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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인의 자세와 선비정신
/ - 효봉 이광녕 (문학박사, 문예창작 지도교수 )
ㅣ.들어가며
'문화(文化)'와 문명(文明)'이라는 단어를 보면, 모든 문화 예술의 중심에는 모두 '글'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일 찍이 논어에서는 '不學詩 無以言(불학시 무이언)'이라 하여, 글을 모든 문화예술의 중심 요소로 보고 생활의 필수 요건으로 까지 보았다.
글을 가까이 하여 학문을 쌓고 학덕을 갖춘 사람을 예전부터 우리나라에서는 '선비'라고 칭해 왔다.
물질주의와 이기주의가 팽배한 살벌한 이 시대, 문인들은 이 선비정신을 갖춘 덕망있는 작가라야 하는데, 현대의 작가들은 예전의 선비들보다 이런 면에서 아주 둔감할 뿐만 아니라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고 노력도 하지 않는 듯하다.
일찍이 다산 정약용은 "시 없이 평화 없다" 라고 말하였는데, 문인의 세계가 선비정신으로 교유되고 대동 단합한다면 아마도 우리 문단과 사회는 더욱 밝아지고 진일보된 이상향으로 펼쳐질 것이다.
다음에 작가의 입장에서 바라본 선비정신의 정의와 문인의 자세에 대하여 바람직한 논지를 펼쳐 보이려 한다.
2. 선비정신이란 무엇인가
'선비'하면 도포자락에 갓을 쓰고 서책을 가까이 하던 전통적인 지식인의 모습을 연상하게 된다. 필자는 '文'자의 글자 형태를 머리에 갓을 쓴 선비가 갓끈을 맨 모습으로 풀이하기도 한다. '갓'은 지식과 교양을 갖춘 고고한 품격을 상징하며 그것으로 스스로 선비임을 자처하던 전통 사고의 맥을 이어 왔다.
서양에서 지식과 학덕을 갖춘 예의 바른 이를 '젠틀맨'이라 하는데, 우리나라에선 그런 사람을 일러 '선비'라 일컬어 왔다. 선비는 벼슬과는 상관없이 직책 여하를 막론하고 학덕과 교양을 겸비한 품격높은 인사를 말한다. 선비는 학문이 높고 언행에 예절이 바르며 도리와 원칙을 준수하고 관직이나 재물을 탐하지 않는 청렴 고결한 인품을 지녀야 한다.
이러한 선비정신은 현대의 문단과 문인들 에게도 그 아름다운 전통사상이 이어져야 바람직하다. 선비정신은 동양철학의 사상적 배경과 직결되어 있기에 그 사상적 배경을 살펴보기로 한다.
3. 동양철학의 사상적 배경과 선비정신
선비정신에 크게 영향을 미친 사상적 배경 에는 유가사상의 영항이 컸다고 본다.
동양철학은 유가(儒家)의 뿌리라고 볼 수 있는 공자(孔子, BC551~BC479)와 맹자(孟子, BC372~BC289)의 공맹사상 에서부터 비롯되어 송나라의 주희(朱憙)가 내세운 주자학(朱子學)에 이르러 그 사상적 중흥을 널리 전파하게 되었다. 주자학 즉 유교는 인간의 네 가지 본성에서 우러나오는 마음[인의예지(仁義禮智)]과 일곱가지 감정[희노애구애오욕(喜)(怒)(哀)(懼)(愛) (惡)(欲)]을 말하는 사단칠정(四端七情)을 수양의 덕목으로 삼고, '성리학(性理學)'이 라는 이름으로 이상적 도덕철학을 구현함 으로써 인간성을 회복하고 사회의 발전과 변화를 도모하려는 뜻이 있었다. 이러한 유가사상은 도덕적 통치 철학을 강조하여 사대문의 명칭도 인의예지(仁義禮智)라는 덕목을 적용하여 동대문을 흥인지문 (興仁之門), 서대문을 돈의문(敦義門), 남대문을 '승례문(崇禮門), 북대문을 '홍지문(弘智門)'으로 명명하는 등 덕치의 근본으로 삼아왔다. 조선의 유학은 이황(李滉), 이이(李珥) 등이 대표적인 성리학자인데, 인간 본성에 따른 덕목인 사 단(四端)과 인간의 감정인 칠정(七情)이 어떤 관계에 있는지에 대해선 주리론(主理論)과 주기론(主氣論)으로 갈리는 등 학파에 따라 각각 다른 입장을 보였다.
