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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사무엘하12장15~31절
제목 : 한 아이의 죽음과 솔로몬의 탄생
다윗의 간절한 기도에도 불구하고 다윗과 밧세바에게서 태어난 아이가 죽습니다.
하지만 솔로몬의 탄생은 시름에 잠긴 그들에게 큰 위안을 줍니다.
1. 다들의 중병과 다윗의 기도(15~17절)
1) 다윗에게 낳은 아이를 여호와께서 치시매 심히 앓습니다(15절)
“[15] 나단이 자기 집으로 돌아가니라 우리아의 아내가 다윗에게 낳은 아이를 여호와께서 치시매 심히 앓는지라”
아이를 여호와께서 치시매. - 14절에서 말씀하신 하나님의 징계가 이제 임하였음을 보여 주는 구절입니다.
그런데 이는 보다 광의적(廣義的)으로 이해할 때 10-13절에서 예고된 다윗가의 재난이 이제 시작되고 있음을 암시해 주는 것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 예고된 다윗가의 재난
10절, 칼이 네 집에서 영원토록 떠나지 아니하리라
11절, 네 집에 재앙를 일으키고. 네 아내들과 더불어 백주에 동침하리라.
12절, 공개적으로 행하시겠다
13절, 당신이 죽지 아니하려니와
14절, 당신이 낳은 아이가 반드시 죽으리이다.
2) 다윗이 그 아이를 위하여 금식하고 밤새도록 땅에 엎드렸습니다(16절).
“[16] 다윗이 그 아이를 위하여 하나님께 간구하되 다윗이 금식하고 안에 들어가서 밤새도록 땅에 엎드렸으니”
여기서 '안에 들어가서'란 말은 다윗이 성소(sanctuary)에 들어갔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께 철저한 기도를 드리기 위해 조그마한 골방(마 6:6)에 들어갔음을 의미합니다.
*마6:6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그런데 이처럼 다윗이 골방에서 7일 동안(18절) 금식 기도를 드린 것은 자기의 죄 때문에 죽어가는 아이(14, 15절)를 하나님의 은총에 호소하여 살리기 위함이었습니다(22절).
특히 본절에서 다윗이 '밤새도록 땅에 엎드려 있었다'는 표현은 그가 하나님께 구할 자격이 없으므로 오직 하나님의 자비하신 은총만을 기다린 애절한 형편을 잘 보여 줍니다.
3) 그 집의 늙은 자들이 다윗을 일으키려 하되 듣지 아니하고 그들과 더불어 먹지도 아니하더라(17절).
“[17] 그 집의 늙은 자들이 그 곁에 서서 다윗을 땅에서 일으키려 하되 왕이 듣지 아니하고 그들과 더불어 먹지도 아니하더라”
그 집의 늙은 자들. - 이에 대해 혹자는 이들이 다윗의 숙부들과 나이 많은 형들이었다고 주장합니다(Ewald).
그러나 이는 확실한 근거 없는 추측에 불과합니다.
왜냐하면 여기서 '늙은 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자켄'은 성경에서 '장로'(창 50:7; 삼상 4:3; 왕상 8:1, 3)로도 번역된 말로서 '가장 나이 많고 신뢰받는 자'를 의미하기 때문입니다(창 24:2).
따라서 여기서 이 말은 다윗의 신하 중 다윗에게 가장 신뢰받는 원로급(元老級) 인사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2. 아들의 죽음과 다윗의 반응(18~23절)
1) 이레 만에 그 아이가 죽었지만 다윗이 상심할까하여 알리기를 두려워합니다(18절).
“[18] 이레 만에 그 아이가 죽으니라 그러나 다윗의 신하들이 아이가 죽은 것을 왕에게 아뢰기를 두려워하니 이는 그들이 말하기를 아이가 살았을 때에 우리가 그에게 말하여도 왕이 그 말을 듣지 아니하셨나니 어떻게 그 아이가 죽은 것을 그에게 아뢸 수 있으랴 왕이 상심하시리로다 함이라”
왕이 상심하시리로다. -이 말은 단순히 다윗 왕이 아이의 죽음으로 인해 괴로워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Lange), 한걸음 더 나아가 그가 자신의 건강을 해치는 어떤 행동을 하는 것까지도 의미합니다.
