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겔의 환상(예수 믿는 맛)
2023. 6. 4(주일오전예배) 에스겔 37:1-14
서울대학교 행복연구센터가 사람은 무엇을 할 때 행복을 느끼는가? 하는 조사를 하였다. 그래서 10-60대에게 12항목을 보여주면서 각 활동을 할 때 얼마나 행복한가?를 물었다. 여러분도 12 항목 중에 여러분을 가장 행복하게 하는 항목을 찾아보기 바란다.
영화 콘서트, 전시회 즐기기 2. 여행하기 3. 감사일기 쓰기
4. 행복에 관한 책이나 강연보기 5. 친구만나기 6. 운동하기
7. 가까운 사람에게 선물하기 8.조용히 명상하기 9. 현재에 집중하기
10. 새로운 목표 세우고 실천하기 11. 새로운 취미 배우기 12. 맛있는 음식 먹기
이 질문에 사람들이 가장 행복하다고 한 활동은 여행과 맛있는 음식먹기였다. 그리고 친구를 만날 때, 선물을 할 때, 문화활동을 즐길 때 순으로 나타났는데 이러한 활동은 7점 만점에 5점이상을 받았다. 그러므로 지금 당장 행복을 느끼고 싶으면 친한 친구와 함께 여행가서 맛있는 것을 먹으면 가장 행복한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것이다. 거기에다 사랑하는 사람의 선물을 사면 더 행복할 수 있다.
그런데 감사일기 쓰기는 3.81로 평균점수인 4점이 되지 않았다. 행복 관련 책이나 강연보기, 운동하기, 명상하기가 그 뒤를 이었다. 그러므로 행복을 찾기 위하여 감사일기를 쓰거나 행복에 관련된 책을 읽으면 아무런 효과를 가지지 못하는 것이다.
이 통계가 여러분에게 큰 힘과 위로가 되는가? 그런데 이 연구에서 독특한 결과가 나왔다. 왜냐하면 즐겁고 신나는 일을 긍정적으로 경험하는 것을 헤도닉(hedonic) 웰빙이라 하고, 명확한 목표를 통해 내적성장의 경험을 유다이모닉(eudaimonic) 웰빙이라 하는데, 사람들은 헤도닉 웰빙을 할 때 행복하다고 말한 것이다. 그런데 내 삶은 행복하다고 하는 사람과 내 삶은 불행하다는 사람 사이에 나타난 차이는 헤도닉 웰빙이 아니라, 유다이모닉 웰빙에서 차이가 났다. 모두 헤도닉 웰빙을 다 좋아하지만, 유다이모닉 웰빙의 점수가 낮은 사람은 자기 인생을 불행하다고 느낀다는 것이다.
무슨 말인가? 모든 사람은 다 지금 당장 행복을 느낄 수 있는 것을 찾는다. 그런데 그것만으로 행복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이다. 정말 행복을 찾으려면 어찌보면 행복과 좀 거리가 멀지만 힘들게 감사일기를 쓰고, 또 행복에 관한 책을 읽고, 강연을 듣는 노력을 할 때 행복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저와 여러분은 행복한 삶을 살고 있는가? 이제 오늘 본문인 에스겔서를 보시기 바란다. 오늘 본문의 저자인 에스겔은 예레미야와 같은 시대 사역한 선지자이다. 그런데 예레미야는 무너져가는 유다에서 선지자 역할을 감당했다면 에스겔은 바벨론 포로로 끌려 온 후에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다. 바벨론의 2차 침략(BC 579년)으로 여호야긴 왕과 함께 포로로 끌려온 에스겔에게 하나님은 임하였다.
그때 에스겔의 마음은 어떠했겠는가? 앗수르에 의하여 사마리아가 무너졌고, 바벨론의 침략 앞에 유다는 두려움에 떨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앗수르를 의지해야 한다고 말하고, 또 어떤 사람은 애굽을 의지해야 한다고 말하는 상황에서 에스겔은 아무런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사독제사장의 아들로서 그 어렵고 힘든 현실 속에 에스겔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자신의 신세를 보고 비참함을 느꼈을 것이다.
