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된 외로움
2024. 6. 16(주일낮예배) 시편 62;1-12
여러분은 시끄러운 상태를 좋아하는가? 조용한 상태를 좋아하는가? 오스카 와일드가 지은 거인의 정원이라는 동화가 있다. 거인이 집을 비운 사이 아이들이 정원에 들어가서 뛰어놀았다. 양탄자와 같은 잔디에서 뛰고, 또 나무에 올라가기도 하였다. 그때 정원에는 예쁜 꽃도 피고, 또 새들이 날아와서 아이들의 친구가 되었다. 그런데 7년 만에 거인이 돌아왔다. 거인은 자기의 정원에서 아이들이 시끄럽게 뛰어노는 것이 싫었다. 그래서 화를 내면서 아이들을 쫓아내고, 높은 담을 쌓았다. 그리고 절대로 들어오지 말 것! 몰래 들어오면 혼내 줄 것이다. 라는 팻말까지 붙였다. 그 후 아이들은 거인이 무서워 아무도 정원에 들어와 놀지 못하였다. 그런데 아이들이 없는 거인의 정원에는 꽃도 피지 않고, 새들도 날아오지 않았다. 거인의 정원은 싸늘한 바람이 부는 겨울을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거인은 싸늘한 바람이 부는 자기의 정원을 보면서 언제 봄이 오는거야! 하면서 투덜거린다.
그러던 어느 날 높은 담의 작은 구멍으로 아이들이 들어왔다. 그리고 나무야 너무 보고 싶었어! 하며 나무를 안았을 때 나무는 꽃을 피우고, 또 잔디도 푸르게 변하였다. 그래서 정원에 아이들의 웃음과 새들의 지저귀는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그 소리에 거인은 정원으로 나온다. 그리고 나무에 올라가지 못하는 어린아이를 뒤에서 안아 나무 위에 올려주자 아이는 거인의 볼이 입을 맞추어 주었다. 거인은 얼마나 행복했던지 애들아 이제부터 여긴 너희들 거야! 라고 말한다. 그 날 오후 학교에 간 아이들이 거인의 정원을 지나다 깜짝 놀란다. 왜냐하면 꽃이 활짝 핀 나무 아래 거인이 누워있었는데, 거인의 모습이 너무 평화로워 보였기 때문이다.
거인은 언제 행복할 수 있었는가? 거인은 아무도 없는 조용한 집에 혼자 있을 때가 아니라, 시끄럽고 귀찮게 하는 아이들과 함께 있을 때 행복할 수 있었다. 이것은 우리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행복하려면 혼자 있는 시간을 줄이고 귀찮고 피곤해도 함께하는 시간을 만들어 가야 하는 것이다.
그러면 여러분에게 이러한 평화가 있는가? 오늘 본문 시편 62편은 학자들에 의하면 다윗이 압살롬의 반란을 피하여 도망할 때 지은 시라고 한다. 그래서 다윗이 도망할 때 시므이라고 하는 사람은 다윗과 그의 신하들을 향하여 계속하여 돌을 던지면서 사악한 자여 가거라(삼하 16:7-8) 라고 하며 저주한다.
그런데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다윗은 예루살렘 성을 빠져나올 때 후궁들을 남겨 두었는데, 압살롬이 옥상에 장막을 치고 온 이스라엘 무리의 눈 앞에서 후궁들과 동침한다(삼하 16:22).
왜 압살롬은 이런 천륜을 저버리는 행동을 하고 있는가? 압살롬이 아버지의 후궁과 동침한다는 것은 내가 아버지 다윗보다 더 강하다는 것을 나타내는 징표가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것이 전부가 아니다. 아버지 다윗을 죽이기 위하여 칼을 든 압살롬은 다윗의 후궁과 동침하므로 아버지와 완전한 단절을 선언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이 다윗이 압살롬을 피하여 도망할 때의 상황이었다.
그때 다윗을 가장 힘들게 하는 것은 무엇이었겠는가? 지금 한국을 비롯하여 전세계를 가장 힘들게 하는 질병 중에 하나가 외로움이라고 한다. 그래서 미국의 보건을 책임지는 비벡 머피단장은 지난 2023년 5월에 이렇게 말한다.