2) 다윗이 그의 신하들이 서로 수군거리는 것을 보고 그 아이가 죽을 줄을 알고 다윗이 땅에서 일어나 음식을 먹습니다(19,20절)
“[19] 다윗이 그의 신하들이 서로 수군거리는 것을 보고 그 아이가 죽은 줄을 다윗이 깨닫고 그의 신하들에게 묻되 아이가 죽었느냐 하니 대답하되 죽었나이다 하는지라[20] 다윗이 땅에서 일어나 몸을 씻고 기름을 바르고 의복을 갈아입고 여호와의 전에 들어가서 경배하고 왕궁으로 돌아와 명령하여 음식을 그 앞에 차리게 하고 먹은지라”
다윗의 신복들의 염려(17, 18절)와는 정반대로 다윗이 아이의 죽음에 대해 아무런 동요도 없이 오히려 기운을 차리는 장면입니다.
다윗 왕의 이러한 행동은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을 겸손하게 그대로 받아들인 신앙적 행동이라고 봅니다(Lange).
즉, 다윗은 지금까지 아이를 위해 금식하고 기도했으나 이제 하나님의 뜻이 분명하게 드러났으니 만큼 죽은 아이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하나님의 뜻을 그대로 받아들였다는 주장입니다.
이는 본장의 기록과 일치할 뿐더러(22, 23절)이후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죽은
아이 대신 솔로몬을 허락하신 사실과도 부합되므로(24, 25절) 타당한 견해라 할 수 있습니다.
3) 다윗이 아이가 죽은 후에 일어나 식사를 한 이유입니다(21,22절)
“[21] 그의 신하들이 그에게 이르되 아이가 살았을 때에는 그를 위하여 금식하고 우시더니 죽은 후에는 일어나서 잡수시니 이 일이 어찌 됨이니이까 하니[22] 이르되 아이가 살았을 때에 내가 금식하고 운 것은 혹시 여호와께서 나를 불쌍히 여기사 아이를 살려 주실는지 누가 알까 생각함이거니와”
다윗이 지금껏 금식 기도한 것(16, 17절)은 아이를 살리기 위해, 좀더 정확하게는 아이의 생명을 거두어 가리라 하셨던 하나님의 뜻(14절)을 돌이키고자 하였음을 보여 주는 구절입니다.
즉 다윗은 자신의 죄 때문에 고통 중에 신음하며 죽어가고 있는 아이(15절)를 보고선 견딜 수 없는 안타까움과 아픔에 젖어 하나님께 자비를 간구치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4) 지금은 죽었으니 내가 어찌 금식하랴(23절).
“[23] 지금은 죽었으니 내가 어찌 금식하랴 내가 다시 돌아오게 할 수 있느냐 나는 그에게로 가려니와 그는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리라 하니라”
지금은 죽었으니. - 한번 떠난 인간의 생명은 돌이킬 수 없으며 이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섭리하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따라서 다윗은 죽은 아이에 대해 계속적으로 미련을 가지는 대신 하나님의 최종적 결정에 스스로를 복종시키므로 세상적 욕심을 버린 것입니다.
이처럼 비록 범죄하였지만 회개함과 동시에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다윗의 자세는 매우 모범적입니다.
즉 다윗은 인간의 생명까지도 하나님의 주권에 달려 있음을 확신하므로 이제 자신의 아이의 죽음에 직면하여서도 평안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욥 1:21; 시 36:9; 42:8).
