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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0장第二十章
(아주 먼 옛날의 세상 사람들은 마음이 유위有爲를) 배우는 바를 끊어냈다. (따라서 그들은 무위無爲를 일삼는 바를) 두려워하는 바를 가지는 바가 없었다. (따라서 아주 먼 옛날의 세상 사람들이 “당신은 무위無爲를 일삼기를 잘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크게 대답하는 소리였던) “예唯”는 (작게 대답하는 소리였던) “예阿”를 더불어 했다. (따라서 아주 먼 옛날의 세상 사람들은 모두 무위無爲를 일삼기를 잘했다. 따라서 그들이 도道·自然·性와) 더불어 떨어진 바가 어떠했겠는가? (멀지 않았다. 이른바, 아주 먼 옛날의 세상 사람들이 “당신은 무위無爲를 일삼기를 잘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작게 대답했던) “예阿”는 (무위無爲를 일삼기를 잘하지 못할 때 내는 소리가 아니라, 무위無爲를 일삼는 바) 그것을 잘할 때 (내는 소리)로서, (크게 대답하는 “예唯”보다 무위無爲를 일삼기를) 잘하지 못할 때를 더불어 한다. (따라서 아주 먼 옛날의 세상 사람들은 모두 무위無爲를 일삼기를 잘했다. 따라서 그들이 도道·無爲·性·德와) 더불어 떨어진 바가 어떠헸겠는가? (멀지 않았다) (따라서 아주 먼 옛날의) 세상 사람들은 이른바 (유위有爲를) 두려워했다. (따라서 아주 먼 옛날의 성인은 또한 유위有爲를)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지금의 세상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바는 비유컨대 무위無爲의) 풀이 뒤덮은 논밭(荒; 道·德·自然·無爲·性·命)이다! 그들은 (무위無爲의 풀이 뒤덮은 논밭의) 가운데 자리하지 않는다! (이른바, 지금의) 세상 사람들은 (마음이 유위有爲에) 빠진 채, (유위有爲를) 좋아한다. 소를 잡아 큰 제사를 지내는 듯, 큰 누대에 올라 꽃이 핀 풍경을 구경하는 듯. (따라서) 나만 홀로 (마음이 유위有爲에 대해) 조용하다! 그 (생각이 유위有爲의) 싹을 틔우지 않는다. (그 입꼬리를 일부러 일삼아 위로 올려) 점점 길어지게 할 줄 모르는 갓난아이인 듯. (아주 먼 옛날의 세상 사람들은 모두 마음이 비유컨대 무위無爲의 수레를) 올라타고 올라탔다! (따라서 나는 홀로 마음이 비유컨대 유위有爲의 수레바퀴 자국을 남기는 바로) 돌아가는 바를 가지는 바가 없는 바와 같이 한다. (아주 먼 옛날의) 세상 사람들은 모두 (마음이 무위無爲가) 남아도는 바를 가지는 바가 있었다. 따라서 나만 홀로 (마음이 유위有爲를) 잊어버리는 바와 같이 한다. (따라서) 나만 (홀로 유위有爲에 대해) 어리석었던 (아주 먼 옛날의) 세상 사람들의 마음이다! (그러나 지금의 세상 사람들은 마음이 무위無爲에 대해) 어둡고 어둡다! (따라서 지금의) 세상 사람들은 지혜와 재주를 (일부러 일삼아) 뽐낸다. 나만 홀로 따라서 (지혜와 재주를 일부러 일삼아 뽐내는 일에 대해) 어둡다. (따라서 지금의) 세상 사람들은 (일부러 일삼는 바를 가지는 바가 없는 바無爲가) 작고 얇다. 나만 홀로 (따라서) 일부러 일삼는 (바를 가지는 바가 있는 바有爲가 크고 두터운) 바를 가지는 바가 없다. (따라서 지금의 세상 사람들은 무위無爲를 살피는 바를 가지는 바가 있는 바와 같이 하는 바에 대해) 소홀하다! (따라서 “나만 홀로” 유위有爲를) 살피는 바를 가지는 바가 없는 바와 같이 한다. (따라서 지금의 세상 사람들은 무위無爲에 이르는 바를 가지는 바가 있는 바와 같이 하는 바에 대해) 조용하다! (따라서 나만 홀로 유위有爲에) 이르는 바를 가지는 바가 없는 바와 같이 한다. (따라서 지금의) 세상 사람들은 모두 유위有爲를 일삼는 바를 가지는 바가 있다. (따라서) 나만 홀로 (유위有爲를 일삼는 바를 가지는 바가 있는 바에 대해) 무딘 채, (유위有爲를 일삼는 바를 가지는 바가 있는 바를) 천하게 여기는 바와 같이 한다. (이른바) 나만 홀로 세상 사람들과 다르다. 왜냐하면, (나만 홀로 아주 먼 옛날의 세상 사람들과 같이 비유컨대 갓난아이가) 젖을 먹는 바인 어미(母; 道·德·自然·無爲·性·命)를 귀하게 여기기 때문이다.
