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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금도(居金島)/ 지붕없는 박물관 고흥
거금도(居金島)는 처음 간다.
섬 여행을 남보다는 비교적 많이 다닌 편인 나에게도 거금도(居金島)란 이름이 생소하다.
한국에 섬이 많아서 그랬나? 나의 삶의 터전인 수도권에서 너무 멀리 떨어진 거리 탓인가.
아무튼 난생처음 가보는 곳이라서 그 고장, 그 바다, 그 산, 그 먹거리 모든 것이 새롭게 다가온다.
나의 여행은 셋으로 구분된다. 여행 가기 전의 공부는 예습이요, 여행 가는 것은 실습이요, 돌아와서 글을 쓰는 것은 이를 종합하는 복습 단계다. 그래서 나의 여행기는 많은 선착객 사람들이 본 자료에다가 내 눈으로 본 거금도를 더한 이야기들이다.
거금도(居金島)는 행정구역 상 전남 고흥군 금산면에 속하는 낙타 모양의 섬이다.
조선조에는 절이도(節吏島), 또는 거억금도(巨億金島)라고 불렀다는 섬으로 예로부터 이 고장에 금광(金鑛)이 많다고 알려져 있었지만 '거금도(居金島)'의 '거' 자가 클 '巨'(거) 아닌 살 '居'(거) 자로 쓰는 것을 보면 어제 보고 온 '여수 100리 섬 섬길'에서 들렸던 '적금도(積金島)'의 섬 이름처럼 예부터 금이 많이 묻혀 있을 것이라는 소문만 무성하던 섬 같다.
고흥반도 남쪽 근해상에 위치하고 있는 이 섬은 면적 64.98㎢로 한국에서는 10번째로 큰 섬이라고 현지의 모든 자료에서는 입을 모으지만 필자가 조사해 본 바에 의하면 한국에서 10번째로 큰 섬은 돌산도요, 거금도는 11번째로 큰 섬이었다.
다음은 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섬 넓이들이다. 9위 울릉도 79.99㎢/ 10위 돌산도 70.01㎢/ 11위 거금도 62.08㎢(기타 자료 64.98㎢)
이 섬은 물과 풀이 풍족한 곳이라서 조선 중기부터 말을 방목하여 기르던 마목장(馬牧場)으로도 유명하던 한적한 낙도(落島)였다.
그 거금도에는 옛날에는 2만여 명의 주민이 살았으나 지금은 4,901명(2014. 11)이 살면서 주민들은 그동안 꿈도 꾸지 못하던 뭍과 연결 다리를 놓는다는 기적 같은 소식에 놀라며 고흥의 동양 읍과 거금도를 이어주는 거금대교 건설을 지켜보고 있었다.
총공사비 2,732억 원이나 되는 천문학적인 자금을 투자하더니 9년만인 2011년 12월 16일에 거금대교를 완공되어 '우리 섬도 드디어 거금도도 육지화되었네!' 하며 섬사람들은 얼마나 기뻐했을까? 거금도에 사는 나 같은 노인들은 말했을 것이다.
'사람은 무조건 오래 살고 볼 일이야!'라고. 이번 여행에서 여수를 거쳐서 '여수 100리 섬 섬길', 소록도 등을 거쳐서 거금도 오기까지 수많은 다리를 보며 '사람은 오래 살고 볼 일이라고 말하던 이 사람도 그런 연도교 중에서도 가장 멋있다고 생각되는 교량이 거금대교였다.
거금도와 소록도 사이에 두 개의 작은 무인도를 끼고 S자형으로 환상적으로 휘어지며 이어지는 모습이 그랬고, 중앙 부부분의 다이아몬드 모양의 주탑 2개를 이어주는 노란 케이블을 있는 사장교의 모습이 금빛이어서 '금빛 대교'라는 별명이 또한 그랬다. 모든 다리가 차도(車道)만 만들어 인도, 자전거 도로가 없는 것을 안타까워하다가 거금대교의 1층 자전거, 보행자 도로, 2층 차도를 구분한 한국 최초의 해양 복층 교량을 보며 머리를 끄덕이며 나도 하던 말이다.
