌다고 생각되면 그것을 반듯하게 펴는 손놀림을 반복하느라 공부를 할 수 없는 행동 등을 그 예로 들 수 있는데 이것 외에도 많은 예가 있다.
이러한 현상의 특징은 자기의 의사와는 달리 그렇게 하지 않으면 불안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꾸 반복하게 된다. 증상만 들어 봐서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다. 하지 않으려고 결심만 하면 안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일부러 그러는 것처럼 보인다. 겉으로만 봐서는 도저히 알 수가 없다.
그러나 이런 경우 그 사람과의 면담을 통해 그의 인생사(人生史)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증상의 의미가 드러난다. 이해할 수 없고 이상스럽게만 보이던 증상의 겉껍질이 한 꺼풀 한 꺼풀 벗겨지고 그 본모습이 나타난다. 그러한 증상의 의미나 그 증상이 나타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밝혀지게 된다.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간단히 예를 들어 보겠다.
사례1
고등학교에 다니는 남학생인데 같은 반 아이들 앞에서 눈이 자꾸 돌아갈 것 같아 수업시간에 안절부절 하지 못하고 점심시간에도 같이 식사를 못하여 점점 고립되어 학교생활이 어렵게 되었다. 이 학생은 이러한 증상이 생기기 전 반에서 라이벌이던 학생에게 심한 경쟁의식을 느껴 상대방 아이가 공부를 못하여 성적이 떨어졌으면 하는 생각을 자주 했었다. 그런 마음을 가지는 것이 평소 동양적 군자(君子) 생활을 지향했던 그 학생으로서는 소인배(小人輩) 행동으로 여겨져 도저히 자신을 용납할 수 없었다.또 그런 마음을 가지는 것이 친구에게 몹쓸 짓을 한다고 생각되어 자기 마음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런 갈등의 와중에 있던 중 그러한 증상이 생겨 이제는 그것에만 신경이 쓰였다.
사례2
여자 대학생인데 자기 주위의 모든 물건들에 신경이 쓰이고 자꾸 시선이 가게 되어 공부도 할 수 없고 사회활동도 할 수 없다고 호소해 왔다. 그것 때문에 대학생활이 엉망이 되어버렸고, 자기는 남에게 뒤져 있으며 인생의 낙오자라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이 사람에게 이러한 증상이 처음으로 나타난 것은 고3 때인데 처음에는 우연히 들었던 음악 멜로디가 머릿속을 떠나지 않다가 주위 물건들이 신경 쓰이면서부터 음악 멜로디는 머리에서 떠났으나 주위의 사소한 사물에까지 신경이 쓰이는 증상은 지금까지 계속되었다.이 학생 역시 인생사를 살펴보니 그러한 증상의 의미가 드러났다. 불쌍하고 불행한 어머니를 자기가 잘 모셔 어머니의 인생을 보장해주려고 결심하였다. 그런데 자신이 유일하게 잘 하는 것은 공부라서 공부하는 데만 매달렸다.
그 결과 성적은 아주 좋았지만 본인의 몸이 약하여 항상 경쟁자가 의식되었다. 성적은 잘 나왔지만 늘 불안하였다. 그러던 중 노랫가락이 머릿속에 들어와 나가지 않았다. 그것이 나가고 난 뒤에는 주위 사물에 신경이 쓰이게 되어 아무것도 제대로 할 수가 없었다.이 두 사례를 볼 때 증상이 나타나기 전과 증세 후에 뚜렷하게 드러나는 변화가 있다. 증상이 나타나기 전에 있던 고민·갈등이 증상의 출현과 함께 자취를 감추어버렸고 증상 걱정만 하고 있다.마치 그 이전의 고민·괴로움·갈등은 어디론가 사라져버리고 새로운 문제가 나타난 것처럼 보인다. 증상 이전의 고민들은 어디로 갔을까. 마치 그 이전에는 그런 걱정거리가 없었던 것처럼 자신의 이상스런 증상만 걱정한다.
첫 번째 사례의 학생의 경우는 친구에 대한 경쟁의식과 죄책감에 시달리다가 주위 사람이 자신의 눈이 돌아가는 것을 알 것 같다는 증세로 전의 갈등을 잊게 되었고 두 번째 사례의 학생 역시 친구에 대한 경쟁의식과 어머니에 대한 부담이 멜로디나 주위 사물에 신경 쓰이는 것으로 대체되어 버렸다.증세 이전의 것이 진짜 고민이라면 증세는 가짜 고민이라고 볼 수 있다. 가짜 고민도 힘들긴 하나 진짜보다는 덜 괴롭다. 말하자면 고육지책(苦肉之策)이 된다. 진짜 고민이 사라진 것을 정신과적 용어로는 ‘억압’이라고 한다. 억압은 무의식적 과정을 거쳐 일어나니까 당사자에게도 왜 그런 현상이 일어났는지 이해가 안 간다.여러분은 가끔 이런 경험을 한 적이 없는지 모르겠다. 어떤 심각하게 골치 아픈 일이 있는데 거기서 벗어날 해결방법은 전혀 보이지 않고 그 상태는 너무 괴롭고 무슨 벗어날 길이 없을까 하고 골똘히 생각할 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멍한 상태가 되는 것을 경험한 적은 없는지.
그 때 도저히 그 상태를 견딜 수도 감당할 수도 없으면 자기도 모르게 정신내부에서 대혼란이 일어난다. 그런 후 진짜 고민에 대한 억압이 일어나고 이를 대신하여 이해할 수 없는 이상한 증상이 생기게 된다.이러한 증상은 현실도피의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이에 대한 근본치료는 자신의 증상에 대한 의미와 속뜻을 깨닫고 원래 가지고 있던 진짜 문제에 직면하여 그것을 해결할 때 가능하다. 또한 이 과정을 거치면 더 성숙한 삶을 살아갈 수 있다.
우리는 흔히 이상스런 증세를 부정적으로만 생각하나 그 증세 속에는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깨닫게 해주는 긍정적인 측면도 같이 있다. 증세를 피하려고만 하지 말고 그 증상의 속뜻을 잘 찾아 진정으로 문제를 해결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