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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약 2개월의 긴 휴식이 끝나고 하반기 첫 강의가 있는 날로 홍제천과 어우러진 역사
이야기 수업에 참관한다.
ㅇ 일시 : 2019.09.20. (금) 10:00 ~ 13:00
ㅇ 장소 : 50플러스 센터
ㅇ 강사 : 홍만조 교수 (전, 부산외대철학과 교수, 전 동명교회담임목사)
ㅇ 내용 : 홍제천 역사이야기 교재 위주 강의 (부제 : 한양도성 북편 "다크투어")
* 다크투어 : 홍제천의 어두운 역사의 교훈을 제대로 알자
- 생태학과 역사의 관계성
- 홍제원 이야기
- 한양도성과 창의문
- 홍제천 주변에 소재한 역사 : 문화 유적지들
- 홍제천 중,하류 지역
- 조별 토론/발표
홍만조 강사님께서 수업 시작 전 부터 죄송하다는 말씀을 전해온다. 작년에 생태교육을 시작으로
50플러스 센터와 인연이 되어 빚 갚는 심정으로 대학 강의 휴강도 하고, 3일전 부터 강의 자료를
정비했는데 PC에 저장된 자료가 삭제되어 PPT를 활용할 수 없다고 거듭 죄송하다고 하신다.
아울러, 교재까지 만들어 오셨다.
본인 소개와 교재의 내용을 위주로 홍제천과 관련된 역사이야기로 강의을 시작한다.
홍제천에 대해 어렴풋이 알고 있던 아픈 역사의 흔적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뜻 깊은 시간
이었다. 다만, 역사의 재해석 부분은 역사를 보는 가치관에 따라 다를 수 있으므로 생략하기로
한다. 자세한 내용은 개별적으로 공부하시길 바라며 교재의 내용을 위주로 정리해 본다.
50쪽의 분량 정리를 가볍게 생각했는데 예상밖으로 시간이 많이 걸린다.
ㅁ 류미정 선생님께서 홍만조 강사님을 소개한다.
- 사진으로 왼쪽 맨 앞에 앉아 계신 분이 홍만조 강사님 : 아쉽게도 강의 장면이 없다
ㅁ 강사님께서 직접 만들어 오신 교재(총 50쪽 분량) : (열린강좌) 홍제천 역사이야기
<<생태학과 역사의 관계성>>
◇ 생태학의 정의 : 에른스트 헤겔
동물과 그의 유기적(생물), 무기적(비생물) 환경과의 전반적인 관계를 다루는 학문
◇ 역사란 무엇인가? : 에드워드 카
역사란 과거의 사실과 현재의 해석 사이의 '끊임없는 대화'다. 곧 하나의 사실이란 존재 할 수 없다. 특히,
하나의 권력이 역사를 규정하는 것은 대단히 위험하다. 다양한 시각을 통해 역사를 보아야 한다.
- 해석은 역사가의 선관(가치관)에 따라, 달라 질 수 있다
- 해석은 역사가가 어떤 권력에 속해 있느냐에 따라, 달라 질 수 있다
- 해석은 역사가가 어떤 연구비를 받고 있느냐에 따라, 달라 질 수 있다
◇ 역사 인식의 지평을 확대하기 위하여
진정한 역사는 역사의 과정 안에서 방향을 찾아 그것을 수용하는 자라야 쓸수 있다.
* 논어 위정편 제15장
學而不思則罔(학이불사즉망)
배우기만 하고 스스로 사색하지 않으면 학문이 체계가 없고
思而不學則殆(사이불학즉태)
사색만 하고 배우지 않으면 객관성, 보편타당성이 부족하여 오류나 독단에 빠질 위험이 있다.
<<홍제원 이야기>>
◇ 홍제천의 지명 유래와 지리적 위치
ㅁ 홍제천의 원래 이름은 홍제원천(弘濟院川) 이라고 한다.
ㅁ 홍제원의 설립과 규모
홍제원은 '널리 구제한다'는 뜻을 담고 있으며 고려 성종 4년 정현 이라는 승려가 창건하였다고 한다.
원(院) 제도는 고려때부터 시작되었는데 주로 승려들이 원을 맡아 보며, 해가 저물면 길손들을 묵어가게
하고, 병이 나면 약을 베풀기도 하였다.
ㅁ 홍제원의 모습
원은 일반인이 이용하던 민영 숙박소였으며, 조선시대 한양에는 흥인문 밖의 보재원, 서대문 밖의 홍제원,
숭례문 밖 남산 기슭에 이태원, 광희문 밖의 전관원과 함께 궁궐에서 공용 여행자들이 이용하게 되었다.
홍제원은 밭 2결(結) - 1결 5정보, 약 15천평, 2결 약 3만평 규모, 50부(負) - 말 50필을 소속시켜 국가
에서 직접 관리하였다.
