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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리산 알아보 기☜ 스크랩 지리산 이야기 - 일흔 넷. ( 뱀사골. 뱀사골 산장. 뱀. 용. 파라오. 문신
이제학(백두) 추천 0 조회 38 12.09.16 08:05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지리산 이야기 - 일흔 넷. ( 뱀사골. 뱀사골 산장. 뱀. 용. 파라오. 문신.)

 



뱀사골.


..............................................................................
반선리 -2Km- 제3야영장 -2.5Km- 병풍소 -1.5Km-
제승대 -1.5Km- 간장소 -4.5Km- 뱀사골산장 -0.2Km
<총 12Km, 오르막 길 4시간, 하산 길 3시간 10분 소요>
...............................................................................

지리산 수많은 계곡 중 가장 인기가 높은 피서지.
원래 북사면 계곡은 일조시간이 짧아 단풍이 곱다.
또한 여름에는 시원해 피서철에 물놀이 하기 좋다.

여름철 뱀사골은 계곡 곳곳마다 피서객이 붐빈다.
그러나, 지리산 일대에서 가장 강우량이 많은 곳.
장마철 폭우에 뱀사골 일대는 항상 수해 재난지역.

뱀사골은 옛부터 풍류객들이 은밀히 찾던 피서지.
옛부터 화개재를 넘는 소금장사 상인들 오가던 곳.
뱀사골 지류 들돌골 일대는 '변강쇠전'의 배경무대'

뱀사골은 성 해학에 관련된 전설이 유난히 많은 곳.
뱀사골은 '욕망의 상징' 뱀에 관련된 전설이 많은 곳.
지금부터 색다른 '전설의 고향' 뱀사골로 들어가보자.

반야봉, 삼도봉, 토끼봉, 명선봉 원시림에서 발원된 물줄기.
물에 패인 기암괴석을 감도는 개울, 소, 폭포의 어울림이 절경.
반선-탁룡소- 뱀소- 병소-병풍소-간장소-제승대-화개재 코스.

'지리산에서 피서철 인파가 가장 붐비는 계곡.'

봄가을 꽃 단풍도 좋지만 설경 속 엉덩이 눈썰매 신나는 곳.
특히, 여름철 무더위를 식혀주는 개울과 짙은 녹음은 환상적.
반선에서 뱀사골 산장까지의 약 5시간은 전혀 지루하지 않다.

12km의 등산로는 계곡과 나란히 이어졌고
경사도 비교적 완만해 걷기 편한 등산코스.

반선 전적기념관을 들머리로 하는 뱀사골 등산로.
일명 흔들바위라 불리우는 요룡대, 아치형 반야교,
탁룡소의 긴 암반 위에서 시원하게 쏟아지는 폭포수.

반야교, 금포교, 병풍교, 명선교,
옥류교, 대응교, 재승교 계곡 철교.

탁룡소에서 금포교 건너 용이 못된 이무기가 살던 뱀소,
병 모양 병소. 아치형 명선교와 옥류교 제승대 지나 간장소.

용이 승천하려고 몸부림 쳤다는 요룡대.
그 용이 곤두박질치며 떨어져 숨진 탁룡소.
소금 장수가 헛발 딛어 소금이 빠졌다는 간장소.

'뱀사골은 개울과 소 곳곳마다 전설의 고향.'

..................뱀사골의 전설.....................
지금부터 1200년 전 신라 말에 창건한 송림사
전통적으로 해마다 불제자 본보기 승려를 선출.

그 선출된 승려가 칠석 날에 기도 하면
구름 타고 은하수 건너 극락 간다는 믿음.
불도들에게 최고 영광인 '승려를 뽑는 행사'

해가 갈수록 행사가 성대해졌다고 한다.
통일신라, 고려, 이조를 거쳐 계승된 전통.

이조 때 서산대사는 그 전통에 대해 의구심을 갖는다.
사람이 불심이 돈독해도 신선이 될 수 없다는 생각 때문.

서산대사는 그 해에 뽑힌 승려에게
독 묻은 옷을 입히고 동정을 살핀다.

자정이 넘자 용소가 요동치더니
거대한 이무기가 승려를 덮쳤다.
그 승려는 이무기의 제물이 된다.

서산대사는 비로서 송림사의 숨겨진 비밀을 알게된다.
승려를 뽑는 행사는 이무기에게 제물을 받치려는 수단.

다음 날 용소 위에 신선대로 가니
승려와 이무기가 함께 죽어 있었다.

뱀사골은 용이 못된 이무기가 죽은 골짜기.
이무기인 뱀이 죽었다는 뜻 이름인 '뱀사골'.

'반선'은 이무기의 밥이 된 스님
또는 '반쪽 신선'이란 뜻의 지명.

반선(半仙)은 그후 언제부터인가
반선(伴仙)으로 한자 표기가 바뀐다.

현재, 뱀사골 입구에 있는 <반선 전적 기념관>
그 자리가 통일신라 시대 창건된 송림사 사찰 터.

하여, 뱀사골 전설에 등장하는 송림사
지금은 사라지고 옛 사찰 터만 남았다.
..........................................................

뱀사골의 전설은 이조의 불교탄압 정책 결과인듯.
서산대사는 임진왜란 때 승병을 일으킨 승병 대장.
승병이 전쟁터에 나갈 정도이면 국운은 바람 앞 촛불.

서산대사는 임진왜란 전까지는
불교탄압으로 박해받았던 인물.

임진왜란 때 세운 혁력한 공으로
선조 왕이 정 2품 벼슬을 하사한다.
그러나, 그 벼슬을 버리고 떠난 고승.

제자 사명대사가 그의 빈자리를 계승.
통신사 외교사절로 수차례 일본 방문,
임진왜란 포로 귀환에 큰공을 세운다.

“금강산은 빼어나되 웅장하지 못하고,
지리산은 웅장하되 빼어나지 못하고
묘향산은 빼어나고 웅장한 산세. ” -서산대사 -

..........................서산 대사.......................................
서산대사는 이조 중기 승려이고 임진왜란 당시 승병장.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양부 이사증(李思贈)에게서 성장.
과거 낙방후 지리산에 입산, 숭인을 스승으로 모시고 출가.

1549년(명종 4) 승과에 급제하여
선교양종판사(禪敎兩宗判事) 제수.

봉은사 주지 후 1556년 승직을 그만두고, 금강산·묘향산 유람.
1589년(선조 22) 정여립 모반에 연루되었다는 무고로 투옥된다.

임진왜란 때 왕명을 받고 전국에 격문을 돌려 승병을 모집.
이때 제자 유정은 금강산에서, 처영은 지리산에서 승군 모집.
승병 1500명을 총지휘하여 명(明)나라 군사와 함께 평양 탈환.

1594년 묘향산 원적암에서 여생을 보내다 입적.
..........................................................

간장소는 운봉 소금장수가 뱀사골 넘어 하동으로 건너가다가
물에 빠져 죽은 뒤에 물이 간장처럼 짜졌다는 얘기가 내려온다.
이 전설로 미루어 뱀사골은 소금 장사 왕래가 많은 곳인 듯 싶다.
아울러, '정력의 상징' 소금장수 왕래가 많은 곳이라 성풍속도 문란.

뱀사골 유래는 이외에도 여러 설이 있다.

뱀소에서 유래된 뱀소골이 뱀사골로 불린다는 설.
옛날 석실(石室) 부근에 배암사라는 사찰이 있어
뱀사로 줄여 뱀사골이라는 이야기도 전해져온다.


.......
소금.
.......

'뱀사골 소금장수 정력은.. 변강쇠의 상징.'

'피아골이 '씨받이촌' 전설의 고향이라면
씨내리 소금장수 '전설의 고향'은.. 뱀사골.'

전국 천일염 생산량 85%를 차지하고 있는 전라남도
'천일염' 세계 문화유산으로 등재하기 위한 첫걸음.
전남 소금산업을 특화산업으로 육성하는 방안 검토

전남 갯벌 소금은 건강에 좋은 미네랄이 다량 포함
건강식품을 만들 경우 높은 소득을 창출할 수 있다.
옛부터 소금은 당나라에서 화폐를 대신한 교역상품.

뱀사골 화개재는 전남 소금의 수송 교역로.
조상 대대로 소금장수 주민들이 많았던 곳.
소금은 젓갈을 담그는데 꼭 필요한 첨가물.

어패류 살 알 창자를 소금에 절여 발효시킨 젓갈.

요긴한 밑반찬으로 새우젓·조기젓·밴댕이젓·
꼴뚜기젓·멸치젓·연어알젓·명란젓·어리굴젓·
조개젓·창난젓·방게젓 등 그 종류가 무척 많다.

김치와 더불어 매우 뛰어난 저장 발효식품.

젓갈은 상하기 쉬운 어패류를 소금으로 저장해
오래 두고서 먹을 수 있도록 한 데서 비롯되었다.
특히 날씨가 더운 전라도지역에서는 젓갈이 중시한다.

젓갈은 제철에 소금을 켜켜이 치고 항아리에 봉
새우젓·멸치젓·조기젓 등은 김장을 할 때 쓰고,
나머지는 젓갈은 양념에 무쳐 밥 반찬으로 쓰인다.