성리학은 비합리적, 신분주의적 관념에서 탈피하지 못하고 인간 본성의 변화에만 호소한 경향이 짙어 임진왜란(1592년) 이후에는 지행일치(知行一致)의 실천 철학인 양명학(陽明學)이 최명길, 이익 등에 의해 나타나고, 그 이후에 실사구시(實事求是)를 추구하는 고증학(考證學)이 정약용, 유득공, 안정복 등에 의해 발전하게 되는 양상을 보였다.
유가사상 외에 선비정신에 크게 영향을 준 동양철학은 '도가사상(道家思想)이라 일컫는 노장사상(老莊思想)이다. 노자(老子)와 장자(莊子)는 자연 순응과 부드러움, 비움과 낮춤의 미학을 강조하여 유능제강(柔能制剛)의 원리가 숨어 있다. 그들은 무위(無爲)와 무욕적(無慾的) 삶을 지향하고 자연 순환 섭리의 선비적 철학관과 문학적 지위를 확보하였다.
노자(老子)의 무위자연(無爲自然) 철학은 도가(道家) 노장사상의 핵심 개념인데, 인위적인 삶을 배격하고 자연스러움을 지향 하라는 뜻이 담겨 있으며, '자연으로 돌아 가라'는 서양 룻소 (Rousseau)의 말을 연상시켜 준다. 도가철학의 시조인 노자가 지었다고 전해지는 도가서(道家書)가 도덕경(道德經) 인데, 여기엔 그의 상선약수(上善若水)와 '곡신불사(谷神不死) 정신, '위학일익(爲學日益), 위도일손(爲道日損) 원리, 장단상교(長短相較) 논리, 화혜복소의(禍兮福所倚), 복혜화소복(福兮禍所伏)이라는 전화위복의 순리, '지족불욕(知足不辱)하고 지지불태(知止不殆)면 가이장구(可以長久) 라는 생명의 말씀 등 순리를 거스르지 않는 자연스런 삶의 놀라운 철학 사상이 집대성 되어 있 다.
장자(莊子) 역시 선비사상에 크게 영함을 준 도가의 중심 인물이다. 맹자가 공자를 최고의 스승으로 섬겼다면, 장자는 노자를 최고의 스승으로 섬겼는데, 장자 사상의 중요한 특징은 범신론(汎神論)과 물아일체(物我一體) 사상을 바탕으로 '인생을 바쁘게 살지 말라'는 삶의 철학이 우리를 되돌아보게 한다. 인생은 소풍 나온 것이니 '소요유(逍遙遊)'라 하여 자연에 순응하면서 슬슬 거닐 듯이 여유있게 살라는 것이다. 그의 사상을 드러내 주는 중요한 말로써 '예미도중(曳尾途中)', 지인무기(至人無己), '못생긴 나무가 산을 지킨다', '학의 다리가 길다고 자르지 말라' 등이 있는데, 이러한 사상철학은 어지러운 현 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인생 참삶의 가치와 방향을 제시해주고 있다. 필자는 나이가 들수록 부드러움과 낮춤의 미학을 추구한 노장사상에 더욱 매력을 느낀다. 다음에 관련 시조 작품을 감상해 보기로 하자.
물아래 그림자 지니 다리 위에 중이 간다.
저 중아 게 섰거라 너 가는데 물어보자
손으로 흰구름 가리키고 말 아니코 간다.
