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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비장전[裵裨將傳]
-구분: 소설
-출간 시기: 조선후기
-작자 · 연대 미상의 국문고전소설. 1권 1책. 구활자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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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소리로 불리어진 <배비장타령(裵裨將打令)>이 소설화된 조선 후기 때의 작품이다. 판소리 열두 마당에 속하지만, 고종 때의 신재효(申在孝)가 판소리 사설을 여섯 마당으로 정착시킬 때 빠진 것으로 보아 그 이전에 이미<배비장타령>은 판소리로서의 생명을 잃어 가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그런데 신재효가 창작한 것으로 보이는 <오섬가(烏蟾歌)>에 <배비장전>의 한 부분인 애랑과 정비장의 이별 장면이 자세히 묘사되어 있고, 또 배비장이 애랑에게 조롱당하는 사실이 서술되어 있는 점으로 보아, 이 시기까지 <배비장타령>은 부분적으로 불리어졌을 가능성도 있다.
다만, 1938년에 <배비장전>은 판소리가 창극으로 공연되었으며, 최근에는 재창조되기도 하였다. 인쇄된 <배비장전>의 자료로는 중요한 이본(異本)의 차이를 보이는 두 종류가 전해지고 있다. 하나는 1916년부터 발간되었던 것으로 알려진 구활자본이고, 또 하나는 1950년에 나온 필사본을 대본으로 한 주석본이다. 앞의 자료에서는 배비장이 애랑과 방자의 계교에 빠져 온갖 곤욕을 치른 뒤에 정의현감(旌義縣監)이라는 관직에 오르는 것으로 끝나고 있으나, 뒤의 자료에서는 배비장이 애랑과 방자의 계교에 빠져 여러 사람이 보는 앞에서 알몸으로 궤 속에서 나오는 장면으로 끝나고 있다.
이 작품의 소재가 되었을 근원설화(根源說話)로는 사랑하는 기생과 이별할 때 이빨을 뽑아 주었던 소년의 이야기인 발치설화(拔齒設話)와 기생을 멀리하였다가 오히려 어린 기생의 계교에 빠져 알몸으로 뒤주에 갇힌 채 여러 사람 앞에서 망신을 당하는 경차관(敬差官)의 이야기인 미궤설화(米櫃說話)가 있다. 서거정(徐居正)의 《태평한화골계전(太平閑話滑稽傳)》에 실려 있는 발치설화는 애랑과 정비장의 이야기에, 이원명(李源命)의 《동야휘집(東野彙輯)》에 실려있는 미궤설화는 애랑과 배비장의 이야기에 수용되었다고 볼 수 있다. 또 실제 있었던 일이 어떻게 설화로 바뀌어지는가 하는 관점에서 <배비장전>의 바탕이 된 미궤설화의 근원이 더욱 자세히 밝혀지기도 하였다.
김안로(金安老)의 《용천담적기(龍泉談寂記)》에 수록된 <모안렴위기광욕(某按廉爲妓狂辱)> · 《실사총담(實事叢譚)》에 실린 <풍류진중일어사(風流陣中一御史)>라는 이야기 등이 미궤설화의 근원이 되었으리라는 추정이 가능하다. 관인사화(官人社會)에 처음 참여하는 사람이 겪어야 되는 입사식(入社式)인 신참례(新參禮)도 소재로 수용되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 작품의 형성시기는 정확하게 알기 어려우나, 유진한(柳振漢)이 남긴 만화본(晩華本)〈춘향가>에 <배비장타령>의 존재를 암시하는 대목이 있다. 영조 때까지는 판소리 한 마당으로 성립되었던 <배비장타령>이 판소리로서의 생명을 잃고 그 사설만 기록되면서 소설화된 것이 <배비장전>으로 남아 전해졌을 것이다.
배비장이라는 남자와 애랑이라는 여자가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제주기생 애랑은 빼어난 데 비해서 배비장은 제주목사로 부임하는 김경(金卿)을 따라온 평범한 인물이다. 이러한 설정은 배비장에 대한 애랑의 우위(優位)를 예견하게 한다. 작품 첫머리에는 제주목사로 부임하는 김경 일행이 풍랑을 만나 고생을 겪은 뒤에 제주도에 도착하는 사건이 묘사되었다. 이 부분에는 비장들의 자탄사설(自歎辭設)이 끼어 있는데. 이는 <적벽가(赤璧歌)>에 나오는 군사들의 자탄사설과 비교될 수 있을 것이다. 이어 애랑과 정비장의 이별장면이 벌어졌다. 이 장면은 그 자체가 희극적이지만 동시에 애랑과 배비장 사이에 벌어질 사건을 준비하는 구실도 하고 있다. 정비장이 애랑에게 창고에 넣어둔 자신의 짐을 모두 내어주고 이별하려 할 때. 애랑은 정비장의 몸에 지닌 것을 남김없이 얻어내고는 끝내 그의 이빨까지 빼게 만들었다.
