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5.현종실록 1권, 현종 대왕 숭릉지(崇陵誌)
현종 대왕 숭릉지(崇陵誌)
아, 우리 현종 순문 숙무 경인 창효 대왕의 성은 이씨(李氏)이고 휘(諱)는 원(棩)이며 자(字)는 효직(孝直)으로 효종 현인 대왕(孝宗顯仁大王)의 적자이고 인조 명숙 대왕(仁祖明肅大王)의 손자이시다. 모비(母妃)는 효숙 경렬 명헌 인선 왕후(孝肅敬烈明獻仁宣王后) 장씨(張氏)로 우의정 신풍 부원군(新豐府院君) 장유(張維)의 따님이다.
전에 효종이 왕자로 계실 적에 청나라에 볼모로 갔었는데, 명나라 숭정(崇楨) 14년 신사181) 2월 4일에 심양(瀋陽)의 관저(館邸)에서 왕을 낳았다. 왕은 태어나면서부터 기질이 특이하였고 용모가 장대하였다.
갑신년182) 에 효종이 심양에서 연경(燕京)으로 들어갈 적에 왕을 보내 먼저 귀국하게 하였다. 왕의 이때 나이 4세로 인조께 뵈었는데, 묻는 바가 있으면 대답하기를 어른처럼 하였다. 요순과 걸 주에 대해 묻자. 왕이 이미 성군(聖君)과 폭군을 구별하여 말마다 고사(古史)를 증거대었다.
한번은, 변방에서 표피(豹皮)를 진사한 자가 있었는데, 털이 성글고 나빠서 되돌려 보내려고 하였다. 왕이 곧 인조께 아뢰기를,
"표범 한 마리를 잡자면 백성을 반드시 많이 다칠 것입니다."
하니, 인조가 그 말을 듣고 매우 기특하게 여겨 되돌려 보내지 말라고 명하였다.
한번은 우연히 합문(閤門)을 나오다가 얼굴이 야위고 시커먼 한 군사를 보고 내수(內竪)183) 에게 물으니, 내수가 대답하기를,
"이는 얼고 굶주려서 그런 것입니다."
하였다. 왕이 그를 불쌍히 여겨 옷을 주게 하고, 또 음식도 계속 먹여주게 하였다. 이처럼 어려서부터 지혜가 넓고 인애(仁愛)가 천성으로 타고났었다.
소현 세자(昭顯世子)가 죽자, 효종이 둘째 아들로 세자의 자리에 올랐고, 왕 역시 원손(元孫)으로 진호(進號)되었다. 기축년184) 에 왕을 책봉하여 왕세손(王世孫)으로 삼고 강서원(講書院)이 설치되었다. 이 해 여름에 효종이 왕위에 오르자 왕도 왕세자(王世子)로 진호(進號)되었다.
신묘년185) 에 관례(冠禮)를 행하고 이어서 왕세자의 책봉례(冊封禮)를 거행하였으며, 겨울에 가례(嘉禮)를 행하였다.
임진년186) 에 입학례(入學禮)를 거행한 다음 춘방(春坊)187) 의 요속(僚屬)을 더 증원시키고 노숙(老宿)한 유신(儒臣)을 모두 맞이하여 보필과 지도를 다하게 하였다. 효종이 일찍이 문묘(文廟)에 재차 제사지내면서 왕에게 수행하도록 명하였는데 이는 문사(文事)를 숭상하라고 가르친 것이고, 남쪽 강나루에서 군대를 대대적으로 사열할 적에 다시 왕에게 수행하도록 명하였는데, 이는 무사(武事)를 잊지 말 것을 가르친 것이며 때로 농전(弄田)188) 에서 농사짓는 것을 관람시켰는데, 이는 백성의 먹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가르친 것이었다.
기해년189) 5월에 효종이 승하하자, 왕이 새보(璽寶)를 받고 왕위에 올랐다. 이미 돌아와서는 여차(廬次)190) 에서 수질과 요질을 띠고 애곡(哀哭)을 그치지 않았으며 죽도 들지 않고 전올리는 일도 대신시키지 않았다. 이때에 매우 더웠었는데, 비좁은 데에 거처하면서 자리를 옮기지 않으니, 좌우의 신하와 원근에서 이 소문을 들은 자들이 모두 왕의 독실한 효성에 감탄하였다.
왕이 처음 정치를 할 적에 오직 효종이 가르쳐준 바를 먼저 시행하여 남긴 뜻과 사업을 따라 할 뿐이었다. 자신을 낮추고 학문을 숭상하였으며, 위에서 검소하게 하고 아랫사람들을 부유하게 하였으며, 두텁고 신중히 하기에 힘써 적당한 데로 돌아가게 하였다.
맨 먼저 대사헌 송준길(宋浚吉)의 말을 채용하여, 고명한 선비에게 예를 다해 대우하되 이미 서울에 도착한 사람은 머물러 있도록 권하고 오지 않은 사람은 유시(諭示)하여 불렀다. 이때 좌찬성 송시열 같은 사람은 이미 효종 때부터 총애를 가장 깊이 받았고 윤선거(尹宣擧)·이유태(李惟泰) 등도 모두 서울에 와 있었다. 송시열 등이 물러가기를 간절히 원하자 왕은 손수 쓴 비답을 자주 내려 위로하고 만류하기를 지극히 하였다.
명을 내려 제도(諸道)의 공물 중에서 향사(享祀)에 관계되는 것 이외에는 모두 줄이고 면제하도록 하니, 백성들이 이미 새로운 교화에 고무되었다. 경자년191) 에 관동·관북 지방에 재난이 들자, 단천(端川)에서 포흠진 은(銀)을 모두 면해주고, 삼수(三水)·갑산(甲山)에서 공물로 바치는 표피(豹皮)를 감해주고, 영동(嶺東)은 포세(布稅)
를, 영서(嶺西)는 미세(米稅)를 감해 주라고 명하였다.
신축년192) 에 삼남(三南) 지방에 또 한재가 들자, 다시 제도(諸道)의 공물을 감해주고 궁중의 주방(酒房)과 어구의 말[馬]을 줄이라고 명하였다. 옛날부터 인수사(仁壽寺)·자수사(慈壽寺)라고 하는 두 이원(尼院)이 도성 북쪽에 있었는데, 왕이 명하여 이를 철거해 학교를 짓고 절에 있던 여승들을 보내서 모두 환속(還俗)시켰다. 가을에 왕이 친히 성균관에서 석채례(釋菜禮)를 행하였다.
임인년193) 봄에 예조에 명하여, 고려조의 모든 능을 수리하게 하고 또 3년에 한 번씩 봉심(奉審)하도록 영을 만들었다. 특별히 어사 남구만(南九萬)·이숙(李䎘) 등을 보내어 호남과 영남의 잡부(雜賦)를 감면해 주었으며 또 진휼하고 곡물을 대여해 주게 하였다. 또 측근의 신하를 보내어 임진 왜란과 병자 호란의 옛날 전쟁터에 여제194) 를 지내게 하였다. 가을에 친히 노량(露梁)에 거둥하여 무사(武事)를 강습하였다.
계묘년195) 에 균전사(均田使) 민정중(閔鼎重)·김시진(金始振)에게 명하여 경기의 전지를 다시 측량하게 하였고 여러 궁가(宮家)의 해세(海稅) 및 시장(柴場)을 널리 점유하여 백성을 침해하는 것을 줄이게 하였다.