/ - 작가 미상(고시조)
이 시조를 읽는 독자들은 문맥의 아이러니와 내용상의 깊이에 고개를 갸우뚱 할 것이다. 다리 위로 중이 지나가니까 물에 그림자가 지는 것인데, "물 아래 그림자 지니 다리 위에 중이 간다"고 하니 어법 논리 상 맞지 않다. 그러나 작가의 시상은 문맥을 초월하여 즉흥적 직관의 세계로 이끌고 있다. 그림자가 있어 위를 보니 중이 지나간다는 것이니, 자연을 앞세우고 인간을 뒤로 세운 것이다. 무위자연과 물아일체의 노장적 사상과 관련이 깊은 글이다.
달리는 열차에는 굽힘 미학 실려 있다
굽은 길 내딛는 길 탈선하지 않는 뜻은
칸마다 시시때때로
굽혀 꺾기 때문이다.
못끗하다 강직하다 대쪽 같다 자랑 마오
인생길 굽이마다 휠 줄 몰라 부러지니
지는 게 이기는 거란 말
꺾인 뒤에 알겠네
/ -효봉, '굽힘의 미학' 전문
이 글은 굽힘과 부드러움, 즉 유능제강 (柔能制剛)의 미학을 강조한 시조다. 달리는 열차가 곡선구간에서 굽혀지지 않는다면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탈선할 것이다. 대쪽 같다고 일컫는 인사도 속을 비우지 않고, 휘어지지 않고서야 어찌 군자라 할 수 있겠는가? '굴기자(屈己者)는 능처중(能處重)' 즉, 굽힐 줄 아는 자가 중히 쓰임 받는다'라고 하였다. 노장사상의 부드 러움과 낮춤의 생명 철학은 선비정신을 잃은 오늘날 현대인들에게 금과옥조가 되어 반짝반짝 빛나고 있다.
4. 지향해 나아가야 할 선비(詩人, 文士, 君子)정신
1) 온유돈후 시교야(溫柔敦厚 詩敎也)
예기에 '溫柔敦厚 詩敎也'라 하여 '온유돈후한 것이 시에서 가르치는 바'라고 하였다. 문인은 남을 배려하여 관용을 베풀 고 행실은 어질게 해야 한다. 어짊(仁)의 기준은 '남의 잘된 일을 얼마나 진심으로 기뻐하고 있나'로 측정할 수 있는데,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는 배려나 관용이나 용서보다는 저주나 시기, 질투가 만연되어 있다. 이러한 소인배의 험악한 성정에서 벗어나 하루 속히 박기후인(薄己厚人), 관즉득중(寬卽得衆), '군자불기(君子不器)라는 말을 되새기며, 군자답고 선비다운 인품의 향기를 갖추어 나갈 때 이상세계는 형성될 것이다. 다산 정약용(1762~1836)도 "詩 없이 평화 없다" 라고 하였다. 詩는 그 선한 마을을 감발 시키는 것이고, 禮는 그 몸을 단속하는 것이며, 樂은 그 뜻을 온화하게 하는 것이다. 시는 그렇게 온화하고 전일하기 때문에 德을 이룰 수 있는 것이니, 시인은 선비정신을 갖춰야 한다.
2) 덕불고필유린(德不孤 必有隣), 인자무적(仁者無敵)
공자가 말한 '덕불고 필유린(德不孤 必有隣)'이란 말은 덕필튜린(德必有隣)과 같은 것인데, '덕은 외롭지 않고 반드시 이웃이 있다'라는 뜻이다. 사마천의 사기(史記)에 도히불언(桃李不言) 하자성혜(下自成蹊) 라고 하였다. 이는 '복숭아나무와 자두나무는 말을 하지 않더라도 그 아래에 저절로 지름길이 난 다'는 뜻으로 인품의 향기가 좋으면 저절로 사람이 모인다는 것을 비유한 말이다.
선비의 첫째 조건이 덕망이다. '덕본재말(德本財末)'이요, 교우지도(交友之道) 막여신의(莫如信義) 라 하였으니 재물 보다는 학덕과 지조와 신의로써 문우의 도리를 지켜나가는 것은 선비정신을 지향하는 지름길이다
맹자는 '인자무적(仁者無敵 : 어진 자에겐 적이 없다)'이라 하였는데, 선비의 마음은 늘 어질어야 하며, 남을 대할 때는 봄바람처럼 부드럽고[待人春風], 자기에겐 추상같이 엄해야 한다[持己秋霜].
