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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우는 인문학 - 무용한 인문학과 쓸모없는 책읽기
몇 해 전부터 영어공부를 하지 않는다. 언젠가 꾸준히 해 놓은 영어가 내 직장생활에 도움이 되지 말란 법은
없을 것이다. 입사 하던 때, 대학시절 따 놓은 몇 개의 자격증이 가점을 부여했듯이 영어라는 마법의 언어도
내 직장내 직위를 한 단계 상승시켜줄지 아는가 말이다. 영어공부를 포기한 이유는 그 지지부진함에 있다.
십 수 년을 하고도 제자리걸음에다 항상 불안할때마다 다시 시작하곤 했던 공부는 사실 입사시험을 치르고
나선 일찌감치 포기했어야 옳았다. 사실, 영어공부는 즐거움이 아닌 실용적 목적에서 하기 마련이다.
그러니 특별히 긴요하지도 않는 공부가 어찌 행복을 가져다 줬겠는가? 그 이후,
남는 시간을 잡다한 책을 읽는데 소비했다. 직장생활과 독서, 내 삶이 단조로워진 것은 그 때 이후다.
한국인만큼 유행을 좇는 국민이 없다. 특히 여자들의 옷은 유행에 민감하다. 거리를 스쳐 지나는 여인들의 복색
에서 드라마의 여주인공이 입는 옷을 상상할 수 있다.
옷에 관심없는 나같은 사람에겐 천편일률적 길거리 패션은 개성과 자아를 잃어버린 이상한 취향으로 비춰진다.
학문이라고 예외가 없다.
수 년 전에는 `인문학의 위기'라는 말들이 대세를 이루더니 최근엔 `인문학 공부'니 `부활'이니 하면서 다시
인문학은 독서시장에서 주요한 마케팅 부문으로 자리잡았다. CEO들은 인문학을 읽고 연구하며, 상품에 인문학의
숨결을 불어넣는다고 호들갑이다. 경영자는 더 이상 장사꾼 마인드가 아닌 인문적 마인드가 담겨야 하고,
유명한 자계서 저자를 불러들여 인문학을 공부한다던 CEO도 있었다. 사실, 그것까진 좋았는데 노조 탄압으로
최근 뉴스에 등장한다. 사람들의 인문학에 대한 변덕은 왜 죽을 쑤듯 잦을까?
인문학은 무엇이고, 그것으로 무엇을 할 수 있으며, 또 불가능한지, 현재 한국 인문학의 수준은 어떠한지 알려
주는 한 권의 책을 읽었다. 서강대 철학과 교수인 서동욱이 기획하고 십 수 명 저자들의 글 한 편씩을 묶어낸
<싸우는 인문학>(2013, 반비펴냄)이다. 이 책은 인문학의 논의를 네가지로 정리한다. 다음과 같다.
1. 팔리는 인문학 2. 잃어버린 인문학 3. 싸우는 인문학 4. 가능성의 인문학. 저자들은 크게 인문학이란 주제
아래 "스티브 잡스는 인문학적 CEO인가" 에서 "인문학자에게 지옥은 무엇인가" 라는 기괴한 주제에까지 다양한
글을 풀어 낸다. 참여 저자만 22명에다 그들의 직업도 기자, 대학교수,출판기획자,심리학자,평론가 등 다채롭다.
과히 잘 차려진 우리 인문학의 만찬상이다.
서동진 계원예술대 교수는 <스티브 잡스는 인문학적 CEO인가>라는 글에서 인문학이 애플의 혁신을 이끌었
다고 주장했던 잡스의 육성에 담긴 반인문적 아이러니를 고발한다. 애플이 인문학을 디자인과 제품 혁신에 도입
했다는 말은 오직 상품에 한정한 미사여구다. 애플의 하청 기지인 중국의 폭스콘 노동자들의 자살이 사회 문제가
되어도, 애플 상품은 그 자체로 인간을 가장 잘 이해한 명품으로 인식된다. 즉, 이때 잡스가 인문학을 끌어들인
이유는 `노동이라는 고역이 부재하는 것처럼 상상하게 하는 우아한 가림막'의 역할을 인문학이 충분히 해내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것은 잡스만의 문제가 아니라 소위 경영에 인문학을 접목했다고
`너스레'를 떠는 모든 CEO들의 약점이다.