어리굴젓:태안반도 근교 서산 서해안이 명산지
게젓:벼를 수확할때 논에 게를 잡아 담근 젓갈.
조기젓·멸치젓·창난젓:3~4월 중부지방의 젓갈.

연평도 조기 아가미에 소금을 가득 채우고,
독 안에다 조기 한 두름에 소금 1번씩 채워
돌을 눌러서 꼭 봉하여 시원한 곳에서 삭힌다.

여름이면 꼬들꼬들하게 된 조기젓
살을 굵직하게 찢어 밥 반찬을 한다.
식초 파 마늘 고춧가루 양념를 얹고 찜.

5~6월경에는 멸치젓을 담그고,
겨울철엔 대구 내장과 아가미젓.
창난젓은 고춧가루, 마늘로 양념.

'소금은 젓갈에 꼭 필요한 원료.'

소금은 없어서는 안될 필수불가결한 생필품.
옛부터 생산이 어려워 귀한 물품으로 여겼다.
물물교환 시대에는 화폐 대용으로도 사용했다.

로마시대에는 관리와 군인에게 봉급으로도 지급.
이처럼 중요한 소금은 생산과 유통을 국가에서 통제
우리나라에서도 고려시대 이후에 국가가 소금을 관리

사사로이 생산하거나 비밀리에 무역하면 엄벌.

소금생산이 한반도에 전래된 시기는 알 수 없다.
전북 고창과 부안 해변가는 소금 제조의 첫 시조
577년(위덕왕 24) 고창 선운사를 창건한 검단선사.

백제 후기 고승으로 소금 제조는 선운사 창건과 밀접
선운사가 창건되기 전 이지역은 도적들의 소굴이었다.
검단선사는 도둑들을 구제하고 선운사 바닷가에 정착.

그들에게 소금과 종이 만드는 기술을 가르쳤다.
아직도 선운사 아래 '검당'이란 지명이 남아있고
해방전까지만 해도 선운사에 매년 소금을 보시했다.

이러한 유래를 간직하는 선운사 소금
건너편 개암사에 이르러 죽염을 개발.
천일염을 대나무에 넣어 아홉번 구운 죽염.

죽염은 근래 건강식품으로 선풍적인 인기.
고창 해리와 부안 곰 소염전은 천일염 산지.

............소금에 얽힌 중국의 전설.............
진시황, 한무제 등 고대국가 중국 황제와 후궁들.
황제는 누구와 잠자야 할지 결정하기란 어려운 일.
하여, 양을 앞세워 따라가다가 양이 걸음을 멈춘 곳.

그 방에 있는 궁녀를 데려와 하룻밤을 보냈다.
그런데, 궁녀 하나가 방문 앞에 뿌려놓은 소금.
양은 항상 그녀의 방문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양이 소금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았던 궁녀.
황제를 그녀의 방문 앞에서 멈추게 했던 비결.
상점 문앞에 소금을 뿌려 손님을 끌려는 관습.

'소금 뿌리기는 이 고사에서 연유한 것.'
.............................................

오줌싸개 아이에게 키를 씌워 소금동냥 보낸 풍습.
'키'는 곡식의 돌이나 쭉정이를 골라내는 농사 기구.
키를 아이에게 씌우는 이유는 오줌을 싸지 말라는 뜻.

소금는 부패를 막고 나쁜 기운을 몰아낸다는 믿음.
아이가 소금 기운을 받아 잘 자라기를 바라는 마음.
남방 묘족 풍습에서 유래되어 우리나라에 정착한 듯.

옛부터 동아시아 해상왕국이었던 우리나라.

특히, '코레아'로 전세계에 알려진 고려시대.
외래 문명과 풍습들이 한반도에 유입되어 정착.
특히, 고려의 중요 교역국가인 중국 송나라 문화.

아울러, 고려 말 원나라 지배하에 있었던 80 여년.
사실, 동아시아 유일한 부동항을 보유했던 한반도.
천혜적인 입지조건때문에 옛부터 국제무역의 중심지.

그 덕분에 고대국가부터 선진문명을 누린 한반도.

선진문명을 누린 만큼, 성풍속도 그만큼 다양했다.
이조시대 쇄국정책과 유교관념 덕분에 보수적 양상
신라시대와 고려시대에는 개방적인 성풍속을 누린듯.

우리나라 소금 산지에서 쓰이는 말은 색다르다.
우리나라 고유의 언어인지 외래어인지 모를 만큼.
하여, 옛부터 소금장수는 외래문화를 많이 전파한듯.

이조시대에는 집안에만 갇혀 살아야 했던 여인들.
소금장수는 여인들에게 세상 이야기를 들려줬을듯.
말하자면, 오늘날 뉴스를 전달해주는 매스컴의 역활.




뱀사골 산장.



'뱀사골은 장마철에 집중 폭우가 잦은 곳.'

2003년 9월 13일 (토) 태풍 '매미'의 강타
태풍 매미는 12일 오후 8시~ 13일 새벽 3시
7시간 동안 450㎜ 폭우가 쏟아졌던.. 뱀사골.

'그로 인해 뱀사골 일대 차량통행 전면통제.'

뱀사골은 해마다 게릴라성 폭우 상습 다발지역.
피서철 야영장 침수로 야영객들 조난사고 빈번.
장마철에는 뱀사골 산장을 이용하는 것이 안전.

1990년대까지만 해도 뱀사골산장은 쌀이 넘쳤던 곳.
등반객들이 배낭의 짐을 덜려고 남기고 간 쌀 때문.
하여, 그 쌀로 일년을 충분히 먹고살았다는 산장지기.

'그만큼 여름철에는 피서 등산객이 붐볐던 곳.'

주능선에 대형 산장들이 들어서며 차츰 침체.
피서철만 피하면 호젓한 곳으로 변하게 되었다.
화엄사에서 출발하면 이곳에서 낭만적인 첫날 밤.

<연하천 산장, 치밭목 산장>과 더불어 맥주 판매.
민간 위탁 관리하는 산장 만이 맥주를 팔 수 있다.
산장이용료 5,000, 침낭 2,000원, 수용인원 80~100 명.

'화개재에서 북쪽 계곡으로 내려서면 뱀사골산장.'

화개장터 화개골 화개재와 연계된..뱀사골계곡 반선.
옛 소금장수들이 지리산을 넘나들던 물물상품 교역로.
등짐 소금장수들에 관한 전설이 얽힌 곳도 뱀사골이다.

'그 대표적인 전설의 고향이 뱀사골.. 간장소.'

뱀사골 산장은 토끼봉과 임걸령 사이
화개재 북쪽 계곡으로 200m 아래 있다.

천왕봉 쪽에서 오면 반야봉 갈림길을 지나면 화개재.
노고단에서 임걸령 지나 화개재가 뱀사골 가는 길목.

주능선에서 약간 아래로 내려간 위치.
뱀사골 계곡 끝나는 지점에 있는 산장.

보통 이곳에서 1박하면 반야봉 등반.
산 넘어 피아골 또는 노고단으로 하산
지리산종주 단골 산꾼들이 즐겨찾는 산장.

<연하천 산장>과 <노고단 산장> 중간.

조난에 대비해 꼭 알아야 할 긴급 대피처.
폭설에 갇히거나 폭우가 쏟아질 때 대피소.
이곳 위치를 모르면 비상시 답답할 때가 많다.

1978년 반야봉 산장으로 탄생
1989년 12월에 전화 개통된 산장.
산장 앞마당에 늘 넘치는 풍부한 샘물.

산장이 들어서기 전까지 야생동물 천국.
하여, 밤이면 산장 주변을 서성거린 맹수.
1990년대 뱀사골산장의 구조 명견 '검둥이'

그곳 찾는 등산객에게는 유순한 검둥이.
야생동물 맹수는 얼씬도 못할 만큼 맹견.
대를 이어 뱀사골 산장을 지켜왔던 구조견.

그곳을 찾던 옛 산꾼들에겐 추억의 대상.
언제부터인가 사라진.. 그곳 구조견 후손.
그 구조견은 산장을 찾던 산꾼들의 즐거움

'언제 어떤 사연으로 사라진걸까?'


.........
송영호.
.........


현재, 뱀사골 산장 관리인 송영호씨.
1996년부터 남원으로 내려간 고영국씨.
'민간구조대 대장' 남원 산악인 고영국씨.

그를 대신해 현재 송영호씨가 산장지기.

그가 십 년째 몸을 담고있는 뱀사골산장은 사설산장.
연하천, 피아골, 치밭목과 마찬가지로 개인 위탁 운영
뱀사골산장 원래 옛 관리인은 '남원의 산악인' 고영국 씨.

'그가 떠난 빈자리를 지키는 송영호씨.'

날마다 오르내리고 밤마다 이곳을 사수.
꿈속에도 눈구덩이 속을 허우적거릴 만큼.
밤과 낮은 물론 꿈속에서도 지리산 지킴이.

산을 오르면서도 그리워하게 하는 곳.
산을 내려올 때에도 돌아보게 하는 곳
그 산을 돌아서려던 발목마저 붙잡은 곳.