서울을 떠날 때 어머니와 부인 앞에서 여자를 가까이하지 않겠다는 맹세를 하고 떠났던 배비장은 이 장면을 보고 정비장을 비웃다가 애랑을 두고 방자와 내기를 걸게 되었다. 기생과 술자리를 멀리하면서 홀로 깨끗한 체하는 배비장을 유혹하기 위해서 방자와 애랑은 계교를 꾸몄다. 이러한 계획은 목사가 지시한 일이었다. 목사는 계교의 실행을 돕기 위하여 야외에서 봄놀이판을 벌였다. 목사 일행을 따라나와 따로 자리잡은 배비장을 유혹하려고 애랑은 수풀 속 시냇가에서 온갖 교태를 부리며 노닐었다. 이에 크게 마음이 움직인 배비장은 배가 아프다는 핑계를 대고 뒤처졌다. 이 부분에 금옥사설(金玉辭說)이 끼어 있는 바, 이것은 앞 부분에 끼어있는 기생점고(妓生點考)와 함께 <춘향전>에 나오는 금옥사설 · 기생점고 부분과 비교될 만하다. 배비장은 방자를 사이에 넣어 애랑이 차려주는 음식상을 받아 먹고서, 애랑을 잊지 못하여 마음의 병이 들게 되었다.
배비장은 방자를 매수하여 애랑과 편지를 주고받으며 만날 기약을 얻어냈다. 배비장은 방자가 지정하는 개가죽옷을 입고 애랑의 집을 찾아갔다. 배비장은 애랑의 집 담구멍을 간신히 통과하여 애랑을 만나게 되었는데 한밤중에 방자가 애랑의 남편 행세를 하며 들이닥치자, 황급해진 배비장은 자루 속에 들어갔다. 방자가 술을 사러 간다고 틈을 내준 사이에 배비장은 피나무궤에 들어가서 몸을 숨겼다. 방자는 배비장이 숨어 들어가 있는 피나무궤를 불을 질러 버리겠다고 위협을 하다가, 다시 톱으로 켜는 흉내를 하면서 궤 속에 든 배비장의 혼을 뽑아버렸다. 배비장이든 피나무궤는 목사와 육방관속(六房官屬) 및 군노배(軍奴輩)가 지켜보는 가운데 동헌(東軒)으로 운반되었다.
바다위에 던져진 줄 안 배비장이 궤 속에서 도움을 청하자, 뱃사공으로 가장한 사령들이 궤문을 열어주었다. 배비장은 알몸으로 허우적거리며 동헌 대청에 머리를 부딪쳐 온갖 망신을 당하였다. 1950년도 출간본은 희극적 파탄이 최고조에 도달한 이 부분에서 끝났다. 구활자본에서는 이와 같은 망신을 당한 배비장은 목사에게 하직하고 서울로 돌아가기 위하여 배를 기다리다가, 애랑이 해남(海南)에 간다고 소문 내면서 준비해 놓은 배에 숨어 들어갔다가 다시 애랑을 만나고, 뒤에 정의현감으로 임명되어 애랑과 함께 부임해서 그 고을을 잘 다스리는 행복을 누렸다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이 작품은 판소리 사설이 기록화되면서 소설화된 것이기 때문에 여러 곳에서 판소리 사설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이 작품의 문체는 판소리 사설의 문체적 특징을 수용하고 있다. 판소리로 불리어진 다른 작품에서 찾아볼 수 있는 것과 같은 삽입가요(揷入歌謠)도 발견된다. 그런데 1950년도 출간본은 판소리 사설에 더욱 가까운 면을 지니고, 구활자본은 소설로 바뀌어져 있다는 느낌을 준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방자는 배비장의 약점과 위선을 폭로하고 파괴하는 일을 적극적으로 수행하고 있어서 주목된다. 그런 면에서 가면극에 등장하는 말뚝이와 상통한다. <춘향전>에 나타나는 방자보다도 더 날카로운 풍자의 기능을 보이고 있다.
따라서 <배비장전>의 방자는 판소리 사설이나 판소리계 소설에서 작가의 목소리를 개입시키는 장치로 형상화되는 인물유형의 하나로 주목될 수 있다. 이 작품의 주제는 위선적인 인물 또는 위선적인 지배층에 대한 풍자에 있다. <배비장전>은 관인사회의 비리(非理)와 야합상(野合相)을 소재로 하여 관인사회 일반을 풍자하며, 그러기에 날카로운 웃음의 긴장상태가 계속되는 작품이라고 판단되기도 한다.
