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에스테르기
10.1 내용
이 책은 페르시아 왕국에 포로로 잡혀간 유다인들 가운데 한 사람인 에스테르라는 처녀가 어떻게 왕비가 되고, 그의 사촌 오빠이며 양부인 모르도카이가 어떻게 임금의 목숨을 노리는 역적모의를 알아냈는지, 또 총리대신 하만이 어떻게 유다인들을 절멸시키려 하고, 그에 맞서 모르도카이의 권유를 받은 에스테르가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면서까지 개입한 끝에 하만이 어떻게 처형되고 유다인들은 어떻게 임금에게서 자신들을 방어할 수 있는 권한을 받아 실행에 옮길 수 있었는지를 이야기한다. 또한 하만이 유다인들을 절멸시킬 날을 결정하려고 주사위를 던진 것을 기념하는 ‘주사위 축제’ 곧 푸림절의 기원을 이야기한다. 이 이야기는 모르도카이에 대한 찬사와 함께 끝을 맺는다.
10.2 저작 시기와 장소
이러한 사건들은 에즈라기, 느헤미야기, 집회서에도(기원전 190년경) 나타나지 않는다. 쿰란에서는 히브리 말 성경의 모든 책이 부분적으로나마 발견되었지만, 유일하게 에스테르기의 것은 하나도 발견되지 않았다. 반면에 2마카 15,36에는 “모르도카이의 날”이 언급되는데, 이는 기원전 1세기 전반부에 팔레스티나에서 이 축일을 지냈음을 가리킨다.
3,8에 따르면 페르시아 왕국의 총리대신인 하만이 유다인들과 관련하여 임금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한다. “임금님 왕국의 모든 주에는 민족들 사이에 흩어져 있으면서도 저희들끼리만 떨어져 사는 민족이 하나 있습니다. 그들의 법은 다른 모든 민족들의 법과는 다를 뿐만 아니라, 임금님의 법마저도 그들은 지키지 않습니다. 그들을 이대로 내버려 두시는 것은 임금님께 합당치 못합니다.” 그런데 피정복민들에 대한 페르시아 왕국의 정치·종교적 관용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에즈라-느헤미야기 참조). 그래서 위의 말은 오히려 유다인들을 강경하게 탄압한 셀레우코스 왕국의 안티오코스 에피파네스 임금의 정책에 더 적합한 것으로 여겨진다. 만일 이러한 가정이 들어맞는다면, 에스테르기는 2세기 말엽 곧 크세르크세스 1세(1,1과 각주 참조) 후 3세기가 지난 다음 아마도 메소포타미아의 디아스포라에서 저술되었을 것이다. 9,20-32에는 여타의 부분들과는 다른 문체와 또 상반되는 내용이 나타나는데, 이는 이 구절이 후대의 첨가물이라는 생각을 갖게 한다.
10.3 그리스 말 역본
이보다 방대한 첨가는 167개의 절로 된 히브리 말 본문에 100여 개의 절을 보태는 칠십인역에서 이루어진다. 첨가 부분은 다음과 같다. 모르도카이의 꿈(1,1①-1⑪), 임금에 대한 음모(1,1⑫-1⑰), 크세르크세스 임금의 조서 내용(3,13①-13⑦), 모르도카이가 에스테르에게 한 당부(4,8①), 모르도카이의 기도(4,17①-17⑪), 에스테르의 기도(4,17⑫-17㉚), 에스테르가 임금 앞에 나아간 장면의 확장된 서술(5,1①-1⑯; 5,1① 각주 참조), 크세르크세스 임금의 두 번째 조서(8,12①-12㉔), 푸림절(‘입문’ 4 참조) 날짜와 관련한 부가 설명(9,19①), 모르도카이가 꾼 꿈의 해석(10,3①-3⑩), 끝으로 그리스 말 역본의 기원에 관한 “붙임 말”이다(10,3⑪). 이 “붙임 말”은, 히브리 말로 된 에스테르기가 저작 시기와 관련하여 이 번역본에서 문제가 되는 프톨레마이오스 임금(10,3⑪과 각주 참조) 이전 시대에 저술되었음을 확인해 준다.