'무엇이 그의 발목을 붙잡은걸까?'

병풍처럼 애워싼 지리산 주능선.
노을에 물들어 보석처럼 빛날 때
그의 가슴 속에서는 파도같은 설렘.

'사랑하는 여인의 치마폭인듯.'

지리산 뱀사골 산장지기 송영호(49)씨.
어느 산꾼들처럼 지리산을 오르내리다가
장터목산장 산장지기로 눌러앉았던 1994년.

2년 후 뱀사골산장으로 옮겨 정착한지 12년.
서울이 고향인 그는 고 3 때 처음 산을 찾았다.
겨울 치악산에서 얼어 죽을 뻔했던 19살 첫경험.

운동화에 하얀 면장갑, 청바지차림으로 헤멘 눈속.
그후 주말이면 배낭을 메고 산으로 출퇴근한 가이드.

치악산에서 구조한 여인이 인생의 반려자.
결혼 후에는 제주도 한라산에서 구조대원.
그후부터 줄곧 그에게 종착역이 된 지리산.

산꾼들에게 지리산과의 첫만남은.. 애틋한 연정.
일반 등산객에게도 지리산 종주는 인생의 전환점
그러한 추억들이 지리산을 다시 찾게 하는 원동력.

먹고사는 일에 쫓겨 살다 문득 떠오르는 옛 추억.
다시 큰 맘을 먹고 종주에 나서면 묵직해진 뱃살.
도둑맞은듯한 세월에 가슴 뭉클해지기도 하는 곳.

'예전엔 나도 이 길을 뛰며 날아다녔는데..'

송영호씨에게 지리산과 첫만남은 1980년 봄.
당시엔 성삼재까지 도로가 닦이기 전이었다.
당시 들머리는 선택 여지가 없는 화엄사계곡.

용산역에서 비둘기호 밤기차를 타고 12 시간.
간이역마다 꼬박꼬박 서며 달려 가는 둥 만둥.
그래도 지리산 가는 길은 지루한줄 몰랐던 시절.

밤기차에서 배낭 맨 사람을 만나면 반갑던 시절.
어울려 이야기하다 술한잔 하다보면 동행 길동무.
그시절 칼바람 몰아치는 겨울에 뱀사골산장의 난로.

꽁꽁 얼어붙은 몸을 녹여주던 장작불 난로.
이곳을 찾던 겨울 산꾼들에겐 못잊을 추억.
그때부터 지금까지 이곳을 지켜온 송영호씨.

아침 7시부터 분주한 등산객을 보내고
산장을 치우고 매점을 관리하다가 보면
밤 9시에는 불을 꺼야만 하는 산장 규칙.

모처럼 반가운 지인들이 찾아오면
뒷방 촛불 아래서 술한잔 기울이고
세상 돌아가는 소식에 귀동냥을 한다.

산장지기이자 구조대원..송영호씨.

뱀사골에서 반야봉까지는 3km의 가파른 산길.
안개 낀 반야봉에서 조난당한 한 남자의 신고
밤 9시 짙은 어둠속에서 가까스로 조난자 발견.

자신보다 훨씬 덩치가 큰 그를 들쳐업고
때론 끌다시피 산길을 내려오면 아침 6시.
그런 우여곡절들은 어느덧 그의 일상 생활.

그에게 구조활동보다 힘든 애로사항은 목욕.
군불을 때는 부엌이라 목욕할 곳도 없는 산장.
하여, 한달에 한번 목욕은 하산 중 가장 큰 행사.

하지만, 그 불편함도 어느덧 익숙해져버린 그.
지리산의 넓은 품속을 누비고 싶어 들어왔던 그.
정작 10년간 천왕봉 근처에도 가보지 못했다는 그.

뱀사골산장을 비워둘 수 없기 때문이다.
산이 좋아 올라와 붙박이 신세가 된 운명.
붙박이 신세가 되었어도 마냥 좋은 지리산.

19살에 처음 산에 올라 죽을 뻔 했다는 그.
주말엔 배낭메고 정신없이 전국을 떠돌던 그.
그의 젊음과 미래를 사로잡고 만.. 뱀사골산장.

'그를 사로잡은 지리산의 매력은 무엇일까?'

국립공원이 산불방지를 위해 입산통제하는 봄.
얼레지꽃이 하늘 하늘 지리산의 숲을 뒤덮는 밤.
새순 돋는 밤에 홀로 마시는 맥주캔 하나의 행복.

쓰레기를 수거하려고 화개재에 오르면
가끔 등골을 쭈뼛하게 하는 멧돼지 떼.

앞장 선 우두머리와 마주치면 두렵지만
꽁무니 새끼 멧돼지들을 보면 귀엽단다.

“털 모양이 정말 보송보송 다람쥐 같아요.
어찌나 예쁜지, 봄날 새순처럼 여려 보여요.”

'뱀사골산장에서 사라진 추억의 명견들.'

그를 통해 듣는 옛 구조견들에 얽힌 추억담.
지금은 모두 전설처럼 사라져버린 옛 이야기.
그를 통해 떠오르는 옛 명견들에 얽힌 추억담.

산꾼이 밤길을 떠나면 연하천산장까지 길안내.
그리고나서, 혼자 되돌아오곤 했던 명견..졸리.
그러나, 등산객들에게 맹수로도 오해받던..졸리.

놀랜 등산객들의 신고로 결국 산장을 떠난 졸리.
졸리는 그의 친구이자, 조난자들의 구조견이었다.
졸리는 자신 아성에 도전한 삼순이에게 물려 운명.

그는 가끔 흑백사진첩을 꺼내 옛 친구들을 본다.
사진 작가가 찍어준 졸리, 삼순이 그리고 장군이.
뱀사골 산장을 거쳐 간 그의 옛 친구들의 사진 첩.

이제는 뱀사골산장 방문객도 그리 많지 않다.
예전엔 종주 산행의 중간 지점이라로 북적거렸다.
지금은 주능선에 대형 산장들이 들어서 한산한 편.

겨울에 눈에 젖은 옷을 털며 산장에 들어서면
따뜻한 차를 건네며 반기는 산장지기 송영호씨,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산장을 지키는 송영호씨.

'송영호씨가 한가할 때 즐겨 찾는다는 반야봉.'

노고단과 천왕봉 주능선에서 약간 벗어난 반야봉.
반야봉은 지리산에서 동떨어진 고도의 섬과도 같다.
견우와 직녀처럼,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의 상징.

뱀사골 산장은 위치상 반야봉을 닮아가는듯.
예나 지금이나 뱀사골산장의 지킴이 송영호씨
그가 있어 산꾼들의 발길을 당기는 뱀사골 산장.




뱀.



인류의 문화를 크게 나누면 뱀을 숭상하는 문화
뱀을 배척하는 서양 기독교 계통의 문화로 구분.
뱀을 숭상하는 문화를 전 세계에 퍼뜨린 풍이족.

9,900년전에 한인천제가 풍이족에서 나와
한국을 세우고 12제국을 묶었다는 수메르.

B.C 4241 풍이(風夷)의 후손인 적제축융 부인
오이 출신으로 항영 풍주(風州)의 배곡에 도읍.
전 국토에 부소나무(蘇 : 무궁화)를 심었다 한다.

하여, 소(蘇)를 성으로 , 이름은 소복(부해)
소 부해(蘇 復解)는 오늘날 소씨의 시조이다.

신라건국의 모체가 된 사로국 사량부 6부 촌장
그 중에서 '돌산 고허촌'의 소벌도리(蘇伐都利)
B.C 70년 소벌도리가 양산 나정에서 큰 알을 발견.

그 알에서 태어난 남자아이가 박혁거세.

신라는 풍이족에서부터 유래된 건국신화.
뱀은 신라를 비롯하여 풍이족의 토탬 상징.
신라시대 전설에는 뱀과 관련된 설화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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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에 관한 우리 민족의 관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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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뱀은 용과 함께 신라시대 토탬신앙의 대상.
농본국가인 신라에서는 뱀을 영물로 여겼던 풍습.
12 수호신으로 보면 여섯번 째로 용(辰) 다음이 뱀.

'사(巳)' = '식물이 싹터 한참 자라는 절기'.
음력 4월.. 시간은 오전 9시에서 11시 사이.

뱀은 영특한 동물이고 사람에게 먼저 해를 끼치지 않는다.
뱀은 용처럼 영험한 동물이라 하여 옛날엔 죽이지 않았다.
그러나, 뱀이 정력에 좋다고 알려지며 잡아 먹기 시작했다.

뱀 쓸개가 눈을 밝게 한다는 말은 본초강목(本草綱目)에 있다.
간혹 죽음 직전의 폐병 환자가 뱀을 고아 먹는 경우는 있었다.
그것은 이왕 죽을 사람이 마지막 수단인 독용법(毒用法)인 셈.

독을 조금씩 사용하여 병을 치료하는 최후의 비술인 치료방법.
뱀을 먹고 회춘했다는 사람이 있지만 알고보면 매우 위험한 일.
그것은 몸이 늙어 말을 듣지 않을 때 몸 속에 독을 넣는 비상책.

뱀은 중국에서 신성한 동물
물의 신를 뱀이라고 여겼다.