<출처: 국어국문학자료사전, 1998., 이응백, 김원경, 김선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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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비장전
천지간의 인생이란 남녀를 막론하고 사람의 씨는 같겠지만, 그러나 사람마다 우열이 판이하여 남자에 현인·군자와 우부·천맹이 있고, 여자에 정부·열녀와 음녀·간희가 아주 없어지는 일이 없이 대를 이어오니, 예나 이제나 헤아려 알 수 없는 것은 형형색색의 사람의 성질이라 할 것이다.
사람의 성질이란 것은 살고 있는 고장의 산천이 지니는 풍치와 경치를 많이 닮게 되는 것이니, 산 좋고 물 맑은 고장의 사람은 성질이 순후하고 공손하고 부지런하며 악한 기질이 별로 없고, 산천이 험준한 지방에서는 그대로 사람의 성질이 어리석고 둔하며 간사하고 교활하게 나는 법이다.
호남 좌도 제주군 한라산은 옛적 탐라국 주산이요, 남녘땅의 제일 명산이다. 그 험준하고 아름다운 정기가 서려서 기생 애랑이 생겨났는지 모른다.
애랑이 비록 천기로 태어났을망정 그 맵시와 지혜가 누구보다 빼어났고 간교한 꾀는 구미호가 환생을 한 것인지 호색하는 사나이가 걸려들면 상투 끝까지 빠져들어 허덕이게 하는 것이었다.
한양에 김경이라는 양반이 있었다. 문필과 재능이 비범하여 십오 세에 생원․진사에, 이십 전에 장원에 급제하여 제주목사를 제수 받았다.
김경이 도임길에 오르고자 이·호·예·공·병·형 등 육방을 선택할 때 서강 사는 배선달을 장막 안으로 불러 예방의 소임을 맡기니, 그를 높여 비장이라 하였다.
배비장은 팔도강산 좋은 경치 안 본 데가 없으나 제주는 육지에서 멀리 떨어진 섬이라 아직 구경을 못 하고 있던 터라 자연 기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좋아하는 모양을 보고 아내가 주의하였다.
"제주라는 곳이 비록 육지에서 멀리 떨어진 섬이긴 하나 색향이라 합니다. 그곳에 계시다가 만약 주색에 몸이 빠져 돌아오지 못하신다면 부모님께 불효되고 첩의 신세를 망칠 것입니다."
그러자 배비장은 펄쩍 뛰었다.
"그건 염려 마오. 명심하고 절대로 계집은 가까이하지 않겠소."
배비장은 전령패를 차고 김경을 따라 떠나게 되었다. 이때는 바로 꽃이 한창인 봄철이라. 오얏꽃, 복사꽃, 살구꽃이 만발하고 풀과 버들은 푸르고 맑은 물은 잔잔하며 사방의 풍광이 아름답기 그지없었다. 배비장이 이런 아름다운 경치에 취하여 사방을 두루 둘러보며 해남 땅에 다다르니 새로 도임되어 오는 목사를 맞이하려고 하인들이 등대해 있었다.
사또가 하인들의 인사를 받은 후에 사공을 불러 분부하였다.
"예서 배를 타면 제주까지 며칠이나 걸리는고?"
사공이 공손히 여쭈었다.
"일기가 청명하고 서풍이 살살 불어 꽁무니바람에 양 돛을 갈라 붙여 아디에서 핑핑 소리 나고, 뱃머리에서 물결 갈라지는 소리가 팔구월 열 바가지 삶은 것같이 절벅절벅 소리 나면 하루에 천리 길도 갈 수 있고 반쯤 가다 왜풍 만나 표류하면 영국이라도 갈 수 있습니다. 만일 일이 틀리면 바닷물도 먹고 숭어와 입도 맞추게 됩니다."
사또가 분부하였다.
"제주에 당일로 닿는다면 상을 많이 줄 테니 착실히 거행하라."
사공이 분부를 받고 순풍을 기다리는데 마침 날씨가 청명하여 서풍이 솔솔 불어왔다. 그러자 사공이 소리를 높여 아뢴다.
"사또 배에 오르시오."
사또 일행이 배에 오르자, 도사공이 키를 들고 역군은 아디 틀며 돛을 달아 바람에 맞추어 배를 내어 망망대해로 나갔다. 그리고 배 위에서 술을 마시고 사람마다 봄 술에 취하여 상하가 같이 즐기는 것이었다.
그런데 배가 이윽고 추자도에 거의 다다랐을 때였다. 난데없이 태풍이 일어나고 사면이 침침해지더니 물결은 찰랑거리고, 태산 같은 물굽이가 덮치면서 우러렁 콸콸 뒹굴어 펄펄 뱃전을 때리고, 바람에 배 위의 띳집도 조각조각 흩어지고, 키는 꺾이고, 용총줄 마룻대가 동강 나고, 고물이 번쩍 들리면 이물이 수그러지고, 이물이 번쩍 들리면 고물이 수그러져서 덤벙 뒤뚱 조리질 치니, 사또는 어리둥절하고 비장과 하인은 분주하게 서둘렀다. 사또가 그런 중에도 노하여 사공을 꾸짖었다.