*욥1:21 “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
*시36:9 “진실로 생명의 원천이 주께 있사오니 주의 빛 안에서 우리가 빛을 보리이다”
*시42:8 “낮에는 여호와께서 그의 인자하심을 베푸시고 밤에는 그의 찬송이 내게 있어 생명의 하나님께 기도하리로다”
나는 그에게로 가려니와 그는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리라. - 이는 단지 아이가 죽은 자들의 거처인 스올(Sheol)에 들어갔으므로 이제 다윗 자신은 생전에 아이를 만날 수 없고 자신의 사후에나 만날 수 있다는 그의 생각을 피력한 말입니다(Lange, Rust, Keil, Clericus).
즉, 구약 시대 당시 히브리인들은 자신들이 죽어서 곧장 하나님이 계신 곳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침묵의 세계인 스올로 내려가 거주하게 된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물론 그들의 이러한 생각은 천국에 대한 하나님의 계시가 그때까지만 해도 아직 발전되지 못한 까닭에 형성된 것이었습니다. 삼상 2:1-10 강해,
'히브리인들의 음부(陰部) 개념', 본장 15-25절 강해, '구약의 사후 개념 - 음부' 참조.
3. 솔로몬의 탄생(24~25절)
1) 다윗이 그의 나내 밧세바 통해 솔로몬을 낳았습니다(24절)
“[24] 다윗이 그의 아내 밧세바를 위로하고 그에게 들어가 그와 동침하였더니 그가 아들을 낳으매 그의 이름을 솔로몬이라 하니라 여호와께서 그를 사랑하사”
그의 아내 밧세바. - 본서 기자는 이제 밧세바(Bath-sheba)를 더 이상
'우리아의 처'(15절;11:26)라 하지 아니하고 '다윗의 처'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이는 이제 하나님께서 밧세바를 다윗의 처로 인정하셨음과 솔로몬이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부부 사이에서 태어난 적자(嫡子)라는 사실을 증거해 줍니다.
위로하고. - 이 말은 단순히 정신적인 차원의 위로 뿐만 아니라 실제적인 위로의 행위까지도 포함합니다.
즉, 다윗 왕은 아이를 잃고 허탈감에 빠져 있는 그의 처 밧세바에게 새로운 아이를 낳아 주기 위한 실제적인 행동을 함으로써 그녀를 위로한 것입니다.
따라서 이 말은 이어지는 '동침하였더니'란 말과 일맥 상통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솔로몬이라 하니라. - 여기서 '솔로몬'(쉘로모)은 '평강의 사람'이란 뜻입니다.
다윗이 그의 이름을 솔로몬(Solomon)이라고 지은 동기에 대하여, 혹자는 이제 이 아이의 시대에는 다윗 자신의 시대에 있었던 것과 같은 피흘리는 처절한 전쟁(8, 10장)이 사라지고 하나님의 은혜로 평화의 시대가 도래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그렇게 이름을 지은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솔로몬이라고 하는 아이가 자신의 범죄에 대한 다윗의 진실한 회개 이후에, 하나님께서 다윗과 밧세바 가정에 사랑의 표시로 주신 선물이었다는 사실을 주목해 보아야 합니다.
따라서 다윗이 그의 새 아이를 솔로몬이라고 이름한 것은 솔로몬의 출생이 하나님과 그 가정 사이에 '화목(和睦)'관계가 회복된 사건으로 이해하였기 때문임이 분명합니다(Keil).
이러한 사실은 하나님께서 나단 선지자를 보내어 이 아이의 이름을 재차 지어주신 것(25절)에 의해서도 뒷받침됩니다.
그런데 이같은 솔로몬은 실상 밧세바가 다윗에게 낳은 넷째 아들입니다(5:14; 대상 3:5). -삼무아와 소밥과 나단과 솔로몬
그러나 여기서 솔로몬이 앞서 죽은 아이(18절)의 바로 다음에 태어난 것처럼 기술된 까닭은 아마 다음 두 가지 이유에서였을 것입니다.
(1) 하나님께서 솔로몬을 특별히 사랑하셨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25절).
(2) 장차 다윗의 왕위를 이을 계승자로서 솔로몬을 부각시키기 위함입니다(왕상 1장).
