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조운시조집』이 복간되었다. 1947년에 발간된 조운(曺雲)의 첫시조집인 『조운시조집(曺雲時調集)』에 실린 작품과 그후에 발표한 시조 및 자유시들을 한데 엮어 낸 것이다. 조운은 월북작가로서 1988년 월북 문인 해금이 이루어지기 전까지 그의 이름은 ××이거나 曺× 등 익명으로 표기되어 왔다. 그러나 월북 문인 해금 조치 이후에도 그는 시조시인이라는 이유로 다른 시인 작가들과는 달리 오랫동안 재조명 받지 못한 상태였다. 『조운시조집』의 재출간은 이러한 의미에서 뜻깊은 일이 아닐 수 없다. 조운은 가람 이병기 등과 함께 시조가 현대적인 율격과 내용을 갖추도록 한 선각자적인 시인이었다. 그는 현재 발표되는 시조들과 별다른 차이를 느낄 수 없을 정도로 제재나 시어의 선택에 현대적 감각을 지니고 있었다. 일상생활에서 느끼고 경험한 구체적인 소재를 가져옴으로써 추상적인 관념에서 탈피하고 있으며, 고투의 언어에서 벗어나 일상어를 사용함으로써 현대시조와 같은 자연스러운 어조와 정감을 띠고 있다. 고시조적인 제재와 어투에서 벗어나지 못한 당시 시조계의 현실에 비추어, 조운의 작품세계는 매우 앞서갔다고 할 수 있다. 특히 그의 대표작으로 손꼽히는 「구룡폭포」는 오늘날에까지 사설시조의 전형적(典型的)인 작품으로 자주 언급되고 있다. 먼저 조운의 일생을 살펴보도록 하자. 그의 작품이 주로 일상생활에서 소재를 선택한 만큼 그의 삶은 작품과 필연적으로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또한 월북 문인으로서 그동안 그의 연보가 잘못 전해져온 점이 많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조운은 1900년 전남 영광군 영광읍 도동리 132번지에서 출생했다. 본명은 주현(柱鉉)이며 운(雲)은 필명이다. 호는 정주랑(靜洲郞)이며 필명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어릴 때부터 한문을 수학했으며 목포상업전수학교를 졸업했다. 1919년 영광독립만세 시위에 참가했다가 만주 지방로 피신하여 방랑 생활을 했는데 이 시기에 그의 매부이자 문학적 동지였던 소설가 최서해를 만난 것으로 보여진다. 일경에게 체宕퓸?다시 영광으로 돌아온 후 1922~25년까지 영광중학교 작문교사를 지냈으며 이 시기에 시조 창작과 독립운동을 힘썼다. 1926년 프로문학에 대항하여 국민문학운동에 참여했으며, 가람 이병기·서해 최학송·『조선문단』 편집자인 춘해 방인근 등과 가깝게 교유했다. 1937년 영광비라 사건으로 투옥되었으며 1939년 출옥했다. 해방 후 1947년 서울로 상경하여 동국대에서 시조론과 시조사를 강의했으며 이때 문학가 동맹에 참여하게 되며 48년 월북한다. 6·25전쟁 후 북한에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 고전예술극장 연구실장을 지낸 것으로 전해지나 확실한 것은 알 수 없으며, 1956년 임종했다는 것 역시 확실하지 않다. 조운은 시조에 앞서 자유시를 창작했다. 일본시, 서구시에 탐닉하여 1921년 『동아일보』 독자문단에 「불살러주오」를 투고·게재하였으나 좋은 평을 얻지 못했다. 그 뒤로도 40여 편의 자유시를 발표하지만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한다. 조운은 그대신 시조에서 그의 문학적인 성과를 거두었다. 1925년 5월 『조선문단』 8호에 「법성포 12경」, 『동아일보』에 「초하금」 등이 최초로 문단에 선보였다. 이때의 작품성은 그리 뛰어나지 못했으나 시조를 창작해 가면서 그의 문학적 재능은 분출되었고, 그리하여 시보다 시조에 더 매진하게 되었던 계기가 되었으리라 생각된다. 그는 당시 대부분의 시조시인들이 창작과 이론을 병행했던 것과는 달리 시조 창작에만 매진했다. 