"이놈, 양반은 물길에 익숙지 못해서 떨지만, 물길에 익은 놈이 그렇게 떠느냐?"
사공이 송구스럽게 말하였다.
"어려서부터 허다한 바다를 다 다녔지만 이런 고생은 처음이오. 사해용왕이 외삼촌이라도 살아나기는 아주 어렵겠소. 살아나려면 이 물을 다 마셔야 하겠으니 뉘 배로 이 물을 다 먹겠소?"
모든 사람이 다 울고 비장들도 울었다. 그러나 사또의 명으로 고사를 지내고 나자 이윽고 달이 오르며 물결이 자니 배는 순조롭게 제주성에 다다르게 되었다.
환풍정에서 배를 내려 사면을 둘러보니 제주에서 제일 경치 좋은 망월루이다.
망월루를 살펴보니 어떤 청춘 남녀 한 쌍이 서로 잡고 이별이 안타까워 한숨 쉬고 눈물짓는 것이었다. 이는 구관 사또가 신임하던 정비장과 수청 기생 애랑의 애타는 이별 장면이었다.
정비장이 애랑의 손을 잡고 말하기를,
"잘 있거라, 나는 간다. 서울 태생 소년으로 제주 물색 좋단 말에 마음이 쏠려 이곳에 와 아리따운 연분을 너와 맺고 세월을 보낼 적에 맵시 있는 너의 태도, 목청 맑은 네 노래에 고향 생각 잊었건만 애닯구나 이별이야! 푸른 강 맑은 물에 원앙새가 짝을 잃은 격이로구나. 사람 없는 높은 산 깊은 골에서 둘이 만나 희롱하다 이별하는 것이로구나. 이별이야, 이별이야, 애닯고나 이별이야! 애랑아, 부디 잘 있거라!"
다음은 애랑의 거동이다. 없는 슬픔을 짜내어 고운 얼굴에 웃는 듯 찡그리는 듯 길게 한숨 지며 하는 말이,
"여보 들어 보시오. 나으리가 이곳에 계시는 동안은 먹고 입고 살기에 걱정 없이 세월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 누구에게 의탁하라고 하루아침에 떠나가십니까?"
"그대는 염려 마라. 내 올라가더라도 한동안 먹고 쓰기에 넉넉할 만큼 볏섬을 풀어 주고 갈 테니."
그리고는 정비장은 창고지기에게 분부하여 볏섬을 풀어 애랑에게 주도록 하였다. 그뿐이 아니다. 그 밖에도 애랑에게 준 갖가지 재물들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았다.
이에 애랑은 눈물을 이리저리 씻으면서 흐느끼는 소리로 말하는 것이었다.
"주신 기물은 천금이라도 귀하지 않습니다. 백 년을 맺은 기약이 한판의 부질없는 꿈이 되니 그것만이 애닯을 뿐입니다. 나리가 소녀를 버리고 가시면 백발 부모 위로하고 아름답고 귀여운 처자 만나 그리고 그리던 정회를 풀 때 소녀 같은 보잘것없는 첩이야 다시 생각이나 하시겠습니까? 애고 애고 슬퍼라."
정비장은 완전히 마음을 빼앗기고 만다.
"네 말을 들으니 정이 간절하구나. 내 몸이 지닌 노리개를 네 마음대로 다 달라고 해라."
그렇지 않아도 정비장을 물오른 송기 벗기듯 하려는 참인데, 가지고 싶은 대로 주마고하니 애랑이 년은 불한당 같은 마음에 피나무 껍질 벗기듯 아주 홀랑 벗겨 버리려고 하였다.
"여보 나으리 들으시오. 갓두루마기 소녀에게 벗어 주고 가시면 나으리님 가신 후에 그 갓두루마기 한 자락은 펴서 깔고 또 한 자락은 흠썩 덮고 두 소매는 착착 접어 베개 삼아 베고 자면 나으리 품에 누운 듯 그 아니 다정하겠소?"
정비장은 양피 갓두루마기를 훨훨 벗어 애랑에게 주었다.
"이 옷을 깔고 덮고 베고 잘 때 부디 나를 잊지 마라."
애랑이 또 말하기를,
"나으리님 들으시오. 나으리 가신 후 겨울이 와서 추운 바람이 불 때 귀시려 어떻게 살겠습니까? 나으리 쓰신 돼지껍질 휘양을 소녀에게 벗어 주고 가시면 두 귀에 덥석 눌러 쓰고 땀을 흘릴 테니 그 아니 다정하겠소?"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정비장은 휘양을 벗어 애랑에게 주었다.
"손으로 겉을 만지며 입으로 털을 불며 쓰게 되면 엄동설한 추위라도 네 귀 시리지 않을 것이다. 이 휘양 쓸 때마다 부디 나를 잊지 마라."