3) 만초손 겸수익(滿招損 謙受益), 상선약수(上善若水)
서경에 나오는 '만초손 겸수익(滿招損 謙受益)'이란 말은 교만하면 손해를 부르고, 겸손하면 이득을 받는다'는 뜻이다.
노자의 '상선약수(上善若水)'는 낮게 흐르는 물의 덕이 최고라는 것이다. 이는 고금을 통해서 실증된 바이며, 중심을 잡지 못하고 목에 힘주고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이 깊이 새기고 실천해야 할 덕목이다.
광릉부원군 이극배(李克培 1422~1495)는 조선전기의 문신이며 본관은 광주(廣州) 이다. 그의 자는 겸보(謙甫)이고 호는 우봉(牛峰)이며 이집(李集)의 증손이다. 그는 후손을 불러놓고, "사물은 성대하면 반드시 쇠하게 되어 있다. 너희는 자만해서 는 안 된다." 그리고는 두 손자 이름을 '수겸'(守謙 : 겸손함을 지켜라), '수공'(守恭 : 공손함을 지켜라) 으로 지어 주었다. 그리고는 "처세 방법은 이 두 글자를 넘는 법이 없다"라고 하며, "자만을 멀리하고 겸공으로 석복(惜福 : 복을 아끼는 것)하라" 고 하였다. 이러한 겸공의 철학을 전승시킨 광주이씨의 후손들은 조선시대 청백리 5명을 비롯, 총 713명의 과거 급제자를 배출하는 영광을 누렸다.
일찍이 고은 시인도 「그 꽃」이란 시에서, "내려갈 때보았네 / 올라갈 때 보지 못한 그 꽃"이라고 노래하였다. 이는 높이 오를 때는 교만해져서 안하무인격으로 아무 것도 안 보이다가, 추락할 그때에서야 주변의 진실이 보이게 된다는 뜻이다. 이 밖에 노자의 '곡신불사(谷神不死 : 계곡 정신은 죽지 않는다)' 사상, 겸양의 도를 지켜내는 우묵눌(愚默訥) 인품향기 등은 다 이와 관련된 내용들이다. 역사적으로 자기만이 최고인 양 교만 때문에 패가망신한 인물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이러한 낮춤의 검양 처신 철학은 오늘날에도 지켜내야 할 가장 중요한 수양 덕목이다.
4) 위학일익 위도일손(為學日益 為道日损), 안빈낙도(安貧 楽道)
노자 도덕경(道德經)의 위학일익 위도일손 (爲學日益 爲道日損)이란 말은 "배우는 것은 날마다 보태는 것이요, 도를 닦는 것은 날마다 덜어내는 것이다"라는 뜻이다. 학문 탐구의 중요성과 도(道)와 관련된 비움 미학의 실천성을 강조한 것이다.
청나라 좌종당은 "학문(學問)은 여역수행주(如逆水行舟)하여 부진즉퇴(不進卽退)라고 하였다. 학문을 게을리 하면 알던 것도 잊게 되어 뒤로 후퇴하게 된다는 말이니, 단기지교(斷機之敎)면 결코 이룰 수 없고, 인백기천(人百己千)의 의지로 날마다 쉬지 않고 노를 젓고 정진하여야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학문 탐구는 남몰래 도광양회(韜光養晦) 정신으로, 정진수도(精進修道)는 마음을 비운 수행심으로 임하는 선비정신이 요망된다. '도를 닦는 일'은 날마다 쌓인 번뇌와 욕심을 덜어내는 것이라 하니, 이것이 바로 마음을 비우고 순리대로 살아가는 철학이요, 선비가 지켜 나아가야 할 수행의 기본 덕목인 것이다.