거금도를 빛낸 이 고장 출신의 명사(名士)로는 전남 고창의 동리 신재효(申在孝) 선생의 뒤를 이어, 판소리 다섯 마당을 집대성한 인간문화재 동초 김연수(東超 金演洙 1907~1974)씨와 서양화가 천경자(千京子) 화백, 그리고 박치기 왕 프로레슬러 김일(金一)등이 이 고장을 빛낸 거금도 출신들이다.
만약 고(故) 김일 선수가 지금까지 살아있었다면 얼마나 더 기뻐했을까?
박치기왕 레슬러 선수 김일이 당시 전 국민에게 커다란 희망을 주던 1960~70년대 시절이었다. 국위를 선양하는 김 선수의 열렬한 팬이었던 박정희 전 대통령이 그를 청와대에 초청하여 격려하며 이 국민적 영웅 김일에게 물었다.
“임자의 소원은 무엇인가?” 이때 “제 소원은 내 고향 거금도(居金島)에 전기가 들어오는 것입니다”라는 김 선수의 답변으로 낙도인 거금도는 한국의 어느 섬보다 가장 빨리 전기 혜택을 누리는 영광스런 섬이 되었다기에 하는 말이다.
여기에 보태고 싶은 한 마디가 있다.
고흥 거금도(居金島)도 이렇게 세계로의 발돋움을 하고 있으니 이 고장을 빛낸 이 고장 출신에 대하여도 배려하여 드려야겠다는 생각이다. 거금도 자료를 수집하다 보니 김일 기념 체육관과 연관된 어느 네티즌의 댓글에 다음과 같은 글이 가슴을 찌른다.
"동초 김연수 선생의 무덤은 풀만 무성하고 봉분은 들짐승이 파헤쳐 놓았더군요. 그에 반해 맞은편 거창한 '김일 기념관'을 보며 씁쓸했습니다.'
언제부터일까? 청산도의 서편제처럼 무형문화재 제6호 판소리 <춘향가> 예능보유자 동초 선생의 목소리가 거금도 어느 구석에서라도 울려 퍼질 그 날을 기대하여 본다. 이는 고흥이나 거금도만을 위하는 게 아니라 국악계(國樂係)의 발전을 위해서도 하는 말이다.
*. 거금 휴게소/금진(錦津) 선착장
거금대교를 지나자마자 좌측에 거금 휴게소가 있다. 거기에 20m 높이 솟아있는 거대한 스테인으로 만든 조형물이 있다.
거인(巨人)으로 상징된 우주를 향하여 손짓하는 '고흥인(高興人)의 모습'이다.
그 거금 휴게소 바로 아래에 녹동에서 출발한 배가 들어오는 옛날부터 거금도의 명동이라고 할 수 있는 금진항(錦津港) 선착장이 있다. 거금도의 모든 정보와 자료를 한 군데 모아 소개하고 있는 곳이다. 여기가 바로 거금도 '금당 8경' 일주 해상 유람선이 출발하는 곳이요. 무료로 빌려 주는 2인용 자전거를 타고 복층 1층 대교를 달려 볼 수도 있는 곳이며,
휴게소 내에는 정유재란 무렵에 조명 연합군(朝明聯合軍) 시절 이순신 장군에 의해 왜군을 격파한 '절이도 해전 승전탑'과 그 생생한 기록이 있다. 휴게소 옥상은 거금대교와 다도해를 굽어 살펴볼 수 있는 최고의 전망대다.
차들 중에는 먼 고장에서 거금도를 보러 처음 달려온 관광객들도 많건만 이를 모르고 안타깝게 그냥 지나쳐 달려 가고만 있다.
*. 거금도 둘레길
거금도 둘레길로는 해안 따라 일주하는 붉은 노을길/8.7km-- 솔 갯내음길 11.2/km-- 바다 모자이크 길 4.6/km--섬 고래 길 4.6/km-- 발포 허리길 4.9/km--두둥실 길 7.1/km--레슬러 길도 있지만,
우리는 익금해수욕장--오천항- 소원 동산- 거금 생태숲으로 일주를 끝으로 마치려 한다. 다음 나로도 일주 일정이 잡혀 있기 때문이다.