산문은 거의 쓰지 않았는데 논문으로는 1927년 「병인년과 시조」가 유일하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1926년 한 해 동안 발표된 시조를 평하는 글로서 조운은 최남선의 시조에 대해 비판을 가하고 자유시적인 기교를 사용한 정지용의 시조는 호평하고 있어 그의 시조관을 짐작케 한다. 그밖에 시조 속에 나타난 ‘임’의 뜻을 살펴보는 「임에 대하여」(조선문단, 1925), 술에 대해 읊은 시조들을 소개한 「술」(조선문단, 1925), 연애에 대한 짧막한 글인 「숫머슴애」(조선문단) 등의 수필류의 산문과, 신재효와 판소리에 관한 내용을 담은 「근대가요 大方家 申五衛將」(신생, 1929) 등이 있다. 북한에서 펴낸 책으로는 「조선구전민요집」(54년)과 박태원·김아부 등과 공저한 「조선창극집」(55년, 국립출판사, 평양)이 있다. 『조운시조집』은 1947년 5월 5일 조선사(朝鮮社)에서 초판이 발간되었다.시집 표지의 제자는 가람 이병기, 장정은 화가 이승만이 맡고 있다. 시조집의 목차는 파초(芭蕉), 설청(雪晴), 만월대(滿月臺), 정운애애(停雲靄靄), 일음(日吟), 옥중저조(獄中低調) 등 6부로 나뉘어져 있고 총 75편의 시조가 실려 있다. 서문은 없으며 대신 ‘애음고시조(愛吟古時調)’라 하여 상촌(象村) 신흠(申欽)의 시조 한 편을 싣고 있다. 신흠의 시조를 그대로 옮겨보면, 노래 생긴 사람 시름도 하도 할사 일러 다 못일러 불러나 프돗던가 진실로 풀릴것이면 나도 불러 보리라.
이 시조는 사람들이 걱정 근심을 노래로 지어냈지만, 아무리 지어내도 그것을 풀어내지 못하면 노래를 불러서라도 풀어냈다는 내용이다. 조운은 창에 관심이 많고 시조를 잘 읊는 것으로 알려졌는데, 그의 시조 창작이 바로 여기에서 출발했음을 암시하는 부분이라고 생각된다. 따라서 그의 전기 시조들은 시조창을 의식한 형태와 내용이었지만 중기와 후기에 이르면 창에서 분리된 문학작품으로서의 시조로 완전히 바뀌어간다. 시조에 대한 이러한 인식의 변화는 절친한 교우 관계를 맺었던 가람 이병기의 영향으로 짐작된다. 가람은 조운과 청년시절부터 교제했으며 조운의 결혼식에도 참석하고 월북한 후인 6·25전쟁 중에도 안부를 주고받았다. 조운은 가람과의 만남을 계기로 시조부흥운동에 참여하게 되며, 따라서 가람의 혁신시조운동에 누구보다도 공감하고 이를 실천하고자 했을 것이다. 『조운시조집』에 실린 작품들은 거의 그의 후기작들로서, 높은 문학적 성취도를 획득하고 있다. 『조운시조집』에 실린 작품들을 감상해 보도록 한다. 1부 <파초>는 「채송화」 「오랑케꽃」 「옥잠화」 등 12편의 시조로 이루어져 있다. 「고매」 「석류」 등 평시조 2편을 살펴보자.
고매(古梅)
梅花 늙은 등걸 성글고 거친 가지 꽃도 드문드문 여기 하나 저기 둘씩 허울 다 털어버리고 남을것만 남을듯
「고매」는 모든 욕망을 초탈해 버린 조촐하게 늙은 선비의 모습을 연상하게 한다. 몇번의 굴곡을 거쳐 물기가 다 빠져나간 늙은 매화나무의 가지는 이제 꽃을 피워내지 못한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히 생물학적 노쇠가 아니라 “허울을 다 털어버”린 몇 송이 사리와 같은 꽃을 간직할 줄 아는 삶의 연륜이다. 꽃은 나무의 생식기이자 욕망의 분출구이다. 그 꽃들을 절제할 줄 아는 힘, 그것이 노년의 삶이 가지는 의미이며 삶의 참된 모습이기도 하다. 옛 선비들이 흐드러지게 핀 매화보다 몇송이 꽃만 피워낸 고목등걸을 선호하는 것도 바로 이러한 뜻에서일 것이다. 이 작품은 초장과 중장에서 고목이 된 매화나무의 모습을 묘사하고 종장에서 그에 대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외적 이미지를 내적 이미지로 변환시킴으로써 한 수의 짧은 평시조 속에 깊은 의미를 담아 내고 있는 것이다. 고시조의 전통을 이어받은 시조들이 의미에 중점을 두기보다 사물의 단순 묘사나 서술에 그치고 있는 점에 비추어 그의 시조는 이러한 점에서 차별성을 지니고 있다. 조운은 이와 같은 시적 구조를 사용하여 문학성이 뛰어난 작품들을 양산해 내었다고 할 수 있다. 그의 작품 중 잘 알려진 「석류」 역시 그러하다.