갑진년196) 에 경기 지방이 해마다 가뭄이 들고, 가을에 또 호남에 수재가 있었으므로 강도(江都)·삼사(三司)로 하여금 모두 인재를 천거하여 등용하게 하였다. 좌참찬 김수항(金壽恒)을 함경도로, 어사 윤심(尹沈)을 제주(濟州)로 보내어 변방의 백성과 해외 사람들의 고통을 탐문하게 하고, 또 문사(文士)와 무사를 다같이 시험을 보여 뽑게 하였다.
왕이 항상 눈병을 앓았는데 오랫동안 낫지 않았다. 을사년197) 에 이르러 남쪽으로 호서(湖西)198) 에 거둥하여 온천에 목욕하자 비로소 효험이 있었다. 행궁(行宮)199) 에 도착한 날 곧바로 도로에서 호위하며 수행했던 향병(鄕兵)을 파하여 각각 본진(本鎭)으로 돌려보내었다. 병조에 명하여 장사(將士)들을 단속하여 백성을 괴롭히거나 곡식을 손상시키지 못하게 하였다. 예조에 명하여 작고한 훈신(勳臣) 및 덕망이 있는 사람이 이웃 고을에 있을 경우 제사를 지내주도록 하고, 문·무과의 시험을 시행하여 선비들을 위로하게 하였다. 호조에 명하여, 요역과 부세(賦稅)를 차등있게 감하여 백성을 위로하게 하였다.
병오년200) 봄에 왕이 인선 태비(仁宣太妃)를 모시고 다시 온천에 거둥하여, 도내의 나이 많은 노인 및 효행으로 소문난 사람에게 쌀과 고기를 두루 주었다. 이조에 명하여, 나이 80 이상인 자에게는 사족이나 서민을 논하지 말고 모두 자급(資級)을 주게 하였다. 온천에서 돌아와 대사령(大赦令)을 내렸다. 명을 내려 호구 장적법(戶口帳籍法)을 자세히 밝히고 누락된 자는 벌로 변방에 이주하게 하였다.
정미년201) 봄에 왕이 친히 법전(法殿)에 나아가 원자 휘 돈(焞)을 책봉하여 왕세자로 삼았다. 여름에 다시 온천에 거둥하여, 거듭 도신(道臣)에게 명하여 원통하게 정체된 백성들의 옥사를 너그럽게 처결하도록 하였다.
이보다 앞서, 효종이 일찍이 명하여 호남과 호서에 대동법(大同法)을 시행하여 백성들의 곤궁함을 풀어주도록 하였는데, 오직 호남의 산간 고을에만 미처 시행하지 못하였다. 왕이 선왕의 일을 계승하여 시행하였는데, 조정의 신하 중에 불편한 점이 있다고 말하는 자가 있어 시행하기도 하고 중지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뒤에 또 모두 편리하다고 말해서 단행하니 호남 백성들이 소생되었다.
무신년202) 에 관동에 또 기근이 들자, 명하여 경자년203) 처럼 백성들의 부세를 감면해 주게 하였다. 진휼청을 설치하고 중신 중에 재능이 있고 성실한 사람을 가려 관장하게 하였다. 각사(各司) 노비들의 공포(貢布)를 감해 주었다.
기유년204) 봄에 다시 온천에 거둥하였다. 겨울에 처음으로 신덕 왕후(神德王后) 강씨(康氏)를 태묘(太廟)에 올려 합사(合祀)하였다. 정릉(貞陵)을 침원(寢園)에서 능으로 복원하고 성대한 전례(典禮)를 거행하여 대륜(大倫)을 밝혔다.
경술년205) 봄과 여름에 큰 가뭄이 들고 가을에 홍수가 졌다. 제도(諸道)에서 모두 재난을 보고해 왔다. 왕이 또 명하여, 강도·남한 산성의 쌀 3만 석을 방출하고 관서의 쌀 2만 석을 옮겨다가 도성과 외방에 나누어 주어 진휼하게 하였다.
신해년206) 봄에 또 보리가 흉년이 들어 백성들이 큰 기근을 치르고 있었는데 돌림병마저 극성을 부려 죽는 자가 잇따르니 왕이 밤낮으로 근심하고 애태웠다. 서울에는 세 곳에다 진휼청을 설치하고, 제도의 각 고을에 신칙하여 성의를 다해 구제케 하되, 산 사람에게는 죽을 끓여 먹이고 죽은 사람에게는 널을 주어 묻게 하였다.
임자년207) 왕이 자신을 책하는 교서를 내렸는데, 말 뜻이 애닯았다. 국내에 유시하여 포흠된 부세를 모두 면제하고, 죄수들을 너그럽게 처결하고, 폐고(廢錮)된 자들을 풀어주는 등 은택이 성대히 내려지니 백성들이 마침내 재난을 당한 줄을 몰랐다. 또 재신(宰臣)과 삼사(三司)에 명하여 학행과 문무(文武)의 재능이 있는 자를 천거하게 하였다. 또 어사 이하(李夏)를 제주에 보내어 곡식 종자와 식량 및 포목을 실어다가 구제하도록 하고, 갑진년208) 의 예처럼 또 선비를 시험보이게 하였다.
계축년209) 에 종친 영림 부령(靈林副令) 이익수(李翼秀)가 상소하여 ‘영릉(寧陵)의 봉분(封墳) 석물(石物)에 틈이 생겼다.’고 말하자, 왕이 크게 놀라고 근심하여 능을 옮기기로 의논을 결정하였다. 이 해 겨울 10월에 마침내 효종의 능을 여릉(驪陵)으로 옮겼는데 예에 따른 것이었다. 이때 왕이 위로 자의 대비(慈懿大妃)와 인선 대비(仁宣大妃)를 받들어 모시되 마음을 다하고 음식물을 두루 구비하여 융숭히 봉양하였다. 효종 때에 건립된 만수전(萬壽殿)은 자의 대비가 거처하던 곳으로 서쪽에 있고 왕이 또 특별히 전(殿) 한 채를 지어 집상전(集祥殿)이라 이름하였는데 이는 인선 대비가 거처하던 곳으로 동쪽에 있었다. 이는 한(漢)나라 장락궁(長樂宮)·장신궁(長信宮)의 제도와 같았다. 모비(母妃)에게 평소 질병이 있었는데, 왕이 항상 곁에서 모시고 간호하면서, 화하고 부드럽게 하여 뜻에 맞게 하였다. 또 여러 자매(姉妹)들을 자주 불러 즐겁게 친애의 정을 펴면서 틈이 없이 화락하게 지냈다. 모비도 일찍이 말하기를,
"왕이 옆에 있으면 병이 몸에서 나가는 것 같다."
하였다.
갑인년210) 봄에 이르러 모비(母妃)의 병환이 점차 위독해지자, 왕이 급히 명하여 기제(祈祭)를 두루 거행하게 하고 또 원통한 죄수들을 평의하여 석방하게 하였다. 모비의 상을 당하자, 왕은 예제(禮制)에 지나칠 정도로 너무 슬퍼하였고, 제사를 더욱 정결히 하여 제수(祭需)를 익히고 씻는 일에서부터 신칙하고 간검하지 않음이 없었다.
처음, 효종의 상이 났을 적에 대신이 여러 유신(儒臣)들과 자의 대비(慈懿大妃)가 입어야 할 복제(服制)에 대해 의논하면서 말하기를,
"본조(本朝) 오복(五服)의 제도에는 오직 자식에게 기년복을 입게 되었을 따름이다."