絶學. 無憂. 唯之, 與阿. 相去, 㡬? 阿, 善之, 與惡. 相去, 何若? 人之, 所畏. 不可不畏. 荒兮! 其, 未央哉! 衆人, 熙熙. 如享太牢, 如登春臺. 我, 獨泊兮! 其未兆. 如嬰兒之未孩. 乗乗兮! 若無所歸. 衆人, 皆有餘. 而我, 獨若遺. 我, 愚人之心也哉. 沌沌兮! 衆人, 昭昭. 我, 獨若昏. 衆人, 察察. 我, 獨悶悶. 忽兮! 若晦. 寂兮! 似無所止. 衆人, 皆有以. 我, 獨頑, 似鄙. 我, 獨異於人. 而貴食母.
(이른바, 아주 먼 옛날의 세상 사람들은 마음이 무위無爲가) 지극한 바(至; 道·德·自然·性·命)를 “배웠다.” 따라서 (그들은 마음이 유위有爲를) “배우는 바”를 가지는 바가 없었고, 따라서 (그들은 무위無爲를) 일삼았다. (이른바, 아주 먼 옛날의 세상 사람들은 마음이 유위有爲를) “배우는 바”를 끊어냈다.” (따라서 그들은 유위有爲를) 생각하는 바를 가지는 바가 없었고, (따라서 그들은 유위有爲를) 일삼는 바를 가지는 바가 없었다. 따라서 (아주 먼 옛날의 세상 사람들은 무위無爲를 일삼는 바를) “두려워하는 바를 가지는 바가 없기”를 잘했다.
學至. 於無所學, 乃為. 絶學. 無思, 無為. 故能無憂.
(아주 먼 옛날의 세상 사람들은 도道·自然·性와 “더불어 떨어진 바”가 멀지 않았다. 예를 들어) “유唯”와 “아阿”는 모두 (“당신은 무위無爲를 일삼기를 잘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아주 먼 옛날의 세상 사람들이 “예”라고) 대답했던 소리였다. (이른바) “유唯”는 크게 (“예”라고) 대답하는 소리이고, “아阿”는 작게 (“예”라고) 대답하는 소리이다. (따라서 “당신은 무위無爲를 일삼기를 잘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크게 “예”라고 소리 내어 대답하기를) “잘하는 사람”은 잘하지 못하는 사람보다 (무위無爲를 일삼는 바에) 뛰어난 사람이다. 이른바, “(‘당신은 무위無爲를 일삼기를 잘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크게) ‘유(唯; 예)’(라고 소리 내어 대답하)는 (사람은 작게) ‘아(阿; 예)’(라고 소리 내어 대답하는 사람)보다 (무위無爲를 일삼는 바에) 뛰어난 사람이다. (따라서 아주 먼 옛날의 세상 사람들은 모두 도道·無爲·命·德와) “더불어 떨어진 바”가 멀지 않았다.
