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선화
김승환
수선화가 피었다 꽃대 기다랗게
봄바람에 낯간지러운지 자꾸만
고개 돌린다
부끄럼타는지 자꾸만
비켜선다
부끄럼타는 여자
수선화 같다는 생각이 든다
부끄럼탄다는 말이 아름답다는 말과
서로 통하는 거리에 있는 건
순전히 모두다 수선화 때문이다
봄바람타고 수줍게 핀 수선화
꽃대 기다랗게 내 마음에도 피었다
내 마음에 꽃피운
알뿌리가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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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환
부산 출생
2011년 창조문예로 등단
진도 서망교회 목사
의기양양
김승환
추석에 부모님께 가는 길이었다
지하철을 타자 자리를 양보해 큰아이는 내가 안고 작은아이는 아내가 안았다
지하철이 지상으로 올라왔을 때 큰아이를 바라보던 털보가 말을 걸어왔다
너, 고추 없지?
고추 없지?
없구나,
없는 게 틀림없어,
있으면 꺼내봐,
없으니까 못 꺼내는 거지,
추석빔을 차려입은 아이가 고와서 건넨 말일게다
털보 아저씨를 빤히 쳐다보던 아이가
아저씨가 고추 없죠!
있으면 꺼내 봐요,
없으니까 못 꺼내는 거죠,
그렇죠!
주위의 사람들이 손으로 입을 가리며 웃기 시작했을 때 아이와 함께 나는
장마철에 핀 백합처럼 의기양양하게 털보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몽산포
김승환
그 시절 나는 고등학생이었습니다
여름방학을 맞아 열세 명의 아이들이 몽산포에 갔었지요
몽산포에 도착한 첫날
밤을 새웠는데, 밤을 새웠는데,
여자아이들이 해변에서 뜬눈으로 밤을 새웠는데
그게 그러니까 그렇게 된 겁니다
새벽이 몽산포에 닿았을 때
해변은 추위를 타기 시작했습니다
방에 들어가 모포를 가져다주었는데
(……)
모포사건으로 자던 아이들이 하나둘 일어나고
밤샌 아이들이 방에 들어가자마자 코를 골았습니다
코고는 소리 달콤한 아이들
모래갯벌과 함께 바다도 大字로 뻗어 나도
말 부칠 수 없는 아이들 틈에 끼어 잘 잤습니다
점심을 먹어치운 후엔
방 한가운데 빨랫줄 걸리더니 담요 두른 간이탈의실 안에서
박하사탕 같은 아이들이 나왔습니다
따가운 시선일랑 아랑곳없고
텀벙텀벙
바다에 뛰어들어 파도타기하다 느닷없이
모람모람 부서지는 파도 아래 또렷해서 가파른 가슴
물살 따라 성난 모래톱 딛고 내 목을 끌어안던 아이
새끼손톱에 봉숭아꽃물 들인
저뭇해지자 그새 친해졌는지 아이들 삼삼오오 뒤섞여
코를 골았습니다
그러자 커피를 손에 들고 다가와 내 어깨를 흔드는 아이
커피도 소용없이 쉬 잠이 든 내 곁에서
눈 흘긴 잠을 청한 아이가 몽산포에 있었습니다
밥 만 물
김승환
소쿠리를 건네는 엄마의 눈이 얼룩져 있고
나와 누이동생은 소쿠리를 주거니받거니 장난치며
김장시장으로 달려갑니다
시장 입구 질퍽한 길 위에 누운
이리 밟히고 저리 밟힌 배춧잎
엄마와 눈길이 부딪친 누이동생은
시장바닥으로 눈 돌리고
발자국 피한,
구루마바퀴 피한,
배춧잎 주웠습니다
말없이 배춧잎 줍던 날
바람 매섭게 불지 않았지만
핀 숯처럼 내 얼굴은 달아올라
고갤 들 수 없었습니다
저녁으로 소금에 절여 썬
배춧잎반찬 하나
밥상 위에 놓여 있어 나는
물에 밥 말아 후루룩 넘깁니다
엄마의 눈물 맛이 나는
밥 만 물
에덴 동산
꽃이 식물의 성기라 하오 그래
백개 천개 만개라도 갖고 싶소
그렇소
난 식물이 되고픈 게요
동산엔 꽃이 피고 지고 그래
난 꽃이 되고픈 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