일본을 건국한 천조대신(天照大神)의 동생 소전명존(素箋鳴尊)
머리 여덟개 뱀을 칼집에 새겨 나라를 지키는 보검으로 삼았다.
이것이 일본 3대 국보의 하나로 알려져 있는 천총운검(天叢雲劒).

'희랍신화의 최초 인간은 케크로스라는.. 뱀.'

헤브라이 신화의 첫 여자 에와도 뱀 이었다 한다.
에와는 뱀과 같이 어울렸고 성행위도 하는 관계였다.
이는 성서에 기록된 뱀과 이브의 관계에서도 알 수 있다.

즉 태초의 뱀은 서서 다녔고 지혜로왔으며 이브와 어울린 상대.
그것은 반대로 말해 이브와 뱀이 한 종족이었다는 반증이 된다.
고구려의 천왕지신총 벽화에는 인두사신상(人頭蛇神像)이 있다.

삼실총 벽화 중 교사도(交蛇圖)에도 뱀은 지신으로 묘사.
신라 미추왕릉, 노동동 고분의 토우에도 뱀은 신성한 존재.
뱀이 사악한 존재로 묘사된 흔적은 치악산 상원사의 전설뿐.

옛날에 가난하지만 착한 나무꾼이
꿩 부부와 새끼를 뱀으로부터 보호.

뱀이 꿩 새끼를 잡아먹으려는 순간
나무꾼의 막대기에 맞아 죽었던 뱀.

그 일이 있고 난 다음날 아침 나무꾼
나무를 팔고 돌아오다가 밤을 맞는다.

어둠 속 불빛 비치는 집에 들어가
하루밤 묵어가기를 청했던 나무꾼.

주인 여자는 따뜻한 저녁과 술을 나무꾼에게 대접.
술에 취한 나무꾼은 여인의 품속에 안겨 잠이 든다.
뱀으로 변해 죽은 남편의 원수를 갚으려는 그 여인.

뱀을 쫓으려 안간힘을 다한 나무꾼.
그때였다. 갑자기 종소리가 들렸다.
땡땡땡땡, 자지러지게 울리는 종소리

그 바람에 뱀이 도망쳐 목숨을 건진 나무꾼.
종소리 울린 곳을 찾아가니 죽어가는 꿩 부부
나무꾼을 살리려고 몸으로 부딪쳐 종을 울린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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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상서로운 터에 세운 사찰이 상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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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재총화>에 수록된 뱀의 설화-

진광사(晉光寺)의 승려가 아내를 숨겨놓고 남몰래 출입한다
사후 뱀으로 환생해 낮에는 독에 숨었다가 밤엔 아내와 동침
그 사실을 안 원님은 뱀을 궤짝에 넣어 강물에 버렸다는 설화.

수도자로서 감래하기 어려운 애욕을 경계하려는 전설.
이밖에도 게으르거나 욕심이 많은 스님은 뱀으로 환생.
불교가 전파되기 전 농본국가 신라에서 뱀을 귀한 영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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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혁거세 왕릉의 비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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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경주시 탑동에 있는... 다섯 봉분의 박혁거세 왕릉.
<오릉>은 <박혁거세왕, 왕후, 남해왕,·유리왕, 파사왕>의 묘.
전설에는 박혁거세가 승천하며 하늘에서 찢어진 5 시신의 묘.

'<오릉>이 사실일까? 아니면, 전설이 사실일까?'

이 무덤을 뱀이 지켰다고 해서 사릉(巳陵)이라고도 한다는 묘.
승천 2일후 땅에 떨어진 5조각 시신의 합장을 뱀이 막았다는 묘.
신라 창건 61년에 왕후도 뒤따라 죽었지만 부부합장을 못했던 묘.
커다란 뱀이 박혁거세 부부의 합장을 못하게 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다섯 덩이의 몸을 다섯 능에 각각 장사했다.
이름을 사릉(蛇陵)이라고 했다.'
-삼국유사 기이(紀異) 편의 기록 -

뱀은 풍요와 다산을 상징하는 신화적 동물.
대지를 배로 기어다니고 허물을 벗어 놓는 뱀.
몸 전체가 남근을 닮아 다산과 정력의 상징인 뱀

'박혁거세 왕릉의 비밀 열쇄는 뱀이 아닐까?'

하늘에서 산산조각 흩어져 쏟아져야 풍요해지는 것. = 비.
뱀의 허물처럼 흩어져 있어야 수확을 많이 거두는 것. = 씨앗.

그런데 하필이면 왜 5 조각을 나눠 묻었던 것일까?

그것은 바로 농업국인 신라의 5 대 곡물을 상징하는 오곡(五穀).
곡모신(穀母神)이 날려보낸 비둘기를 쏘아 주몽이 얻은 오곡 씨앗.
단군이 죽은 후 산신으로 모시었듯, 박혁거세는 농경신으로 모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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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월 삼짇날의 풍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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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력 3월 3일을 <삼월 삼짇날> 3월의 첫 뱀날이란 절기.
신라시대부터 이조로 들쑥날쑥 이어져 내려온 풍속이다.
삼짇날은 강남제비가 돌아오고 뱀이 동면에서 깨어나는 날.

'벌, 나비나 새도 나타나는 날.'

경북에서는 이날 뱀을 보면 운수대통,
흰나비를 보면 그 해에 상을 당하게 되고
노랑나비를 보면 집안이 길하다고 여긴다.

이날 장을 담그면 맛이 좋다고 하며 집안 수리를 한다.
아울러 농경제(農耕祭)를 하여 풍년을 기원하기도 한다.
전국 한량들이 모여 편을 짜서 활쏘기와 닭싸움을 즐긴다.
사내 아이들은 물이 오른 버드나무 가지를 꺽어 피리를 분다.
계집 아이들은 대나무쪽에다 풀을 뜯어 각시인형 놀음을 한다.

이조 후기에 간행된 <동국 세시기>에 의하면 이날은 화전 먹는날.
진달래꽃을 따다가 찹쌀가루에 반죽해 만든 둥근 떡이 화전(花煎)

진달래꽃을 녹두 가루에 반죽한 전도 화전이라고 한다.
이날은 시절음식으로 제상을 올리고 그 음식들을 즐겼다.

녹두 국수, 수면(녹두가루를 붉게 물들여 꿀물에 띄운 음식)
팥고물 넣은 방울떡, 다섯 색깔 떡을 3~5개씩 구슬처럼 꿴 산떡.
찹쌀, 송기와 쑥을 넣은 고리떡. 쑥잎을 찹쌀가루에 섞어 찐 쑥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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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은 중세 유럽, 아라비아, 남아프리카 반투 같은 곳에서는 길조의 동물.
폴란드 슐레지엔 지방에서는 행운과 불행의 조짐, 노르웨이에서는 불길함.
유럽에서는 재화와 보물 지킴이, 이스라엘에서는 에덴동산 뱀을 악의 상징.

뱀은 사람에게 혐오감을 주지만 사람을 습격하는 예는 드물다.
독이 없는 뱀은 작은 새나 그 새끼 그리고 새의 알을 포식하지만,
또한 농림업에 큰 피해를 주는 쥐류를 잡아먹기 때문에 유용하다.
뱀은 애완용으로, 또는 가죽세공의 재료로 중요하게 사용되고 있다.
독성분은 의약품으로 이용되고, 몸은 옛부터 민간 약용으로 쓰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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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사뱀의 전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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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에서 뱀이 나쁘게 인식된 탓은, <상사뱀>.
뱀은 떠돌아 다니는 남성, 즉 한량으로 비유한다.
정숙한 부인을 유혹해 애욕의 노리개로 만드는 뱀.

즉, 상사병 남자는 사모하는 여인의 노리게로 환생.
상사뱀이 되어 그 여인의 몸속으로 들어간다는 전설.

가지밭에 숨어 가지로 둔갑하거나 오이밭에선 오이로,
고추밭과 가지밭에서는 고추와 가지로 변신하고 숨어서
사모했던 여인이 밭으로 들어오면 음부로 들어간다는 뱀.

한번 들어간 뱀은 평생 그 여인의 신랑이 되고 만다는 전설.
자신을 죽도록 애태웠던 여인을 못 견디게 애태우며 앙갚음.
꿈속에서도 그 여인이 자신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한다.

그로 인해 색시를 빼앗긴 남성은 상사뱀과 철천지 원수가 된다.
그런 상사뱀 전설로 인해 뱀 자체에 대한 나쁜 인식이 심어졌다.
상사뱀 전설는 불교에서 '뱀은 애욕의 화신'이라 인용된데서 비롯.

<법화경>은 뱀의 형태를 남근의 형태나 성적 기교로 해석한다.
즉, 뱀을 여성 애욕의 근원으로 여겨 부정적인 불심으로 여긴다.




용.



전설 속에 등장하는 용은 대개 몸집이 크고
박쥐같은 날개를 가졌으며 입에서 불을 뿜고
가시가 돋은 꼬리를 단 도마뱀 또는 뱀의 형상

드래곤(dragon)은 그리스어 드라콘(drakn)에서 유래
이 말의 원래 의미는 큰 뱀 또는 바다뱀을 의미했다.
신화 속에 등장하는 용은 본질적으로 뱀의 형상이다.