唯阿, 皆應聲. 唯, 㳟, 而阿, 慢. 善, 勝惡. 猶唯, 勝阿. 相去, 不逺.
“(아주 먼 옛날의) 세상 사람들은 이른바 (유위有爲를) 두려워했다.” (따라서 아주 먼 옛날의) 성인 또한 (유위有爲) 그것을 “두려워했다.” 이른바, 그 (아주 먼 옛날의 “세상 사람들”이) “두려워한 바”는 (유위有爲가) 큰 바였다. 이른바, (따라서 그 아주 먼 옛날의 성인이 또한 “두려워한 바”는) 이른바 (무위無爲가) 끝점을 다한 바(極; 道·德·自然·性·命)를 가지는 바가 없는 바(者; 有爲)였다. (그러나 지금의 “세상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바”는 비유컨대) “(유위有爲의) 풀이 뒤덮은 논밭荒(의 가운데)이다!” “(무위無爲의 풀이 뒤덮은 논밭의) 가운데가 아니다.” 이른바, (지금의 “세상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바”는 무위無爲의) 두렁길을 가진 바가 없는 논밭域·荒·有爲(의 “가운데”)이다.
人之, 所畏. 聖人, 亦畏之. 而其, 所畏者, 大. 而無極. 荒兮! 未央. 言無畛域也.
“희희熙熙”는 (지금의 세상 사람들은 마음이 유위有爲에) 빠져있다(는 말)로서, 이른바 (마음이 유위有爲를) 좋아한다(는 뜻)이다. “향태뢰享太牢”는 비유한다. (지금의 세상 사람들의 마음) 그것이 (논밭을 갈아야 할 “봄철”에 “큰 소를 잡아 제사를 지내는 일”을) 아름답게 여기는 모습을. “등춘대登春臺”는 비유한다. 그것이 (논밭에 씨를 뿌려야 할 “봄철”에 큰 “누대에 올라” 꽃이 핀 풍경을 구경하는 일을) 즐겁게 여기는 모습을.
熙熙, 溺於所好也. 享太牢, 喻其, 美. 登春臺, 喻其, 樂.
“박泊”은 (마음이 무위無爲에 배를 대었다는 말로서, 마음이 유위有爲에 대해) 조용하다(는 뜻)이다. “조兆”는 (유위有爲의) 싹을 튀운다(는 말)이다. “영嬰”은 갓 태어났다(는 말)이다. “해孩”는 (갓난아이가 저절로 그러하게 웃는다는 말로서, 갓난아이의 입꼬리가 저절로 그러하게 위로 올라가) 점점 길어진다(는 뜻)이다.
泊, 静也. 兆, 萌芽也. 嬰, 方生也. 孩, 稍長也.
(이른바, 아주 먼 옛날의 세상 사람들은 마음이 비유컨대 무위無爲의) 수레를 올라탔던 사람들이다. 이른바, (그들은 마음이 무위無爲로) “돌아갔(던 사람들이)다.” 이른바, (그들은 마음이 유위有爲의 수레를) 올라타지(乗; 乘·駕) 않았(던 사람들이)다. (따라서 노자는 마음이 비유컨대 무위無爲의 수레를) “올라타고 올라타며”, 따라서 (그는 마음이 무위無爲에게) 나아가는 바와 같이 하고(似; 若), (유위有爲에서) 물러나는 바와 같이 하며, (따라서 그는 마음이 비유컨대 유위有爲의 수레바퀴 자국을) 남기는 바로 “돌아가는 바”를 가지는 바가 없다는 것이다.
駕車者. 既歸. 則不乗矣. 乗乗, 則似進, 似退, 未有歸著也.