칠십인역 에스테르기의 첨가 부분들은, 하느님에 대하여 한 번도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으면서 모든 것이 오로지 권력과 계교로 움직인다는 인상을 줌으로써 ‘경전화’하는 데에 어려움을 겪게 된 히브리 말 원본에 더욱 종교적인 성격을 부여하려는 의도를 지닌다(신약 성경에서는 한 번도 직간접적으로 인용되지 않으며, 교회 전례에서는 그리스 말 첨가 부분만을 사용한다). 그렇지만 역사의 주인은 그 어떠한 인간의 권능이 아니라 유다 백성을 선택하신 분임을 상기하는 데에는(적어도 유다인 청중 또는 독자에게) 4,14의 다음 말로도 충분하다. “그대가 이런 때에 정녕 침묵을 지킨다면, 유다인들을 위한 해방과 구원은 다른 데서 일어날 것이오. …… 누가 알겠소? 지금과 같은 때를 위하여 그대가 왕비 자리에까지 이르렀는지”(6,13과 4,1.16도 참조). 하느님께서는 역사 안에서 기계적으로가 아니라 당신 증인들의 행동을 통하여 활동하신다. 이러한 의미에서 그리스 말 역본은 히브리 말 성경이 암시하는 바를 더욱 명료하게 표현해 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칠십인역과 관련된 구체적인 문제는 번역본에서 이 그리스 말 첨가 부분을 어디에 어떻게 배치시키느냐는 것이다. 원래 칠십인역은 첨가 부분을 히브리 말 본문 사이사이에 삽입시켰다. 반면에 예로니모는 라틴 말 번역본에서 히브리 말 본문이 끝난 다음 일종의 부록처럼 히브리 말 성경에 연이어지는 장절수에 따라 첨가 부분을 한데 모았다. 현대 번역본들은(개신교에서는 이 첨가 부분의 경전성을 부정하기 때문에 이를 번역하지 않는다) 칠십인역 전통이나 예로니모의 전통을 따르기도 하고, 또는 칠십인역의 배치를 따르면서 예로니모의 장절수를 이용하거나 독자적인 장절수를 쓰기도 한다. 칠십인역의 배치를 따를 때에는 일반적으로 다른 글씨체를 사용함으로써 히브리 말 성경에만 들어 있는 부분과 구별을 쉽게 한다. 우리말 번역본에서는 칠십인역의 전통을 따르면서, 장절수는 바로 직전의 히브리 말 성경 장절에 이어 ①, ② 등을 붙여 표기한다. 예를 들면, 1,1①; 4,17⑤; 5,1⑯ 등과 같다.
