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인 거지 바디매오의 눈을 뜨게 하다
마가복음 10장 46-47절『그들이 여리고에 이르렀더니 예수께서 제자들과 허다한 무리와 함께 여리고에서 나가실 때에 디매오의 아들인 맹인 거지 바디매오가 길 가에 앉았다가 나사렛 예수시란 말을 듣고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이스라엘 백성들이 젖과 꿀이 흐른다는 가나안에 들어섰는데, 가장 먼저 만난 것이 바로 여리고 성이었다. 여리고 성은 여호수아서에 따르면 단 칠일 만에 무너져 함락되었고 그리고 성벽은 한 순간에 무너져 내렸다. 이 여리고 성이 무너진 것의 의미는 성도의 옛사람이 무너짐과 같은 의미를 갖는다. 칠(7)은 하늘의 군대와 땅의 군대가 완성된 창세기 2장 1절의 말씀의 성취인 것이다. 땅의 군대는 범죄한 천사로서 하나님께 범죄하여 이 땅에서 죽어야 할 인간이 된 자들, 그리고 하늘의 군대는 하나님 나라의 천사들이다. 이러한 배치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상징한다.
『그들이 여리고에 이르렀더니 예수께서 제자들과 허다한 무리와 함께 여리고에서 나가실 때에』이는 예수님과 제자들이 여리고 성에 들어갔다가 나오는 모습이다. 장차 이루어질 십자가의 죽음(옛성전의 무너짐)과 부활(새성전의 세움)을 보여주는 것이다.
마가복음 10장 48-49절『많은 사람이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그가 더욱 크게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지라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그를 부르라 하시니 그들이 그 맹인을 부르며 이르되 안심하고 일어나라 그가 너를 부르신다 하매』
『디매오의 아들인 맹인 거지 바디매오』맹인 거지는 영적으로 하나님 나라를 보지 못하는 자들이다. 율법주의 속에 갇혀 있는 이스라엘을 상징한다. 오늘날 여리고 성을 통해서, 장차 이루어질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알지 못지 못하는 자들을 예표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만 알지, 신도 역시 현재적으로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이 이루어지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자들이다.
그가『나사렛 예수시란 말을 듣고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다윗의 자손이라는 말은 맹인이 나사렛 예수를 메시야로 인식하고 있었다는 말이다. 나사렛(나자르)이라는 말은 히브리어 나자르이다. 나실인의 히브리어 나지르(נְזִ֧יר)'는 '바치다, 거룩하게 하다, 구별하다'는 뜻의 동사 '나자르'에서 파생된 명사로서 '거룩하게 구별된 자'를 의미한다.
이 나실인에 대한 규례는 민수기 9장 12절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시내 산을 출발하기 직전에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주신 것이다. 그리고 나실인은 포도 나무에서 나는 것과 독주를 먹을 수 없으며, 머리를 자르지 말아야 하고, 시체를 가까이하여 자기의 몸을 더럽혀서도 안 되었다. 이러한 나실인의 규례는 구속사적 의미에서 볼 때 하나님 앞에서 온전한 제사로 자신을 드린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한다. 마지막 사사인 삼손 이야기는 다윗을 향하고 있다. 그리고 다윗은 예수 그리스도를 향하고 있다.
『다윗의 자손 예수』는 마태복음 1장 1절에서 등장한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히우)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게네세오스)라』게네세오스(γενέσεως)는 세대(generation)라는 의미다.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는 예수 그리스도의 한 세대를 의미한다. 그 당시 한 세대는 주로 30-40년 정도로 여겨진다. 즉 그 사람이 사역(일)하는 기간을 두고 말을 하는 것이다. 히우는 아들(자손)이라는 의미다. 아들은 육신의 혈통으로 된 아들이 아니라, 사역을 할 수 있는 자로서 아들이라는 의미다. 당시 남자들만 사역을 하였다. 그래서 성인이 된 남자를 아들이라고 표현했다. 그래서 아들은 후손이라는 개념보다 하나님 나라의 사역자로서 아들인 것이다.