“유遺”는 (마음이 유위有爲를) 잊어버린다(는 말)이다. (이른바, 아주 먼 옛날의 세상 사람들은) 모두 (마음이 무위無爲를) 알아차리는 바에 힘썼다. 따라서 (그들은 모두) 스스로 일컬었다. “(나의 마음은 무위無爲가) 남아도는 바를 가지는 바가 있다.” (이른바, 아주 먼 옛날의) 성인은 (마음이 무위無爲를) 알아차리지 못하는 바를 가지는 바가 없었다. 따라서 (그는 마음이 유위有爲를) 알아차리는 바를 가지는 바가 없는 바를 바탕으로 삼았다. 따라서 (그는 마음이 유위有爲를) 잊어버리는 바와 “같이 했다.” “우인지심愚人之心”은 (아주 먼 옛날의 세상 사람들은 마음이 유위有爲를) 알아차리는 바를 가지는 바가 없었다는 뜻이다.
遺, 忘也. 各矜所知. 則自謂: 有餘. 聖人, 無所不知. 而實無所知. 則若忘矣. 愚人之心, 言無所知也.
(그러나 지금의 세상 사람들은 마음이 유위有爲와) 섞인 채, (무위無爲를) 알아차리는 바를 가지는 바가 없다.
渾然, 無知.
“소소昭昭”는 (지금의 “세상 사람들”은) 지혜와 재주를 (일부러 일삼아) 뽐낸다(는 말)이다. “약혼若昏”은 따라서 (“나만 홀로” 지혜와 재주를 일부러 일삼아 뽐내는 일에 대해) 어둡다(는 말)이다. “찰찰察察”은 (지금의 “세상 사람들”은 일부러 일삼는 바를 가지는 바가 없는 바無爲가) 작고 얇다(는 말)이다. “민민悶悶”는 (따라서 “나만 홀로”) 일부러 일삼는 (바를 가지는 바가 있는 바有爲가 크고 두터운) 바를 가지는 바가 없다(는 말)이다.
昭昭, 矜智巧也. 若昏, 自晦也. 察察, 苛細也. 悶悶, 無為也.
(“약회若晦”는) “(따라서 나만 홀로 유위有爲를) 살피는 바를 가지는 바가 없는 바와 같이 한다”(는 말)이다.
若無所見也.
(“사무소지似無所止”는) “(따라서 나만 홀로 유위有爲에) 이르는 바(棲; 止)를 가지는 바가 없는 바와 같이 한다”(는 말)이다.
若無所棲也.
“유이有以”는 “(‘따라서以’ 지금의 세상 사람들은 유위有爲) 그것을 일삼는 바를 가지는 바가 있다”(는 말)이다. “완頑”과 “비鄙”는 “(‘따라서’ 나만 홀로) 이른바 (유위有爲를) 일삼는 바를 가지는 바가 없다”(는 말)이다.
有以, 有所用之也. 頑鄙, 則無所用.
(이른바) 도(道; 德·自然·無爲·性·命)는 (비유컨대 만물이 “젖을 먹는” 바인) 만물의 “어미”이다. (따라서 아주 먼 옛날의) 성인은 (아주 먼 옛날의 세상 사람들과 같이 마음이) 도道를 바탕으로 삼았다. (따라서 아주 먼 옛날의 성인은 아주 먼 옛날의 세상 사람들과 같이 비유컨대) “갓난아이(嬰兒; 萬物)”가 “젖을 먹는” 바인 “어미母·道(를 귀하게 여기는 바)”와 “같이 했다.”
道者, 萬物之母. 聖人, 以道為宗. 如嬰兒之, 食於母.
(덧붙여, 아주 먼 옛날의 세상 사람들은 무위無爲가) 지극했던 사람들이었다. 이른바, (그들은 일부러 일삼아 이름 지어 부른) “성스러움과 지혜로움, 인仁과 의義, 재주와 이익”, 이른바 그것을 “내버리고” “끊어냈다.” 따라서 (그들은 비유컨대) “흰빛의 비단(素; 德·無爲·命)과 통나무(樸; 道·自然·性)”로 돌아갔다. 그들은 이른바 (그러한) 세상 사람들(世; 人)이었다.
至人. 於聖智仁義巧利, 既棄絶之. 而歸於素樸. 其, 於世也.