조선왕조 실록에 나타나는 홍제원은 명나라 혹은 청나라와 관련된 사신의 영접과 전송, 함경도와 평안도
등에서 돌아오는 신하의 영접과 관련된 기록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홍제원이 언제 사라졌는지 사료에는 나타나지 않지만 병자호란 중에 사라진 것으로 보이며, 1648년
청나라의 칙사의 요청에 의해 홍제원에 참(站, 驛) 을 설치하고 홍제원을 다시 인경궁(경희궁)의 아문
한곳에 옮겨져 다시 지었는데 고종때까지 유지되었지만 청일전쟁 이후 사라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ㅁ 홍제원의 인절미 이야기
조선시대에 중국으로 가는 사신은 1년에 대여섯번 정도 되는데 사신 일행은 대개 수백 명으로 수석과 계곡이
좋은 홍제원에서 쉬게 되며, 상사, 부사, 서장관, 비장, 역관이 자리 잡은 차일(遮日) 아래에는 진수성찬이
차려지고, 기생의 노래와 풍악소리가 요란한 환송연이 벌어지는데, 교군이나, 마부, 군졸 등 하속들은 환송
나온 가족이나 친지들과 술잔이나 나누며 씁슬하게 쉴 수 밖에 없었다.
세종 때 사신을 수행하던 하속 하나가 술이 잔뜩 취해 차일을 바라보며, "이런 제기랄 것, 벼슬아치도 사람
이요. 우리들도 사람인데 멀고 먼 수천리 길를 가기는 마찬가지 아닌가? 그런데, 벼슬아치 자리에는 기생
까지 앉아 고운 노래도 듣지만, 우리 상놈들은 그런 노래 한 마디 듣지 못하고 간신히 막걸리 몇 잔으로
위로를 하니 차라리 죽어야지" 하고 떠들었는데, 그때 사신 환송을 마치고 돌아가던 정승이 이 광경을 목격
하고 세종에게 "전하, 신이 보옵건데 홍제원에 노래하는 여자를 배치하여 사신을 수행하는 하속들도 위안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라고 진언하자 세종도 그 말이 옳다고 생각되어 곧 한성부에 영을 내려 홍제원
에 색주가(色酒家)를 두도록 하였는데, 그 뒤로 도성안에도 홍제원 색주가를 본 뜬 색주가들이 생겨났다고
한다.
한편, 홍제원에는 술을 마시지 못하는 행인을 대상으로 떡을 파는 집도 생겨났는데, 그 중에서도 인절미를
잘 만들어 '홍제원 인절미'가 특히 유명하였으며, 이로 인해 홍제원 주민들은 대개가 술집 아니면 떡집으로
생계를 삼았다.
ㅁ 홍제원의 술집
ㅁ 홍제원과 인조반정
1623년 4월 11일 서인 일파가 광해군과 대북을 몰아내고 능양군 이종을 옹립하고자 일으킨 인조반정 때
이 귀 등이 1천명의 병력을 홍제원에 집결하였다.<< 추가 내용 생략 >>
◇ 홍제천의 설화
ㅁ 환향녀(還鄕女) 이야기
화냥년의 어원이라고 전해지는 환향녀에 대한 이야기는 논란의 여지가 많다. 조선왕조 실록에는 환향녀
라는 단어가 없으며 실록에는 '속환인(贖還人)'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적에게 잡혀가 값을 치르고 돌아온
사람'이란 뜻이다. 그러나, 그녀들에겐 정절을 잃었다는 이우로 자결을 강요 받았거나 이혼을 당했는데,
인조는 환향녀들을 위한 대책으로 맑은 물인 홍제천에서 몸을 씻으면 모든 과거는 불문에 부친다고
하였다. 청나라에서 조선으로 들어오는 초입이었던 물 맑은 홍제천 상류계곡 백사실에서 몸을 씻었으나,
집으로 돌아가지 못한 환향녀들은 홍제천 주변에 터를 잡고 살다가 창기가 되거나 걸인이 되어 한 서린
삶을 마쳤다고 전해진다.
* 환양녀에 대한 또다른 가설
만주어 'Hayan (하얀)'에 어원이 있다는 것으로, 만주족의 청나라 군사가 조선의 부녀자를 겁탈
하면서 여인들을 Hayan 이라고 불렀고, 이 말이 한자어 '화랑(花娘)'을 거쳐 '화냥'이 되었다는
견해다. 김무림 강릉원주대 교수는 국립국어원의 계간지 '새국어 생활' 2013년 가을호에 발표한
'한자음의 변화와 화냥의 어원'이라는 제목의 글에서, '화랑(花娘)은 가무에 능한 여성을 지칭하는
말이었고, 의미에 있어서는 '서방질이나 하는' 정절이 없는 단어이지만, 어휘 형태는 몇 백년,
또는 그 이상의 시대룰 견디며 절개를 지킨 지조가 굳은 단어'라고 주장한다.