한편, 본장에서 솔로몬의 출생 기사는 랍바 성 함락 사건(26-31절)보다 앞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실상은 솔로몬의 출생 사건이 랍바 성의 함락 사건 이후에 있었을 것으로 확실히 사려됩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군의 랍바 성에 대한 포위 공격(包圍攻擊)은 밧세바가 죽은 아이(18절)을 잉태하였을 때(11:5)이미 진행되고 있었으며(11:1,14-25) 솔로몬의 출생은 그로부터 약 2년 후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본 기록 역시 연대별로 기록된 것이 아니라 앞의 내용과 연결시키기 위해 주제별로(topically) 기록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5:11 주석 참조.
2) 선지자 나단을 보내 그의 이름을 여디디야라 하십니다(25절)
“[25] 선지자 나단을 보내 그의 이름을 여디디야라 하시니 이는 여호와께서 사랑하셨기 때문이더라”
선지자 나단을 보내. - 나단 선지자가 다윗을 내방(來訪)한 것은 다윗 가정에 대한 하나님의 새로운 뜻을 알리기 위한 직무 수행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Keil).
그 이름을 여디디야라 하시니. - 여기서 '여디디야'란 이름은 '여호와의 사랑하심을 입은 자'란 뜻입니다.
이 이름은 '사랑을 입은 자'라는 뜻의 '다윗'과 내용상 같은 점을 시사해 주기에 충분합니다.
(1) 하나님께서 회개한 다윗을 전보다 더욱 사랑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 솔로몬을 선물로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2) 다윗이 사형에 해당하는 죄악을 저질렀음에도 불구하고 (5절)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은총을 베푸사 그의 아들 중에 하나를 후계자로 선택하여 다윗 왕조가 영구히 계속되도록 하셨다는 사실입니다(7:14-16).
즉, '여디디야'(Jedidiah)라고 하는 이름 속에는 하나님께서 이미 그를 다윗의후계자로 선택하셨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아무튼 이와 같은 사실만 보더라도 하나님께서는 다윗과 맺으신 언약을 성실히 이행하셨음을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7:4-16).
4. 암몬과의 전쟁을 마무리하는 다윗(26~31절)
1) 요압이 암몬 자손의 랍바를 쳐서 그 왕성을 점령합니다(26절)
“[26] 요압이 암몬 자손의 랍바를 쳐서 그 왕성을 점령하매”
랍바 성 함락 사건이 솔로몬의 출생보다 먼저 일어난 사건임은 이미 앞에서 살펴본 바입니다. 24절 주석 참조.
한편, 여기서 '왕성'(the royal city)은 랍바 성을 이루고 있던 두 성중 하나의 성을 의미합니다.
어디까지나 이 둘은 랍바 내의 각기 다른 두 성이다(Lange). 11:1 주석 참조.
2) 요압이 전령을 다윗게게 보내 물들의 성읍을 쳐서 점령하였슴을 보고합니다(27절)
“27] 요압이 전령을 다윗에게 보내 이르되 내가 랍바 곧 물들의 성읍을 쳐서 점령하였으니”
물들의 성. - 이는 왕성(王城)과 더불어 랍바 성을 이루고 있던 또 하나의 성입니다.
즉 이는 얍복 강에서 흘러 들어온 물을 가두어 두었던 랍바의 수원지(水源池)를 지키기 위한 또 하나의 성이었습니다. 11:1 주석 참조.
3) 요압은 물들의 성을 점령하기위해 다윗을 모셔오려 합니다(28절)
“[28] 이제 왕은 그 백성의 남은 군사를 모아 그 성에 맞서 진 치고 이 성읍을 쳐서 점령하소서 내가 이 성읍을 점령하면 이 성읍이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을까 두려워하나이다 하니”
랍바 성의 두 성 중 하나인 왕성(王城)을 탈취한 요압(26절)이 나머지 하나인 '물들의 성'을 탈취하기 전에(27절) 예루살렘에 있던 다윗 왕을 모셔오는 장면입니다(Lange).