'일반적으로 중동 지방에서 뱀과 용은 악의 상징.'

예를 들면 이집트의 신 '아페피'는 암흑세계의 큰 뱀
그리스와 로마, 극동 지역과 중국에서는 유익한 존재
중국의 용은 강 호수 바다에 살며 하늘을 날아다닌다.

중국에서 용은 '비의 신'이며 선행과 풍요를 상징.

BC 6세기부터 중국에서는 용탈을 쓰고 춤추며 기우제.
고대 중국의 창조 신화에는 4가지 유형의 용이 있었다.

첫째는 하늘을 지키는 천룡(天龍).
둘째는 복장룡(伏藏龍),
셋째는 수로를 다스리는 지룡(地龍)
넷째는 비바람을 다스리는 신룡(神龍)

민간신앙에서는 지룡과 신룡이 중요하게 여겼고,
바다에서 비를 내리고 어부를 보호한다고 믿었다.

일반적으로 용은 비늘이 있고 몸이 뱀처럼 생겼으며
뿔, 발톱, 다리 4개, 마력적인 눈이 있는 것으로 묘사.

용은 모든 동물들의 왕으로 여겨졌으며,
용의 형상은 곧 제국의 신성한 힘을 상징
역대 고대 중국 황실의 문장으로 사용되었다.

용은 중국문물과 함께 한반도 일본으로 전해졌으며
자유자재로 커지거나 보이지 않는 존재로 묘사되었다.
중국과 우리나라 일본에서 용은 하늘을 날수 있는 존재.

'용은 도교 사상에 등장하는 신성한 존재.'

도교사상은 진시황의 진나라, 산동지방 제나라,
하북 지방 연나라, 호북, 안휘, 하남 일부지방
혼란기 공자에서 노자와 장자로 대표되는 사상.

'한반도의 용은 도교 사상에서 유래된 듯..'

동양인에게 있어서 용은 뱀을 신격화한 상상의 동물.
용을 종족 상징으로 여긴 우리나라 옛 조상 '풍이족.

뱀을 조상으로 여기는 풍이족
한인천제를 배출해 한국을 창건.
영원불사 뱀을 신성하게 여겨 용.

풍이족은 성씨를 사(巳자)로 표현한다.
'인류의 조상'은 뱀이라고 여기기 때문.

한인천제는 9,900년 전에 한국(桓國)을 세우고
구한족(九桓族) 지도자는 한인천재 파(巴)라 했다.
사(巳)에 획을 하나 그어 만든 파(巴)자가 곧 용(龍)

'구한족 대표 사(巳)들이 모여 선출한 파(巴).'

한인천제 이름을 안파견(安巴堅)이라고 했다.
안파견에 들어 있는 파(巴)는 용을 뜻하는 문자
이후 풍이족은 12제국을 하나로 묶어 한국을 설립.

'한국은 단군조선보다 수천년 이전의 고대국가.'

<晉州蘇氏 족보서문>에 한인천제를 적제(赤帝)라 표기.
그가 남방에서 일어나 불을 관장했으므로 적제라 한것
적제(赤帝)의 제(帝)는 풍이족의 통치자라는 의미이다.

후대에 와서 적제(赤帝)를 적룡(赤龍)이라고 불렀다.
적제를 모방한 지나족 시조 황제(黃帝)가 곧 황룡(黃龍)
이를 본받아 진시황은 백룡을 뜻하는 백제(白帝)라고 했다.

진을 멸망시킨 한고조는 자기를 높여 '적제의 아들'.

용이 땅으로 내려오면 개구리나 지렁이,
개구리가 되는 용을 와룡(蛙龍)이라 한다.
와룡이 개구리가 된 사람이 북부여 금와왕

'금와왕(金蛙王)은 금개구리 왕이란 뜻.'

후백제를 세운 견훤은 지렁이 아들,
지렁이는 북두칠성을 상징하는 동물.
그러므로 견훤은 칠성의 자식이 된다.

용이 왕이 되고,
개구리가 왕이 되고,
지렁이가 왕이 되는 것

'신화적 변용'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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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룡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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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황룡사는 동양 최대의 사찰로 현재 복원되고 있다.
절터는 불국사의 10배 2만평, 에밀레종보다 4배인 100톤.
9층 목탑, 솔거의 그림..지금까지 모두 불타 소실된 유물들.

신라 진흥왕 14년 (553년) 반월성 동쪽에 궁궐을 지으려 할때
궁궐터 안 작은 연못에서 솟은 황룡이 하늘로 승천하는 바람에
이 곳에 절을 지어 나라를 편안하게 하려 황룡사를 짓게 되었다.

황룡사 앞에는 분황사,뒤에는 황복사
중앙 대웅전 금동장륙상 좌,우는 설법전
설법전 서쪽에 반월성,안압지 궁궐이 있었다.

황룡사 안에는 황자가 붙은 절이 9개.
이곳 마을 이름도 구황동이라고 한다.

당간지주와 치미는 박물관과 절터에 남아 있다.
황룡사의 웅장함은 분황사에서 보면 알 수 있다.

몽고의 3차 침략으로 하나씩 불타 없어졌고
고려시대 고종 25년에 완전히 불타 없어졌다.

황룡사 대종은 규모가 어마어마해서
그 위엄이 웅장해 몽고가 탐을 내어
배로 동해를 통해 몽고로 옮기는 중
이 대종을 바다속에 빠뜨리고 말았다.

그당시 지금 기림사와 감포고개까지 바다였다.
경주 보문단지 한화콘도 뒷땅에서 조개껍질 출토.
보문단지도 범람한 바닷물이 들어왔을 것으로 추정.

경주 한화콘도 지하 700m 암반수는 염분 온천수.

동해바다 속 대종은 지금 어디 있는지 알 수 없다.
기림사 마을에서는 비가 많이 오거나,바람이 불면
대종이 우는 소리가 마을까지 들려온다고 전해온다.

"웅 ~ 웅 ~ 웅 ~ " "웅 ~ 웅 ~ 웅 ~ "

경주에는 전설을 간직한 3개의 종이 있다.
성덕대왕종(에밀레종),황룡사대종 ,박정희종

박정희 종은 1970년 유신시절 '한진그룹 조중훈 올림'
글자가 세겨진 종이 불국사에 걸려 있는데 항상 6시5분.
약간 기울어져있다가 10.26 사태 이후 6시 방향이 되었다.

종을 내려 조중훈이란 이름을 지웠기 때문.

황룡사는 삼국을 통일한 통일신라 궁궐터 같다.
'뱀이 승천하면 용이 된다.'는 믿음은 불교문화.
황룡사의 황룡은 지금 중국 황하강을 상징하는 듯.

'고대 신라인의 용에 대한 관념을 알것 같다.'

하늘에서 쏟아지는 비는 곧 '신의 정기.'
대지를 촉촉하게 적시고 폭포를 이룬다.

폭포는 소에 꽂히듯 고였다가 내를 이루고
바다로 흘러가 승천하는 것을 뜻하는 용(龍).

민심은 곧 천심이라는 말은
물이 흘러가는 이치를 뜻한다.
하여, 용의 눈은 곧 '왕의 혜안'.

왕의 혜안을 갖지 못한 폭군 통치자는
승천하려다가 결국 죽고마는 이무기 운명.
왕은 하늘에서 내린다는 뜻이 담겨있는 듯.




파라오.



'큰 집'이라는 뜻의 이집트어peraa에서 유래.
고대 이집트 왕의 칭호로 원래는 왕궁이란 뜻.

신왕국시대(제18왕조부터 시작, BC 1539~1292)
이집트 왕을 존경하는 뜻의 이름으로서 쓰였다.
제22왕조(BC 945경~730경) 때는 존칭 형용어구

파라오가 공식 칭호로 쓰인 적은 한번도 없었지만
오늘날에 와서 고대 이집트 모든 왕을 일컫는 총칭.
공문서에 적힌 이집트 왕의 정식 칭호는 모두 5가지

각 이름 앞에는 '호루스', '두 귀부인', '황금 호루스',
'상(上)이집트와 하(下)이집트의 왕이며 두 땅의 주인',
4가지는 이집트의 왕 파라오가 대관식을 할때 받는 이름.

'태양신 레(Re)의 아들이며 왕관의 주인' 칭호 중 하나
장차, 이집트의 왕이 될 파라오가 태어날 때 받는 이름.

이집트인들은 파라오가 신이라 믿었다.
하늘의 신 호루스와 태양신인 레와 아몬
하여, 파라오가 죽은 후에도 여전히 신격화.

호루스의 아버지 = 죽은 자들의 신 = 오시리스

파라오는 그 아들 또는 딸에게 권력과 지위를 승계.
파라오는 대를 이어 신통력을 계승한다고 여긴 때문.
예를 들면, 우라에우스(파라오 왕관에 달린 코브라 문양)

적들에게 불길을 토해낸다고 이집트인들은 믿었고,
전쟁터에서 수천 적을 무찌를 수 있다고 여겼으며
모든 것을 알고 자연과 땅을 지배한 전지전능한 신.