ㅁ 서울 한복판의 두메산골 뒷골(능금마을)이야기
백사실(白石) 계곡을 따라 오르면 서울의 두메산골 뒷골이 나타난다. 그린벨트와 군사보호구역에 묶이고
'북악산길'로 단절된 이곳은 아직도 18채의 가구가 밭농사 등을 지으며 사는 마을이다. 예전에 능금나무가
많아 아직도 능금나무골로 부르는 이들이 있다, 현재 창의문 밖 부암동 일대는 '능금마을'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사과나무는 전혀 없다. 하지만 창의문 밖 능금은 맛이 뛰어나서 '경림금(京林檎)'이라 하여
임금께 진상을 했고, 추석 차례 상에 빠지지 않고 오르는 제례물품이 되었다고 한다.
창의문 밖 능금 마을은 인조반정에 협조했다 하여 창의문 밖 백성들에게 능금나무와 자두나무를 나누어
주었으며, 이게 부암동 능금마을의 시초가 된 것이다, 숙종 때에는 정책적으로 묘목을 더 많이 심어 부암동
일대에 무려 20만 그루의 능금나무가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능금 나무는 손이 참 많이 가는 나무여서 그동안 관리가 안돼 이제는 다 사리자고 산속에 2~3그루
만 남아있다. 주민들은 마을 곳곳에 앵두나무를 가꾸어서 이제 능금나무골은 앵두골이란 새 명찰을 달
채비를 하고 있다.
ㅁ 생태경관보전지역 지정(서울시 2009년) 백사실 계곡
2013년 생태계 조사 결과, 도룡뇽, 무당개구리, 북방산개구리 등 서울시 보호종 3종이 서식했다. 파충류인
아무르장지뱀도 1종이 추가로 발견되는 등 생물 종류도 다양해졌다. 버들치와 한국토종 민물고기인 꺽지의
서식도 확인되었고, 계곡 바닥에 사는 저서동물도 처음 조사가 이루어 졌는데 날도래 등 46종이 발견됬다.
저서동물을 먹고 사는 도룡뇽 등 양서류와 양서류 알 덩어리가 많이 발견되어 계곡의 먹이사슬이 안정적
으로 유지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백사실 계곡 수질은 상류부터 하류까지 모두 1등급 수준이었고,
주택과 경작지가 있는 부암동 능금마을 주변은 2등급이었다. 수심이 2~20cm의 실개천이니 만큼 수질
오염을 막을 수 있도록 꾸준하게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한양도성과 창의문>>
ㅁ 한양도성
1392년 개성 수창궁에서 조성왕조를 개국한 태조는 즉위한지 한달 만에 한양 천도를 명하고, 태조 4년
(1395년) 경복궁, 종묘, 사직단의 건립이 완성되자 정도전이 수립한 도성 축조 계획에 따라 한양도성을
수축하기 시작하였다.
한양성곽은 북악산(342m), 낙산(125m), 남산(262m), 인왕산(382m)를 잇는 약 18.2km 의 성곽으로
평지는 토성, 산지는 산성으로 계획되었다. 방대하고 시급한 사업을 농한기에 완성하기 위하여 이등해인
1396년 1월, 2월 49일 동안 전국에서 11만 8천명을 동원하여 성곽의 대부분을 준공하였고, 가을 농한기
인 8월,9월의 49일 동안에 79,400명을 동원하여 봄철에 못다 쌓은 흥인문 구역을 완공하는 동시에
4대문과 4소문을 준공하였다. 그 후 27년이 지나 세종은 서울 한양도성을 전면 석성(石城)으로 수축하는
대대적인 보수 확장 사업을 벌였다.
세종 4년(1422) 1월 겨울 농한기에 전국에서 약32만 명의 인부와 2,200명의 기술자를 동원하여 완공
하였다. 이는 한양의 인구가 10만명 인것을 감안하면 엄청난 규모의 공사였다. 이것이 지금의 서울 성곽의
기본 골격이다. 이후 성곽을 재정비했던 숙종30년(1704)까지 260년간 성곽은 부분적인 보수만 있었을 뿐
큰 붕괴는 없었다.
* 각자성석(글쓴이 둘레길 체험)
서울성곽길을 따라 걷다 보면 성벽에 '각자 성석'이 있다. 이는 성곽 공사별 구간에 따라 행정구역과
공사책임자 들의 이름을 새겨 넣었으며, 향후, 보수 공사 시 해당 마을 주민들을 불러 보수하도록
했다고 한다.
1899년 서대문과 청량리 사이에 전차를 부설하면서 동대문과 서대문 부근의 성곽 일부가 헐려나갔고,
이듬해에는 용산과 종로 사이 전차를 부설하기 위하여 남대문 부근을 철거하였다. 일제 강점기에 들어
서면서 서대문과 혜화문(동소문)이 헐리며 서울 평지 성곽은 모두 철거되어 총 길이 18.2km 중 산지
성곽 10.5km 만 남게 되었다.
2006년 문화재청과 서울시는 서울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하기 위하여 서울 한양성곽을 가능한
한 옛 모습으로 복원하는 계획을 수립하고 그 정비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ㅁ 수선전도 (고산자 김정호의 작품,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296호, 2010.2.11 지정)
수선전도의 목판(보물 제853호)은 순조 25년 경에 김정호가 직접 작성한 한양도성 시가지도 목판이다.