산 하나 우뚝 서서 "다 버려라" 호령하네,
침침한 눈 비늘을 한켜씩 벗겨내고
삿됨도 놓으라하네
눈에 씌운 깍지라며
먼 바다 파도소리 간간이 들려오는
고즈넉한 산사에서 풍광이나 벗을 하고
고달픈 윤회의 끝을
허허 대며 살라하네.
/ - 김은자, 「구름이듯 바람이듯」 전문
노자는 무위자연(無爲自然)을, 법정 스님은 무소유(無所有)를 주장하였다. 사람이 어찌 '채움'으로만 만족할 수 있단 말 인가. '비움'의 철학에서 진정한 '채움'이 이루어진다는 진리를 망각한 채 말이다.
이 글은 풍광 좋은 어느 산 밑의 산사를 배경으로 지은 시조다.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고 오늘도 세상의 삿됨에 눈멀어 있으니, 만유의 질서를 품고있는 대자연의 눈으로 보면 대단히 어리석고 한심하기 짝이 없는 노릇이다. 파도소리 간간이 들러오는 고즈넉한 산사에 드니 우람한 산은 '다 버려라' 호령하고, 대자연은 우주질서를 품고 있는 풍광이 나 벗을 하며 달인대관의 자세로 순리대로 살라 하니, 옛 선비들이 길을 걷던 안분지족(安分知足)의 경지에 드는 듯하다. 이 시조를 읊으면 물질주의와 이기주의가 팽배한 각박한 현실에서, 마음의 평정을 얻어 안빈낙도(安貧樂道)의 평안함이 가슴 속에 젖어들게 한다. 일상에 쫓기는 현대인들에게 자기 성찰의 기회를 부여해 줄 뿐만 아니라, 올바른 삶의 철학까지 제시해 주는 좋은 시조이다.
5) 지족불욕 지지불태 가이장구 (知足不辱 知止不殆 可以長久)
일찍이 우리 선조들은 '안빈낙도(安貧樂道) '라는 선비 철학을 실천하며 살아왔다. 인물에 따라 그 실천 양상이 달랐지만, 선비 다운 실천철학을 구현하고자 하는 데는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었다.
노자 도덕경에서는 '지족불욕 지지불태 가이장구(知足不辱 知止不殆 可以長久) 라고 하여, '만족함을 알면 욕됨이 없고, 그침을 알면 위태롭지 않으며 오래 장수할 수 있다'라고 말하고 있다. 모든 것은 다 마음먹기에 따라 달리 판단되는 것이기에, 주어진 현실을 만족하다고 느끼면 결코 욕됨을 당하지 않고, 지나친 과욕을 부러 때에 이르러도 그칠 줄 모르면 위태롭게 전개된다는 뜻이니, 세상 이치와 그에 따른 처신철학을 아주 잘 나타내 준 말이다. 선비정신에 아주 적합한, 좋은 가르침의 말이다.
무명한 자 같으나 은근히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살아있는 숨은 자요
징계를 받은 자 같으나
용서 받은 양이로다
근심하는 자 같으나 범사에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이를 부요케 하고
가진 것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지닌 자다.
/ - 효봉, 「아름다운 이름은」 (고린도후서 6:9~10을 생각하며)
6) 생전부귀 사후문장(生前富貴 死後文章)
'생전부귀 사후문장(生前富貴 死後文章)' 은 소동파의 시에 나오는 문구다. 살아서는 부귀를 누린다지만, 죽어서는 문장을 남겨야 한다는 말이다.
필자는 강의시간에 '시인은 죽을 준비를 가장 잘하는 사람이다.' '떨어진 꽃잎은 꽃씨를 품고 있어야 한다.'라고 강조하곤 한다. 여기서 '죽을 준비'란 보람있는 일생을 장식하기 위한 '알찬 족적 남기기'이며, '떨어진 꽃잎'은 '한철이 지나 물러난 자', '꽃씨'는 '아름답게 남긴 족적'을 의미한다. 소위 족적론(足跡論)과 관련된 이런 지론은 '어떻게 하면 보람있게 남은 인생을 살아 갈까'라는 화두로 귀결된다. 그러기에 그 실천 양상은 웰빙(Well-being)에서, 웰다잉(Well-dying), 웰에이징(well-aging) 으로 진전된다.