이른바, (아주 먼 옛날의 세상 사람들이) 어찌 이른바 (유위有爲를) “배웠겠는가”? 이른바, (그들은 유위有爲를) “배우는 바”를 가지는 바가 없었고, 따라서 (그들은 무위無爲를) 일삼았다. (이른바, 아주 먼 옛날의 세상 사람들은 유위有爲를) “배우는 바를 끊어냈다.” 따라서 (아주 먼 옛날의) 세상 사람들(物; 世)은 (무위無爲를 일삼는 바) 그것을 “두려워하기”를 충족하는 바를 가지는 바가 없었다.
又何, 所學乎? 惟無所學, 乃為. 絶學. 而物, 無足憂之矣.
이른바, (지금의) 세상 사람들은 이른바 (유위有爲를 일삼는 바에) 어지럽고 어지러운데, 따라서 (그들은 무위無爲를 일삼는 바를) “두려워하는 바”(를 충족하는 바를 가지는 바가 있는 바)가 많은 사람들이다. 따라서 (그들의) 마음은 (유위有爲를 일삼는 바를) 잊어버리기를 잘하지 못한다.
夫世人, 所以擾擾多憂者. 以心之, 不能忘也.
이른바, “선善”은 (아주 먼 옛날의 세상 사람들은 유위有爲를 일삼는 바) 그것을 “잘하지 못하는 사람들이었다”(는 표현으)로서, (아주 먼 옛날의 세상 사람들은 무위無爲를) 일삼는 바가 아주 뛰어난 사람들이었다(는 의미)를 드러낸다. 따라서 (노자는) 일컬었다. “(아주 먼 옛날의 세상 사람들은 무위無爲를 일삼기를) 잘하는 바가 잘하지 못하는 바보다 뛰어난 사람들이었다.” 따라서 (노자) 그는 일컬었다. “(아주 먼 옛날의 세상 사람들은 ‘당신은 무위無爲를 일삼기를 잘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크게 소리 내어) ‘예唯’(라고 대답하는 바)가 (작게 소리 내어) ‘예阿’(라고 대답하는 바)보다 뛰어났다.” 따라서 (노자는) 알지 못했다. (아주 먼 옛날의 세상 사람들) 그들이 (도道·自然·性와) “더불어 떨어진 바(가 어떠한지)를. (이른바, 그들이 유위有爲를 일삼는 바를) 가지는 바가 없는 바(無; 無爲·命·德·道)와 더불어 하는 바(俱; 相)가 “어떠한지를.” (따라서 노자는 일컬었다. “그들이 도道·德·自然·無爲·性·命와 더불어 떨어진 바가 어떠했겠는가?”)
而善, 惡之, 見為最. 故謂: 善之, 勝惡者. 猶之, 謂: 唯之, 勝阿. 而不知其, 相去. 俱無, 㡬.
(따라서 지금의 세상 사람들은 무위無爲를 일삼는 바) 그것을 “잘하는 바”를 아우르고, (유위有爲를 일삼는 바) 그것을 가지는 바가 없는 바를 이름 지어 부르는 것만 같지 못하다. 따라서 (지금의 세상 사람들) 이들의 마음은 (무위無爲를 일삼는 바를) 저절로 그러하게 여기는 바를 키워야 하고, (유위有爲를 일삼는 바와 더불어) 얽히고설키는 바를 가지는 바가 없어야 한다.
不若併善之, 名無之. 而此心, 廓然, 無累矣.
따라서 (아주 먼 옛날의) 성인은 마음(意; 心)이 자기 멋대로 (유위有爲를) 일삼는 바를 뜻하는 바(志; 欲)를 편안하게 여기지 않았다. 따라서 (그는 무위無爲) 그것을 일삼았다. (따라서 그는 아주 먼 옛날의) “세상 사람들”이 이른바 (유위有爲를 일삼는 바를) “두려워하게 하는 바”를 일삼았다. (이른바, 아주 먼 옛날의) 성인(聖人; 吾)은 (유위有爲) “그것을 두려워했다.” 그러나 이른바 (지금의 세상 사람들은 유위有爲를) “두려워하는 바”를 가지는 바가 없다. (그들이 “두려워하는 바”는 비유컨대) “(무위無爲의) 풀이 뒤덮은 논밭이다!” “그들은 (비유컨대 무위無爲의 풀이 뒤덮은 논밭의) 가운데 자리하지 않는다!”