석류
투박한 나의 얼굴 두툴한 나의 입술
알알이 붉은 뜻을 내가 어이 이르리까
보소라 임아 보소라 빠개 젖힌 이 가슴.
이 작품도 초장과 중장에서 석류를 의인화하여 그려내고 있으며, 종장에서 석류가 가지고 있는 이미지에 화자(話者)의 마음을 투영시키고 있다. 시의 화자는 투박하게 생긴 못난 얼굴이지만 임에 대한 사랑만은 알알이 불타올라 이제는 그 마음을 감출 수조차 없는 상태이다. 석류의 외적 이미지가 내적 이미지로 전환되면서, 도치법과 반복법을 사용하여 “보소라 임아 보소라”라며 짝사랑하는 임이 “빠개 젖힌” 자신의 진실한 마음을 알아주기를 간곡하게 호소하고 있다. 제2부 <설청>은 「독거」 「상치쌈」 「시조한장」 등 15편으로 이루어졌다.
雪晴
눈오고 개인 볕이 터지거라 비친 窓에
落水물 떨어지는 그림자 지나가고
와지끈 고드름 지는 소리 가끔 맘이 설레네.
「설청」은 순간적으로 변화하는 감정의 상태를 잘 표출해 내고 있다. 창문으로 터질 듯 쏟아들어오는 햇살과 한순간 그림자를 긋는 낙숫물. 그림자만 비칠 정도로 얼핏 스쳐 떨어지는 낙숫물이지만, 종장에서는 화자의 가슴에 큰 파문을 일으킨다. 바깥을 향해 있던 화자의 시선이 자신의 내면을 향한 순간, 화자의 마음에 소용돌이치는 감정의 변화가 일어난다. 그것을 시인은 와지끈 고드름 떨어지는 소리로, 곧 청각적 이미지로 환치시키고 있다. 인간의 미묘한 감정은 매우 작은 자극에 의해서도 알 수 없는 방향으로 치닫는다. 그 찰나적인 심경의 변화를 낙숫물 지는 그림자와 고드름 떨어지는 소리로 형상화하고 있다는 데서 높은 시적 성취도를 획득하고 있다. 제3부 <만월대>는 「해불암 낙조」 「선죽교」 등 명승고적지를 관람한 소감을 형상화한 작품들이 대부분으로 총 10편으로 구성되었다. 조운의 유일한 사설시조인 「구룡폭포」가 들어 있다.
九龍瀑布
사람이 몇生이나 닦아야 물이 되며 몇劫이나 轉化해야 金剛에 물이 되나! 金剛에 물이 되나!
샘도, 江도 바다도 말고 玉流 水簾 眞珠潭과 滿幅洞 다 고만 두고 구름 비 눈과 서리 비로峰 새벽안개 풀 끝에 이슬 되어 구슬구슬 맷혔다가 連珠八潭 함께 흘러
九龍淵 千尺絶崖에 한번 굴러 보느냐
「구룡폭포」는 조운의 대표작으로 꼽을 만큼 널리 알려진 작품이다. 앞서 말했듯이 사설시조를 논할 때 그의 작품은 하나의 전범으로 늘 거론된다. 사설시조는 산문화된 시로서 산문이 아니다. 그런데 사설시조라고 하면 시와는 달리 시적 의미구조나 운율을 무시해도 좋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더러 있다. 사설시조도 시이기 때문에 나름의 내재율이 존재한다. 그것은 의미구조와 율격이 서로 조화를 이루어 미적 통일성을 이룰 때에 가능하다. 「구룡폭포」는 이러한 점에서 모범적인 작품이 아닐 수 없다. 초장과 중장이 사설의 형태를 취하고 있는데 각 장은 2개의 의미구조로 구성되어 있다. 초장의 경우 ‘몇 생’ ‘몇 겁’이 점층적으로 대립을 이루고 있으며, 중장은 “샘도~고만 두고” “구름 비 눈과~함께 흘러”가 서로 대조를 이루며 의미를 형성하고 있다. 운율 역시 초장에서는 “물이 되며, 물이 되나”가 반복적으로 강조되면서, 중장에서는 ‘샘, 강, 바다, 옥류, 수렴, 진주담, 만폭동, 구름, 비 눈, 서리…” 등이 열거되면서 자연스럽게 형성되고 있다. 시의 의미와 그 의미를 전달하는 운율이 하나가 되어 읽힐 때 미적 통일성은 획득되는 것이다. 또한 이 작품은 격조 높은 시적 진술로써 읽는이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사람이 몇 겁이라는 오랜 시간의 윤회를 거쳐 다다르는 곳은 종교에 말하는 거창한 해탈이 아니라 물이라고 시인은 말한다. 