하고, 드디어 기년복으로 정하였다. 그런데 그 뒤에 ‘기년복은 예가 아니고 예로 볼때 삼년복을 입어야 합당하다.’고 말한 자가 있었으므로 왕이 이에 여러 대신과 유신(儒臣) 등에게 묻도록 하였다. 그러나 여러 유신(儒臣)들이 ‘고례(古禮)로 볼때 역시 기년복을 입어야 할 듯하다.’ 하였고, 대신이 또 전의 의견을 주장하여 ‘국제(國制)에는 오직 기년복으로 되어 있다.’고 대답하였으므로 왕이 대신의 말을 따라 그대로 기년복으로 결정하고 고치지 않았다. 이때에 이르러 예관(禮官)이 다시 자의 대비의 복을 줄여 대공복(大功服)으로 정하자 왕이 다시 공경(公卿)·삼사(三司)에게 묻고 또 《예경(禮經)》을 친히 고증하여 그 잘못된 점을 다 분별하여 말하기를,
"대체로 적자(嫡子)가 어찌 서자(庶子)가 되겠으며 장자(長子)가 어찌 중자(衆子)가 된단 말인가. 선왕(先王)211) 이 대비(大妃)에게는 오직 가공언(賈公彦)의 주소(注疏)에 말한 ‘적처에게서 난 둘째 아들을 세워도 또한 장자라고 부른다.[取嫡第二長子亦名長子]’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하고, 예관을 중죄로 다스렸다. 그리고 대공(大功)을 고쳐 기년으로 정하게 하고 또 수상이 예(禮)의 분명한 조문을 따르지 아니하고 사람들의 말을 따른 것을 꾸짖었다. 그리하여 복제가 정해지고 명분이 바르게 되니 국가의 예가 더욱 유감이 없게 되었다.
왕은 행실이 순수하고 천성 또한 총명하여 특별히 뛰어났다. 정사를 처결하고 난 여가에 항상 경사(經史)를 탐독하고 도리(道理)를 깊이 사색하였으나, 발로되어 일을 할 때에는 반드시 되풀이 해서 참작한 다음 타당성이 있어야만 시행하였다. 만년에는 더욱 정사의 법을 잘 익히고 기강을 총괄하여, 바야흐로 근래 군민(軍民)의 폐단을 크게 구명해서 모두 변통해 보려고 하였다. 그런데 왕이 이미 피로가 쌓이고 모비의 상에 과도하게 슬퍼하여 병이 날로 심해져 갔다. 8월 7일 아침에 대신을 빈청(賓廳)에 모이게 한 다음 불러서 일을 의논하려 하였는데 갑자기 병환이 더욱 위독하여 시행하지 못하였다. 급히 승지를 충주에 보내어 영의정 허적을 불러오게 하고, 또 좌의정 김수항을 불러 침전(寢殿) 앞에 오게 하여 도타이 일렀다. 병환이 깊어 승하하던 날 밤에도 경사전(敬思殿)의 선수(膳羞)가 정결한지 자주 물었다. 또 문 밖의 바람소리를 듣고 어느 쪽에서 불어오는가를 물었다. 동풍이라고 대답하자. 왕이 놀라며 이르기를,
"곡식을 몹시 손상하겠구나. 백성이 장차 죽어가겠구나. 내가 어찌하여 또 이 소리를 듣는단 말인가."
하고, 여전히 슬퍼하고 탄식해 마지않았다. 왕세자가 여러 대신들로 하여금 종묘 사직과 산천에 왕의 회복을 빌도록 하였으나, 왕은 마침내 이달 18일에 창덕궁(昌德宮)의 여차에서 승하하였다. 왕은 재위한 지 15년이었고 춘추는 34세였다. 덕이 있으면 장수한다는 말이 징험이 없고 말았으니 신도(神道)의 이치가 어그러졌다. 아, 슬프도다. 영의정 허적, 좌의정 김수항, 우의정 정지화(鄭知和) 등이 왕의 공덕(功德)을 의논하여 ‘순문 숙무 경인 창효’란 시호를 올리고, 묘호(廟號)를 현종(顯宗)으로 정하였다. 김수항이 능에 관한 일을 총괄하여, 건원릉(健元陵)의 서남쪽 다른 산줄기인 태좌 묘향(兌坐卯向)212) 의 자리에 묘지를 정하고 이해 12월 13일 임인(壬寅)에 숭릉(崇陵)에 장시지냈다. 처음 염(斂)을 할 적에, 모든 교금(絞紟)213) ·복습(複褶)214) 등의 물품을 모두 궁중에서 마련하였고, 유사(有司)들에게 준비하라고 하지 않았다. 빈소(殯所)를 차리고 장사를 지낼 때에도 모든 일을 검소하게 하여 백성들에게 피해가 가지 않게 하였다. 이는 대개 우리 왕비와 우리 사왕(嗣王)이, 평일 소박한 것을 숭상한 대왕의 유지를 몸받아 행한 것이라고 한다.
왕비 김씨(金氏)는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 청풍 부원군(淸風府院君) 김우명(金佑明)의 따님인데, 1남 3녀를 낳았다. 아들은 곧 우리 사왕(嗣王) 전하이고 큰 딸은 명선 공주(明善公主), 다음은 명혜 공주(明惠公主)인데 모두 출가하기 전에 일찍 죽었고 막내는 명안 공주(明安公主)인데 아직 어리다. 중궁(中宮) 김씨는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 광성 부원군(光城府院君) 김만기(金萬基)의 따님이다. 신해년215) 봄에 세자빈으로 책봉되었고 지금 중전의 자리에 올랐다.
아, 무릇 하늘을 본 사람은 높은 것을 알고 해와 달을 본 사람은 밝게 빛나는 것을 안다. 그러므로 비록 신(臣)이 매우 어둡고 비루하지만 우리 대행 대왕(大行大王)을 섬겨 교명(敎命)을 받든 지가 또한 오래되었기에 우리 선왕의 순수한 행의(行誼)와 아름다운 덕망이 탁월하여 옛날 성군에 비교해 봐도 손색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왕이 본디 공손하고 검소하며 공경하고 조심하여, 노래나 여색을 좋아하지 않았고 놀이나 안일에 젖은 적도 없으며 항상 조심하고 두려워하시면서 깊은 못이나 골짜기에 임하는 듯한 경계심을 가지고 계셨는데, 15년 동안을 하루와 같이 하셨다. 매양 비오기를 빌 때를 당하면 혹 궁중에서 재계하고 한 데 서서 밤을 새우기도 하고, 혹은 정전(正殿)을 피해 거처하기도 하고 법주(法廚)216) 를 줄이기도 하였다. 비록 몸에 질병이 있어서 한때나마 편안한 적이 없었으나 또한 감히 자신의 몸만을 돌보지 않았다.
특히 궁금(宮禁)을 엄히 단속하여 청탁하는 길을 끊어버리고 조정을 경계하여 당파를 제거하게 하였다. 또 간하는 말을 하는 사람에게 자주 상을 주어 언로(言路)를 넓혔다.
지난 병오년217) 겨울 무렵에 신이 여러 강관(講官)의 뒤를 따라 선정전(宣政殿)에 들어가 왕을 모시었다. 이때 요망한 혜성(慧星)이 겨우 사라지자마자 또 천둥의 이변이 있었으므로 왕이 더욱 척연히 놀라고 두려워하여 재변의 구제책을 묻고 직언을 구하였는데, 일체 지극한 정성에서 나왔다. 신이 매양 이 일을 칭송하며 감히 잊지 못하고 있다.