애랑이 또 말한다.
"여보 나으리 들으시오. 나으리 차신 칼을 소녀에게 풀어 주시오."
정비장은 그러나 칼을 만지며 이것만은 거절하였다. 그러자 애랑이 말하였다.
"여보 나으리 들으시오. 내가 임을 위하여 수절할 때 외간 남자가 달려들면 어쩌란 말이오? 소녀는 나으리가 주고 가신 칼을 빼어 키 큰 놈은 배를 찌르고, 키 작은 놈은 멱을 찔러 물리쳐야 하지 않겠습니까? 제발 그 칼을 풀어 주시오."
정비장은 껄껄 웃으며 기분이 좋아 칼을 풀어 주었다.
"수절 공방 범하는 놈 네 수단껏 잘 찌르면 만인은 못 당해도 한 사람은 당할 수 있을 것이다."
애랑이 칼을 받아놓고 앉아 울면서 또 하는 말이,
"여보 나으리 들으시오. 나으리 입으신 숙주창의 소녀에게 벗어 주고 가시오."
그러자 정비장이 말하였다.
"여복을 달란다면 괴이할 게 없겠지만 남복이야 네게 쓸데가 없지 않느냐?"
"에그, 남의 슬픈 사정 그리도 모르신단 말이오? 나으리의 상하 의복 입고 밖에 나가 이리저리 거닐다 한없이 슬픈 정회 임 생각 절로 날 때 들어와 빈방에 홀로 앉아 이 옷 매만지면 이별 낭군은 가고 없어도 일천 시름 일만 근심 풀어질 것이니 그 아니 다정하겠소?"
정비장이 크게 현혹되어 옷을 모두 활활 벗어 주니 애랑은 그 옷을 받아 놓고 또 말하였다.
"여보시오, 나으리 들어 보시오. 나으리와의 이별 후에 때로 나으리 생각나면 그 답답하고 슬픈 마음을 어찌하겠습니까? 그 슬픔을 풀 길이 없을 겁니다. 무얼 가지고 슬픔을 풀면 좋겠습니까? 나으리 입고 계신 고의적삼을 소녀에게 벗어 주시면 제 손으로 착착 접어 두었다가 임 생각에 잠 못 이루고 누웠을 때, 나으리의 고의적삼을 나으리와 둘이 자는 듯이 담쏙 안고 옷가슴을 열어 볼 것입니다. 그리하여 향기로운 임의 땀내 폴싹폴싹 코를 건드리면 그 냄새로 슬픔을 풀 것이니 그 아니 다정하겠소?"
그까짓 고의적삼쯤이 문제랴. 통가죽이라도 벗어 줄판이었다. 정비장은 고의적삼마저 벗어 애랑에게 주고 정비장이 아니라 알비장이 되었다. 그러니 밑천을 가릴 길이 없었다. 할 수 없이 그는 방자를 불렀다.
"가는 새끼 두 발만 들여오너라."
그것으로 개짐을 만들어 가지고 제마 입에 쇠재갈 먹이듯이 샅에 차고서 눈을 두리번거리는 것이었다.
"어허 극한이로구나. 바다의 섬 속이라서 매우 차구나."
그러나 애랑이 또 청하였다.
"나으리 들어 보시오. 옷은 그만 벗어 주고, 나으리 상투를 좀 베어 주신다면 소녀의 머리와 함께 땋겠습니다. 그렇게 한다면 그 아니 다정하겠습니까?"
그 말을 듣고 정비장은 말하였다.
"정리는 비록 그렇다만 너는 나더러 바로 정텃절 몽구리 아들이 되란 말이냐?"
"나으리 여보시오, 내 말 좀 들어 보시오. 나리가 아무리 다정하다 하나 소녀의 뜻만 못하니 애닯고 그 어찌 원통치 않겠습니까? 그건 그렇거니와 창가에 마주 앉아 나를 보고 당싯당싯 웃으시던 앞니 하나 빼 주시오."
애랑이 이러고 통곡을 하니 이런 애랑의 모양을 보고 정비장은 어이가 없어 묻는 것이었다.
"이젠 부모의 유체까지 헐라고 하니 그건 어디다 쓰려고 그러느냐?"
애랑이 대답하였다.
"앞니 하나 빼어 주시면 손수건에 싸고 싸서 백옥함에 넣어 두고 눈에 암암한 임의 얼굴 보고 싶고, 귀에 쟁쟁한 임의 목소리 듣고 싶은 생각이 날 때면 종종 꺼내어 보고 슬픔을 풀고, 소녀 죽은 후에라도 관 구석에 지니고 가면 한 몸 합장이 되지 않겠습니까? 그 아니 다정하겠소!"
정비장은 크게 현혹되어 공방의 창고지기를 부르는 것이었다.
"장도리와 집게를 대령해라."
"예, 대령했습니다."
"너는 이를 얼마나 빼어 보았느냐?"