물은 삶과 죽음을 모두 수용하는 근원적 생명력과 정화 또는 청정력을 의미한다. 물로 되돌아가기는 근원적인 순수함으로 돌아가는 것이며 자연과의 합일이다. 시인은 윤회의 끝에 이르러 금강의 물이 되기를 원한다. 그리고 물이 되자면 바다나 강물이 아닌 풀끝에 매달린 작은 이슬 방울이 되고자 한다. 그것도 금강산 구룡연의 높디높은 절벽을 구르는 새벽 이슬이 되고 싶어 한다. 그것은 자연의 극히 작은 일부분을 이루는 지극한 순수함이며, 청정하고 고귀한 시적 표상으로서 시인의 이상을 상징하고 있다. 제4부 <정운애애>는 「책 보다가」 「비 맛고 찾아온 벗에게」 「어머니 回甲」 「아버지 얼굴」 등 개인적이고 일상적인 사건을 제재로 삼은 14편의 시조들로 구성되어 있다. 여기에는 매부이자 절친한 문학 동지였던 서해 최학송의 죽음을 애도하는 시조가 연작 형태를 띠고 있다.
曙海야 芬麗야 ―분려의 訃電을 받으니 먼저 간 서해가 더 생각힌다
「曙海야」 피 식는걸 굽어 볼 때 그때 나는 마지막으로 무엇을 원했던고 부디나 누이와 바꾸어 죽어다오 가다오.
누이가 죽어지고 曙海 네가 살았으면 주검은 설어워도 삶은 섧지 안하려든
이설음 또 저설음에 어쩔줄을 몰랐어.
늙으신 어버이와 젊은 안해 어린 아이
이를 두고 가는 주검이야 너뿐이랴
네 살에 나도 아빠를잃었다 큰 설음은 아니어.
하고 싶은 이야기를 다 해보지 못한 설음
千古에 남고 말을 뼈 맞히는 恨일지니 한마디 더 했더라면 어떤 얘기였을꼬.
최서해(1901~1932)는 「탈출기」 「홍염」 등을 쓴 카프 계열의 소설가로서 조운의 누이동생 분려의 남편이기도 하다. 최서해 부부는 몇 년 사이를 두고 차례차례 세상을 떠났는데, 그 비통함을 직설적으로 진술하고 있다. 조운에게 서해는 매부이기보다 문학적 동지로서의 연대감이 더욱 컸다고 할 수 있다. 누이동생의 부음을 전해 듣고도 ‘먼저 간 서해가 더 생각힌다’고 부제를 달거나, 서해대신 누이동생이 죽었더라면 하고 바랐다는 고백과 서해와 “하고 싶은 이야기를 다 해보지 못”해 한스럽다고 토로하는 데서도 잘 알 수 있다. 이러한 조운의 진술은 인간적 비정함이 아니라 문학에 대한 열정과 집념이라고 할 수 있다. 이어지는 연작시조 「분려야」에서 먼저 간 누이동생의 죽음을 애통해 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芬麗야」
너는 비오던 날 會寧千里 떠났것다 나는 널 보낼제 「웃누이나 못되더냐?」 「차라리 죽어가는 길이라면」 하고 울었더니라.
간지 겨우 三年 더 못 붙일 뉘(世上)이더냐 白이놈이 국문이나 붙이어 볼줄 알아 네 葉書 읽게 될 때까지나 못 기다릴 네더냐. *白이는 曙海의 큰아들
조운은 “웃누이나 못되더냐” 라며 젊은 누이의 죽음을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다. 죽을 목숨이라도 큰아들이 국문이나 읽을 줄 알 때까지 조금이라도 더 살았더라면 하고 “…울었더니라” 라며 그 슬픔을 표하고 있다. 그러나 누이동생의 죽음은 육친을 잃은 아픔이지만, 서해의 죽음은 그의 문학의 일부분을 잃은 것과 마찬가지였다. 「曙海야 芬麗야」에서의 조운의 시적 진술은 바로 이러한 뜻을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제5부 <일음>은 「×月×日」이나 날짜를 밝힌 일기체의 시조와 「복습시키다가」 「일요일밤」 등 13편의 시조로 이루어져 있다. 시조를 일기 쓰듯 생활화한 조운의 문학 자세를 알 수 있다.