신이 또 일찍이 유신(儒臣) 송준길과 내합(內閤)에서 함께 진대(進對)하였다가 이어서 본조의 신하 성삼문(成三問)의 일에 대해 논의하게 되었다. 왕은 성삼문을 허여하며 ‘명나라 방효유(方孝儒) 등과 같은 사람이다.’ 하였으니, 여기에서 충의를 포상하는 왕의 성대한 뜻을 볼 수 있다. 또 지난해 해서(海西) 지방에서 일찍이 변란을 고한 자가 있었는데, 왕이 한 번 물어보고 그것이 무고(誣告)임을 알고 70여 인을 석방하면서 같은 날에 양식을 주어 고향으로 돌려보내었으니, 여기에서 또한 왕이 재위하던 세상에서는 형벌로 억울하게 죽은 사람이 하나도 없음을 알 수 있다. 아, 어찌 훌륭하지 아니한가.
그러나 신이 또 일찍이 감히 논하였거니와, 이 몇 가지 일은 범상한 군주에 있어서는 진실로 훌륭한 일이 되겠지만, 선왕에게는 조그마한 일일 뿐이다. 오직 천승(千乘)의 지귀(至貴)함과 군주의 지존(至尊)함으로서 증자(曾子)와 민자(閔子)의 덕행218) 을 실천하고 검소한 절조(節操)를 지켰다. 그리고 또 우리 온 동방 수천 리 사이가 비록 홍수와 가뭄이 들어도 재난의 걱정이 없게 하고 도랑과 골짜기에 뒹굴던 사람을 집으로 돌아오게 하여 넓은 인애(仁愛)와 큰 은택의 안에서 삶을 누리게 하였으니, 이는 실로 질박을 숭상한 요(堯) 순(舜)219) 과 자책하면서 큰 가뭄에 비를 빈 탕왕(湯王)220) 의 성세(盛世)에 가깝다고 하겠다. 이게 특히 왕의 성덕(盛德)과 지선(至善)으로서 영구히 잊지 못하는 것이다. 아, 지극하고 지극하도다
가선 대부 이조 참판 겸 동지경연성균관사(嘉善大夫吏曺參判兼同知經筵成均館事) 신 김석주(金錫冑)는 지어 올림.
【태백산사고본】 23책 1권 1장 A면【국편영인본】 37책 95면
【분류】
왕실-국왕(國王) / 왕실-종사(宗社) / 어문학-문학(文學)
[註 181]신사 : 1641 인조 19년.
[註 182]갑신년 : 1644 인조 22년.
[註 183]내수(內竪) : 궁중에서 부리는 어린 내시.
[註 184]기축년 : 1649 인조 27년.
[註 185]신묘년 : 1651 효종 2년.
[註 186]임진년 : 1652 효종 3년.
[註 187]춘방(春坊) : 세자 시강원(世子侍講院)의 별칭.
[註 188]농전(弄田) : 심심 소일로 가꾸기 위해 장만한 전지.
[註 189]기해년 : 1659 효종 10년.
[註 190]여차(廬次) : 상제가 거처하는 곳.
[註 191]경자년 : 1660 현종 원년.
[註 192]신축년 : 1661 현종 2년.
[註 193]임인년 : 1662 현종 3년.
[註 194]여제 : 여귀에게 지내는 제사.
[註 195]계묘년 : 1663 현종 4년.
[註 196]갑진년 : 1664 현종 5년.
[註 197]을사년 : 1665 현종 6년.
[註 198]호서(湖西) : 온양(溫陽).
[註 199]행궁(行宮) : 임금이 임시 머무르는 궁, 여기서는 온양.
[註 200]병오년 : 1666 현종 7년.
[註 201]정미년 : 1667 현종 8년.
[註 202]무신년 : 1668 현종 9년.
[註 203]경자년 : 1660 현종 원년.
[註 204]기유년 : 1669 현종 10년.
[註 205]경술년 : 1670 현종 11년.
[註 206]신해년 : 1671 현종 12년.
[註 207]임자년 : 1672 현종 13년.
[註 208]갑진년 : 1664 현종 5년.
[註 209]계축년 : 1673 현종 14년.
[註 210]갑인년 : 1674 현종 15년.
[註 211]선왕(先王) : 효종.
[註 212]태좌 묘향(兌坐卯向) : 서방을 등지고 동쪽을 향한 자리.
[註 213]교금(絞紟) : 시신을 묶을 때 쓰는 소대(小帶).
[註 214]복습(複褶) : 시신을 싸는 옷 등.
[註 215]신해년 : 1671 현종 12년.
[註 216]법주(法廚) : 임금 수라를 만드는 주방.
[註 217]병오년 : 1666 현종 7년.
[註 218]증자(曾子)와 민자(閔子)의 덕행 : 이 두 사람은 모두 공자(孔子)의 고제(高弟)로 덕행이 뛰어나고, 효행(孝行)이 특출하였다. 증자는 증삼(曾參), 민자(閔子)는 민손(閔損).
[註 219]질박을 숭상한 요(堯)순(舜) : 요임금과 순임금은 질박을 숭상하여 산에서 벌채해 온 서까래를 다듬지 않고 그대로 사용했고, 띠풀로 지붕을 덮고 자르지 아니했다 한다. 《사기(史記)》 진 시황 본기(秦始皇本紀).
[註 220]큰 가뭄에 비를 빈 탕왕(湯王) : 은(殷)나라 때에 큰 가뭄이 들자 탕왕(湯王)이 상림(桑林)에서 비를 빌면서 여섯 가지 일로 자책하였는데, 첫째, 정치가 절도가 없는가? 둘째, 백성을 고통스럽게 부렸는가? 셋째, 궁실이 사치한가? 넷째, 여알(女謁)이 성한가? 다섯째, 뇌물이 행해지는가? 여섯째, 참소가 일었는가? 등이다. 《공양전(公羊傳)》 환공5(恒公五) 대우주(大雩注), 《사략(史略)》.
166.현종개수실록 21권, 현종 10년 8월 18일 무인 4번째기사 1669년 청 강희(康熙) 8년
정언 김덕원이 세 폐군에 대해 입후할 것 등을 상소하니 몇 달 후에 체직하다
정언 김덕원(金德遠)이 상소하여, 노산(魯山)·연산(燕山)·광해(光海) 세 폐군(廢君)에 대해서 입후하고, 성삼문(成三問) 등 6신을 정표하고 사당을 세우게 할 것을 청했는데, 소를 들인 지 몇 달이 지났으나 상이 비답을 내리지 않다가, 그를 특명으로 체직시켰다.