신정근 성균관 대학 교수의 <동양 고전은 왜 처세서로 읽히는가>는 한국 독서시장의 주요한 축을 이루는 동양
고전독법에 문제의식을 드러낸 글이다. 나이와 동양 고전을 조합한 제목을 달고 나온 처세서들이 즐비하다.
과연 <논어>나 <손자병법>을 21세기를 살아가는 개인이 인간관계와 처세에 응용하는 것이 올바른 독법일까?
신정근은 동양철학은 본질적으로 국가,기술,타자(화이),언어,본질,진리,이상사회를 탐구의 주제로 삼아왔다고
말한다. 고대 동양 사상가들이 경서에서 관심가져 온 것은 `국가의 퇴행성을 경고하고 이상사회의 도래를 견인
하는 책임의식'이었다. 그런데 오늘날 독자들은 `본래의 맥락과 동떨어진 방식으로 고전을 읽고 뭔가 그 안에서
실용주의 관점을 재구성'하는 의도를 품는다. 자기계발에 여념없는 현대 독자가 고전을 제 좋을대로 해석한다.
꿈보다 해몽이 좋은 셈이다.
영화평론가 강유정의 글 <인문학은 한국 영화를 어떻게 변화시켰나>는 영화와 인문학의 만남을 주선하는 흥미
로운 논설이다. 영화가 단순한 오락 차원을 넘어서는 이유을 그는 공간의 재해석인 미장센과 시간의 재생산인
편집이 개입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작가주의 감독들은 흔히 `사실을 반영하는 데 멈추지 않고 해석'함으로써
영화에 인문학을 심는다. 그는 이미지의 일회성과 반복성, 죽음과 재생 가운데 영화의 운명이 놓여 있다고 주장
한다. 박찬욱 감독의 <올드보이>는 "짐승 같은 인간은 살 가치가 없다"는 <오이디푸스>의 윤리를 영화속에서
근친상간이란 소재로 재해석하며, 홍상수에게 영화는 "어쩔 수 없이 일회적 일 수밖에 없는 삶에 대한 어떤 내용"
으로 풀이된다. 이 글은 오락에 머물 수 있는 한 편의 영화가 어떻게 인문학과 연계되며 감독의 철학이 반영된
작가주의로 승화할 수 있는지 해명하고 있다.
" 책을 펴는 순간 삶이 시작되듯 영화가 시작되면 한 인물은 살아 있는 인격체로 관객에게 다가온다.
그리고 마지막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 순간 그의 삶은 증발되며, 이는 다시 영화가 상영 될 때
반복된다. " 195쪽, 강유정, <인문학은 한국 영화를 어떻게 변화시켰나>
수 편의 글 가운데 몇 편을 맛보기로 살펴 봤다. 하지만, 이 외에도 상당히 주목할 만한 논의가 가득하다. 책의
부제가 `한국 인문학의 최전선'인 이유는 최근 사회,정치적 상황속에서 인문학의 위치을 조명하고,
그 분석틀로 세상을 해석하는 신선한 글들로 채워졌기 때문이겠다. 걔중엔 안철수 현상의 원인이나 MB의
천박한 사익(私益)정치를 논한 글도 있고, 프랑스 문학이나 한국시의 위상을 평한 글도 있다. 그 다양성은 분명
즐겁고 유익하다. 하지만, 개별적 나무의 구체성 보다 중요한 것은 이 책이 지향하는 숲 속 인문학의 웅장함과
풍요로움이다. 이 많은 주제들을 소화하면서 독자들은 인문학이 무엇을 할 수 있고, 왜 필요한지 그 가능성과
한계를 깨닫게 될 터이다.
이 책에는 인문학을 정의하는 문장들이 곳곳에 등장한다. 서문에서 기획자 서동욱은 인문학은 `인간다움'
즉 후마니타스(Humanitas)로 그 작명자는 인문학을 탄생시킨 그리스인이 아닌 로마인이었으며, 동양에 유입돼
`인문학(人文學)으로 옮겨지게 됐다고 밝힌다. 한양대 교수 표정훈은 인문학은 `인생에 대한 물음과 해답을 시도
하는 것'이자 곧 `사람과 텍스트' 또는 `인생과 텍스트'라고 정의한다. 동국대 이상헌 교수는 <인문학은 과학에
자리를 내 주어야 하는가>라는 글속에서 인문학은 `늘 밖으로 대상으로 향하는 과학과 달리 안으로, 자기 자신
으로 향하는 반성적 학문'이며, 인문학의 목적을 `개인과 공동체의 삶을 이해함으로써 인간의 자기 이해를 풍요
롭게 하는 학문'으로 정리한다. 그러한 정의 가운데 가장 마음에 와닿는 글이 있었다.