然聖人, 非安意, 肆志. 以行之. 行人之, 所畏. 吾, 亦畏之. 而且無所不畏. 荒乎! 其, 未央焉!
(지금의 사람들은 유위有爲에 대해) 참되다. 따라서 (지금의) “사람들”은 (비유컨대 지금의) 세상이 (일부러 일삼은 맛味·有爲을) 맛보는 바로 나아간다. (따라서 그들은 비유컨대 유위有爲의 뿔이) “크고” (유위有爲의 털이) 고른 바(平; 牢)로 “제사를 지내는 듯하다.” (따라서) 그들은 (비유컨대 유위有爲의 뿔이 “크고” 유위有爲의 털이 고른 바를) 아름답게 여긴다. (따라서 그들은) “봄날에 누대에 오른 듯하다.” (따라서) 그들은 (유위有爲의 꽃이 핀 “봄날”의 풍경을) 즐겁게 여긴다.
正. 以衆人, 之於世, 味. 如享太平. 之, 美. 如登春臺. 之, 樂.
그러나 (아주 먼 옛날의) 성인은 그러하지 않았다. (이른바) 그는 (마음이 유위有爲에 대해) 조용했다. (따라서 노자는 마음이 비유컨대 유위有爲가) 묽은 바(淡; 無爲)를 편안하게 여기고, (무위無爲에) 배를 대는 바를 지켰다. (따라서 노자는 유위有爲가) 싹을 틔운 한 생각도 가지는 바가 없었다. “(따라서 그는 일부러 일삼아) 웃을 줄 모르는” 때의 “갓난아이인 듯했다.” (이른바) 그는 (마음이 무위無爲에 대해) 시끄러웠다.
而聖人, 不然. 其, 静也. 安守淡泊. 無一念之萌. 如嬰兒未孩之時. 其, 動也.
“승승(乗乗; 乘乘)”은 (아주 먼 옛날의 세상 사람들은 모두 마음이 무위無爲의 수레를 “올라타고 올라탄 채”) 저절로 그러했다然·自然(는 말)로서, (그들은 모두 마음이 무위無爲에 대해) 시끄러운 바(動; 自然)와 같이 하고, (유위有爲에 대해) 시끄럽지 않은 바(不動; 無爲)와 같이 했다(는 뜻)이다. “무소귀無所歸”는 (따라서 노자는 “홀로” 마음이 유위有爲의 수레를 “올라타고 올라타는 바”로 “돌아가는 바”를 가지는 바가 있기를) 멈춘다(는 말)로서, 이른바 (따라서 노자는 “홀로” 마음이 유위有爲의 수레)바퀴 자국을 남기지 않는다(는 뜻)이다. (이른바, 노자는 “홀로” 마음이 무위無爲의 수레를 “올라타고 올라탔는데”) 이것이 그가 (당시의) “세상 사람들”과 달랐던 까닭이다.
乗乗, 然, 若動, 若不動. 無所歸, 止, 而不著迹. 此, 其, 所以異於衆人也.
이른바, (아주 먼 옛날의) 세상 사람들(人; 衆人)은 그 (마음이 무위無爲가) 긴 바(長; 道·自然·性)를 살피는 바에 대해 오롯했다. 따라서 (그 마음은 무위無爲가) “남아도는 바를 가지는 바가 있는 바(有; 德·命)”와 “같이 했다.” 그리고 (아주 먼 옛날의) 성인은 이른바 (그 마음이 무위無爲가) 크고(擧; 巨) 큰(萬; 擧) 물건(物; 長)을 품어 안았다. 이른바, (그 마음이 유위有爲가) 텅 비고 텅 비며 (유위有爲를) 가지는 바가 없는 물건(物; 有·無爲)을 바탕으로 삼았다. 따라서 (그 마음은 유위有爲를) 넘어선 채, 저절로 그러했다(然; 自然). (따라서 그 마음은 유위有爲를) “잊어버리는 바(遺; 無爲)”와 “같이 했다.” 따라서 (지금의 성인인 노자는) 일컬었다. “(나의 마음) 이것은 “(유위有爲에 대해) 어리석었던 (아주 먼 옛날의) 세상 사람들의 마음이다.”