사신은 논한다. 노산군은 우리 임금의 적자로서 죄없이 자리에서 물러났으므로 충신 열사들이 지금도 눈물을 흘리고 있으니, 입후하여 제사를 지내게 하는 것이 실로 옳은 것이다. 그러나 연산의 포악한 짓은 걸(桀)과 주(紂)보다 더하였고, 광해의 죄는 윤기(倫紀)에 관계되는 것이었는데 어떻게 노산과 더불어 입후할 것을 청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성삼문 등은 성사시키지 못할 것을 알면서도 하였으니, 그 충절이 지극하고 뜻이 비장하다. 중국의 고사에 따라 그들의 관작을 회복시켜주면 충분한 것이다. 정표하고 사당을 세우게 하는 문제는 본조에서 거론할 수 없는 것인데 덕원이 함부로 말하였으니, 식자들이 그르다고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21책 21권 39장 B면【국편영인본】 37책 683면
【분류】
정론-정론(政論) / 윤리-강상(綱常) / 왕실(王室) / 풍속-예속(禮俗) / 인물(人物)
167.현종개수실록 1권, 현종 대왕 행장(行狀)
현종 대왕 행장(行狀)
현종 순문 숙무 경인 창효 대왕 행장
왕의 성은 이씨(李氏), 휘(諱)는 원(棩), 자(字)는 경직(景直)이다. 효종 대왕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인선 왕후(仁宣王后) 장씨(張氏)인데, 우의정 문충공(文忠公) 유(維)의 딸이었다. 효종이 대군(大君) 시절 심관(瀋館)에 볼모로 있으면서 신사년001) 2월 기유일에 대왕을 낳았는데, 남다른 데가 있었고 두 세 살 적부터 언어 행동이 법도가 있었다.
갑신년에 효종이 심양에서 연경(燕京)을 가게 되어 왕을 본국으로 보냈는데, 돌아와 인조 대왕을 뵈었을 때 응대하는 것이 어른과 같았었다. 인조가 요(堯) 순(舜)·걸(桀) 주(紂)에 대하여 물었는데 그때 왕은 증선지(曾先之)가 쓴 《사략(史略)》을 읽고 있을 때였다. 그리하여 그 책 속의 문구들을 낱낱이 들어가면서 성군이 되고 폭군이 된 이유를 입증하였으므로 인조가 그 대답을 듣고는 유별나게 사랑하였다. 표범 가죽을 공진(貢進)한 자가 있었는데 품질이 나빠 물리치려 하자, 왕이 곁에 있다가 말하기를,
"표범 한 마리를 잡으려면 틀림없이 많은 사람이 다칠 것입니다."
하여, 인조는 그뜻을 가상히 여기고 물리치지 말도록 명하였다. 효종이 본국으로 돌아오기 전에 왕은 해가 뜰 때마다 축원하기를,
"부모님이 어서 돌아와 내가 뵐 수 있도록 해주소서."
하였고, 언제나 새로운 맛을 대하면 그 지방002) 생산이 아닌 경우 바로 보내드리고 나서야 비로소 맛을 보았으며, 부모를 모시고 있을 때는 옷가지나 기물들에 있어 비록 하찮은 것일지라도 반드시 조심성 있게 다루고 감히 장소를 바꿔놓지 않았다. 그리고 부모 곁에 있지 않을 때라도 반드시 부모님 뜻이 어떠하리라는 것을 상상하여 부모가 평소 좋아하지 않았던 일이면 감히 하지 않았다.
언젠가 여염집에 나가 있을 때 그 이웃에 목소리 높은 자가 있어 시자(侍者)가 그리 못하도록 꾸짖자, 왕이 말리면서 말하기를,
"사람이 자기 집에 있으면서 어떻게 소리를 안 낼 것인가. 그들을 편안하게 해주어야지 괴롭게 해서는 안 된다."
하였다. 언젠가 합문(閤門) 밖에 나갔다가 얼굴이 새까만 수졸(守卒)을 보고는 그의 춥고 배고픈 것을 불쌍히 여겨 그에게 옷을 주게 하고 또 날마다 남은 밥을 주게 하여 그의 복무기간이 끝날 때까지 계속하였다.
인조가 효종을 후사로 삼고 기축년 2월에 친히 인정전(仁政殿)에 납시어 왕을 세손(世孫)으로 책봉하였는데, 자태가 의젓하고 일거일동이 차분하고 우아하였으므로 백관들이 서로 하례하였으며, 강서원(講書院)을 개설하여 강관(講官)을 두고 학문을 익히었다. 그해 5월에 인조대왕이 승하하고 효종 대왕이 왕위를 잇자, 왕이 세자 자리에 올랐는데, 보도(輔導)도 더욱 짜임새가 있었거니와 반면 슬기로운 덕이 날로 성취되어갔다. 효종은 왕으로 하여금 농사일의 어려움을 알게 하기 위하여 농부를 들어오게 하여 후원(後苑)을 갈도록 하였던 바 그것을 본 왕은 말하기를,
"소가 사람에게 공로가 있고, 사람도 노력 끝에 먹을 것을 얻는 것이 바로 저렇구나."
하고, 자기가 먹을 것을 대신 밭 가는 농부에게 주기도 하였다.
왕은 기억력이 남달리 뛰어나 한번 보고 들은 것이면 잊지 않았다. 《맹자(孟子)》를 읽을 때인데, 효종이 외우어보라고 하자, 7편을 다 외우도록 글자 하나 틀리지 않았으므로 효종은 놀랍도록 기뻐하였다. 어려서부터 장성할 때까지 책읽을 시간 말고는 부모 곁을 떠난 적이 없었고, 부모가 혹 편찮기라도 하면 밤낮으로 곁에서 시중들면서 비록 물러가 쉬라고 하여도 물러가질 않았다.
신묘년003) 에 가례(嘉禮)를 치루었는데, 왕비는 김씨(金氏)로 영돈녕부사 청풍 부원군(淸風府院君) 김우명(金佑明)의 딸이었다. 임진년에 입학례(入學禮)를 행하고 선성(先聖)을 배알한 후 이어 박사(博士)에게 학업을 청했는데, 예의를 갖춘 모습이 장중하고 독서하는 음성이 카랑카랑하여, 뜰을 에워싸고 구경하던 자들이 모두가 기뻐하고 감탄하였다.
기해년004) 5월 4일 효종이 승하하여 왕은 상차(喪次)를 지켰는데, 예(禮)에서 정한 이상으로 몸이 야위도록 슬퍼하였고, 그로부터 5일 후인 기사일에 인정문(仁政門)에서 왕위에 오를 때도 너무나 슬퍼하는 모습에 뭇 신하들이 차마 얼굴을 들고 보지 못할 정도였었다. 영중추부사 이경석(李景奭)이 효종의 행장을 지어 올리니, 왕이 서찰을 내리기를,
"요 순의 도는 효제(孝悌)일 뿐이다. 따라서 요순의 정치를 하려면 당연히 요순의 도를 다해야 하는데, 선왕께서는 그것을 자신을 닦고 백성을 교화하는 근본으로 삼으셨으며, 또 세상사를 개탄한 나머지 준수하고 어진 이들을 초치하여 심복의 자리에다 두시고는 서로 도덕과 의리를 강마하여 기어코 이 세상을 삼대(三代) 시절로 끌어올리고, 대의를 만천하에 펴려고 했던 것이 사실 선왕의 뜻이었으며 평일에 세워오신 웅대한 규모였는데, 지금 이 행장 내에는 그러한 것들이 그다지 거론되지 않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사실들을 분명하게 기록하여 후세에 전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하여, 그 서찰이 나오자, 그를 본 사람들이 선왕의 업적을 천양하고 그 뜻을 이어 사업을 계속하려는 왕의 태도에 대하여 감복하지 않은 이가 없었다.
그때는 더위가 한창인 데다 여차도 비좁았기 때문에 가을까지만 거처를 다른 곳으로 옮길 것을 근신(近臣)들이 청하였다. 이에 왕이 이르기를,
"지금이 어느 때인데 거처를 가린단 말인가. 거처를 골라서 지내면 몸이야 편안하겠지만 마음이 불안한 것이다."