외로움은 하루에 담배 15개피를 피우는 것보다 몸에 안좋은 질병이며, 비만보다 사망률이 높다.
그런데 이 외로움의 질병이 한국에도 찾아왔다. 그래서 한국 성인 54.6%가 평소에 외로움을 느낀다고 한다. 그리고 우리나라 국민 4명 중에 한 명은 치료를 받아야 할 정도로 심각한 외로움을 겪고 있다고 보고하였다.
그러면 교회 다니는 사람은 다르겠는가? 2023년 5월 목회데이터연구소에서 19세 이상 전국 개신교인 2천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바에 의하면 46.2%가 외로움을 느낀다고 하였다. 그리고 온라인예배를 드리는 사람보다는 예배에 출석하는 사람이 덜 외롭고, 구역모임에 참석하는 사람이 구역모임에 참석하지 않는 사람보다 덜 외롭다고 한다.
그리고 목회데이터연구소는 외로움의 이유를 도표로 정리하였다<도표1>. 성도들이 외롭다고 느끼는 가장 큰 이유는 ①경제적인 문제이고, 그 다음은 ②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③딱히 만날 사람이 없기 때문에 외로움을 느낀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자료를 가지고 오늘 본문의 다윗을 생각해 보기 바란다. 압살롬의 공격에 도망하는 다윗은 아마 도망하는 사람들과 함께 먹는 것도 부족했을 것이다. 경제적으로 큰 어려움을 겪게 된 것이다. 그리고 아들이 아버지를 죽이려 하고, 또 아버지의 후궁과 동침한 것은 그 누구와도 이야기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다윗은 목회데이터연구소가 말하는 외로움의 이유를 다 가지게 된 것이다.
그때 다윗은 이 외로움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가? 목회데이터연구소는 성도가 외로움을 이겨나가는 대처방안을 조사하여 도표를 만들었다<도표2>. 외로움을 느끼는 성도들은 그 외로움을 이기기 위하여 ①취미활동을 하고, 또 ②헬스나 운동 등의 신체활동을 통하여 외로움을 이기려 하고 있다는 것이다. 신앙인이지만, 외로움의 문제를 ③신앙적으로 해결하려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이다.
왜 하나님을 찾지 않는가? 다윗은 압살롬을 피하여 도망할 때 그의 상황이 얼마나 힘들었던지 시 62편 3-4절에서 이렇게 기록한다. 표준새번역으로 읽기 바란다.
(시 62;3-4) 기울어 가는 담과도 같고 무너지는 돌담과도 같은 사람을, 너희가 죽이려고 다 함께 추격하니, 너희가 언제까지 그리하겠느냐? 4너희가 그를 그 높은 자리에서 떨어뜨릴 궁리만 하고, 거짓말만 즐겨 하니, 입으로 해주는 축복이 속으로는 저주로구나. (셀라)
압살롬을 피하여 도망하는 다윗은 자신을 무너져가는 담으로 비유하고 있다. 그런데 대적들은 그러한 다윗을 죽이기 위하여 맹추격하고 있다. 그래서 다윗은 살기 위하여 압살롬을 피하여 도망하는 일이 제일 급할 수 있었다.
그러한 상황에서 오직 여호와 하나님 한 분만 바라는 것이 쉬운가? 또 시편 62편 9절도 읽기 바란다.
(시 62:9) 아, 슬프도다 사람은 입김이며 인생도 속임수이니 저울에 달면 그들은 입김보다 가벼우리로다
여기서 입김(헤멜)은 아무 것도 아니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우리가 힘들고 가슴이 답답할 때 한숨을 쉰다. 그런데 그 한 숨은 다 날아가고 나의 힘들고 답답한 가슴은 그대로 남아 있다. 한숨은 아무 것도 아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아무 것도 아닌 것이 사람이다는 것이다. 아니 뒷부분을 보면 다윗은 사람은 그 입김보다 더 아무 것도 아니다고 말한다.
