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장산 - 무기를 버려라
경주 동대봉산 무장봉의 억새밭이 장관이다.
무장봉으로 향하는 등산 관광객들의 발걸음이 많아 어깨가 부딪혀 길이 막힐 정도다.
단풍이 절정으로 치닫고 있는 요즘 주말이면 아예 승용차로 진입하려는 생각을 버리는 것이 좋다.
경주시가 등산객들의 편의를 위해 가을철에는 시내버스를 증차해 대중교통을 지원하고 있을 정도다.
승용차를 고집한다면 차라리 오후 1시 이후면 마을입구까지 들어갈 수 있다.
그러나 천천히 걸어서 왕복 4시간 소요된다고 계산하면 산계곡에 5시면 벌써 노을이 지기 시작해 어둠이 내리고 급격히 온도가 낮아지기 때문에 주의해야 한다.
무장봉의 억새밭 절경은 겨울이라도 괜찮다.
억새밭이 정상을 기준으로 동남쪽과 동북쪽으로 조성돼 오히려 늦은 오후시간이 역광을 받아 억새 특유의 반짝이는 은물결을 감상하기 좋다.
무장봉은 최근까지 목장이 운영돼 초지가 억새밭으로 변모 새로운 볼거리로 등장하면서 무장사지 삼층석탑 등의 문화재와 함께 명소가 됐다.
삼국유사에서 말하는 ‘무장사’의 기원과 함께 억새밭의 절경을 찾아가는 무장자지 삼층석탑과 소성왕의 왕비 계화왕후의 애잔한 마음이 서린 사적비를 더듬어보는 역사기행은 우리 전통문화를 깊이 들여다보는 재미와 함께 묘한 흥분을 자아낸다.
기우는 가을 태양의 빛을 받아 은비늘 반짝거리는 무장봉으로 가본다.
❚휴대폰 안터지는 자연인의 시간
경주 동대봉산 무장봉에 들 때는 사심을 버려야 한다.
경주 보문단지에서 천북 방향으로 길을 시작해 덕동댐 상류로 방향을 틀어 암곡동으로 접어들어야 길을 제대로 찾는다.
암곡동 무장봉의 계곡이 깊어 현대식 신무기 휴대폰의 통화가 끊어진다.
애절한 사연을 간직한 연인들이라도 무장봉으로 향하는 걸음을 시작하기 전에는 잠시 휴대폰으로 하는 사랑놀이는 접어야 하는 것이다.
계약을 위한 소통이 필요한 사업가라면 반드시 3시간 정도의 여유를 두어야 낭패를 면하게 된다.
목장이 철수되면서 기지국도 없어진 것인지 아예 기지국이 설치되지 않았던 곳인지는 모른다.
계곡 안쪽으로 들어서면 요즘도 휴대폰 연결이 안되는 비무장지대가 되는 것이다.
세상 복잡한 사연과 잠시 연을 끊어두고 완전한 자연인이 되어보는 시간을 가져보는 기회가 되기도 한다.
‘무장사’라는 이름도 삼국유사 기록에 의하면 신라시대 삼국을 통일한 태종 무열왕이 투구와 무기를 감추어 두었던 곳이라 ‘투구 무’ 자와 ‘감출 장’ 자를 써서 ‘무장사’ 라는 절 이름이 붙었다는 설명이다.
삼국을 통일했지만 아직 당나라 군사들이 내정에 간섭하며 전쟁의 기운이 감돌고 있었기 때문에 무기를 완전히 폐기하지는 못하고 감추어 두고 당나라의 정세를 살폈던 것이 아닐까라는 상상을 하게 한다.
고서에는 무장봉이 산세가 험하고 집을 지을만한 땅이 없다고 전하고 있지만 지금의 무장봉에는 그럴만한 땅들이 곳곳에 보인다.
그러나 역시 계곡이 깊고 물이 맑아 1급수에 서식한다는 쉬리가 여유있게 헤엄치는 모습도 쉽게 관찰할 수 있으며 등산객들의 혼을 빼놓을 만큼 아름다운 절경은 계곡을 따라 쭈욱 이어진다.
계곡이 갖가지 형상으로 물소리를 요란하게 만들고 단풍들이 제각각 개성을 자랑하듯 원색을 내뿜어 카메라 셔터를 누르기 위한 걸음이 멈추어져 산행속도가 늦어지기도 일쑤여서 바쁜걸음에 제동을 걸기도 한다.