하였다. 10월 병진일에 효종 대왕을 영릉(寧陵)에 장사지내고 초하루·보름의 제전에 있어 심한 병이 아니면 대행을 허락치 않았으며 능침(陵寢) 참배 때는 좌우가 감동하도록 슬퍼하여 주위 모두가 따라서 슬픔을 가누지 못하였다.
그해에 드디어 노인을 우대하고, 의지할 곳 없는 자를 돌보고, 충효를 표창하고, 절의를 격려하고, 청백리를 장려하고, 전망자를 녹훈(錄勳)하는 은전을 거행하였으며, 형을 남용하는 관리는 금고에 처하고, 아약(兒弱)으로서 군적(軍籍)에 실려 군포를 징수하는 자는 그것을 일체 견면하였다. 그리고 수재로 인하여 호남·경기·호서의 세액을 면제했으며, 세미를 견감하고 북관(北關)의 공부(貢賦)도 그 수를 덜어주었고, 관서(關西)에 와 떠돌이 생활을 하는 백성들에게는 관향곡(管餉穀)을 풀어 가구 수대로 대주었으며, 내탕(內帑)에서 무명베 1천 필을 내리고 상평청(常平廳)의 백금 몇 천 냥과 각도의 감영·병영의 무명베 여러 만 필을 풀어서 견감으로 인한 부족분을 충당하였는데, 이게 바로 왕이 처음 즉위하고 나서 정사를 베풀어 사랑을 구현하기 시작한 일이었다.
즉위 1년인 경자년에 기근으로 하여, 단천(端川)의 공은(貢銀), 영동·영서의 대동미(大同米), 각도의 전세(田稅)와 노비들 공포(貢布)를 견감했으며, 떠돌이로 나선 북민(北民)들을 어사를 보내 위로하고 안집시켰다. 그리고 호구(戶口)의 법을 엄하게 하여 백성들이 감히 누락자가 없이 모두 판적(版籍)에 등재되게 하였으며, 강원도에는 여정포(餘丁布)를 내려 재앙을 당한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게 하고, 중외의 노인들에게는 쌀과 베, 명주, 솜 등을 내려주었으며, 여러 궁가(宮家)의 원당(願堂)을 혁파하고, 관북 또는 영동·영서로부터 성중으로 떠들어온 백성들은 상평청으로 하여금 쌀과 소금 등을 대주도록 명하였다.
7월에 큰 가뭄으로 인하여 기우제를 행하였다. 가을 이후에는 기우제가 없는 것이 국가 제도였지만 이때 특별히 행하였던 것이다. 각 아문이 백성을 상대로 물건을 팔거나 빌려주고 이식을 취하는 일을 금하였고, 영릉(寧陵) 성알길에 시위하는 장사(將士)들을 단속하여 길가 곡식들을 밟는 일이 없도록 하였다. 팔도에 두루 유시를 내려 유민들을 안집시키게 하도록 하교하고, 어공(御供)의 정미(精米)·향온미(香醞米)를 제감하였으며, 각도에 명하여 각기 인재를 추천하게 하였다. 해서(海西) 사람으로 상변(上變)한 자가 있었는데, 왕은 일차 심문에서 그것이 무고임을 알고는 그를 목 베고 연루되어 체포된 자 70여 명은 모두 석방하면서 식량을 주어 돌아가게 하고 이졸들에게 재산을 빼앗긴 자는 그것을 모두 찾아 되돌려주도록 하였다.
겨울에 사형수를 복심해야 했는데 도심지에 마마가 유행하고 있었으므로 대신이 외신(外臣)들을 인접하기가 곤란하다 하여 정지할 것을 청하자, 왕이 서찰을 내리기를,
"아, 천성(天性)은 사람마다 다 가지고 있는 것이다. 애초의 천성을 되찾지 못해서 악한 짓을 하게 되는 것인데, 그를 즉시 처리하지 않고서 계속 가두어만 둔다면 그의 죄로 보아서는 당연히 벌을 받아야 하지만 정상으로서는 불쌍한 것이다. 생각이 여기 미치니 나도 모르게 슬픔을 느끼는 것이다. 금년에 그 때문에 처리를 하지 않고 내년에도 또 그 때문에 처리를 못한다면 그 죄인은 모두 다 감옥 속의 귀신이 되고야 말 것이니 그는 나라 다스리는 도리가 아닌 것이다."
하고, 허락하지 않았다.
신축 2년에 도성 안에 있는 두 이원(尼院)을 철거하였다. 왕이 처음에는 중들이 교화를 어지럽히는 것을 미워하여 모두 없애려고 하였던 것인데, 불시에 다 그리 하기는 어렵다는 대신과 옥당의 건의에 따라 우선 자수(慈壽)·인수(仁壽) 두 원을 철거하도록 명하고, 나이 젊은 중은 각기 제 갈 곳으로 가게 하고 늙은이는 성밖으로 내쫓았으며, 그 원의 목재로는 학궁(學宮)과 무관(武館)을 수리하게 하였다. 그리고 중외에서 행하는 부당한 제사는 그를 모두 금하였다. 가뭄이 심하여 친히 기우제를 행하려고 했는데, 연신(筵臣)들이 성상 체후가 편치 않음을 들어 말하자, 왕이 이르기를,
"내 어찌 내 한 몸을 아껴 만성의 생명을 돌보지 않을 것인가."
하였다. 그리고 강도(江都)·남한(南漢)의 쌀을 옮겨 삼남(三南)을 진구하였다.
7월에 왕이 태묘(太廟)에 이르러 효종의 부제(袝祭)를 행하고, 진하(陳賀)·반교(頒敎)·음복연(飮福宴)을 정지하였다. 종전에는 수시로 도성 안의 양가(良家) 딸을 선발하여 시녀로 삼는 예가 있었는데, 이때 와서 그를 특별 혁파하고 일정한 법으로 삼았다. 삼남과 경기·해서의 조적(糶糴)을 일체 면제하고 이어 봄에 징수하는 미곡을 감해주게 했으며, 태복시의 말먹이 곡식 1천여 석을 방출하여 굶주린 백성을 먹이게 하였다.
임인 3년 봄에 진휼 어사(賑恤御史)를 양남에 보내 편리한 대로 일을 보도록 하였으며, 절행이 있는 영남 사람에게 차등을 두어 미곡을 하사하고, 서북면의 감사들에게 명하여 인재를 발굴하여 알리게 하였다. 그리고 경기도에 전지 측량을 실시하고 호남에도 대동법을 시행하였다.
계묘 4년에 가뭄으로 하여 자신을 책하는 분부를 내리고 대소 신료들에게 서로 공경하고 협조하여 하늘의 견책에 답하도록 명했으며, 여러 궁가의 면세 전결(免稅田結)을 정하면서 그 수를 차등을 두었고 시장(柴塲)도 한 곳만 남겨두고 많이 점유하지 못하게 하였으며, 어장(魚塲)·망장(網塲)은 선조조(宣祖朝)에서 하사받은 것 만을 인정하되 그나마 하사받은 당사자에 한해서만 인정하도록 하였다.
갑진 5년에 내수사 노비의 신공(身貢)에 있어 이미 죽은 자에게도 추징하던 것을 무술년 이후부터는 그를 탕감하였다. 성변(星變)으로 인하여 대소 뭇 신하에게 명하여 정사의 득실에 대해 갖추 아뢰게 하고, 내사옥(內司獄)의 죄수를 석방했으며 상의원의 비단짜는 일도 정지시켰다.