夫人, 惟自見其長. 則若有餘. 而聖人, 則包舉萬物. 而實空洞無物. 則超然. 若遺矣. 将謂: 是, 愚人之心也.
그러나 (지금의 세상 사람들은 마음이) 어떠한가? 그것은 (무위無爲를) 알아차리는 바를 가지는 바가 없는 바(無; 有爲)에 섞여 들고 잠겨 든다. 따라서 (지금의) 세상 사람들은 (유위有爲에 대해) 밝은 바를 살핀다. 따라서 (지금의) 성인(聖人; 老子)은 “홀로” “(유위有爲에 대해) 어두운 바(昏; 無爲)”와 “같이 한다.” (따라서 지금의) 세상 사람들은 (일부러 일삼는 바를 가지는 바가 없는) 물건(物; 無爲)을 “작아지게 하고 얇아지게 하기”를 잘한다. 따라서 (지금의) 성인(聖人; 老子)은 “홀로” 일부러 일삼는 바를 (가지는 바가 있는 물건物·有爲을 커지게 하고 두터워지게 하기를 잘하는 바를) 가지는 바가 없다.
歟何? 其, 渾淪無知也. 故人, 見明, 而聖人, 獨若昏. 人, 能察物. 而聖人, 獨無為.
(따라서 지금의) 세상 사람들은 모두 서로 그 (유위有爲를) 살피는 바를 꺼내놓고, (유위有爲를) 일삼는 바를 가지는 바가 있는 바와 “같이 한다.” 따라서 (지금의) 성인(聖人; 老子)은 “홀로” “(유위有爲를 일삼는 바를 가지는 바가 있는 바에 대해) 무딘 채” 저절로 그러하고(然; 自然), “(유위有爲를 일삼는 바를 가지는 바가 있는 바를) 천하게 여긴 채” 저절로 그러하며, (유위有爲를) 펼치는 바를 가지는 바가 없는 바(無; 無爲)와 하나가 된다.
人, 皆各出其見, 若有所用. 而聖人, 獨頑然鄙然, 一無所施.
이른바, (마음이 도道·自然·性를 “귀하게 여겼던 것”) 이것이 (아주 먼 옛날의 세상 사람들이 지금의) “세상 사람들과 달랐던” 까닭이다. 이른바, (아주 먼 옛날의 세상 사람들은 마음이 비유컨대 무위無爲를) “배우고” (무위無爲에 대해) 묻는 바를 “잊어버리는 바(遺; 有爲)”의 옷을 벗어버렸다. (이른바, 아주 먼 옛날의 세상 사람들은 마음이) 도(道·德·無爲·命)를 바탕으로 삼았다. (이른바, 아주 먼 옛날의 세상 사람들은 마음이 비유컨대) 갓난아이(嬰兒; 萬物)가 “젖을 먹는” 바인 “어미(母; 道)”와 “같이 했을” 따름이다.
凡此所以異於人者. 蓋脱遺學問. 以道為宗. 如嬰兒之, 食於母而已.
이른바, (도道·德·自然·無爲·性·命는 비유컨대) 갓난아이(嬰兒; 萬物)가 “젖을 먹는” 바인 “어미”이다. 따라서 (마음이 유위有爲를 “배우는 바를 끊어냈던” 아주 먼 옛날의 세상 사람들이) 어찌 (무위無爲를 일삼는 바를) “두려워했겠는가?”
夫嬰兒, 食母. 曽何憂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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