"예, 많이는 못 빼어 보았으나 서너 말은 빼어 보았습니다."
"이놈, 제주 이는 죄다 망친 놈이로구나. 다른 이는 상하지 않게 앞니 한 개만 쑥 빼어라."
"소인이 이 빼기에는 이골이 났으니 어련하겠습니까?"
그러더니 작은 집게로 빼면 쑥 빠질 것을 커다란 집게로 잡고서는 좌로 치고 우로 치는 창과 칼격으로, 차·포 접은 장기 면상 차린 격으로 한없이 어르다가 느닷없이 코를 탁 치는 것이었다. 정비장은 코를 잔뜩 움켜쥐고 소리를 쳤다.
"어허 봉변이로군. 이놈, 너더러 이를 빼랬지 코 빼라고 하더냐?"
공방 창고지기가 대답하였다.
"울려 쑥 빠지게 하느라고 코를 좀 쳤소."
정비장이 탄식하였다.
"이 빼라고 한 게 내 잘못이다."
이러고 있을 즈음이다. 방자가 바삐 뛰어 들어왔다.
"사또 등선하시니 어서 등선하십시오."
정비장은 할 수 없이 일어섰다.
"노 젓는 소리 한마디에 배 떠난다 재촉을 하니 이제 그만 떠날 수밖에 없구나."
애랑은 정비장의 손을 잡고 발을 구르며 탄식하였다.
"나를 두고 어디로 가시오. 하루 천리 가는 저 배에 임은 나를 싣고 가시오. 살아서 다시 못 볼 임 죽어서 환생하여 다시 볼까? 낭군은 죽어 학이 되고 첩은 죽어 구름 되어 첩첩한 흰 구름 속 가는 곳마다 정답게 놀아 볼까."
이에 정비장은 말하였다.
"너는 죽어 높은 집에 거울 되고 나는 죽어 동방에 해가 되어 서로 얼굴을 비쳐 보자."
이렇게 이들이 작별할 때였다. 신관 사또의 앞장을 섰던 예방의 배비장이 이 거동을 잠깐 보고는 방자를 불러 물었다.
"저 건너편 노상에서 청춘 남녀가 서로 잡고 못 떠나고 있으니, 무슨 일이냐?"
방자가 대답하였다.
"기생 애랑이와 구관 사또를 모시고 있던 정비장이 작별하고 있습니다."
배비장은 그 말을 듣고 비방하였다.
"허랑한 장부로구나. 부모 친척과 떨어져 천리 밖에 와서 아녀자에게 현혹하여 저러니 체면이 꼴이 아니다."
방자 놈은 코웃음을 쳤다.
"남의 말씀 쉽게 하지 마십시오. 나으리도 애랑의 은근한 태도와 아름다운 얼굴을 보시면 오목 요자에 움을 묻어 게다가 살림을 차릴 것입니다."
배비장은 잔뜩 허세를 부리면서 방자를 꾸짖었다.
"이놈, 양반의 정취를 어찌 알고 경솔히 말을 하느냐?"
그러나 방자는 물러서지 않았다.
"그러면 황송하오나 소인과 내기를 합시다."
"무슨 내기를 하자느냐?"
"나으리께서 올라가시기 전에 저 기생에게 눈을 팔지 않으시면 소인의 많은 식구가 댁에 가서 드난밥을 먹고, 만일 저 기생에게 반하시면 타시고 다니는 말을 소인에게 주시기 바랍니다."
이에 배비장은 대답하였다.
"그래라. 말값이 천금이 된다할 지라도 내기하고서 너를 속이겠느냐?"
두 사람이 한참 이렇게 수작하고 있을 때, 신관 사또와 구관 사또는 인수인계를 마치고 새 사또가 도임하였다. 그리고 사또의 도임절차가 끝나고 모두가 정해진 처소로 돌아갔을 때는 이미 지고 동쪽에 달이 뜨면서 맑은 바람이 부니 태평한 기상이 완연하였다.
모든 비장이 기생들을 골라잡고 들어가니 방마다 노래소리와 비파소리가 화합하여 월야에 퍼지는 소리는 듣기 좋고 처량한 느낌을 자아내 주는 것이었다.
이 때 배비장은 심사가 울적하여 남들처럼 놀고 싶었다. 그러나 이미 정한 내기가 있다. 장부의 한마디 말은 천금의 무게가 있다 하였으니 어찌 마음을 바꾸어 먹을 수 있겠는가. 그러니 하릴없이 혼자 앉아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이 때 여러 비장 동료들이 배비장에게 권하여 전갈하였다.
"방자야. 네 예방 나으리께 가서 '미인의 고장인 이곳에 오셔서 수심에 싸이시니 웬일입니까? 고향 생각 너무 마시고 미색을 골라 수청들게 하시고 정담을 나눔이 장부의 소일인 줄 압니다.' 하고 여쭈어라."