을사 6년 4월에 온양의 온천에 거둥하였다. 그보다 앞서 왕이 안질이 있었는데 오래도록 낫지 않아 의원이 아뢰기를 온천 목욕이 좋다고 하여 한 달 남짓 목욕 끝에 완쾌를 보았다. 그 도내에 명하여, 기로(耆老)를 예우하고 효제(孝悌)를 천거하며 충현(忠賢)에 제를 올리고 전조(田租)를 감면하고 과거(科擧)를 보이도록 하고 돌아와서도 기로 우대의 은전을 연로(沿路)에까지 베풀었으며 그후 누차 거둥을 하였지만 그때마다 모두 그렇게 하였다.
10월에는 풍뢰(風雷)의 이변이 있었다. 왕은 재야의 유신(儒臣)들에게 실봉(實封)을 갖추어 아뢰도록 명하고, 백성의 전결이 몰래 궁가의 면세 전결에 등록되는 것을 일체 금지하였다.
병오 7년에도 흉년 때문에 자신을 죄주는 분부를 내렸고, 영남 곡식은 영동·영서로 해서 곡식은 북관으로 옮겨 굶주린 백성을 먹였으며, 목화가 품귀하다 하여 포보(砲保)가 바치는 포목 및 각 관아 노비의 신공을 차등을 두어 견감하였다. 그리고 함경도 9개 읍의 전세 및 우황(牛黃)·표피(豹皮) 등 공물도 그를 면제하였다.
정미 8년에 한재로 인하여 자신을 책하는 분부를 내리고, 각사 노비의 신공 절반을 감했으며, 저화(楮貨) 값을 특감하였다. 국가 제도에 노비들 신공 이외에 저화 값이라는 것이 또 있었는데, 그 후 저화가 없어졌는데도 그 값을 환산하여 베를 징수하여 오던 것을 지금 와서 특감하고 그를 영(令)으로 삼았다.
7월에 친히 사직에 제사하여 비를 빌고 옥중 죄수들을 재심했으며, 바른말을 널리 구하고 경기 지방의 전세와 대동미를 모두 견감하였으며, 각사의 경비도 모두 절반씩 감하게 하고, 호조의 염세도 감하고 양서(兩西)의 징수할 쌀을 견감했으며, 북로 조적의 포흠분을 탕척하였다. 그리고 경기 관내에서 번을 드는 기병(騎兵) 및 각진의 수군(水軍)이 매월 번드는 조로 납입하는 군포도 그것을 절반으로 줄였으며, 각도 노비의 신공 중 아직 거두지 못한 것도 모두 탕척하였다.
무신 9년에 성변으로 인하여 자신을 책하는 분부를 내리고 뭇 신하를 경계하여, 경건한 자세로 봉직하고 인재 발굴에 힘쓰며 모든 옥사를 유체없이 제때제때 처리하도록 하였으며, 강도의 쌀 일만 석과 남한 산성의 쌀 오천 석을 풀어 경기 관내의 기민을 먹이게 하였다. 예조가 성변이 이미 사라졌으니 평상의 수라를 다시 들도록 청하자, 왕이 이르기를,
"기근이 들어 백성들이 의지할 곳을 잃었다는 소식을 들을 때마다 늘 마음이 아파 밥이 잘 넘어가지 않는데 무슨 마음으로 평상 수라를 들겠는가. 가을걷이 후에나 할 일이다."
하였다.
기유 10년에 영남 지방의 기근으로 하여 각사 노비 중에 을사년 이후로 신공을 징수할 수 없는 자를 조사하여 그 신공을 견감해주도록 명하고, 여러 궁가가 떼어받은 곳을 조사하여 주인이 있는 백성의 전지 및 떼어받기 이전에 백성들이 일구어 경작했던 땅이 있으면 모두 그들에게로 되돌려주게 하였다. 세시 때 송엽(松葉) 바치는 일에 대하여, 대신이 청하기를, 그것은 기도에 가까운 일로 정도가 아니니 없앴으면 좋겠다고 하였다. 왕은 그 청을 받아들여 도장(桃杖)·도지(桃枝)·인승(人勝)·채화(綵畵)까지도 모두 함께 없애도록 명하였다. 그리고 성씨가 같으면 관향이 다르더라도 서로 혼인을 못하게 하였다. 종전의 나라 풍속은 성씨가 비록 같더라도 관향만 서로 틀리면 으레 혼인을 해왔었는데 이때 와서 금한 것이다.
10월에 처음으로 신덕 왕후(神德王后) 강씨(康氏)를 태묘에 합부하고 의식에 맞추어 휘호를 올리고 능침도 복원하였다. 왕후는 태조가 개국 때 여러 해 동안 중전 자리를 지키고 있었는데, 태조가 승하하자 신하들이 잘못하여 합부의 예를 거행하지 못했으므로 사람이나 신도나 오래도록 억울하게 여기던 일이었고 그에 대한 조정 논의가 가끔 발발하기도 하였지만 열성조에서 미처 못했던 일이었는데 지금 와서야 비로소 그동안 빠져 있던 전례를 거행한 것이다. 능침을 봉하고 제를 올리던 날 소나기가 정릉(貞陵) 일대에 갑자기 쏟아져 백성들은 그 비를 일러 세원우(洗冤雨)라고 하였다. 천둥·우박의 재이로 하여 중외의 죄수들을 너그럽게 처결하고 대동미 징수도 그 수를 감하였다.
경술 11년에 흉년 때문에 각 전(殿)의 향온미를 감량하고 강화도 쌀 3만 석을 실어다가 서울에서 발매했으며, 호조의 염철포(鹽鐵布)를 전라도에다 끊어주어 기민 구제에 충당하게 하고, 어영군(御營軍)에 번드는 일을 정지하여 그 보미(保米)를 각기 자기 도에 유치하였다가 진구에 쓰게 하였다. 그리고 제주(濟州)에 기근이 들어 호남 및 통영(統營) 곡식을 옮겨다가 진구하게 하고 본주의 노비들 신공은 모두 제감했으며, 호조와 진휼청에 명하여 춥고 굶주린 사람에게 곡식과 옷가지를 차등을 두어 주급하게 하고, 각도에도 포공(布貢)의 수를 감하였다.
신해 12년 봄에 큰 기근이 들어 왕이 하교하기를,
"이렇게 큰 흉년을 당하여 백성들을 독려하여 조세를 징수할 수는 없는 일이니 삼남과 원양·황해·경기의 전세를 모두 본도에 유치하였다가 굶주린 백성들을 구제하라."
하고, 도심 안에는 세 곳에 진청(賑廳)을 두어 재신(宰臣)이 그 일을 관리하게 하였으며, 각도에는 읍과 촌락의 원근을 헤아려 기민 먹이는 곳을 군데군데 설치하고 미음을 쑤어 굶주리고 부황 난 자를 먹이게 하였다. 그리고 건량(乾粮)을 대주면서 농사를 지을 수 있게 해주고, 진청에서는 조곡의 값을 내려 뛰는 값을 막도록 명하였다.
여름에는 또 보리 농사가 크게 흉작이어서 굶어죽은 자가 길에 즐비하였으므로 중외에 명하여 창고의 것을 모두 털어내어 기민 먹이는 일을 계속하게 하고 병든 자에게는 의약을 대주고 죽은 자는 장례를 치뤄주었으며 버려진 아이는 그를 수양하여 자식으로 삼게 만들었다. 그리하여 서울 밖에 사는 백성들도 모두 관청을 찾아 먹여주기를 바랐으며 그렇게 했기 때문에 비록 의지할 곳 없이 금방 죽어가는 다급한 상황에서도 저들끼리 모여 사람을 죽이거나 한 일이 없어 죽은 자가 유한없이 죽어갔으며 살아남은 자도 자기 고장으로 다시 갈 수가 있었다.