파라오는 신성한 통치자로서 신이 주신 질서(ma'at).

또 이집트 땅의 대부분을 소유하고 그 사용법을 지시했으며,
백성의 복지와 행복을 책임 맡았고, 신하들에게 정의의 사도.
파라오는 최고의 권위자로서, 그 포고령으로 나라를 다스렸다.

그러나 나라를 공정하게 다스리기 위해서는
파라오도 남에게 책임 일부를 위임해야 했다.
가장 지위가 높은 보좌관은 와지르(wazr)였다.

와지르는 여러 가지 의무가 있었지만,
그중에서도 재판장으로서 재판을 담당
국고를 관리하는 우두머리로서 재정책임

모든 기록을 감독하는 것이 최우선 의무.

중앙정부 밑에서 파라오의 뜻은 노모스(州)를 통해 집행.
상이집트와 하이집트는 노모스라는 행정구역으로서 구분.

파라오는 신과 동일시되기에
다른 사람들과 떨어져 살았다.

신하들은 파라오를 신성한 왕으로 높이는 예절.
예를 들어 파라오 앞에서는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파라오가 죽으면 이집트식 장례를 거행했는데,
내세에 신으로 살 수 있다는 이집트인의 생각.

그러나, 이집트인들은 왕이 인간 임을 안듯.
파라오의 업적에 따라서 그를 평가하고 비판.

민중은 파라오를 해치려는 음모를 꾸몄고,
무능한 파라오는 왕위에서 몰아내거나 살해.
그러나 새로운 파라오는 신성한 통치자로 인정
일정한 의식과 전통에 의해 왕위에 오른 파라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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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파라오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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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이 잦아지며 강력한 왕권이 필요했던 고대국가.
모계사회 여성 통치자 무당이나 여왕은 사라져간다.
인류 문명 발상지 이집트 통치자는 태양신의 <아들>

고대 이집트의 여성 파라오.. 하쳅수트.

이집트의 수도 카이로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룩소르
이집트 파라오들의 무덤 피라미드와 스핑크스 밀집 장소.
그 중 룩소르 서쪽, 왕가의 계곡 뒤편에 있는 거대한 신전.

사자들의 신전 ‘데이르 엘바하리’,
이집트 왕 장례 신전 하쳅수트 무덤.
(BC 1503~1482 재위) 여성 파라오 무덤

하쳅수트가 아버지 투토모스 1세를 기리는 신전.
그녀는 스스로 신전에서 제례를 관장하는 제사장.
이집트 최초의 여성 파라오이자 제사장 하쳅수트.

처음에는 남편을 잃고 의붓아들의 섭정.

이집트의 파라오 가문은 혈통유지를 위해 근친혼
그녀는 아버지 첩의 아들이자 배다른 오빠와 결혼.
병약한 투토모스 2세는 하쳅수트와 결혼후 곧 운명

하쳅수트와 투토모스 2세 사이에 딸 네페루레

차기 파라오는 투토모스 2세의 후궁 소생 투토모스 3세
그때 투토모스 3세는 불과 10세라 그녀가 20 세에 섭정
섭정이 된 얼마 후 그녀는 내친 김에 파라오로 등극한다.

관례상 여성은 파라오가 될 수 없었던 이집트.
그녀는 남자 옷을 입고 인조 수염을 달고 통치.
투토모스 3세는 그녀의 딸 네페루레와 결혼했다.

하쳅수트의 통치기는 이집트 신왕조의 전성기.

그녀는 상이집트와 하 이집트를 통합하고 신권과 왕권,
군사권 제사장까지 모두 휘두르는 강력한 파라오가 된다.
그녀는 교역에 관심이 많아 여러나라에 상인 군단을 파견

'그녀 무덤 벽화에 전설의 나라' 푼트와 교역한 그림들.'

그녀는 신전 데이르 엘바하리 뿐만 아니라
이집트 곳곳에 거대한 건축물을 건설했다.

카르낙 아몬 사원에 세워진 오벨리스크,
룩소르와 카르낙 사이의 성벽과 중간 성소,
벤하산 암벽사원, 수단 북부 누비아 부헨 사원

엄청나게 화려하고 거대한 건물들이 이 시기에 건축
그녀의 파라오 권력이 얼마나 강력했는지를 말해준다.

그리스 신화 속에 등장하는 여신'헤라.'
하늘의 신 바람둥이 제우스의 정실부인.
헤라 여신의 모델로 추정되는 '하쳅수트'

.................헤라 여신.........................
크로노스와 레아의 딸이며, 제우스의 정실부인이자 누이
로마신화 주노(Juno)에 해당하며 올림푸스 12신 중 하나.
여성의 보호신이며 결혼과 출산을 관장했던, 질투의 여신

제우스의 연인들은 물론이고 자식들까지 심하게 박해.

무지개의 여신 이리스를 시녀로 거느린 여신의 왕.
헤라의 상징은 성수(聖獸:암소), 성조(聖鳥:공작새)

'결혼의 계절' 6월 June은 여신 주노의 이름.
제우스(주피터)의 아내로, 그리스에서는 헤라.
헤라는 신성한 결혼과 가정을 수호하는 신이다.

'순결한 결혼과 화목한 가정의 상징' 공작새.

그녀는 해마다 지하세계 입구인 스틱스 강에서 목욕.
영원한 젊음을 회복했지만, 순탄치 않았던 결혼생활.
무수한 여신들과 관계한 남편 제우스의 바람기 때문.

제우스는 헤라와 결혼 전에도 수많은 여신들과 관계
헤라와 결혼한 후에도 무수한 여신과 여인들을 농락

그것도 성에 차지 않아 트로이 왕자였던 가니메데스
그를 시동으로 삼아 동성애를 즐겼기에 분노한 헤라.
불륜의 연적들을 그냥 내버려 두었을 리가 없는 헤라.

제우스와 관계만 맺었다 하면 모진 고초를 겪는 신세.
불륜의 여인이든 자식이든 그리스에서 이집트로 추방.
제우스 사생아 헤라클레스는 평생 모진 고초를 겪는다.

질투로 무장한 헤라 여신은 곧 모계사회의 상징.
부계사회였던 초기 그리스 사회에서는 낯선 여신
원시, 모계사회에서는 남자도 여러 여자와 성관계

여자 역시 도덕적 가책 없이 여러 남자와 성관계

이 시대에는 아버지가 누구인지를 모르는 많은 자식들
한 어머니를 중심으로 혈족을 형성한 시기가 모계사회
제우스를 가장으로 하는 올림포스 신전은 곧 부계사회

올림푸스 신전은 최초 부계사회 정착의 상징.

헤라도 본래는 모계사회에서 '가슴이 넓은 지모신.'
제우스와 결혼한 후 질투의 화신으로 둔갑한 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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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의 마지막 파라오는 클레오파트라.
로마에게 점령당한 후 39세에 독사로 자살.
이집트 파라오가 로마 노예로 살수 없기 때문.

클레오파트라는 곧 '모계사회 종식의 상징'.

서양에서는 예수가 탄생한 시점 전후.
동양에서는 석가모니 탄생 시점 전후.
모계사회에서 부계사회 전환기였던듯.

'즉, 철기시대가 곧 부계사회 출발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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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라오'의 저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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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탄카멘' 파라오의 황금 마스크 = 파라오 저주
기원전 1343년 이집트 18 왕조의 아메노피스 4세
키야 왕비로부터 태어나 10세에 파라오, 20세 사망.

왕가의 계곡(Valley of Kings)에 묻힌 채
사망한 이후 3245년간 잊혀졌던 투탄카멘

1922년 10월 26일 영국 카르나본 경
고고학자 카터에 의해 미이라로 발굴.

파라오의 관에는 일반적으로 적힌, 저주의 글귀.
'사자의 안녕을 방해하는 자에게 저주가 있으라'
이 글귀가 소위 파라오의 저주로 비약된 것이다.

파라오 저주의 첫 희생자는 카르나본 경.

미이라가 있던 방을 개봉(1924년 2월 17일)한지 6주후
1924년 4월 5일에 카르나본 경은 모기에 물려 죽고만다.
그런데, 투탄카멘의 얼굴에 나 있던 상처와 똑같은 부위.

카르나본 경이 죽을때 카이로의 전등이 이유없이 꺼졌고
영국에 있던 카르나본 경의 개도 경련을 일으키며 죽었다

이후 카터 및 카르나본 경과 관련된 사람들
연달아 이유를 모르는 의문의 죽음을 당했다.
발굴작업에 참여한 아서 메이스(미국 고고학자)

미국의 유명한 민간 금융업자의 아들인 조지 J.
굴드도 무덤으로 안내된 다음날 고열로 죽었다.
영국 실업가 '조엘 울'도 무덤을 다녀와 죽었다.

투탄카멘의 미이라의 시체를 X선 촬영한
사진기사 아치볼드 더글라스 라이드도 사망.
결국, 1929년까지 카나본의 부인과 이복 형제,
카터의 비서, 파라오 후계자라던 이집트 왕족들

약 30 명이 무덤을 다녀온 후 세상을 떠났다.
그 중에는 자살하거나 살해된 사람들도 있었다.