'웰에이징'은 '보람있게 늙어가기(나이먹기)' 의 뜻을 지니고 있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 는데, 그러기 위해선 남은 여생, 문인은 후회 없이 웰 에이징의 삶을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행백리자 반어구십(行百里者 半於九十)' 이란 말이 있다. 백리길을 가는 사람은 구십 리를 반으로 여겨야 한다'는 뜻으로, 유향(劉向)이 저술한 전국책(戰國策)의 진책무왕편(秦策武王篇)에서 유래한 말이다. '시작이 반이다', '천릿길도 한 걸음 부터' 라는 말이 첫 출발의 의미를 강조 했다면 이말은 유종의 미(美) 즉, 마무리의 중요성을 강조한 말이다. 은퇴하다'의 영문 표기는 "Retire"인데 "타이어를 같아 끼우다" 라는 새 출발의 의미가 담졌다. 하나의 존재 가치로서 문인정신에 입각한 참 인생의 의미를 되돌아볼 수 있는 귀한 말씀들이다.
7)앙천불괴(仰天不愧)경천애인(敬天愛人)
맹자의 군자삼락에 "우러러 하늘에 부끄러움이 없고 구부려 사람에게 부끄럽지 않은 것이 두 번째 즐거움이라 하였다 (仰天愧於天 俯不於人 二樂也).
부모형제가 무고한 것도 중요하고, 천하의 영재를 얻어 교육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선비는 스스로의 수신(修身)에 더 힘써야 할 것이다. 선비인 난고(蘭皇) 김병연이 가족사의 욕됨이 부끄러워 하늘을 가리기 위해 삿갓을 쓰고 다녔다는 일화는 선비의 양심과 수치가 얼마나 뼈저린가를 생각하게 한다. 또 일제에 철저히 항거하지 못한 윤동주가 시를 통하여 스스로 하늘을 우러러 부끄럽다고 표현한 것도 선비다운 양심에서 우러 나온 것이다. 그러기에 유가(儒家)에서는 인의예지(仁義禮智) 덕목을 통치철학으로 삼고 하늘처럼 받들어 왔지 않는가! 지금도 이 네 가지 덕목에 어긋나게 행동하는 저급한 사람들에겐 "싸가지'(4가지의 속어) 없다"라고 질타하고 있다. 하늘을 우러러 부끄럽다고 하는 말은 경천애인(敬天愛人) 사상과 관련이 있다. 하늘이 무서운 것을 알면 부끄러운 언행을 삼가게 되니, 이웃에 조심하고 남을 사랑하게 된다. 남을 존중하는 것이 신사도 이며 선비정신이다. 그러기에 명심보감에서 도 '남이 나를 존중해 주기를 바란다면, 내가 먼저 남을 존중해야 한다(若要人重我 無過我重人) 라고 경계하고 있다.
8) 구시화지문(口是禍之門) 설시참신도(舌是斬身刀)
저주(詛呪)의 말은 화가 되어 돌아오고 덕담(德談)은 복이 되어 돌아온다. 그래서 「」「명심보감」에는 '입은 재앙의 문이요, 혀는 몸을베는 칼'이라고 하였다(口是禍之門 舌是斬身刀). 재앙은 입으로부터 나오는 것(禍從口出)이기 때문에 말수는 적게, 행동은 조심스럽게 신중히 해야 한다. 말 많은 사람은 자주 궁지에 몰리는데 (多言數窮) 그래서 그런 사람에게 "가만히 있으면 중간이나 가지(不如守中)"라고 나무라기도 한다.
"남의 작은 과실을 책하지 말며 (不責人小過), 남의 사생활을 들춰내지 말며(不發人陰私), 남의 구악을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不念人舊惡) 라는 말은 문인들에게 아주 절실한 금언이다. 뒤에서 시기질투 하는 못된 언행 때문에 문단이 갈라진다.