방자놈은 분부를 듣고 예방 나으리께 전갈을 드렸다. 배비장은 방자에게 되돌려 전갈을 보냈다.
"먼저 물어 주시니 대단히 감사합니다. 모처럼의 청을 거절함은 자못 당돌한 일이나 저는 성질이 원래 옹졸하여 기악은 즐기지 않으니 이를 용서하시고 여러 동관께서나 재미있게 노시기 바랍니다."
그러더니 갑자기 무슨 급한 일이나 있는 듯이 방자를 불렀다.
"지금 내 기생 차지가 누구냐?"
"행수인 줄 압니다."
배비장이 분부하였다.
"네 만일 이후로 기생년을 내 앞에 비쳤다가는 엄한 매를 맞으리라."
이 소리를 사또가 들으셨다. 그리고 일등 명기를 모두 불렀다.
"너희 가운데 배비장을 흐뭇하게 하는 사람이 있으면 중한 상을 줄 것이니 그렇게 할 기생이 있느냐?"
그 가운데서 애랑이 나섰다.
"소녀가 사또의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사또가 말하였다.
"네 만약 배비장의 절의를 꺾을 수 있는 재주가 있다면 기생 중에 으뜸이 되리라."
애랑이 말을 받는다.
"시방 좋은 봄철이니 내일 한라산에서 꽃놀이를 하십시오. 그러면 배비장을 흉계를 꾸며 홀리겠습니다."
사또는 각방 비장과 의논하고 새벽녘에 발령하여 한라산으로 꽃놀이를 갔다. 산속으로 들어가니 온갖 꽃들이 다투듯 피어 있고 온갖 새들이 지저귀어 마치 아름다운 풍악을 갖춘 것 같았다.
사또와 여러 비장이 기생들과 어울려 술을 마시며 춘흥에 겨워 놀 때, 배비장은 저 혼자 깨끗하고 고고한 체하며 소나무 아래 외면하고 앉아 남의 노는 것을 비양하며 글을 읊고 있었다.
그러다가 우연히 숲속을 바라보니, 한 미인이 어릴락 비칠락 백만 가지 교태를 다 부리면서 봄빛을 희롱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상하 의복을 훨훨 벗어 던지고 물에 풍덩 뛰어드는 게 아닌가. 그러더니 물장구를 치며 온갖 장난을 다 하며 손도 씻고 발도 씻고 배·가슴·젖도 씻고 예도 씻고 게도 씻고 샅도 씻고 한창 이렇게 목욕을 하고 있었다. 배비장은 그 거동을 보자 어깨가 들먹거려지고 정신이 흐릿해졌다. 드디어 음남이 되어 눈을 흘끗 뜨고 도둑나무하다가 쫓기듯이 숨을 헐떡거리며, 그 여자의 근본이 알고 싶어졌다.
'어! 저 여자가 누군지는 모르나 사람 여럿 녹였겠다.'
그러나 누구에게 물어 볼 수도 없으니 군침만 꿀꺽 삼키며 자탄할 뿐이었다.
드디어 하루해가 저무니 사또는 관으로 돌아가려고 길을 재촉하였다. 그리하여 모든 비장들과 기생들, 그리고 하인들도 일제히 길을 떠날 때였다. 배비장은 딴 마음을 먹고 꾀병으로 배를 앓는 체하였다.
"벌써 혹했구나."
비장들은 그의 눈치를 채고 수군거리며 겉으로만 인사를 하였다.
"예방께서는 침이나 한 대 맞으시오."
"아니오. 천만에요. 병이 아니니 조금 진정하면 나을 것이오."
배비장이 대답하였다.
비장들은 웃음을 참고 방자를 불러 일렀다.
"너의 나리 병환은 대단치 않다하니 진정되거든 잘 모시고 오도록 해라."
그리고는 배비장에게 말하였다.
"이대로 사또께 잘 말씀을 드릴 테니 마음 놓고 진정한 후에 오시오."
"동관들께서 이처럼 염려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사또께 잘 여쭈어 주시기 바랍니다. 아이고 배야!"
그러자 동관 한 사람이 쑥 앞으로 나섰다. 이 사람은 짓궂기가 짝이 없는 사람이었다. 배비장을 놀려줄 생각으로 이렇게 말하였다.
"그건 너무 염려 마시오. 사또께서는 동관께서 이런 때 없는 병이 있음을 짐작하시는 것 같습니다. 들으니 배앓이는 계집 손으로 문지르면 효력이 있다고 합니다. 기생 한 년을 두고 갈 테니 잘 문질러 달라고 하시오."
"아니오. 내 배는 다른 이의 배와 달라서 기생은 보기만 해도 배가 더 아프니 그런 말씀을 다시 하지 마십시오."