여기서 끝나지 않았던 '파라오의 저주'

1969년 투탄카멘 무덤 발굴 대원 중 유일한 생존자
아담슨이 영국 텔레비젼 방송에 출연해 큰소리 친 말.

"나는 한 순간도 파라오의 저주라는
터무니 없는 전설을 믿어본 적이 없다"

그러나 그는 출연을 마치고 돌아가던 중 큰 교통사고
하루만에 그의 부인이 죽었고 그 아들이 등뼈를 다쳤다.

하여, 시작된 파라오의 저주에 대한 과학적인 설명
고대 이집트인들이 독약에 관한 전문가였다는 사실
피부에 스며들면 치명적인 독을 묘 안 벽에 칠한듯.

전 세계를 떠들썩하게 했던 파라오의 저주

투탄카멘 파라오의 무덤발굴과 관련된 사람 1천5백명
그중 10년 이내에 사망한 사람은 21명 뿐이라고 한다.
자연사이거나 발굴과 관계없는 죽음, 또는 우연한 죽음.

특히 무덤을 최초로 개봉한 카터는 66세 나이로 자연사.
'파라오의 저주' 전설은 카르나본 경이 꾸민것으로 판명.
파라오 발굴자금의 조달을 위해 쓴 런던 타임즈와 기사보도

독점계약권을 체결하고 돈을 지원 받았던 카르나본 경.
그 기사를 쓰고 죽자 언론들이 그의 죽음을 부풀려 보도

'사자의 안녕을 방해하는 자에게 저주가 있으라'
'왕의 이름을 알리는 자에게 복이 있으라'라는 글귀
투탄카멘은 자신의 무덤이 영광스럽게 개봉되길 바란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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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라미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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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각형 토대에 측면은 3각형을 이루도록
돌이나 벽돌을 쌓아 올려 한 정점에서
만나도록 축조한 기념비적인 구조물.

때론 측면이 사다리꼴이고
꼭대기가 평평한 것도 있다.

여러 시대에 걸쳐 이집트·수단·에티오피아·
서아시아·그리스·키프로스·이탈리아·인도·
타이 멕시코 남아메리카, 태평양의 몇몇 섬

이집트, 중앙 아메리카, 남아메리카가 가장 유명.


고대 이집트의 피라미드는 장제용(葬祭用) 건축물.
고왕국 창건 때부터 프톨레마이오스 시대 종말까지
2,700년 동안 계속 지어졌던 피라미드 건축물 시대.

피라미드 전성시대는 제3왕조부터 제6왕조까지
<BC 2686경~2345> 이 기간에 왕묘의 표준적 형태
독립 구조물이 아니라 건축물 복합체의 일부였다.

어쨌든 고왕국 시대 건축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피라미드는 무덤을 포함하거나 무덤 위에 세워지며
사막 높은 곳에 구획된 경내에 자리잡고 있다는 점.

피라미드 옆에는 장제신전이 있으며
둑길을 따라 내려가면 흔히 계곡사원

이 계곡사원은 경작지 끝에 지어졌고
운하를 통해 나일강과 연결 되었던듯.

이집트에서 약 80기 피라미드가 발견되었으나
많은 수가 폐허더미로 변했고 보물은 이미 약탈

피라미드의 원형은 왕조시대 초기부터
이집트에 알려져 있던 무덤형태 마스타바.

마스타바는 꼭대기가 평평한 4각형 구조물
지하 매장실로 내려가는 통로가 있는 특징.

제3왕조의 2대 왕인 조세르
임호테프를 건축가로 채용해
처음으로 돌 마스타바를 건축.

높이는 8m였고 각 변의 길이가 63m인 정4각형
4면 바닥이 꼭대기로 갈수록 좁아지는 구조물
조세르가 지은 최초의 마스타바는 6층 구조물.
높이 60m, 밑변이 가로 120m, 세로 108m 계단형

사카라에 있는 이 기념물은 계단식 피라미드
이집트에 석조건물 중 가장 오랜 것인듯 싶다.
하부는 지하 복도와 방으로 이루어진 복잡한 구조

가장 중요한 부분은 깊이 25m, 너비 8m의 중앙 통로.

그 아래에 아스완산(産) 화강암으로 만든 지하 매장소.
이 계단식 피라미드는 길이 544m, 너비 277m 거대한 벽
왕이 사후 쓸 물품을 놓아두던 다른 석조 구조물들 잔해.

사카라에서 남쪽으로 조금 떨어진 다슈르

'뭉툭한', '잘못된', '굴절', '장사방형'(長斜方形)
특이한 모양의 구조물은 엄격한 4각뿔 무덤으로 발전

제4왕조 스네프루가 세운 피라미드
각 변의 길이가 188m, 높이는 98m.
특이하게도 중간 위부터는 이중 경사

아래쪽이 위쪽보다 더 가파르고 4각뿔 형태.
초기의 구조체가 점점 확장되어 거대한 8단.
이후 테라스를 돌로 메워 만든 연속된 경사면

마지막으로 구조물 전체를 뒤덮은 평탄한 석회암층
기하학적으로 순수한 4각뿔 형태를 만들어낸 피라미드
많이 파괴?지만, 지금은 70m 높이의 3단 피라미드 모습.

4각뿔로 설계, 시공된 최초의 묘는 다슈르에 있는 석조
'북피라미드'로, 일설에 의하면 스네프루가 세운 것인듯.

밑변의 길이는 약 220m, 높이는 104m.

이집트의 피라미드 중 가장 큰 피라미드.
기자에 있는 쿠프·카프레·멘쿠레 등등.

아메리카의 피라미드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
중부 멕시코의 태양 피라미드와 달 피라미드,

치첸이트사에 있는 카스티요, 그밖에 안데스 산맥의 촌락
잉카 문명과 치무 문명의 유적들인 아메리카의 피라미드들.
보통 흙으로 쌓아 표면에 돌을 입힌 것으로 전형적 계단식

태양신전 피라미드는 밑변이 가로 220m, 세로 230m,
한 변이 길이가 230m인 정4각형을 이룬 기자 피라미드
(쿠푸왕이 축조)에 견줄 만한 규모의 피라미드 건축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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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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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라미드 스핑크스 낙타는 이집트의 상징.
고대부터 동서양을 누빈 아라비아 상인들.
낙타가 있었기에 실크로드 사막을 누볐다.

황하강 이북과 중국 서부를 잇는 실크로드.
그곳 상인들이 짐을 싣거나 타고다닌 낙타.
털, 낙타젖, 가죽, 고기 등을 얻었던 낙타.

단봉낙타는 등에 혹이 1개, 쌍봉낙타는 2개.

낙타는 다리가 길며,
부드럽고 넓은 발가락 2개
사막이나 설원을 누빈 낙타.

단봉낙타는 인도와 중동지방, 북아프리카가 원산지.
쌍봉낙타보다 다리가 길고 털이 짧으며 몸이 가볍다.
어깨 높이가 2m 정도이며 흰 것부터 검은 것까지 색깔

쌍봉낙타는 중앙아시아 산간지역에서 자생
혹까지의 높이가 2m 정도이며 대부분 갈색
겨울 모피는 털이 무성하고 성격이 온순하다.

낙타는 길들이면 발정기 등에 특히 잘 뛴다.
귀찮으면 침뱉으며 발로 차거나 물기도 한다.
낙타는 가시 식물이나 건초 먹이로도 살아간다.

낙타는 혹에 저장한 지방이 사막에서 비상식량.
며칠 동안 물을 마시지 않고도 살 수 있는 낙타.

낙타의 몸에 있는 수분은 서서히 없어지며,
100ℓ정도 마신 물로 10분 안에 기력을 회복.
실크로드를 오간 아라비아 상인들의 수송수단.

'고려 초 글안족이 왕건에게 선물했던 낙타.'

개성상인이 밑바탕 지지 세력인 왕건.
글안족과 동아시아 실크로드 패권다툼.
왕건은 동아시아 해상무역 패권을 장악.

'코레아'는 동아시아 해상무역 왕국.

오늘날까지 '코레아'는 한반도의 상징.
이조시대 새국정책으로 사라진 '코레아.'
'88 서울 올림픽' 유치로 옛 영광이 부활


덧 말.

산청 가락국 마지막왕의 피라미드 구형왕릉.
베일 속 수수께끼 의문점을 풀수있는 실마리.
고인돌을 비롯한 피라미드는 옛 몽골리안 풍습.

'신라왕실의 근친혼과 진골귀족 풍습.'

통일 신라는 이집트 그리스 소아시아와도 교역.
아라비아 상인들이 드나들며 신라에 전한 풍습.
가락국 마야부인, 신라 선도성모, 고려 위숙왕후.

'한반도 고대국가 왕실의 신격화 계기가 된듯.

한반도에 커다란 영향을 끼친 고대 그리스 문화
고대 번창했던 그리스 문화의 근원인 이집트 문명
부권 중심 로마가 강해지며 모권사회는 사라져간듯.

세계 최초로 동성애를 즐긴.. 제우스.

제우스가 사랑한 트로이 왕자 가니메데스.
제우스 부인 헤라가 질투할 만큼 깊은 관계.