10.4 에스테르기와 역사
에스테르기가 페르시아 왕국의 도성 가운데 하나인 수사 왕성의 지리, 연대, 행정에 대한 지식을 반영하고 있으며, 이야기 자체도 연대와 장소, 등장인물들을 명시하여 일종의 ‘역사화’를 꾀하고 있음을 간과할 수는 없지만, 이 책이 전하는 바는 현대적 의미의 역사적 보고가 아니다. 사실 임금을 제외한 다른 모든 등장인물들은 알려져 있지 않다. 이 왕국의 왕비는 항상 페르시아 사람이었다. 1,1의 임금이 크세르크세스(히브리 말로는, 아하스에로스) 1세라면, 그의 왕비는 1,11이 말하는 바와 같이 와스티가 아니라 후타오사(그리스식으로 아토사, 그리고 고대 그리스의 역사가 헤로도토스에 따르면 아메스트리스)라는 여인이었다. 자신들에 대한 말살정책에 대항하는 유다인들의 조직적 반격은 역사적으로 한 번도 일어난 적이 없다. 에스테르기는 이룰 수 없던 유다인들의 소망을 소설의 형태로 전하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소설과 같은 이야기의 핵심에(비록 에스테르기의 배경보다 후대의 것이라 할지라도) 유다인들의 실제적 체험이 반영되었을 가능성을 전적으로 배제할 수는 없겠다. 유다인들을 말살하려는 시도는 역사상 여러 번 있어 왔기 때문이다. 에스테르기에 담긴 말살 시도는 그 가운데 하나로 오늘날까지도 사육제적인 경향을 보존하고 있는 푸림절을 정당화하려는 목적으로 쓰인 것으로 여겨진다. 9,24-26이 설명하고 있듯이, “주사위”를 뜻하는 외래어 푸림은 유다인들의 이 축제가 본디 이교도들의 축제였는데, 유다인들이 이를 자신들의 축제로 받아들였음을 가리킨다. 어떤 이들은 이 이교 축제를 바빌론의 신년 축제 또는 원초적 혼돈에 대한 승리자로서 운명의 신들을 통괄하는 므로닥 신의 축제라 생각하였다. 그리고 바빌론의 신인 므로닥과 이쉬타르, 엘람의 신인 후만과 마스티 사이의 투쟁, 또는 다리우스 임금이 벌인 제관들의 학살 등을 이 축제의 배경으로 여기기도 하였다. 그러나 어떠한 가설도 충분히 만족스럽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어쨌든 이런저런 영향들을 처음부터 배제할 수는 없다고 생각된다. 신화론적 요소들을 지닌 이교도들의 축제, 그리고 한편으로는 자신들이 겪어야만 하는 박해 앞에서, 유다인들은 이러한 축제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어떻게 하면 이 축제를 자신들의 특별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방도로 삼을 수 있는지를 스스로에게 물었으리라 추측할 수 있다. 그들의 다른 축제들처럼 유다인들은 이교도들의 신화를 받아들여 이를 역사 속으로 삽입시켰다. 구약 성경에서 하느님은 인간의 역사를 통해서만 인식될 수 있으며, 바로 이 역사 안에서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을 선택하시고 또 이들을 바로 그 속에서 살게 하시는 것이다. 이렇게 그들은 마치 그리스도교가 예수 성탄 대축일과 관련하여 그렇게 하였듯이, 자신들의 역사적 체험을 바탕으로 이교도들의 축제를 수용하고 탈신화화 하여 자신들의 전설을 정당화한다.
10.5 에스테르기의 의의
역사와 일상 체험은, 인간이 다른 사람들의 ‘다름’에 대한 권리를 흔쾌히 인정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끊임없이 새롭게 지적해 준다(3,8 참조). 유다 백성이 여러 나라에 퍼져 살게 된 뒤, 그들은 여타의 소수 민족들처럼 자신의 정체성을 보존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게 되고, 그렇게 하여 박해의 대상이 되어 왔다. 14세기 유럽의 ‘대흑사병’을 계기로 한 유다인 학살 또는 독일의 나치당과 그 공범자들이 채택한 이른바 ‘최종적 해결’은 이에 대한 비극적인 실례들이다.
이스라엘이 자기들을 말살하려는 그 모든 시도들에도 존속하는 것은 당신 자신을 세상에 드러내 보이시고자 이 민족을 선택하신 하느님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하만이 모의한 유다인 말살도, 모르도카이가 조직한 ‘반-말살’ 활동도 끝이 아니다. 이러한 맹목적 폭력은 또 다른 복수를 불러일으킬 뿐이다. 유다인의 원수들이 유다인들을 매단 십자가 밑에서가 아니라, 비유다인들과 유다인들이 하나 되어 못 박았지만 비유다인들과 유다인들 모두를 위하여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아래에서만이 화해는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이십니다. 그분께서는 당신의 몸으로 유다인과 이민족을 하나로 만드시고 이 둘을 가르는 장벽인 적개심을 허무셨습니다. ……그 적개심을 당신 안에서 없애셨습니다”(에페 2,14-16).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