올 한 해가 저물기 전에 무열왕이 무기를 감추어두었던 무장봉으로 신무기 스마트폰의 기능을 잠시 버리고 억새풀 우거진 무장봉 깊은 계곡으로 들어가 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무장사지 삼층석탑
경주 암곡동 동대봉산 무장봉 깊숙한 곳에 있는 무장사지 삼층석탑. 소성왕의 명복을 빌었던 아미타불조상사적비의 비문이 발견되면서 무장사지로 확인됐다.
작은 사진은 왕희지 글씨를 집각한 비문. 이 비문에서 소성왕의 명복을 빌기위해 미타전에 아미타불을 왕비 계화부인이 모셨다는 것을 알 수 있게 됐다.
사진속 비석의 귀부와 머릿돌은 진품이지만 비문이 새겨진 몸돌은 복제품이다.
진품은 3조각으로 파손돼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중이다.
경주시 암곡동 동대봉산 깊숙한 곳에 자리한 무장사는 원성왕의 아버지 김효양이 지은 절이라는 기록이 삼국유사에 전하고 있다.
무장사지 삼층석탑은 암곡동 무장봉 깊은 계곡 심장부에 설치된 통일신라시대 대표적인 석탑 중의 하나다.
높이는 5m 정도의 보통 크기로 석재의 일부가 없어졌지만 1962년에 보충해 복원됐다.
석탑은 소나무 숲에 둘러 쌓여 그늘이 진 곳에 있지만 주변은 절이 있었던 자리의 대지가 제법 넓게 형성돼 있다.
보물 제126호로 지정 관리되고 있다.
무장사지 삼층석탑은 2층의 기단 위에 3층 몸돌과 지붕돌을 올려 만든 전형적인 통일신라시대 석탑의 양식을 띠고 있다.
2층 기단석에 새겨진 안상의 조각이 특이하다.
거의 동그라미에 가깝다.
탑의 몸돌과 지붕돌은 각각 하나의 돌로 만들어져 있다.
1층 몸돌은 약간 높게 조성됐고, 몸돌의 각면 귀퉁이는 모서리 기둥만 있고 다른 장식은 없다.
지붕돌은 석탑이 무너지면서 더러 파손되었지만 안정감을 주는 형식으로 지붕돌 받침은 5단으로 조성됐다.
석탑의 상륜부는 모두 없어졌지만 석탑 안쪽에 네모난 사리공이 확인됐다.
석탑을 복원할 대 아래층 기단석과 2층 기단석 등의 일부 석재는 새로 만들었다.
지붕돌 끝에는 4개의 구멍이 뚫려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풍각을 달았거나 등을 달았던 흔적으로 짐작된다.
석등의 조각과 절의 기둥을 받쳤을 주춧돌 등의 석재가 여러 곳에 흩어져 있는 것을 미루어 풍각을 달았던 구멍으로 짐작하기 쉽다.
❚무장사 아미타불조상사적비 이수 및 귀부
무장사지의 아미타불조상사적비는 신라 39대 소성왕의 왕비 계화왕후가 소성왕의 명복을 빌기 위해 무장사 미타전에 아미타불을 만들어 모시고 그 내용과 과정을 새긴 비석이다.
지금은 파손된 3조각이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 중이다.
현지에 복제된 비석몸돌과 남은 귀부와 일부 파손된 비석의 머릿돌이 복원돼 있다.
귀부는 쌍거북이 형태로 거북의 머리는 크게 훼손됐다.
받침돌 귀부의 윗부분에 12지신상이 양각으로 조각돼 있어 이채롭다.
1915년 발견된 사적비문에 계화부인이 소성왕의 명복을 빌기 위해 아미타불상을 만들어 무장사에 봉안한 내용이 드러나면서 무장사라는 절이름도 밝혀지게 됐다.
비석의 글씨는 왕희지의 글씨를 집각한 것으로 전해진다.
무장사의 아미타불조상사적비 이수와 귀부는 보물 제125호로 지정 관리되고 있다.
계화부인이 애타게 명복을 빌었던 소성왕은 신라 39대왕으로 38대 원성왕의 태자로 책봉됐다가 왕위에 오르기 전에 죽은 인겸의 아들이다.