.................가니메데스.............
뛰어난 미모 탓에 신들이나 독수리로 변한 제우스
크레타 전설에 따르면 미노스에게 납치되어 술시중.
제우스는 죽지 않는 '종마'를 그의 아버지에게 선물.

'종마(種馬) 1필 또는 황금 포도나무 1그루.'

예로부터 가니메데스를 유괴한 사람은 동성애자.
하여, 동성애 미소년을 뜻하는 'catamite'란 말
가니메데스의 라틴식 이름(Catamitus)에서 유래.

'훗날 그는 '물병자리 별자리'로 환생.'
..........................................

로마 제국의 무사들 간에 성행했던 동성애.
통일 신라시대 화랑 문화에도 영향을 끼친듯.
남사당 남색은 신라 화랑으로부터 파생된 풍습.




문신(文身)



우리나라에서 문신은 한때 마도로스의 상징.
뱃사람이면 으례 팔뚝에 문신을 하고다닐 정도.
커다란 용 문신은 옛 해적으로부터 비롯된듯 싶다.

오늘날 문신은 생활 속에 보편화된듯.
여자들이 눈섭 속에 아름답게 새긴 문신.
몸의 은밀한 곳에 보일듯 말듯 그려진 문신.

은밀한 매력 속으로 이성의 시선을 끌어들이듯
대부분, 아름다운 문양을 몸에 그려 넣는 정도.
남녀가 커플로 문신을 하고 다니는 경우도 있다.

원래는 물감을 새겨넣어 지워지지 않게 했던 문신.
피부 색깔이 검은 민족과 중국인들에게는 드물지만
그외의 세계 대부분 지역에서는 문신행위가 보편화.

문신은 질병 재앙으로부터 보호해 주는 마술적 효과
또는 지위 신분 소속을 나타내기 위해서 문신이 사용.
그러나 문신의 가장 보편적 이유는 장식을 위한 목적

BC 2000년 경 이집트 미이라에서 문신이 발견되었으며
트라키아인, 그리스인, 갈리아인, 게르만인, 영국인들
등이 문신을 했었다는 고전 작가들의 기록이 남아 있다.

로마인들은 죄수와 노예들에게 문신을 새겼다.
그리스도교 이후 유럽에서는 문신행위를 금지
중동지역과 그밖에 여러 지역에서는 계속 성행.

아메리카 인디언 부족들은 몸이나 얼굴에 문신.
보편적인 방법은 바늘로 찔러 그림을 그리는 것
캘리포니아 몇몇 부족들은 물감을 새겨 넣는 문신.

북극지방 많은 부족들과 대부분의 에스키모인들,
동부 시베리아의 몇몇 민족들은 문신이 성행했다.

폴리네시아·미크로네시아·말레이시아 여러 지역
숯을 사용한 색소로 피부에 스며드는 문신법을 사용.
뉴질랜드 마오리족은 조그만 뼈 바늘로 얼굴에 문신.

마오리족의 여성 성기 위에 새겨진 도깨비 문신
도깨비는 힘이 세 여근을 지키는 수문장의 역할
만일 함부로 침입하면 죽음이라는 것을 뜻한다.

즉, '함부로 처들어가면 죽는다'
'몰래 처들어와도 죽인다'는 뜻.
'죽인다.'란 말은 여기에서 유래.

죽음에 이를듯한.. 황홀함
곧 죽어도 좋을듯한.. 쾌감.

"아! 끝내준다. 죽인다 죽여~~."

살아 있던 것이 죽는다는 것을 의미하며
또 죽으면서 사정되어 나온 정자와 난자.
그 결합은 새로운 생명의 탄생을 뜻한다.

에로스와 타나토스를 상징하는 문신.

생과 사 그리고 성을 동시에 표출한 문신
삶, 사랑 그리고 죽음은 다 행복이란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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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사의 상징 '소용돌이'
마오리족 불사신의 전설

소용돌이는 에너지의 흐름을 나타내기 때문에
소용돌이는 불사의 중심이 된다고 생각하므로
이를 믿고 몸과 얼굴에 소용돌이 문신을 새긴다.

전설에 의하면 죽은 뒤에 혼은 몸에서 분리되어
마귀할멈과 만나면 '불사의 땅'으로 간다는 믿음

만일 소용돌이 문신이 없으면 혼이 눈알을 파먹어
장님이 되어 불사의 땅을 찾지 못하게 한다고 한다.
그래서, 마우리 족은 소용돌이 문신을 몸에 새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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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우리 족의 여성 성기 위에 새겨진 도깨비 얼굴.
남성 성기를 코로 하여, 새겨진 도깨비 얼굴 문신.
"도깨비 방망이" "코 큰 남성"은 '강한 정력의 상징.

일본에서는 나무손잡이가 달린 바늘로 전신에 문신.
대단히 정교하고 다채로운 문신을 온 몸에 수놓는다.
주로 용을 등 전체에 정교하게 그려넣는 문신이 성행.

미얀마에서는 펜 모양의 놋쇠로 된 도구를 사용한다.
때론 칼로 상처내 색소를 상처에 스며들게 하는 문신
일본 아이누족, 나이지리아 이보족, 멕시코 인디언 등.

애리조나주 피마 인디언, 말레이시아 세노이족
가시 또는 바늘을 이용해 피부를 찔러 새긴 문신.

유럽인들은 인디언을 통해 문신을 알게 되었다.
그후 18, 19세기에 유럽과 미국에서 문신이 성행.

폴리네시아인들과 일본인들의 문신풍습
전세계 국제항구 도시마다 선원간 성행.
1891년 전기문신 기구가 미국에서 특허

19세기 미국 죄수들과 영국의 탈영병들에게 문신
그들의 전과을 표시했고 그 이후로 시베리아 감옥
나치 집단 강제 수용소의 포로들에게도 비슷한 표시.

20세기에는 노상강도나 오토바이 갱들이 문신
갱들이 그들 자신의 신분을 나타내기도 했다.

19세기말에는 영국 상류사회에서 잠시 문신 유행.
지금은 전세계 대부분 문신은 거의 자취를 감췄다.

"죽은 자를 위해 너희는 살을 베지 말며,
몸에 어떤 무늬도 그리지 말라"(레위 19:38)
성서구절 종교적 이유로 문신이 금지되었다.

문신으로 인한 피부암, 문신 장구로 인한 간염
1961년 뉴욕 시 당국은 문신을 강력히 규제했다.

우리나라 문신역사를 알려주는〈삼국지〉 위지동이전
고려 이조시대 도망 노비에게 문신을 한 예가 있었다

삼한시대 일본과 가까운 남쪽 변한인들의 문신 풍습.
몸뚱이에 바늘로 먹물을 넣어 글씨나 그림을 그렸다.
삼국지, 동이전, 한 남자나 여자 모두 왜와 같이 문신.

고려, 이조시대 - 묵형(墨刑)

도둑질을 하여 유배한 곳에서 도망한 자 얼굴에
글자를 새기고, 형기가 끝난 뒤에 먼곳으로 유배.

고려 때 사형에 처하지 않는 강도는 강도라는 문신.
두 글자를 먹물로 새기고 두번 범하면 교형에 처했다.

경국대전(경국대전) 기록에 의하면
오철은 소를 훔치다 잡혀 귀를 베이고
다음에는 의복과 말을 훔쳐 도망갔으나
추적에 의해 잡혀 얼굴에 문신을 당했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기록에 의하면

몸을 훼손하지 않는 것이 유교관의 '효.'
묵형은 일종의 저주이고 천형이라 여겼다.
성종11년 어우동이 남자들 몸에 문신한 행위.

이조시대 연인 간 팔뚝 문신이 은밀히 성행.
오늘날 연인간 커플 문신이 성행한 계기인듯.

한반도 최초로 문신 풍습이 있었다는 변한인들.
변한은 4세기까지 경상도 지역에 분포한 정치집단
진한 연맹체에 속하지 않은 세력들을 통칭하는 말.

대부분 가야연맹체를 구성하는 주요 소국들로 성장.
가야연맹체는 동아시아를 주름 잡던 해상무역 집단.

진한은 낙동강 동쪽에 위치
변한은 낙동강 서쪽에 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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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진은 진한과 잡거하며 언어·법속·의식주가 같고
다만 귀신을 섬김이 다르다"- <삼국지〉위지 동이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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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록을 보면 지역적 구분이 확연하지 않았던듯.
후대 신라와 가야 시대에서는 '영역 경계선'이 확연.

고고학 자료를 볼 때 영남지역 1~3세기 유물들.
유물로 보면 지역적인 차이가 두드러지지 않다.
결국 진한과 변한은 전체적으로 같은 문화기반

변진에 속한 소국으로는 김해지방 구야국(狗邪國),
함안 안야국(安邪國), 고령 미오야마국(彌烏邪馬國),
동래 독로국(瀆盧國) 등 12개 나라 이름이 전해온다.

변한은 중국 군현과 왜에 철을 수출한 철산지
왜와 인접한 일부 지역에서 있었던 문신 풍습.
뱀사골은 변한의 옛 풍습이 전해오는 곳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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