이 지도는 1892년(고종 29년)에 펜으로 필사하여 미국인 선교사들이 사용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여기
에는 한양의 지명들이 한글로 적혀 있다. 현전하는 한글본 한양지도가 희소하고, 구한말 한양의 지명을
구체적으로 알 수 있는 등 지도학사적, 어문학적으로 가치가 있다.
ㅁ 서울 한양도성 관광안내지도(글쓴이 한양도성길 걸을때 사용)
서울시청과 각 포스트에 가면 구할 수 있다. 한글 제작분은 소진이 빨라 외국어로 제작된 지도를 사용하는
것도 방법이다.
ㅁ 한양도성 스탬프투어 지도(상기 지도와 앞뒤로 인쇄되어 있다)
각 포스트별로 스탬프를 찍고 완주하면 각 포스트에서 완주 기념 배지를 받을 수 있다.(월요일은 휴무)
ㅁ 한양도성 지도(교재)
ㅁ 한양도성 4대문과 4소문 : 태조실록 (태조 5년, 1396)
위치 |
명칭 |
풍수지리 |
방위 |
공식명칭 |
별칭 |
동 |
백악산(白岳山) (북악산:北岳山) |
주산 (主山) |
정동 |
흥인지문(興仁之門) <흥인문(興仁門)> |
동대문(東大門) |
동남 |
광희문(光熙門) |
시구문(屍軀門) 수구문(水口門) | |||
남 |
목멱산(木覓山) (남산:南山) |
안산 (案山) |
정남 |
숭례문(崇禮門) |
남대문(南大門) |
서남 |
소의문(昭義門) 소덕문(昭德門) |
서소문(西小門) | |||
서 |
타락산(駝駱山) (낙산:駱山) |
좌청룡 (左靑龍) |
정서 |
돈의문(敦義門) |
서대문(西大門) |
북서 |
창의문(彰義門) |
자하문(紫霞門) | |||
북 |
인왕산(仁王山) |
우백호 (右白虎) |
정북 |
숙정문(肅靖門 <숙청문(肅淸門)> |
북대문(北大門) |
동북 |
혜화문(惠化門) <홍화문(弘化門)> |
동소문(東小門) |
◇ 창의문 - 북소문 ㅁ 창의문 종로구 청운동에 있는 창의문은 도성 4소문의 하나로 태조 5년(1396) 도성을 수축할때 건립 되었으나, 태종 13년(1413) 풍수설에 따라 숙정문과 함께 폐쇄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현재의 문루는 영조 17년 (1741)에 세운 것으로 4소문 가운데 유일하게 원형의 형태를 간직하고 있는 중요한 유적이다. 창의문을 자하문(紫霞門)이라 한 것은 창의문이 자핫골(지금의 청운동)에 있다고 해서 생긴 속칭으로 청운동 일대는 골이 깊고 수석이 맑고 아름다워서 개성의 자하동과 같다고 해서 자핫골이라 하였다. ㅁ 겨울의 창의문 모습(글쓴이 개인 촬영) ㅁ 봄의 자하문 모습 (글쓴이 개인 촬영) * 자하(紫霞) '보라빛 저녁놀'을 뜻하는 한자어로 신비하고 아름다운 것을 의미하는 단어이다. 또한, 창의문을 장의문(莊義門)이라고도 했고, 청운동, 적선동 일대를 장의동, 줄여서 장동이라 칭하였다. 또한, 성 밖 신영동에 있는 장의사(藏義寺)의 이름에 연유하여 장의문(藏義門)이라고도 하였다. << 홍제천 주변에 소재한 역사 : 문화 유적지 >> ◇ 홍제원천(洪濟院川) ㅁ 홍제천 홍제원을 지나가는 하천으로, 물이 맑고 깨끗하여 한강 제1천 이라 하여 홍제원천으로 불리었다가 훗날 홍제천으로 불리게 되었다. 삼각산 문수봉, 보현봉, 형제봉과 삼각산 서쪽 기슭과 북악산 북서쪽 기슭에서 발원한 두 개천이 합류하여 3개구(종로구, 서대문구, 마포구) 15개 동에 지난다. 백련산 동쪽을 감싸 돌면서 남가좌동에 이르고 녹번천이 합류한 불광천을 합류하여 난지도를 끼고 13.92km를 흘러 한강 하류로 흘러드는 지방 2급 하천으로 평균 하천의 폭은 50m이다. 