그런데 이처럼 요압이 직접 랍바성을 완전히 함락시키지 않고 다윗을 초치(招致), 그로 하여금 랍바 성을 정복하게 한 요압의 처신은 다분히 개인적인 소신이나 야망에서 나온 행위로 보아야 합니다(Lange).
즉, 요압은 자기의 주인인 다윗 왕에 대한 존경심의 발로에서 그렇게 했거나 아니면 군대 장관이라는 자신의 현 위치를 더욱 강화하기 위해 다윗왕에게 아부하는 의미에서 그렇게 했을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본서에서 자주 보여지는 다윗왕에 대한 요압의 맹목적인 헌신과 자기의 출세를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그의 이중적인 성격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11:17 주석 참조.
4) 다윗이 모든 군사를 모아 랍바로 가서 그 곳을 쳐서 점령합니다(29절)
“[29] 다윗이 모든 군사를 모아 랍바로 가서 그 곳을 쳐서 점령하고”
당시 다윗이 거처하던 예루살렘(11:1)에서 암몬의 수도 랍바(Rabbah)까지는 약 70km 정도의 거리입니다.
따라서 요압의 전갈을 받은 다윗(27, 28절)은 그다지 많은 시간을 소요(所要)하지 않고서도 랍바에 당도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11:1 주석 참조.
5) 그 왕의 머리에서 보석 박힌 왕관을 가져왔습니다(30절)
“[30] 그 왕의 머리에서 보석 박힌 왕관을 가져오니 그 중량이 금 한 달란트라 다윗이 자기의 머리에 쓰니라 다윗이 또 그 성읍에서 노략한 물건을 무수히 내오고”
그 왕의 머리에서. - 본절의 '그 왕'이란 당시 암몬인들이 자신들의 왕과 같은 존재로 섬기던 신(神)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금 한 달란트라. - 여기서 달란트(Talent)는 구약 시대 당시 히브리인들이 무게를 측정하던 도량형으로 1달란트는 34.27kg에 해당됩니다.
다윗이 자기의 머리에 쓰니라. - 앞에서 언급하였듯이 34kg이나 나가는 면류관은 다윗이 머리에 쓰기에는 너무나 무거운 것입니다.
따라서 다윗은 암몬족의 면류관에서 보석만을 빼어 자신의 면류관에 부착한 후 이를 머리에 썼을 것입니다.
아무튼 이러한 행위는 헛된 우상을 섬긴 암몬 사람들의 실패와 다윗 왕이 이제 암몬의 정복자가 되었음을 알리는 상징적인 의미를 담고 있는 행위였음이 분명합니다.
6) 그 안에 있는 백성들을 끌어내어 톱질, 써레질, 철도끼질, 벽돌구이를 그들에게하게 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갔습니다(31절)
“[31] 그 안에 있는 백성들을 끌어내어 톱질과 써레질과 철도끼질과 벽돌구이를 그들에게 하게 하니라 암몬 자손의 모든 성읍을 이같이 하고 다윗과 모든 백성이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니라”
본절은 학자들간에서 상당한 논란을 불러일으키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원문상 본절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해석이 다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1) 다윗이 암몬인들에게 톱질이나 써레질 등과 같은 고역(苦役)을 시켰다는 해석입니다(Hertzberg, Wycliffe).
(2) 다윗이 톱이나 써레 등과 같은 도구로써 암몬인들을 무참히 살해했다는 해석입니다(Keil, Lange, Pulpit Commentary).
이 중 어느 해석이 보다 타당한지는 섣불리 판단키 어렵습니다.
그러나 과거 암몬인들이 다윗의 신복에게 크나 큰 수치를 안겨 주었던 점(10:4, 5)에 비추어 볼 때 본절은 다윗이 어떤 식으로든 암몬인들에게도 잔인하게 복수한 것을 가리키는 구절임이 분명합니다.