그러던 에스겔은 여호와 긴 왕과 함께 포로로 끌려와서 5년동안 힘든 시간을 보내었던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이 비참을 넘어 이제 모든 것을 포기한 에스겔에게 임하여서 환상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렇게 하나님이 에스겔에게 보여준 환상 중에 우리가 잘 아는 내용이 오늘 본문이다. 하나님은 에스겔을 마른뼈로 가득한 골짜기로 데려간다. 그리고 하나님은 인자야 이 뼈들이 능히 살 수 있겠느냐? 하고 물으신다.
이 말에 에스겔은 뭐라고 대답해야 하는가? 요한복음 11장을 보면 예수님은 나사로가 죽은 후에 나사렛으로 오신다. 그리고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무덤을 막고 있는 돌을 옮기라고 말씀하신다. 그때 마르다는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요 11:39)고 대답한다. 마르다는 죽은 지 4일 된 나사로에 대하여 예수님은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것이다고 대답한 것이다. 그런데 에스겔은 정말 놀라운 대답을 한다. 에스겔이 뭐라고 했는지 에스겔 37장 3절을 읽기 바란다.
(겔 37:3)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 뼈들이 능히 살 수 있겠느냐 하시기로 내가 대답하되 주 여호와여 주께서 아시나이다
주께서 아신다는 말은 하나님이 원하시면 가능하다는 의미이다. 좀 더 정확하게 말씀드리면 이 일을 가능케 하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 밖에 없습니다는 고백이다.
얼마나 놀라운 믿음의 고백인가? 사실 에스겔은 하나님 앞에 불평과 원망으로 낙심해 있어야 하는 사람이었다. 그런데도 에스겔은 누가 봐도 마른 뼈는 다시 살아날 수 없는 마른 뼈를 하나님은 다시 살릴 수 있다는 그 믿음을 버리지 않았던 것이다.
이렇게 놀라운 믿음을 가진 에스겔에게 하나님은 대언을 명령한다. 그래서 에스겔이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내가 생기를 너희에게 들어가게 하리니 너희가 살아나리라(겔 37:5)고 말할 때 마른 뼈가 달그닥거리며 맞추어지고, 또 그 위에 힘줄이 붙고 살이 차오르는 것이다. 그래서 마른 뼈가 수많은 시체로 바뀐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다시 대언을 명령하심으로 에스겔은 생기야 사방에서부터 와서 이 죽음을 당한 자에게 불어서 살아나게 하라(겔 37:9)고 하였을 때 그 죽은 시체들이 일어나서 여호와의 군대가 된 것이다. 믿음으로 에스겔이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할 때 마른 뼈가 여호와의 군대로 변화된 것이다.
이렇게 마른 뼈가 여호와의 군대로 변화되는 것을 본 에스겔은 얼마나 감격했겠는가? 2003년 제가 한빛교회에 부임하여 유년주일학교를 담당하게 되었다. 당시 한빛교회는 어린이전도협회 사역과 메빅사역을 통하여 프로그램에는 익숙했지만, 몇 명의 교사외는 모두 지쳐 있었다. 그래서 수요기도회를 마친 후 교사기도회를 하자고 제안하였는데, 교사들은 늦은 시간에 기도회는 위험하다고 거절하였다. 그래서 참석이 가능한 사람 20-30명이 모여서 함께 기도회를 했다.
그렇게 3-4달 정도 기도회를 한 후 겨울경건학교를 했다. 1-2학년 반과 3-6학년 반으로 나누어서 교회에서 수련회를 하였는데, 그때 저녁집회를 3시간을 하였다. 1시간 찬양, 1시간 설교, 1시간 기도회였다. 한시간 찬양시간에 아이들은 땀을 흘리며 찬양을 하였다. 그리고 설교 시간에 주위를 돌아보는 학생이 한 명도 없다고 할만큼 집중해서 말씀을 들었다. 그리고 기도회를 하는데, 아이들은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였다. 그 집회를 본 후 선생님들이 다 놀랐다. 그리고 4월에 꾸러기페스티벌이라는 이름으로 총동원전도주일을 하였는데, 어떤 선생님은 꾸러기페스티벌까지 금식을 작정하고 점심시간에 학교 운동장에서 학생들에게 전도하였다. 그리고 어떤 선생님은 매일 아이들 등교시간에 전도지를 나누어주고, 하교시간에 약속하여 아이들을 개별적으로 만나 전도하였다. 그러니 토요일이면 부서별로 모든 선생님이 다 학교 앞에 전도를 나갔다. 처음에 수요기도회를 하자는 말에 이런저런 불만을 하던 선생님들이 모두 열정이 넘쳐서 기도하고, 또 전도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였다. 그래서 꾸러기페스티벌에 1천이 넘는 아이들이 모여서 부서별로 예배를 드렸다. 그리고 꾸러기페스티벌이 마친 후에 선생님 중에 힘들었다고 말하는 분은 아무도 없었다. 모두 감사하고, 모두 감격하는 은혜를 누렸다. 지금도 한빛교회 선생님을 만나면 그때가 제일 좋았습니다 하고 말을 한다.