홍제천 인근 주민들은 자신 들이 거주지와 연관성을 지어 모래가 많이 쌓여 물이 모래 밑으로 흘렀다고 해서 '모래내' 또는 '사천(沙川)'으로도 불리었고, 세검정 인근의 상류 부근에서 '세검천(洗劍川)'이라고 하고, 1950년 서울시에 편입되면서 예전의 경기도 은평면(恩平面)과 홍제외리(弘濟外里)가 합쳐 지면서 생긴 홍은동(弘恩洞) 주민들은 홍은천 이라고 칭할 정도로 친밀감을 드러낸다. ◇ 백석동천(白石洞天, 백사실 계곡) ㅁ 백석동천 백악산은 세 개의 수려한 골짜기를 거느리고 있다, 하나는 백악의 서쪽 사면을 흘러내려 경복궁의 오른쪽을 휘감아 흐르는 '백운동천(白雲洞天)", 또 다른 하나는 백악의 동쪽 사면을 흘러내려 경복궁의 왼쪽을 휘감아 흐르는 '삼청동천(三淸洞天)', 마지막으로는 도성 밖인 백악의 북서쪽 사면을 흐르는 '백석동천(白石洞天)'이다. 백운동천과 삼청동천은 도성 안의 청계천으로 흘러 들고, 백석동천은 도성 밖 홍제천으로 흘러든다. * 동천(洞天) 옛날 사람들은 교외에 따로 지은 집을 말할 때 '농막(農幕) 서(墅)' 자를 써서 별서(別墅)라고 했다. 별서(별장)의 필요 조건은 그윽한 자연 계곡이고 충분 조건은 수려한 풍광이다. 이 두 조건을 갖춘 곳을 동천이라고 했으며 동천은 신선이나 사는 별천지를 일컫는 말이다. 1968년 1.21 사태로 인해 백악산 일대인 백석동천은 기존 주민들 외에는 일반인들의 출입이 금지 되었고 군부대가 주둔하고 있다. 35년 동안 훼손되지 않은 자연이 알려지게 된 것은 故 노무현 대통령이 2003년 국회의 탄핵 의결로 직무가 정지 되었을때, 유흥준 교수에게 구경 시켜줄 곳이 있으니 등산할 준비를 하고 청와대로 들어오라고 해서, 대통령의 안내를 받아서 간 곳이 백석동천 이라고 전한다. 이후 지표조사를 위촉했고 2008년 1월 사적 462호에서 명승 36호로 지정되었다. 이렇게 백석동천 의 별서 터는 뒤늦게 세상에 알려졌다.
1800년대 도성에 인접하여 조성된 별서는 고증과 백석동천 논문에는 문인이자 서화가로서 연객 허필
(1709~1761)의 초옥이 있었던 곳으로 인정한다. 2012년 문화재청 소속 국립문화재연구소는 후일 추사
김정희가 별서 유적을 사들였다는 문헌 자료를 확인했다고 공식 발표했다.
◇ 백석동천의 나무들
ㅁ 은행나무
열매가 살구와 비슷하고, 표면에 은빛 나는 흰 가루에 덥여 있어서 은행이라는 이름이 붙여졌으며, 공룡
시대인 쥐라기(1억 3천 5백 ~ 1억 8천만 년 전) 이전부터 지구상에 삶의 터전을 잡아온 식물로 '살아있는
화석'이라고도 불린다. 은행나무는 오래살며 수형이 크고 깨끗하고 가을 단풍이 아름답다. 공손수(公孫樹)
라는 이름도 있는데 장수하는 성질을 가져 결실 연령이 길다는 데서 얻어진 것으로 풀이 된다, 즉, 심은
사람 당대에서는 결실하지 않고 손자대에 가서 결실한다는 뜻이다.
ㅁ 오리나무
길가에 이정표 삼아 5리(五里)마다 심은 데서 비롯되었다고 하지만, 이와는 달리 나무가 자라는 저습지에
오리가 많이 서식해 오리나무가 되었다고 한다. 깊은 산속이라도 개울가나 도랑 근처인 경우가 많고 높이
는 20m에 이른다, 뿌리는 뿌리혹 박테리아가 공생해서 척박한 토양에서도 잘 자라고 거친 토양을 기름
지게 한다.
ㅁ 느티나무
느티나무는 공해에 약해서 도시에는 제 기능을 못하지만 공기 좋은 지역에서는 가지가 넓게 퍼지는 속성이
잘 드러나서 커다란 그늘을 드리워서 초여름 열기를 식혀주며 위용이 당당하여 마을을 지켜주는 당산목
으로 사랑을 받아왔다. 나무줄기가 찢어지거나 꺽어지지 않으며 도끼질에도 절대 갈라지지 않은 강인함이
있어서 선비들이 시를 짓거나 풍류를 즐기는 누정(樓亭) 주위에 많이 심어서 정자목이라고도 불린다.
느티나무는 괴목(槐木)이라고 하였으며, 느티나무로 만든 밥상을 괴목상(槐木床)이라고 하여 귀하게 여겼다.
◇ 세검정(洗劍亭)
신영동 186-6 번지에는 정자 세검정이 있고 이를 중심으로 한 일대를 세검정동이라 하였으며, 세검정동은
다시 세검동으로 약칭되어 온다. 세검동은 현재 법정동명도 행정동명도 아니지만 신영동은 물론 자하문
고개를 넘어서 부터 홍지문안 북한산과 백악 뒤의 여러 골짜기 일대가 대게 세검동으로 불리어 왔다.