삼가는 것, 이것은 몸을 지키는 부적과도 같다(愼是護身之符). 인간 사회의 모든 것은 다 말에서 비롯된다. 극기복례(克己復禮) 하지 못하고 분(奮)을 참지 못한 입술에는 사탄이 타고 있어 이성을 잃게 하고 재앙을 불러오게 되니, 특히 문인 간에도 말조심 입조심에 전심을 다해야 된다.
풍랑이 심하구나 흔들리는 이 지축
이 훌랑은 열지 마오 입방정이 구렁인 걸
十(십자)를 X(엑스)로 본다면
그대 입은 지옥문.
/ - 효봉, 「설화(舌禍)」 전문
이 단시조는 말조심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열십자를 긍정적 이미지로, 엑스자를 부정적 이미지로 내세워 시적 분위기를 드러내면서, 말을 함부로 하거나 말 많은 사람들에게 정곡을 찌르고 경계심을 부여해 주고 있어 교훈성이 짙다. 우리의 현실을 돌아볼 때, 함부로 내밸은 말 한 마디 때문에 세상은 시끄럽고 당사자는 구렁텅이 속에 빠져서 허우적거리며 헤어 나오기 어려운 경우가 허다하다. 말은 건전하고 맑고 밝게, 늘 긍정적 태도로 표현해야 한다. 십자가(十)도 삐딱하게 보는 이에겐 엑스(X)로 보인다. 매사를 부정적으로 보지
말고 좋은 말, 밝은 말로 긍정적인 사고를 지녀야 어지러운 현실도 천국으로 변모해 가리라.
9) 사무사(思無邪), 대인 적자지심(大人 赤子之心 )
공자는 '사무사(思無邪)'를, 맹자는 '대인 적자지심(大人 赤子之心)'을 강조하였다. 시는 사특함이 없어야 하고, 군자는 어린이 다운 순수성이 있어야 한다는 의미다. 성경에도 '어린이 다운 순수성이 없으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라고 하였다. 글을 쓸 때도 사특함을 멀리하고 평범 속에 진실이 발견되는 순수성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공자께서는 글을 쓸 때, 난해하거나 괴이 하거나 귀신스런 것을 피하라고 '불어괴력난신(不語怪力亂神)이라 말씀하셨다.
10) 군자지교 담약수(君子之敎 淡若水) 소인지교 감약례(小人之交甘若醴)
장자는 "군자의 사귐은 물같이 담담하고 소인의 사귐은 단술같이 달콤하다"라고 하였다. 군자의 사귐은 오래될수록 더 신 뢰가 깊어져 상대방을 존경하게 된다. 소인의 사귐은 이기적이고 시간이 짧고 달콤하다. 처음부터 교언영색(巧言令色) 으로 달라붙는 사람을 조심해야 한다. 그러기에 명나라 말 육소형은 "군자의 사귐은 선담후농(先淡後濃 : 처음엔 담담하게 나중에 진하게), 선소후친(先疎後親 : 처음엔 거리 두고 나중엔 친하게), 선원후근(先遠後近 : 처음엔 멀리 나중엔 가깝게)하는 것이 교우지도(交友之道)"라고 하였다. 이러한 사귐의 도리를 염두에 두고 선비는 문인간의 상호 교유에 신중을 기해야 할 것이다.
5. 맺음말
성공한 사람들의 특징은 무슨 일이든지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수기치인(修己治人) 하면서 최선을 다한다. 생각의 차이가 신분의 차이를 불러온다. 삼인행(三人行) 이면 필유아사(必有我師)라 했는데, 나 보다는 남을 귀히 여기며, 선비된 이는 잘난 체 하지말고, 오히려 어리석은 체 하는 게 좋으며, 자기수행을 게을리하지 말고 남몰래 학문에 힘쓰고 마음을 비우며, 허황된 욕심은 버려야 한다. 곱게 물든 단풍은 봄꽃 보다 더 예쁘고, 떨어진 꽃잎은 꽃씨를 품고 있어야 한다. 문인의 도리와 선비정신으로 무장하고 아름다운 글과 언행으로 족적을 남기는 것은 이 시대 문인들의 사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