*. 오천항(梧川港) 이야기
오천마을에는 예부터 오동나무와 버드나무가 많았다. 그래서 마을 이름을 '오류천(梧柳川) 마을'이라 하였다는데 그 후 오천마을로 바뀐 모양이다.
오천항에서 가장 인상 깊은 것이 둘이 있다. 그 하나가 바로 '국도 27번 시점 비'다. 이는 소록도와 거금도 대교가 놓이면서 군산도에서 거금도 오천항까지 그 시점이 연장되었다는 기념비라 생각된다.
또 하나의 신기한 것은 커다란 돌들이 여러 가지 모양인데 대개 둥근 것이 많은 것은 이 근처에 몽돌 바위가 많은 것을 주민들이 공룡알 바위라고 한다는데, 그 형성과정과 오천항 둥근 바위도 그와 연관이 있는 것 같다. 여기도 일출의 명소요, 촬영 포인트가 되는 곳이다.
*. 일출의 명소 소원 동산
거금도 둘레길을 달리다 보니 약간의 언덕진 해안가 8 각정이 차를 우리도 모르게 멈추게 한다.
비가 오다가 막 그친 후라서 다도해의 섬들이 구름 속에 잠겼다가 막 걷히기 직전의 카메라맨이 기다리고 기다리던 촬영 순간이었다.
방파제 끝엔 하얀 등대가, 푸른 바다를 우두커니 바라보고, 김 양식하는 광경이 운무(雲霧)에 수줍은 듯 숨바꼭질하듯 숨어 있는데 울긋불긋한 김양식을 돕는 거룻배가 방파제에 기대어 조용히 휴식하고 있다. 일출로 유명한 거금도에서도 가장 경치가 좋다는 곳이 바로 여기다. 다도해의 먼 섬들은 운무에 감싸여 있고-.
여기가 고금도 주민들이 고금도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바다요, 일출을 바라보며 소원을 빌면 이루어진다는 소원 전망대(所願展望臺)였다.
그 광경이 너무나 아름다워서 '아름답다'는 뜻을 사전에게 물어보았다.
사물이 보거나 듣기에 좋은 느낌을 가지게 할 만하다.
마음에 들게 갸륵하고 훌륭하다.(이상 우리말 큰 사전)
사물의 됨됨이가 기쁨과 만족을 줄만하다.(표준국어대사전 이숭녕)
예쁘다, 어여쁘다. 곱다, 귀엽다, 새뜻하다. 아리땁다. 미려(美麗)하다. 수려(秀麗)하다. 우아(優雅)하다. 가려(佳麗)하다. 선연(鮮姸)하다. 청염(淸艶)하다. 야염(冶艶)하다. 기려(奇麗)하다. 휴미(休美)하다. 선호(鮮好)하다. 매력적(魅力的)이다. 빼어나다. (이상 '유의어, 반의어 사전' 김광해 편)
이 중에서도 나의 눈동자를 머물게 하는 말이 있다. '휴미(休美)하다'였다. '아름다움을 쉰다?' 이게 무슨 뜻인가 해서 또 사전에 물어보니 '휴미(休美)하다 = 아름답다'였다. 아름답다라는 말을 쉬는 것이 아름다움'이란 말이렷다. 하하! 명답이로고!
이렇게 아름다운 곳은 임진왜란 때의 전투장이었다니-. 정유재란(丁酉再亂) 때였다. 우리 조명연합군과 왜놈들과의 절리 전투(節吏戰鬪)에서 이순신 장군이 대승전한 역사의 현장이 바로 이 아름다운 바다라니-..
*. 익금해수욕장(益金海水浴場)
해수욕장에도 조건과 자격이 있다.
모래나 고운 자갈이 넓게 펼쳐져 있는가. 수심이 완만하게 경사진 곳이어서 안전한가. 수온도 적당한가. 안전시설과 탈의실, 샤워실 등 자연환경이 갖추어져 있는가. 교통은 편리한가.
이런 조건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이 자연조건이다.