바로 비평가 故 김현의 문장 가운데 `사람 人' 자 하나를 추가해 재해석한 표정훈의 논설이다.
"유용함은 인간을 억압한다. (인)문학은 쓸모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인간을 억압하지 않으며 억압이
인간에게 얼마나 부정적으로 작용하는지 보여준다. 이것이 바로 쓸모없는 (인)문학이 쓸모 있는 이유다."
김현 <문학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이 문장에 이르자 내가 첫 문장에서 언급했듯, 십 수년 해 오던 영어공부를 접고, 무용하고 잡다한 책 읽기에
올인한 무척 `위험한 선택'을 하게 된 변명 거리를 하나 갖게 됐다. 나의 지지부진한 영어공부는 `밥벌이의 수단'
으로서 나를 `억압'해 왔던 것은 아닐까? 김현의 문장이 진실이라면 내 책읽기는 무용한 일이다. 아무리 많은 책을
읽어도 책 속에서 돈 한 푼 떨어지진 않을 것이다. 나의 생계를 튼튼히 해줄 수단은 어쩌면 높은 토익 점수일지도
모른다. 나는 영어공부를 포기할 때 강을 건넌자가 뗏목을 버리는 심정이라 자위했었다. 내게 지금 필요한 것은
넉넉한 수입과 영혼의 자유다. 하지만, 그 둘은 함께 추구할 수 있는 것인가? 그 불가능성과 불안속에서 하나의
균형을 되살리기 위해 밥벌이의 수단 하나를 팽개친 건 아니었을까?
노조를 탄압하고, 노동자의 죽음을 무시하는 CEO들이 고급 백화점에서 사치품을 고르듯, 인문학을 경영과 접목
한다고 떠들 때 우리는 인문학의 본래 가치를 착각해선 안 된다. 인문학은 간명히 문학과 역사,
그리고 철학을 탐독하는 일이다. 문사철(文史哲)을 학습하는 것이 인문학의 기본이다. 하지만, 공부하는 것에서
그치면 곤란하다. 독서 또한 수단일 뿐, 본질은 아니다. 세계와 나의 관계, 나와 세계의 본질을 연구하고 사색
하는 가운데 개인과 사회는 나아갈 방향을 찾아내야 한다. 인류가 진보한 것은 과학기술과 그 실용적 가치관 때문
일까? 진화생물학에서 진화를 진보와 동일시 하던 시절이 있었다. 오늘날 우린 그 말이 거짓임을 안다.
편리함과 풍족함을 누리고 있는 현대문명은 언제든 자기자신을 파괴할 힘도 함께 키워왔기에 말이다.
핵무기와 환경오염, 그리고 전쟁과 기아, 종교간 대립과 범죄가 그 증좌다.
인문학은 잘못된 정치와 정치인, 그리고 탐욕에 깃든 자본주의를 감시하고, 전쟁보다 평화를 대립보다 화합을
가르친다. 모든 세계의 정치지도자들이 예술가로 선임된다면, 세계는 오늘 곧장 평화를 되찾을 것이란 말이 있다.
그렇지 않더라도, 우리의 지도자들이 인문학이 가르치는 인간 중시, 예술이 가르치는 미학적 가치를 알고 있다면
이 세계가 오늘만큼 불안하진 않을 듯 하다. 더불어 일하기 위해 사는 것인지, 살기 위해 일하는 것인지를 모른 채
육체와 감각적 탐욕만을 추구하는 사람들에게 인문학은 구원의 손길이 될 수 있다. 인문학은 그 자체로 무용
하지만, 세계와 개인의 운명을 결정하고 악과 위기로부터 우리를 구원할 충분한 가르침을 담고 있다. 그런 믿음
으로 오늘 나는 그렇게 밥벌이와 무관한 `쓸모없는' 책읽기에 열중하며 산다. 아니 살고 싶다.
(강양구 외 정리:개츠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