"참으로 그 배는 이상도 하구려. 계집 말만 들어도 더 아프다 하니 우리가 한 낙양 사람으로 천리 밖에 와서 정의가 친형제 같은데 그처럼 괴로워하는 것을 보고서야 혼자 두고 어떻게 갈 수가 있겠소? 진정된 후에 우리같이 가도록 하는 게 좋겠소이다."
"동관께서는 내 성미를 잘 모르시는 것 같습니다. 나는 병이 나면 혼자서 진정을 해야 낫지 형제간일지라도 같이 있게 되면 낫기는커녕 더 아프니 사람을 살리려거든 어서 제발 먼저 가 주오. 애고 배야 나 죽겠소!"
"정 그러시다면 혼자 두고라도 갈 수밖에 없소이다. 우리가 간 후에 무정한 사람들이라고 하지는 마시오."
동관들이 사또를 모시고 관으로 돌아갈 때 배비장은 그 여인을 보아야겠다는 욕심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얘 방자야! 애고 배야!"
"예?"
"나는 여기에 온 후 눈앞이 몽롱해서 지척을 분간 못 하겠다. 애고 배야, 애고 배야."
"소인도 나으리께서 애를 쓰시는 것을 보니 정신이 없습니다."
"우리 사또 가시는 걸 자세히 보아라."
"저기 내려가십니다."
"애고 배야! 또 보아라."
"산모퉁이를 지났습니다."
"애고 배야! 또 보아라."
"저기 아득히 가십니다."
"난 배가 아프기를 그만두었다."
목욕을 하는 여자를 보려고 배비장은 골짜기 화초 사이의 좁은 길로 몸을 숨겨 가만가만 사뿐히 걸어 들어갔다. 그리고 가느다란 소리로 방자를 불렀다. 방자가 그에 대답한다. 그러나 말공대는 점점 없어지고 말았다.
"예, 어째서 부르오?"
방자의 대답이었다.
"너 저 거동을 좀 보아라."
배비장의 말이었다.
"저기 무엇이 있소?"
"얘야, 요란하게 굴지 말아라. 조용히 구경하자구나."
백만 가지 교태를 다 부리며 놀고 있는 그 거동은 금도 같고 옥도 같았다. 배비장은 드디어 이렇게 말하였다.
"금이냐, 옥이냐?"
방자의 대답이었다.
"저 물이 여수가 아니거늘 금이 어찌 놀고 있겠소?"
"그러면 옥이냐?"
"이곳이 *형산이 아니거늘 어찌 옥이 있겠습니까?"
"금도 옥도 아니라면 꽃이냐, 매화란 말이냐?"
"눈 속이 아니거늘 어찌 매화가 피겠소?"
"그럼 해당화가 틀림없구나."
"명사십리가 아니거늘 어찌 해당화가 되겠소?"
"그러면 국화란 말이냐?"
"국화도 아닙니다."
"꽃이 아니면 귀비란 말이냐?"
"온천물이 아니거늘 어찌 귀비가 목욕을 하겠습니까?"
"귀비가 아니면 불여우냐? 애고 애고 나를 죽인다. 나를 죽여!"
"나으리, 뭘 보고 그렇게 미쳤습니까? 소인의 눈엔 아무것도 안 보입니다."
"이 놈아! 저기저기 저 건너 백포장 속에 목욕하는 저것을 못 본단 말이냐?"
"예! 소인은 나으리께서 무엇을 보고 그러시나 했지요. 저 건너 목욕을 하는 여인을 말씀하시나 보군요. 그렇지요?"
"옳다. 너도 이젠 보았단 말이구나. 상놈의 눈이라 양반의 눈보다는 많이 무디구나."
"예. 눈은 반상이 다르니까 소인의 눈이 나리의 눈보다는 무디어 저런 예에 어긋나는 것이 안 보입니다. 그러나 마음도 반상이 달라 나으리 마음은 소인보다 컴컴하고 음탐하여 남녀유별의 체면도 모르고 규중처녀가 목욕하는 것을 보고 욕심내어 눈을 쏘아 구경을 한단 말씀이시구려. 요새 서울 양반들 양반 자세를 하고 계집이라면 체면도 없이 욕심을 낼 데 안 낼 데 분간을 하지 못하고 함부로 덤비다가 봉변도 많이 당합니다."
"뭐라구? 이놈이?"
"유부녀가 약수에 목욕하는 것을 엿보는 타인 남자의 버릇없는 눈치를 채고, 친척들이 일시에 냅다 치면 꼼짝없이 혼만 날 것이니 저 여자 볼 생각은 꿈에도 마시오."
무안을 당한 배비장이 하는 말이었다.
"다시는 안 본다. 그러나 그것을 보면 정신이 헛갈려 아무리 안 보려고 해도 지남철에 날바늘 달라붙듯 눈이 자꾸 그리로만 가니 어쩐단 말이냐?"
방자가 배비장을 보고 있다가 소리쳤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