이러한 깊고 넒은 계곡, 그 중에서도 수석과 좌우 산림풍경이 가장 좋은 곳에 자리 잡은 것이 세검정이었다.
ㅁ 세검정의 이름유래에 대해서는 두가지 설이 있다.
하나는 인조반정 때의 이야기로서 광해군 15년(1623)에 이괄을 비롯한 이귀, 김자점, 김유 등이 자하문
밖 이 곳에서 광해군의 폐위를 논하고 칼을 씻었다 하여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또 하나는 숙종 45년(1719) 탕춘대성을 쌓고 평창 등 시설을 부근에 두었으며, 영조 때 군문의 하나인
총융청을 설치하고 종래 북한산성의 업무를 관장하던 경리청도 총융청과 합하여 탕춘대의 이름을 연융대로
고치고 연융대 앞애 정자를 지어 정자 이름을 세검이라고 지은 것은 장소가 군영 앞이고, 또 인조반정 때
반정군이 창의문을 진군하여 성공하였던 사실을 기념하면서 '칼을 씻어 칼집에 거둔다' 곧 평화를 구가
한다는 뜻이었다 한다.
◇ 탕춘대와 중종반정
ㅁ 탕춘대
숙종 37년(1711) 북한산성을 쌓은 다음 숙종 45년(1719) 북한산성과 도성을 연결하는 새 성을 쌓고 그
명칭을 탕춘대성(蕩春臺城)이라고 하여 명칭이 유래되었다고 한다. 세검정 정자에서 평창동으로 넘어가는
야트막한 조세고개가 있는 데 명칭 유래는 고객 부근에 조선시대에 조지서(造紙署, 종이 만드는 곳)가
있었기 때문이다.
오른쪽 언덕에 연산군 11년(1505) 지금의 세검정초등학교 자리에 있었던 사찰 장의사를 이궁(離宮)으로
사용하고, 그 아래 경치 좋은 언덕을 놀이터로 쓰면서 탕춘대를 마련하고 그 앞 시냇가에는 수각을 세우고
유리를 끼워 냇가를 볼 수 있도록 하여 궁녀들과 놀았다고 한다. 흥청(興淸)들과 놀았던 데서 유래된
이름이다. 탕춘이란 '봄기운을 만끽한다' 는 뜻이다.
* 흥청(興淸) - 맑은 기운을 일으킨다는 뜻.
연산군이 술과 여자에 빠져 채홍사라는 관리를 파견해 각 지방의 아름다운 처녀 1만여 명을 궁궐로
뽑아 왔는데, 이들 중에서도 특히 외모가 예쁘고, 노래를 잘 부르고, 춤도 잘 추는 여자들을 일컫는
말로 흥청망청의 유래가 되었다.
영조 27년(1751)가을에 영조는 탕춘대에 거동하여 활쏘기로 무사를 뽑고, 29년에 탕춘중성을 새로 쌓고
30년에 탕춘대를 고쳐 연융대라 하고, 홍상서를 시켜 신영동 172번지 세검정 위 길가에 있는 바위에
'연융대(鍊戎臺)' 석자를 새겼다.
ㅁ 중종반정
중종반정은 1506년(연산군 12년) 성희안, 박원종, 유순정 등이 중심이 되어 연산군을 폐위시키고 중종을
옹립한 사건이다. 중종반정은 조선 왕조에 단 두 차례에 있었던 반정의 효시가 되었던 사건으로 단순한
왕위 교체에 그치지 않고, 정치의 주도층 변화, 왕권과 신권의 역학관계에 중대한 변화를 가져온 사건이다.
< 추가 내용 생략 >
◇ 홍지문과 탕춘대성
ㅁ 홍지문
한성 북쪽에 있는 문이어서 한북문(漢北門)이라고도 하였으나, 숙종이 친필로 '홍지문(弘智門)'이라는 편액
을 하사하여 달면서부터 공직적인 명칭이 되었다. 숙종 41년(1715) 건축되어 1921년까지 탕춘대 성문 역할
을 하였으나 1921년 홍수로 붕괴되어 50년간 방치되어 왔다. 이에 서울시에서 1977년 탕춘대성과 함께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복원하였다. 화강암으로 중앙부에 월단(月團, 아치)이 꾸며지고, 그 위에 단층 문루
가 세워져 있다. 석축 및 부분 들레는 여장(女牆)이 있고 문루는 평면이 40.2m로 우진각 지붕이다
* 여장(女牆)
성곽에서 몸을 숨기기 위해 성 위에 낮게 쌓은 담. 여장에는 성 외부를 향해 총 등을 쏠 수 있게
'총안'이라는 구멍을 여장 하나마다 세 개를 뚫어 두었는데, 좌우로 양쪽에 뚫은 것을 원총안
(먼 곳을 보는 총안), 가운데 둟은 것을 근총안(가까운 곳을 보는 총안)이라고 한다.