족보에 등장하는 인물이 자녀들 중에서 주로 한 사람을 등장시킨다. 가끔 두명도 있지만 한명을 등장시키는 것은 믿음의 사람들의 족보를 이어가기 위함인 것이다. 그런데 아브라함부터 예수님까지 열네대, 열네대, 열네대를 삼등분하여 구분하고 있다. 그래서 전체 42 세대가 된다. 42세대가 진행되는 동안 믿음의 세대가 한 사람씩 끊기지 않고 이어져 왔다는 것을 보여준다.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되었는데, 아브라함과 같은 믿음이 이어져 왔다는 말이다. 예수님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자가 아니라, 성령의 능력으로 마리아에게서 태어난 그리스도이시다. 그래서 혈통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아브라함의 신앙은 바랄 수 없는 중에 믿는 신앙이다. 그리스도의 믿음은 죽음과 부활로 요약할 수 있다.
마가복음 10장 50-51절『맹인이 겉옷(히마티온)을 내버리고 뛰어 일어나 예수께 나아오거늘 예수께서 말씀하여 이르시되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맹인이 이르되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히마티온(ἱμάτιον)은 옷인데, 마가복음 6장 56절에서『아무 데나 예수께서 들어가시는 지방이나 도시나 마을에서 병자를 시장에 두고 예수께 그의 옷(히마티온) 가에라도 손을 대게 하시기를 간구하니 손을 대는 자는 다 성함을 얻으니라』예수의 옷은 몸을 상징하는 것으로 십자가에서 죽어야 할 몸을 의미한다. 겉옷을 내버린다는 의미는 십자가에서 죽어야 할 예수에게로 달려가 연합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그래서 맹인(하나님 나라에 대한 맹인)은 부활의 그리스도(메시야)와 만나서 눈을 뜨게 된다는 예표이기도 하다.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아나블렢소)』아나블랲소(ἀναβλέψω)는 쳐다보다 라는 의미다. 누가복음 4장 18절에서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튀플로이스) 자에게 다시 보게(아나블렢신)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여기에서 아나블랲신은 영적으로 하나님 나라를 보는 것이다. 튀플로이스는 튀플로에서 유래된 단어로서, 교만하다는 의미를 갖는다. 교만하여 영적으로 하나님 나라를 보지 못하는 자를 의미한다. 바디메오는 메시야의 소식을 듣고, 하나님 나라에 알고자 하는 자를 상징한다. 예수를 찾아온 많은 유대인들은 바디메오와 같은 맹인인데,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는 알고자 찾아온 것이다.
마가복음 10장 52절『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휘파게 ὕπαγε) 네 믿음(피스티스 πίστις)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세소켄 σέσωκέν) 하시니 그가 곧 보게 되어(아네블렢센 ἀνέβλεψεν) 예수를 길에서 따르니라』휘파게는 “은둔하다, 아래로 향하다” 라는 의미가 있다. 당장 “나를 떠나가라”는 의미가 아니라, “자신을 낮추어라”는 것이다. 우월한 선민의식을 갖은 유대인들에게, 율법주의에서 자신을 낮추어 율법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발견하라는 것이다. 믿음은 율법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발견하는 믿음이다. 예수님이 자신(바디메오)의 눈을 뜨게 할 수 있다는 믿음은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 나라를 발견할 수 있다는 말이다.
율법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발견한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오래 전에 약속하신 여인의 후손을 발견하게 되고, “그 분이 날마다 드리는 제사의 영원한 대속의 어린양”이라는 것이다. 그런 메시야를 바로 앞에서 발견하였으므로 그는 상한 마음을 치유받게 되는 것이다. 세소켄은 구원이 아니라 치유받았다는 말이다. 치유받았다는 것은 잘못된 생각에서 벗어나 바른 생각을 하게 된 것을 의미한다. 이게 구원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많은 유대인들은 예수를 메시야로 받아드렸지만, 그들이 생각하는 메시야는 로마를 무너뜨릴 그런 힘있는 메시야로 생각했다. 그들은 메시야를 발견했지만,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에 대해서는 사실상 맹인 그대로인 것이다. 육적으로 눈을 떴을 것이나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는 여전히 맹인이 된다. 바디메오가 예수님을 만나 상한 마음을 치유받고 하나님 나라를 보게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구원에 이르게 되는 길은 상한 마음을 치유받는 것이 아니라, 더 나아가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에 연합되는 것이다.
예수를 따르던 수많은 유대인들이 갑자기 돌변하여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게 소리쳤다. 물론 오순절 성령 강림 후에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많은 유대인들이 마음에 찔려 회개하는 역사가 일어난 것이다. 신도 역시 교회로 인도되었지만, 현재적으로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과 현재적으로 그리스도의 부활과 연합되지 않으면, 구원받았다고 말을 할 수 없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