×月×日
볕을 지고 앉아 新聞을 보노라니
「雲아!」 부르는 소리 건넌山 마루에서
하이얀 두루마기 자락이 가벼웁게 날린다.
위의 시는 겉 형태로 보아 시조라기보다 자유시에 더 가깝다. 지금까지 인용된 시조들이 거의 그러하듯 조운은 전통적인 시조의 배열 방식보다는 자유시적인 기사 방식을 선호하고 있다. 그가 시조에 앞서 서구의 자유시에 경도된 바 있듯이, 자유시 습작은 그의 시조 창작에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으리라 생각된다. 이 작품은 시각적인 행의 배열과 함께 시어의 사용이나 시적 기법이 당대의 자유시에 못지 않다. ‘신문’이라는 시어(당시로서는 신식 용어인)의 사용과 “운아!”라며 자신의 이름을 시어로 그대로 적고 있지만, 시의 의미구조 속에 그대로 녹아들어 전혀 어색함이 없다. 그리고 종장에서 ‘하이얀 두루마기 자락’을 시인의 심상으로 내면화시킨 상징기법이 특출하다. 건넌산마루에서 부르는 소리는 실제의 소리가 아니라 시인이 마음으로 듣는 소리라고 할 수 있다. 눈이 그친 뒤 명징하게 맑은 하늘은 시인의 상상력을 극대화시킨다. 따라서 ‘두루마기 자락’은 다의적으로 해석될 수 있다. 하얗게 눈 덮인 건넌산이 마치 흰 두루마기를 입고 훠이훠이 찾아오는 그리운 이의 모습으로 환치될 수 있으며, “雲아” 라고 부르는 소리를 뜻 그대로 ‘구름’으로 해석하게 되면 두루마기 자락은 산마루를 지나는 흰구름으로 그 상상력을 확대시킬 수 있을 것이다. 제6부 <옥중저조>는 1937년과 39년까지 3년여에 이르는 옥중 생활에서 지은 시조로 보여진다. 「고향하늘」 「면회」 「덥고 긴 날」 등 11편으로 영어의 몸으로 견뎌내야 할 고달픈 일상들을 그리고 있다.
가을비
―어머니 생각 뜰에 芭蕉 있어 빗소리도 굵으리다 내가 이리 그리울제 어버이야 좀하시리 어머니 어머니 머리 내가 세게 하다니.
―안해에게 새로 바른 窓을 닫고 수수들을 까는 저녁 요 빗소리를 鐵窓에서 또 듣다니 언제나 등잔불 도두면서 이런 이약 할까요.
―딸에게 올 날을 이르라니 날짜나 어디 있니 너도 많이 컸으리라 날랑은 생각 말고 송편에 돔부랑 두어 할머니께 드려라.