ㅁ 홍지문 (글쓴이 개인 촬영)
ㅁ 여장의 3개의 총안 (남산 성곽, 글쓴이 개인 촬영)
ㅁ 원(遠)총안 (남산 성곽, 글쓴이 개인 촬영)
- 3개의 총안 중 좌우 2개의 총안은 원거리용으로 바닥이 반듯하다.
ㅁ 근(近)총안 (남산 성곽, 글쓴이 개인 촬영)
- 3개의 총안중 가운데 있으며 근거리용으로 바닥이 비스듬하게 만들어져 성곽 밑을 볼 수가 있다.
ㅁ 홍지문과 오간대수문(글쓴이 개인 촬영)
홍지문과 같이 설치하였던 오간대수문도 1921년에 홍수로 유실되었으나 1977년 홍지문 복원때 길이
26.72m, 폭 6.8m, 수구 폭 3.76m, 수구 높이 2.78m의 5간의 홍예교(虹霓橋)로 복원하였다. 복원된
오간대수문 밑으로는 오염된 생활하수가 프로고 성문의 지붕 높이로 난 길 위로는 쉴 새없이 자동차의
행령이 이어져 볼 품이 없다. 그나마 인근 주민과 홍제천을 걷는 사람들의 청원으로 2017년 부터 문이
개방되고 통행이 가능해져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 홍예교 - 무지개다리
교량 밑이 무지개 같은 반원형의 형상을 하고 있는 교량.
ㅁ 탕춘대성
종로구 홍지동 산 4번지에 있는 탕춘대성은 도성과 북한산성을 연결하는 성으로, 인왕산 동북에 있는 창의문
서쪽에서 시작하여 북쪽을 향해 능선을 따라 내려가다가 홍제천을 건너 북한산 서남쪽의 비봉 아래까지 연결
하여 축성한 약 4km에 달하는 산성이다. 명칭을 탕춘대성이라고 한 것은 현재 세검정이 있는 동쪽 약 100여m
되는 산봉우리에 탕춘대가 있었던 것에서 연유한 것이며, 한성의 서쪽에 있다고 하여 서성(西城)이라고 하였다.
ㅁ 탕춘대성의 암문(글쓴이 개인 촬영)
◇ 옥천암 백불(마애보살좌상, 보물 제1820호,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17호)
ㅁ 옥천암
삼각산의 맥이 비봉과 향로봉을 거쳐 인왕산으로 이어지기 직전 삼각산이 끝나는 지점에 자리한 옥천암은
서울이 대규모 도시화 되기 전에는 옥같이 맑은 물이 흘렀다. 그런 연유로 절 이름 또한 옥천암이라 불렀다.
이 절은 사찰 자체보다 높이 10m의 바위 남쪽 면에 새겨진 관음보살상으로 더 유명하다.
ㅁ 삼각산 옥천암(글쓴이 개인 촬영)
ㅁ 옥천암 백불(글쓴이 개인 촬영)
- 마애보살좌상 : 보물 제1820호
◇ 포방터(砲放터)
홍제천의 변모와 생태 환경 서울도성 창의문을 벗어나 홍제천을 따라 세검정과 홍지문을 지나고 옥천암
보도각 백불을 거쳐 약간 더 하류로 내려오면 홍은초등학교가 나타나고 그 보다 약간 북쪽에 해당하는
지점에 '포방교'와 '포방터시장'이 이어진다. 이 포방터라는 것은 글자 그대로 '포를 놓는 곳', 즉, 사격장이
있던 곳이라는 의미이다. 이 포방터가 만들어진 시기에 대해서는 이런저런 설명이 분분하지만, 명쾌한
자료(한국지명총람 1)를 근거로 판단하건데 '대한제국 시기'의 일이었던 것으로 드러난다.
ㅁ 포방터(창의문 밖 수마동, 사격 기사 : 교재)
- 독립신문 1899년 5월 12일자 : 크르푸(극로백) 야포 시험
- 황성신문 1899년 5월 13일자 : 무관학도들이 인물표(표적)를 이백보에 입(立)하고 사격
- 황성신문 1907년 6월 24일자 : 일본 사내육군대신이 신대포 시험
- 매일신보 1921년 8월 22일자 : 육군사적장에 대해 현지 주민의 교통 불편 탄원서 제출
- 동아일보 1921년 10월 27일자 : 서대문경찰서원 120명이 실탄사격 연습
ㅁ 포방교(글쓴이 개인 촬영)
ㅁ 포방터 시장 입구에 세워진 포방터 홍보물(글쓴이 개인 촬영)
<<홍제천 중, 하류 지역>>
◇ 유신정권의 상징물 - 복개공사와 유진상가
유진상가는 1970년에 지어진 2개동 5충 건물로 당시엔 드물었던 주상복합아파트로 육중하고 튼튼하게
지어졌다. 1967년 완공된 세운상가와 1968년에 완공된 주상복합 아파트 낙원상가 와는 태생부터 다르다.