해수욕장의 자연조건(自然條件)이란 대개 백사장은 모래가 활처럼 반원을 그리고 있는 아취형이고, 해수욕장 뒤편에는 시원한 그늘을 제공해 주는 송림(松林)이 있는데다가 주위 경관이 좋다면 최고 해수욕장 터일 것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해수욕장은 부산광역시 서구의 '송도해수욕장(松島海水浴場)이다. 전국에는 대략 330여 개 이상의 해수욕장이 있다는데, 강원도, 전남, 충남 순으로 전북에 해수욕장 수가 가장 적다.
어느 누가 말했던가, '고흥은 해수욕장 천지'라고. 그런 해수욕장 천지인 고흥에서도 가장 유명하여 고흥 사람들이 제일 즐겨하며 찾는다는 해수욕장이 바로 '익금해수욕장(益金海水浴場)'이다. 그 해수욕장 역시 운무에 휩싸여 있다.
우리 가족 1남 2녀도 엄마 생신 기념으로 가족여행을 고흥으로 와서 익금해수욕장을 거닐고 있다. 그런데 익금해수욕장이란 지명이 좀 거칠다.
인명(人名)에서도 그렇지만 지명(地名)에서도 특별한 이유가 아니고는 받침에 'ㄱ, ㄲ,ㅋ/ㄷ,ㄸ, ㅌ/ㅂ, ㅃ, ㅍ 같은 파열음(破裂音)은 피하는 법인데 '왜 '익금'이란 이름을 가졌을까? 다음은 섬 여행 이재언 작가의 이야기다.
바다에서 해가 뜨면 마을 앞 바닷가 모래에 햇빛이 반사되어 금빛처럼 빛 나므로 욱금(旭金)이라 부르다가, 지금의 거금도란 섬 이름처럼 금이 나와 부촌(富村)이 된다면 그때 금을 더한다는 소망으로 '익금(益金) 마을'이라 칭했다.
*. 여행은 생략의 예술인가
여행을 왔다 가서는 언제나 부질없는 아쉬움이 뒤에 남는 법이다,
초행길이라서 까맣게 모르던 곳을 다녀와서 관심을 갖게 되니 어느 정도 알게 된 후의 아름다운 후회다.
'그때 살 껄, 많이 살 껄-, 그때 팔 껄 아주 다 팔 껄-.' 하는 증권 투자가처럼.
거금도 여행도 그랬다.
연흥도를 다녀올 껄-. 고흥을 '지붕 없는 박물관'이라 하듯이, '나로도의 '쑥섬'처럼 섬 천체가 미술관'이라는 연홍도를 알고 난 후였다.
파도에 떠밀려 오는 추한 바다 쓰레기를 멋진 미술작품으로 만들어 승화시켰다는 신진항을 바로 코 앞애 두고 그냥 되돌아 가다니 하는 후회다.
홍연마을을 다녀 올 껄-. 홍연 마을의 고산 목(孤山木)을 보고 싶어서였다.
고산 윤선도(孤山)가 고금도가 아름답다는 말을 전해 듣고 보길도에서 거금도를 찾아 오지 마을인 홍련 마을에 들려서 기념수를 심고 갔다 해서 고산(孤山木)이라 했다는 나무였다.
둘레길 마지막 코스의 송강암은 지눌대사가 지었다는 암자다. ' 3송강'이라 하여 송광사, 송강암, 여수 금오도라 하지 않던가. 그 곳은 높은 산이라서 바다를 굽어볼 수 있는 송강 전망대의 전망이 일품이라는데-. 송강암을 다녀 올껄-. 그랬다.
고금도 '편백숲'이 아름답다 해서 찾아갔다가 여기도 코로나19로 출입금지라서 거금도를 떠나면서 하는 여러 가지 생각들이었다.
첫댓글 일만 성철용 선생님 ! 건강하셔서 여행과 기행수필을 올려주시니 정말로 감사합니다.
고흥은 유자고장이라고만 알고 있었는데 거금도여행이 그렇게 좋은 줄 몰랐습니다.
언젠가는 저도 거금도 방문해 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일만 성철용 선생님 !
한국수필 작가외에 임회장이 있어 글을 올릴 수 있네요. 제 홈피 "ilman의 국내외 여행기"에도 언제나 하루 50명 정도는 매일 독자가 있어 이젠 30만 명 독자가 글을 쓰는 보람을 주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임작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