「가을비」는 감옥에서 어머니와 아내, 딸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의 연작시조이다. 가을비를 제재로 취했지만, 그것은 시인의 심상에 따라 다양하게 변주된다. 어머니와 아내를 향한 시조를 비교하여 감상해 보도록 한다. ‘어머니 생각’에서 파초에 떨어지는 굵은 빗소리는 어머니가 느끼고 있을 수심에 대한 헤아림이다. 감옥에 있는 아들 생각에 어머니에게 빗소리는 다른 사람에 비해 굵고 크게 들릴 것이다. 을씨년스런 날씨에 아들이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노심초사하는 어머니의 서글픔은 파초잎을 두들기는 빗소리만큼 세차게 가슴을 칠 것이다. 그 마음을 헤아리기에 시인은 어머니를 그리워하고 불효자로서의 죄스러움을 탄식하고 있다. ‘안해에게’의 초장은 빗소리를 탁월한 시청각적 이미지로 묘사하고 있다. 새로 바른 창호지 문 틈 사이로 들려오는 “수수를 까는” 소리를 빗소리에 비유하고 있다. 그것은 앞의 파초에 떨어지는 빗소리와는 사뭇 다른 정감을 보여준다. 사그락 사그락 수수 까는 소리는 불투명한 창호지에 다시 한번 흡수되어 소근소근 속삭이는 소리로 들려온다. 그것은 “등잔불 도두면서” 정담을 나누는 부부간의 말소리로 변환되어 애틋한 정서를 자아낸다. 조운은 빗소리를 통해 아내에 대한 사랑을 상기하고 있는 것이다. 이상과 같이 조운의 시조를 각 장에 뽑아 살펴보았다. 조운은 당시 시조단에서 앞서간 선각자임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다. 그의 시조는 일상적인 제재와 일상어의 사용으로 자연스러운 어조와 정감을 띠면서 당대 시조들과 차별성을 갖추었으며, 비유나 상징 등의 시적 기법은 자유시에 못지 않았다. 또한 한정된 자수 안에서 그만큼의 깊이 있는 내면 의식과 시적 정감을 표출하기란 어려운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다만 월북시인으로서 오랜 기간 동안 평단의 조명을 받지 못한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참고시
눈 아침
간밤엔 바람도 없어 기척없이 쌓인 눈이 가지가지 꽃이 되어 오막사리가 번화(繁華)하이 자리 옷 입은 그채로 한참 뜰에 거닐어
설월야(雪月夜)
눈우에 달이 밝다 가는 대로 가고 싶다 이길로 가고 가면 어디까지 가지는고 먼 말에 개 컹컹 짖고 밤은 도로 깊어져
시조 한 장
손가락 모돠 쥐고 비비다 꼬다 못해 질항을 버쩍들어 메부치는 마음으로 훤한 들 바라다 보며 시조 한 장 부른다.
파초
펴이어도 펴이어도 다 못펴고 남은 뜻은 고국이 그리워서냐 노상 맘은 감기이고 반듯이 펴인 잎은 갈갈이 이내 찢어만 지고 湖月
달이 물에 잠겨 두렷이 흐르는데 맑은 바람은 連波를 일으키며 뱃몸을 실근실근 밀어 달을 따라 보내더라.
달이 배를 따르다가 배가 달을 따르다가 뱃머리 빙긋 돌제 달이 櫓에 부디치면 아뿔사 조각조각 부서져 뱃전으로 돌더라.
풍덩실 뛰어들어 이 달을 건져내랴 훨훨 날아가서 저달을 안아 오랴 머리를 들었다 숙였다 어쩔줄을 몰라라.
黃眞伊
欄干에 기대이어 구름을 바라다가
어른님 내가 되어 紫霞洞 찾아 가니
흰구름 黃眞伊 되어 미나리를 뜯더라.
×月×日
소리를 벽력같이 냅다 한번 질러볼까
땅이 꺼지거라 퍼버리고 울어볼까
무어나 부드득 한번 쥐어보면 풀릴까.
面會
읽고 자고 읽고 자고 出接만 여겼더니
몰라보는 어린 자식 돌아서서 우는 안해
이몸이 가친 몸임을 새삼스리 느꼈다.
상치쌈
쥘상치 두 손 받처 한 입에 우겨넣다 희뜩 눈이 팔려 우긴 채 내다보니 흩는 꽃 쫓이던 나비 울 너머로 가더라
일요일 밤
눈에 차가 막히면 새벽길 삼십 리 걷는다고 밤으로 간다는 안해 달래여 잡아두고 자다가 깨일 때 족족 창을 열어 보았다
비맞고 찾아온 벗에게
어젯밤 비만해도 보리에는 무던하다 그만 갤 것이지 어이 이리 굳이 오노 봄비는 찰지다는데 지레 어이 왔는고
비맞는 나뭇가지 새움이 뾰쪽뾰쪽 잔디 속잎이 파릇파릇 윤이 난다 자네도 비를 맞아서 정이 치나 자랐네 ―『동광』(1932. 8)
*송정란 경북 영주출생 건국대학교 정치외교학과/동국대학교 문화예술대학원 문예창작학과 졸업 경기대학교 대학원국문학과『엇시조에 관한 문학적 연구 』 졸업(문학박사 ) 문학과 창작』 편집국장./2004년~현재; 건양대 강의전임강사 1990년; 『월간문학』 시 부문 신인상 당선. 오페레타 『무량수경』 작시, 대본 2000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조 부문 당선. 시집『불의 시집』『허튼층쌓기 외 다수. 논저『한국 시조시학의 탐색』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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