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런 아로노프스키 감독의 영화 ‘블랙 스완’은 저 유명한 러시아 작곡가 차이코프스키가 만든 발레음악 ‘백조의 호수’에 대한 극한의 변주곡이자, 이 작품에 대한 현대적 오마주이다.
영화는 순결을 상징하는 백조와 타락을 상징하는 흑조를 동시에 연기해야만 하는 ‘백조의 호수’ 주인공 역에서 착안한다. 전 무용수였던 엄마 아래서 곱게 키워진 니나(나탈리 포트만)는 꿈에 그리던 백조의 호수 주인공 역을 맡게 되지만, 자신을 발탁한 감독 토마스(뱅상 카셀)로부터 흑조로서의 타락하고 관능적인 모습이 부족하다는 지적에 시달린다. 결국 그녀는 작품에 대한 강박관념으로 인해 정신분열증에 시달린다.
영화의 상당부분은 니나의 강박관념과 정신분열증세를 시각적으로 형상화하는 데 할애하고 있는데, 아로노프스가 만들어낸 영상은 소름이 끼칠 정도다. 별다른 잔인한 액션 하나 없이 등골이 오싹하게 만드는 장면들은 이 영화의 장르 구분에 ‘스릴러’라는 꼬리표까지 하나 더 달아주었다. 덕분에 단순히 선과 악의 극적인 대비로 진행되어야 할 차이코프스키의 ‘백조의 호수’는 감춰진 욕망과 인간의 이중성이라는 거대한 주제까지 끌어안은 채 극한의 지점까지 거침없이 변주되어 간다.
영화 속 니나의 삶은 ‘백조의 호수’ 주인공의 운명과 다르지 않다. 백조의 외관에 갖혀 자신에게 걸린 마법을 풀어줄 왕자를 기다리는 스완퀸. 자신이 이루지 못한 발레리나로서의 꿈을 딸이 이뤄주기를 바라는 엄마의 삶에 갖혀 화분처럼 키워진 니나. 흑조의 품에 안겨버리는 왕자를 보며 결국 자살하게 되는 스완퀸, 자신을 퀸으로 만들어준 왕자 토마스에게 완벽한 흑조 연기를 선보이며 서서히 죽어가는 니나.
원작 ‘백조의 호수’는 동화같은 이야기가 아니라 인간의 양면성에 관한 처절한 드라마이자 욕망의 경계에서 살아가는 우리 삶의 반증인 것이다. 결국 차이코프스키의 음악은 영화 속에서 발레 음악이 아니라 그녀의 일그러진 삶에 대한 반주가 된다.
영화의 긴장감을 만들어가는 게 아로노프스키의 영상이라면 극의 몰입도를 높이는 것은 클린트 만셀의 오리지널 스코어이다. 만셀은 차이코프스키 ‘백조의 호수’ 원곡의 오케스트레이션 기법과 주부선율을 그대로 가져다가 새롭게 변주를 더하고 편곡하여 ‘블랙 스완’ 스코어를 만들었다. ‘블랙 스완’ 사운드 트랙 앨범은 기회가 된다면 ‘백조의 호수’ 음반과 함께 반드시 감상해 볼 것을 강력 추천한다.
차이코프스키 ‘백조의 호수’ 녹음은 상당히 많다. 음반은 전곡판과 결정적인 장면들만 골라모은 편집판(suite), 이렇게 두 종류로 발매되는데, 굳이 발레와 함께 감상하지 않는다면 편집판 만으로도 곡의 감동을 느끼기에 충분하고, 접근하기도 쉽다.
많은 음반들 가운데 추천하는 녹음은 헤르베르트 본 카라얀과 빈 필의 연주다. 1964년 데카 녹음으로 당대를 대표했던 프로듀서 존 컬쇼와 고든 페리의 협업이 만들어낸 명 녹음이다.
음악의 제왕이라는 칭호로 대중들에게 널리 알려졌지만, 정치적 야심과 독재자적인 음악계에서의 활동으로 이중적인 예술가 중 한 명으로 분류되어 버린 카라얀의 연주는, 묘하게도 영화 ‘블랙 스완’이 내밀고 있는 인간의 이중성이라는 소재와도 부합되는 면이 있어, 다시금 관심을 갖게 된 녹음이다.
빈 필의 유려한 음색과 합주력에 잡티 하나도 용납하지 않는 완벽주의자 카라얀의 매끈한 해석이 절묘한 조화를 이룬, 오히려 진짜 ‘영화 음악’ 같은 연주다.
(독립영화감독/음악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