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40여년 전에 백양로를 함께 오르내리던 동문들이 아직도 못다한 국악사랑에 연주회를 준비했습니다.
저는 재학시절 거문고를 연주했지만 지금은 악보 읽는 법조차 까마득해졌는데 그래도 어디선가 국악기 연주소리가 나면 귀가 쫑긋해지곤 합니다.
노벨문학상 수상을 축하하는 현수막이 대문짝만하게 걸린 백양로를 다시 걸어볼 기회가 생겼습니다.
노벨 전
노벨 후
노엘 전
노엘 후
집에서 누워계신 어머니에게 무엇이 달라졌을까라는 질문을 던지며 혼자서 궁시렁궁시렁 즐거운 독백을 해봅니다.
60년이 넘도록 이제까지 한번도 연세대학교가 금수저 은수저들의 학교라는 생각을 해본적 없이 살아 오다 갑자기 내가 생각한 엘리트들의 학교만도 아니라는 생각이 미치자 노벨전과 노벨후에 달라지는 것은 내 자신의 문제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전문가라는 호칭이 두려웠던 저는 어떤 전문분야에서도 정착하지 못하고 좋게 말하면 자유롭게 나쁘게 말하면 세상 모르고 살아온 것 같습니다.
그러다가 60이 되어서야 힘드신 어머니를 도와 집안 살림에 뛰어들게 되었고 이제는 병환으로 누워계시는 어머니를 요양보호사로 가족요양을 하며 집안일이 박사학위 코스 못지않게 힘들다는 것을 배워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깨달은 것은 모두가 생활 속에서 자기 몫의 십자가를 감당하며 살아가고 있으며 그런 생활 속의 십자가들이 만드는 세상은 이론과 학설을 넘어 그 넓이와 깊이와 높이와 길이를 측량할 수 없을 만큼 크고 방대하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다 모으기를 하신 어머니의 살림을 버리기로 정리하며 이제야 숨이 트이는 공간을 회복한 자신이 노벨 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노벨 후에 만나는 동문들 그리고 국악
저는 왜 국악반에 들어가 4년을 버텨냈을까요? 특별히 정악을 좋아한 것도 아닌데요
이화여자대학교를 다니는 언니의 조언대로 국악반 써클문을 들어섰던 저는 이제 생각하니 특별히 국악 그 중에도 정악에 관심이 있었다기 보다는 그저 정악의 편안한 분위기가 좋았던 것 같습니다.
왜 편했냐 하는 이유도 이제야 알게 되었지만 저처럼 느리고 반복적이며 쉬운 가락이 편하게 느껴졌던 것 같습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의문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지치지 않고 수십년을 느리고 반복적이며 쉬운 가락을 놓지 않고 거기에 무게와 의미를 더해 온 동문들의 진지함은 과연 어떤 것일까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게 내가 두려워하는 전문성일텐데..
공간의 미를 중요시하는 동양화를 한 때 좋아하셔서 열심히 배우신 어머니의 미완성 그림을 걸어 놓고 보면서 느끼던 안도감이 이 정악의 흐름속에도 있는 것일까..
두려움을 넘어선 안도감의 세계..
그러다가 문득 정악은 리듬으로 감성을 만들어 가기 보다는 한 노트 한 노트의 길이에 감성을 싣고 간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길게 뻗는 숨 그 숨에 시간을 담아 가는 것이라는..
그래서 다시 무대에 선 동문들이 보고 싶어졌습니다.
그들이 연주하는 곡들의 한 숨 한 숨에 어쩌면 우리들의 학창시절 그리고 발버둥치며 살아 온 노벨 전의 세월들이 담겨져 있을 것만 같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저라도 그 시간에 그 긴 노트들 위에 저의 세월을 담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참 고마운 초대
이런 초대의 시간이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것은 아니기에 더욱 감사합니다.
어쩌면 모태 신앙으로 태어나 노엘 전과 노엘 후의 삶을 구별 없이 살며 주 예수 그리스도가 어떻게 일상의 삶 속에 살아 계시는지 묻지도 않고 살아 온 저에게 저라는 한 노트에 실린 시간 (주 예수 그리스도의 숨이랄 수 있는) 의 의미를 새롭게 깨닫게 하는 전환점의 선물인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