그런데 사실 저도 그때의 그 기쁨과 감격은 잊혀지지 않는다. 꼼짝도 하지 않았던 선생님들이 기도회를 통하여 조금씩 자기 자리를 찾기 시작하고, 그러한 선생님들과 함께 한빛교회 역사상 처음있는 겨울경건학교를 만들어 집회를 하는데, 그 자리가 얼마나 뜨겁고 감격스러웠던지, 그 후 모든 선생님들이 다 변화되어서 열정을 찾게 된 것이다. 그러한 모습을 보는 것은 교역자에게 있어서 가장 큰 기쁨인 것이다.
그런데 에스겔이 지금 그 놀라운 역사를 보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보여주고 있는 그 마른 뼈는 아무런 소망이 없는 유다백성들이다. 유다백성은 마른 뼈와 같이 살아날 수 있는 기대가 전혀 없는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에스겔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습니다 라고 고백하는 것이다. 그리고 에스겔은 자신이 믿는 그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할 때 유다백성이 살아나서 하나님의 군대로 변화되는 것을 본 것이다. 에스겔은 그 모습을 보면서 감격하고 기뻐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 감격과 기쁨은 에스겔만의 것이겠는가? 어느 목사님이 강사로 다른 교회에 가서 성도들과 함께 마음이 상한 자를 찬송하였다.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시는 주님 하늘의 아버지 날 주관하소서
주의 길로 인도하사 자유케 하소서 새 일을 행하사 부흥케 하소서
그런데 누가 자막 작업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만 띄워쓰기를 잘못해서 이렇게 자막에 이렇게 글귀가 적혀 있었다.
마음 이상한 자를 고치시는 주님
목사님은 찬송을 부르다가 그 글귀를 보고 웃음을 참지 못했다. 그래서 찬송시간에 웃음을 참으려고 안간힘을 쓰던 목사님은 갑자기 하나님은 마음이 상한 자만 고치는 분이 아니라, 마음이 이상한 사람도 고치시는 분이 맞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여러분은 이 목사님이 깨달은 것을 체험하고 있는가? 사도 바울의 생애를 보면 이해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예수 믿는 사람을 잡아 옥에 가두는 일을 한 사람이다. 그랬던 바울은 예수님을 믿고 난 후에 사람들에 의하여 옥에 갇히는 자가 되었다. 박해를 하던 사람이 박해를 받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면 바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예수 괜히 믿었다가 되어야 한다. 그런데 바울의 입에서 예수 괜히 믿었다는 말이 한번도 나오지 않는다. 오히려 바울은 기뻐하고 즐거워한다고 말하고, 또 갇힌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원한다(행 26:29)고 아그립바 왕에게 말을 할 정도로 자기 삶에 만족하고 있는 것이다.
어떻게 바울이 그런 만족을 가질 수 있었겠는가? 감옥에 갇힌 바울이 자신의 삶에 대하여 이렇게 만족함이 넘칠 수 있었던 것은 좋은 곳에 여행을 가고, 맛있는 음식을 먹어서가 아니다. 바울은 복음의 진보를 보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감당하며 나아갈 때 마른 뼈와 같이 소망을 잃었던 사람들이 소망을 가지며 하나님의 사람으로 일어나는 것을 경험하였기에 바울은 감사와 감격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이다.
저와 여러분에게 이런 감사와 감격이 있는가?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그 말씀을 대언하며 살 수 있기를 바란다. 그래서 죽은 영이 살아나고 하나님의 군대를 세워가는 것을 목도하는 참된 행복과 만족을 누리는 성도의 삶이 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