유진상가는 박정희 정권 시절 군사적인 목적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정확히 북쪽을 향해 세워진 두 동의 건물
은 유사시 북한군의 진입을 차단하는 방어벽 혹은 바리케이드란다. 1층의 기둥들은 탱크 진지로 높이를 탱크
한 대가 쏙 들어갈 만한 규모로 설계했다. 이 기둥들을 몇 개만 폭파해도 건물 전체가 길게 옆으로 쓰러지게
되어 있어 적 전차의 진로를 방해하게 되어 있다.
1968년 1.21 사태와 그해 말 울진과 삼척 지역에 북한 무장공작원 침투 사건으로 1969년 '서울 요새화'가
선포되고 그 일환으로 생겨난 것이 유진상가와 수십만 명을 수용할 수 있는 대피소로 활용하기 위해 만든
남산 1~2호 터널, 청와대 방어를 위해 만든 북악스카이웨이 등이다. 이 무렵에 생겨난 한강 다리도 폭격
피해를 입을 경우 가장 신속하고 효과적으로 복구 할 수 있는 형태를 염두에 두고 서례가 이루어 졌다고
한다.
<< 홍제천의 신음, 내부순환도로 >>
ㅁ 내부순환도로(서울특별시도 제30호선)
서울특별시 마포구 성산대교 북단에서 성동구 성수동 동부간선도로 분기점까지 연결하는 순환 고속화도로
이다. 1996년 6월 30일 개통한 이 도로는 동서축 간선도로로는 두번째이고 총 길이는 27km이며, 편도
3차로로 구성되어 있다. 내부순환도로 설치로 인해 물이 마르는 현상까지 발생해 서대문구에서는 2004년에
60억원을 들여 홍제천의 5.3km 구간에 걸쳐 지하수를 흘려보냄으로 건천에서 물이 흐르는 하천이 되었다.
특히, 홍은 램프에서 들어오는 차량들이 기본적으로 병목현상을 유발하는데다 홍은램프를 통해 도로에 진입
하자마자 바로 홍지문 터널 입구를 마주하게 되는 구조여서 상습 정체구간이다. 터널 진출입시 본능적으로
운전자들이 속력을 줄이는 현상까지 더해져 꽤 긴 구간정체가 이어지며 보통 정릉 램프나 정릉 터널을
지나야만 정체가 조금씩 풀리게 된다.
홍은, 홍제, 문화촌, 연희지역 등 인근 지역에 램프가 6개나 위치하고 있고, 백련산과 안산을 양 옆에 끼고
있는 구릉지로 배기가스가 가라앉아 고여 있는 형태여서 노약자나 어린이들은 공해로 인한 피해를 겪고
있으며, 특히, 하천위에 가설된 교각으로 극심한 일조량 저하로 인한 홍제천 생명체에 생태계 교란을
초래했다는 환경평가가 대두되고 있다.
ㅁ 내부순환도로 사천교 주변 모습 (한국 강의날 오산천 대회 발표자료 발췌)
- 홍제천을 따라 건설되어 하천의 지붕 역할을 하고 있어 일조량이 적다.
<< 홍제천의 자연형 하천 조성 공사, 유감 >>
ㅁ 홍체전의 하천 조성 (교재)
서대문구는 '청계천이나 여타 하천과 달리 가장 자연에 가까운 하천이 홍제천'이라며 '기존 방식과는 차별화
된 기법(하천 바닥에 방수처리 배제 등)을 이용해 공사중' 이라고 자랑하고 있지만 하천 복원 방식에 의문이
있다. 펌프를 이용해 강제로 물을 퍼올려 흘러보내는 것은 '거대한 어항'이라 비판 받는 청계천과 다름 없다.
하천 전문가들로 부터 실개천을 활용한 물 확보나 수자원의 다양한 재활용 방안에 대한 검토와 고려를 요구
했다. 이런 지적과 요구가 있었지만 서울시와 서대문구의 홍제천 자연형 하천조성공사는 '녹색뉴딜'이란
색다른 개발 구호만 고집하고 있다.
ㅁ 비 오는날의 홍제천 모습(글쓴이 개인 촬영)
- 온 갖 흙탕물에 악취도 심하다.
ㅁ 홍제천의 비점오염원이 하천으로 그대로 유입되고 있다. (글쓴이 개인 촬영)
- 대부분의 우수관은 교각 밑에서 직접 하천으로 떨어지도록 설계되어 있다.
<< 조별 토론과 발표>>
ㅁ 조별 토론 : 홍제천 역사 이야기를 일상에 적용하기 위한 토론
강의가 끝나고 학습 효과의 증대를 위해 짧은 시간이지만 3개조로 나뉘어 아래의 주제를 한 가지씩 토론을
하고 대표자를 지정하여 토론된 내용을 발표하고, 발표자에게는 선물(책 총 3권)도 주어진다.
마지막으로 강사님의 끝인사로 강의를 마무리 한다.
1조 : 역사
2조 : 생태
3조 : 걷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