오늘 본문은
1) 다윗의 기도는 책임을 다하는 기도, 순종하는 기도였습니다.
자녀를 위한 간절한 기도였습니다.
순종하는 기도였습니다.
우리의 기도는 우리가 원하는 결과에 하나님이 이르도록 하는 기도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깨닫기 원하는 곳에 우리의 마음과 행동이 이르도록 하는 기도여야 합니다.
우리의 기도은 하나님이 응답이 있을 때까지 최선을 다하여야 하며 설사 내가 원하는 응답이 아닐지라도 하나님의 응답에 순종하는 기도여야 합니다.
2) 나단 선지자를 통하여 그의 아들의 이름을 주셨습니다.
다윗의 죄와 심판은 알렸던 나단 선지자가 이제는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선지자를 통해서 전해지는 멧세지 들은 하나님의 마음에 따라 우리가 예상치 못한 내용이 전해지는 것이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마음과 삶이 어떻게 변하는지를 따라 심판의 멧세지 인지 사랑의 멧세지인지가 결정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하루 하나님과 회복되는 기도를 드리기를 원합니다.
다윗처럼 자기 잘못으로 힘든 상황이 있다면 하나님께 참회하며 매달리는 기도를 드리십시오.
비록 내가 원하는 삶의 결과가 아닐지라도 겸허히 수용하는 기도를 드리십시오.
하나님은 어떤 분입니까?
1) 나단을 ‘보내’(11:1)축복하십니다(24,25절).
‘솔로몬의 탄생’과 ‘여기기야’라는 이름은 은총의 표징이자 언약 성취(7:12,13)의 희망을 보게 합니다.
인간의 죄악이 아무리 커도 하나님의 은총을 가로막지 못하고,
심판이 아무리 가혹해보여도 “은혜와 평강”(샬롬)을 주시는 하나님의 계획을 중단할 수 없습니다.
회개를 망설이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새롭게 시작하실 준비가 되어 계십니다.
내게 주시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1) 예고대로(14절) 징계가 시작됩니다(15,18,19절).
다윗과 ‘우리아의 아내’사이에서 난 첫 아이가 시름시름 않다가 죽습니다.
이것은 숨길 수 없는 죄의 결과이고 피할 수 없는 심판입니다.
다윗은 회개를 통해 용서받지만 그 죄의 책임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합니다.
죄는 크든 작든 반드시 ‘후유증’을 남깁니다.
2) 다윗은 죽어가는 아이를 살리기 위해 사력을 다해 기도합니다(16,17절).
이미 아이의 운명(14절)에 대해 들었지만 아비이기에 포기할 수 없습니다.
천하를 호령하던 왕의 모습이 아닌 무기력한 아비의 모습으로 하나님의 긍휼만 바라고 있습니다.
비록 죽은 아이를 살리지 못했지만
다윗은 간음과 살인을 교사할 때 잃었던 영성을 점점 되찾고 있습니다.
그러니 거절된 응답에 실망하지 말고 내 안에 일어나는 변화를 살펴보십시오.
3) 아이가 죽은 것을 안 다윗은 자리에서 일어납니다(18~23절).
가슴을 치던 간구와 고통의 자리에서이러나 일상으로돌아갑니다.
자식을 먼저 보낸 아픔을 털고 일어난 것이 아닙니다.
아이의 죽음을 징계의 결과로 겸허히 받아들인 것입니다.
돌이킬 수 없는 주님의 뜻 앞에서 나는 어떻게 반응합니까?
4) 다윗은 요압의 요청에 따라 랍바 성 함락을 마무리합니다(26~31절).
암몬 왕의 왕관과 성읍 전리품을 취하고
백성에게 노역을 시키며 암몬을 복속시킵니다.
이스라엘이 전쟁하는 동안 깊은 수렁에 빠져 있던 다윗이 참회하며 용서를 구하자 하나님이 그를 용서하시고(25절)다시 그의 이름을 높여주십니다.
회개는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 참 회복의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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