소성왕은 왕위에 오른지 1년만에 죽었다.
소성왕의 아들 청명이 제40대 애장왕으로 왕위를 이었지만 9년만에 소성왕의 친동생인 삼촌에게 살해당했다.
조카를 죽이고 왕위에 오른 제41대 헌덕왕은 동생에게 왕위를 넘겼다.
42대 흥덕왕은 형이 죽인 소성왕의 딸을 왕비로 삼았다.
흥덕왕은 형 헌덕왕과 함께 조카인 애장왕과 애장왕의 동생을 함께 죽이고 그들이 죽인 애장왕 형제의 여동생을 왕비로 삼았던 것이다.
삼촌에게 살해당한 애장왕은 어머니 계화부인이 아버지 소성왕의 명복을 빌기 위해 미타전에 아미타불을 건립하기도 했지만 국가적으로 사찰을 짓는 것을 금지하는 명령을 내리고 오로지 수리하는 정도만 허락했다.
❚동대봉산 무장봉
동대봉산 무장봉은 무장사지 유적과 억새밭으로 유명하다.
얼마 전까지 목장으로 운영되던 곳이다.
초지가 억새밭으로 변하면서 무장봉의 정상이 대규모 억새군락으로 장관을 연출하고 있다.
무장봉 등산길은 두갈래로 선택을 강요한다.
마을에서 산으로 500m 정도 들어서면 경사가 급한 오른쪽의 등산길과 그대로 동쪽으로 완만하게 이어지는 완만한 등산길이 나타난다.
오른쪽으로 좁게 형성된 등산길은 경사가 아주 급하다.
다행하게도 오르막이 급하게 진행되다가 다시 내리막길이 나타나길 반복하면서 쉬는 여유를 누릴 수는 있다.
그렇지만 곳곳에 밧줄을 매어두고 줄을 잡고 오르내릴 수 있게 서비스가 제공된다는 점을 감안하면 오르막 경사가 심각할 정도로 심하다는 것을 미리 각오해야 된다.
대신 완만하게 5.4㎞를 걸어야하는 동쪽노선에 비해 3.5㎞ 라는 짧은 거리로 정상에 오를 수 있다.
서쪽 급경사 등산로를 선택하면 운동은 제대로 할 수 있지만 단풍구경이나 가을정취를 느끼려는 여유는 포기해야 된다.
정상에서 시원하게 억새밭 풍경을 일찍 감상하려는 튼튼한 다리를 가진 젊음이라면 이 길을 선택하는 것도 괜찮다.
서쪽 완만한 등산로는 여유로운 산행과 함께 계곡으로 이어지는 시원한 물소리와 함께 다양한 풍경을 감상 할 수 있어 좋다.
이 길은 정상까지 과거에 목장을 운영하면서 화물차가 소를 싣고 다녔던 넓은 길이 남아 있어 여럿이 함께 이야기 하며 오를 수도 있다.
짐을 실은 차가 다녔던 길이기 때문에 아주 완만한 경사길로 조성돼 하산하면서도 무릎에 큰 부담이 없어 좋다.
등산 초보객도 쉽게 도전할 수 있는 길이다.
소성왕의 왕비가 지아비의 극락왕생을 기원하며 아미타불상을 세웠던 무장사의 미타전이 있었던 터에 남아 있는 보물 무장사 아미타불조상사적비와 무장사 삼층석탑을 보려면 동쪽 완만한 경사길을 선택해야 된다.
무장사지는 동쪽 완만한 길로 2.4㎞ 정도 걸어야 만날 수 있다.
아름다운 단풍에 죽이고 죽임을 당하는 피의 얼룩이 더해져 무장사지의 단풍이 선연한 천연색을 띠는 것인지, “빨갛게 빨갛게 물 들었네…” 나이든 동심의 등산객이 부르는 노래는 역사와 무관하게 들리지 않는다.
역사기행을 할수록 안타까움이 깊어가는 가을 단풍처럼 물드는 것을 체험한다.
이 가을이 가기 전에 무장봉의 억새밭 은물결을 체험하라고 권하고 싶다.
첫댓글 원성왕 이후, 신라 하대의 피비린내 진동하는 본격적인 왕권쟁탈전이 시작된다.
부끄러운 역사이지만
반면교사로 삼는다면 좀 더 나은 미래를 기대할 수 있으련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