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은 작년 10월 중순경 텃밭에 시금치와 배추씨를 뿌렸다. 농작물이 잘 자라게 하려고 3주 전에 흙에 밑거름을 넣어 섞었다. 그곳에 가끔 고양이 한 마리가 땅을 파헤치곤 했다. 내가 매일 물을 주었는데도 시금치는 보이지 않았다. 배추는 듬성듬성 싹이 일어나고 있었다. 그는 시금치 씨앗만 다시 덧뿌렸다. "추워지기 전에 새싹이 나야 할 텐데." 반신반의하는 표정으로 나를 본다. 그때만 해도 우리는 주말부부였다. 매일 물을 주고 풀을 뽑으라고 내게 보낸 눈짓이다.
설명절이 지나 바람이 드세게 불었다. 눈까지 내렸다. 텃밭에 배추 다섯 폭이 어린 시금치가 하얀 눈에 덮여있다. 그 모습이 마치 폭신한 이불을 덮고 잠자리에 든 것처럼 평화롭다. 옹기종기 모여있는 시금치가 진한 녹색이 되었다. 얼었다. 녹았다. 성장하고 있다. 남편도 그랬다. 한 직장에서 35년을 일했다. 기뻤을 것이고, 외로웠을 것이다. 그 기간을 버티고 3월에 정년퇴직했다. 쉴 만도 한데 남편은 여전히 다른 시작을 준비한다. 불안한 마음을 다잡으며 바람이 불더라도 사소한 기후의 변화처럼 천천히 준비했다.
시금치씨를 뿌렸던 그쯤 우리는 물맞이 공원으로 산책하러 갔다. 여러 가지 꽃들이 모여있는 산책로가 있고 야트막한 산이 있었다. 짧지만 황톳길도 만들어져있었다. 늦가을인데도 수국꽃이 피어있었다. 정원에는 우리뿐이었다. 남편은 이리저리 주변을 살피더니 내게 망을 보게 했다. 앙상한 수국 가지를 잽싸게 꺾어 바지 주머니에 넣는다. 배추밭에 수확하고 나뒹구는 작은 배추조차도 줍지 못하게 했던 젊은 시절 그 남자는 아니었다.
남편은 집에 오자마자 분리수거함에서 스티로폼을 가지고 와 요리조리 재단하더니 물컵 위에 올려놓는다. 열한 개 구멍을 뚫고 목수국 가지를 꽂았다. 뿌리 내리는 것을 보겠다고 투명한 화병에 물을 담아 물꽂이를 해두었다. 보름이 지나자 메마른 나뭇가지에서 연한 새순이 뾰족뾰족 솟아나는 것이 너무나 신기했다. 한 달이 지나자 겹겹이 잎 싹이 나왔다. 수국의 성장을 위해 남편은 물꽂이에서 화분으로 옮겨심었다.
"오늘 반찬은 땅콩 조림에 시금치나물이에요." 들고 있던 가방을 남편에게 건네주고 나는 운동갈 준비한다. 그는 2년 전부터 자격증 공부를 했다. 그동안 손해평가사, 산업안전기사 자격증을 취득했다. 올 2월에 소방설비기사(기계) 1차 시험 합격하고 2차 준비 중이다. 오늘도 평소처럼 도서관으로 출근한다. 다가오는 여름에 필 수국꽃을 분갈이하듯 자기 일을 분갈이하고 있다.
첫댓글 '다가오는 여름에 필 수국을 분갈이하듯 자기 일을 분갈이하고 있다.'
수국과 남편의 일을 묶은 멋진 표현이네요.
잠시도 쉬지 못하는 부지런한 낭군님과 오래오래 행복하게 지내기를 바랍니다.
다시 만나서 반갑습니다.
매번 반겨주니 고맙습니다.
부지런한 사람과 조금 느린 사람이 만났습니다. 규칙, 정렬, 물건이 있어야 할 곳에 가지런하게 줄 맞춰있어야 하는 사람, 저와는 매우 다릅니다. 이 말이 무슨 말인지 아시죠?
@임정자 전생의 웬수가 부부가 된다는 말에 공감하고 삽니다. 흐흐.
주말부부가 끝나셨군요. 축하드리는 게 맞겠죠? 하하. 알콩달콩 봄을 맞는 두 분이 예쁩니다.
으윽...
행복 끝 불행 시작이죠.
하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