무슨 말인가? 다윗은 왕이라는 높은 직책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성실과 열정의 삶을 살았지만, 압살롬의 반란 앞에 그 모든 것은 아무 것도 아니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그런데 다윗은 하나님을 찾는다. 인생에 더 급한 일이 있고, 또 허무가 찾아와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그 상황에서 다윗은 하나님을 바라는 것이다.
(시 62:1-2) 나의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람이여 나의 구원이 그에게서 나오는도다 2오직 그만이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원이시요 나의 요새이시니 내가 크게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
만약 여러분이 다윗이었다면 오직 하나님만 찾았겠는가? 창세기 2장 18절을 보면 아담이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였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이 하나님의 모양과 형상대로 사람을 지었다는 창세기 1장 27절의 말씀을 세부적으로 기록한 내용이다. 하나님은 흙으로 아담을 지으시고, 아담을 위하여 여자를 지으실 것을 계획하신다. 그때 아담의 독처하는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좋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아담의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한 문제를 누가 해결하고 있는가? 천지만물을 지으신 하나님은 아담의 몸에서 갈비뼈를 취하여 여자를 만드신다. 그리고 여자를 아담에게 데리고 갔을 때 아담은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는 기쁨을 노래하게 한 것이다. 아담의 독처하는 그 문제를 해결하신 분은 여호와 하나님 한 분 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모습은 예수님에게서도 찾아볼 있다. 마가복음 1장을 보면 예수님이 갈릴리 전도사역을 할 때 한 나병환자를 만난다. 예수님께 와서 무릎을 꿇고 엎드려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는 말하는 그 나병환자에게 예수님은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막 1:41) 라고 기록한다. 예수님은 그냥 나음을 입을찌어다 라고 말씀하시면 고칠 수 있는 능력의 주님이시다. 그런데 예수님은 손을 내밀어 나병환자의 몸에 손을 대시었다.
왜 손을 내밀어 몸에 손을 대었겠는가? 나병은 저주의 병이었다. 그래서 나병에 걸린 사람은 가족과 격리되어 성 밖으로 쫓겨나야 했다. 뿐만 아니라, 나병환자는 건강한 사람이 지나가면 나는 부정한 사람입니다 라고 외쳐서 건강한 사람이 자기 주위에 오지 못하도록 하였다. 이렇게 나병환자는 철저한 격리의 삶을 살아야 했던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렇게 격리된 삶을 살고 있는 나병환자의 병을 고치기 전에 먼저 격리로 가졌던 외로움을 해결해 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저와 여러분은 외로울 때 누구를 찾아야 하겠는가? 시인 정호승이 쓴 수선화 라는 시에서 울지마라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살아간다는 것은 외로움을 견디는 일이다 라고 말한다. 정호승 시인은 사람은 다 외로우니까 견디며 살아야 한다고 노래한다.
그런데 성경은 그렇게 말씀하지 않는다. 성경은 외로울 때 아담의 갈비뼈를 취하여 여자를 만드신 하나님을 찾으라고 가르친다. 아니 나병으로 모든 것에서 격리된 나병환자에게 손을 내미시는 예수님이 있음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 인생의 허무와 외로움에 빠진 분이 있는가? 파스칼은 사람은 하나님 크기의 공백(God-sized vacuum)을 가지고 있다고 하였다. 하나님을 떠난 사람은 모두 하나님이 있어야 할 빈공간(허전함)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 빈공간을 채우도록 하기 위하여 우리의 인생에 외로움을 주신다. 그래서 그 외로움을 통하여 우리를 무너지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빈공간을 채우도록 해 주신 것이다.
그러면 이 외로움은 하나님이 주신 복이 아닌가? 지금 우리가 가진 그 외로움으로 모든 사람은 다 그렇게 사는거야! 라고 생각하지 말기 바란다. 아니 그 외로움 때문에 낙망하지도 말기 바란다. 그 외로움으로 힘들고 어려워도 하나님을 찾기 바란다. 그래서 그 외로움을 통하여 하나님을 만나는 복된 성도가 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