가을에는 각도에 풍년이 들어 그다지 가꾸지 않고서 수확하는 자도 있었다. 그리하여 동서 교외에다 단을 만들어 굶주려 죽고 마마에 죽은 사람들을 제사 지내도록 명하고, 각도의 진상품은 두 자전(慈殿)에 올리는 것만 그대로 두고 나머지는 다 정파하였으며, 어사를 제주에 보내 세 읍의 백성들을 위로하고 무명베 4천 필, 보리 종자 2천 석, 쌀 2천 석을 수송하여 도와주게 하였고, 정상적으로 바치던 토산품도 그 모두를 견면하였다. 그리고 각도에도 토산품 바치는 것을 명년부터 계축년까지 그 수를 감하도록 하였다.
임자 13년에 재신 및 육조의 참의들에게 인재를 추천하도록 명하고, 중외의 죄수들 중 사형수 이하를 관대히 처리하며 병오년 이전의 조적 포흠분을 모두 물시하고 각 아문에서 받을 조세도 모두 탕감하도록 명하였다.
계축 14년에 애통한 심사와 함께 농사에 힘쓰라는 하교를 팔도에 내리고 한재로 인하여 억울한 죄인이 있는가를 살폈으며, 정전을 피하고, 수라상 음식수를 줄이고, 술을 금하였다. 단오첩(端午帖)을 지어올리자, 왕이 이르기를,
"가뭄이 이렇게 심할 때는 이와 같이 실속없는 글월은 짓지 않는 것이 좋다."
하였다. 신해년 이전의 군병과 노비 중 도망갔거나 죽은 자 및 임자년에 상납못한 것 또는 계축년에 바쳐야 할 군포들을 일체 물시하도록 명하였고, 영릉(寧陵) 석물에 틈이 생겨 빗물이 스며들 염려가 있다 하여 9월에 구릉(舊陵)을 열어보았으나 탈이 없었다. 10월 계묘일에 여주(驪州) 홍제동(弘濟洞)으로 옮겨 모셨는데, 영구가 지나간 5개 읍에 대하여 대동미 징수를 면제하고 경기에는 봄에 징수할 쌀을 차등을 두어 감해주었으며 경기·황해·전라·원양 4개 도의 경술년 전세 미수분을 탕감하였다.
갑인 15년 2월에 인선 왕대비(仁宣王大妃)가 승하하여 6월 정유일에 영릉에 부장하였다. 처음 효종 상사 때, 대신이 여러 유신(儒臣)들과 논의하여 자의 대비(慈懿大妃)가 입어야 할 복을 기년으로 정했었는데 그후 허목(許穆)이 상소하면서 《의례(儀禮)》 주소의 설을 인용하고, 차장자의 복으로 3년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왕은 대신·유신에게 다시 물어보도록 명하여, 송시열(宋時烈)·송준길(宋浚吉) 등이 대답하기를,
"주소에 그 설이 있음은 물론 알지마는 그 주소 내용에 차자는 기년이라는 뜻도 있어, 하나만을 고집하고 하나는 버릴 수는 없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의심스러운 주소의 설을 경솔하게 채택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가까이 명(明)나라 제도 또는 국가 전례를 따르는 것이 오히려 허물이 적을 것입니다."
하였고, 대신들도 종전 소견을 고집하여 국가 전례를 들어 대답했기 때문에 다시 고치지 않고 기년복을 그대로 했던 것이다. 윤선도(尹善道)가 앞장서서, 송시열 등이 효종을 깎아내린 것이라고 주창하자, 그의 말에 호응하는 자가 꼬리를 물고 일어났으므로 왕이 이르기를,
"기해년 복제 강정은 사실 시왕의 칙령(勅令)에 따른 것이었기 때문에 송시열 등 여러 사람들도 당초 수의 때 대신의 논의를 그대로 따랐던 것이다. 급기야 경자년 이후 여러 상소들이 오로지 시열 만을 책망하고 나온 이후에야 시열 등 여러 사람이 비로소 고례(古禮)를 인용 쟁변하기 시작하여 싸우는 한 마당이 되고 말았지만 그러나 그것은 원래 국가가 채택하여 쓰지 않은 것이다."
하였다. 그것은 시열 등이 비록 차자 중자 등의 논의를 하기는 하였으나 국가에서 이미 그들 말을 채택하여 쓴 적이 없고 허목도 삼년이라는 말을 하기는 하였지만 역시 국가에서는 그의 말도 채택한 적이 없이 다만 10여 년을 두고 피차 싸움질로만 끝난 하나의 공담(空談)에 불과했던 것인데, 그래도 시열 등을 궁지에 몰아넣으려고 한 자들이 번번이 예를 논한답시고 들고 나왔기 때문에 왕은 그들 속을 훤히 꿰뚫어보고서 이 하교를 내렸던 것이며 또, 말은 동쪽에 있어도 뜻은 서쪽에 있는 것이라고 물리치기도 하였던 것이다.
이때 와서 모비(母妃) 상사에 예관이 전번 상사 때 국조 전례를 그대로 따랐던 근본 뜻을 까맣게 모르고서 먼저 여쭈어보지도 않고 자의 대비 복제를 대뜸 대공으로 정하였던 것인데, 7월에 와서 왕이 공경과 삼사(三司)를 빈청에 모이게 하고, 자의 대비가 인선 왕비 상에 어느 복을 입어야 옳은가를 물었던 것이다. 공경 이하가 왕의 뜻에 맞지 않게 대답을 잘못하자, 왕은 이르기를,
"기해년 상사 때는 아들을 위하여 기년을 입는 국조 전례를 그대로 따랐을 뿐이다. 국조 전례에 의하면 비록 장자·중자의 구별 없이 그냥 기년이지만 자의 대비로서는 선왕에 대하여 의당 장자를 위한 기년인 것으로 하였을 것이니 이번 상사에도 당연히 장부(長婦)를 위한 기년으로 해야 할 것이다."
하고, 대공을 고쳐 기년으로 하도록 특명하고, 먼저 여쭈어보지 않았다 하여 예관에게 죄를 내리고, 대답이 묻는 뜻과 배치되었다 하여 수상을 꾸짖었던 것이다.
왕은 봄부터 거상하면서 몸을 너무 돌보지 않아 피로가 쌓여갔다. 8월 7일에 재신을 불러 들어오게 하여 일을 논의하려다가 갑자기 병이 발발하여 그리 못했는데 그달 18일 기유에 창덕궁 재려(齋廬)에서 뭇 신하들을 다 버리고 영원히 떠나갔다. 그때 춘추가 겨우 34세였기에 도성 안의 사서(士庶)는 물론 산골 막바지 우매한 백성들까지도 슬퍼 울부짖으며 지극한 덕을 사모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아, 슬픈 일이었다. 신하들이 왕의 공덕을 논의한 끝에 시호를 ‘순문 숙무 경인 창효(純文肅武敬仁彰孝)’라 올리고, 묘호는 ‘현종(顯宗)’이라 하였으며 그 해 12월 13일 임인에 숭능(崇陵)에다 장례를 모셨다.
왕은 타고난 바탕이 성스러웠고 어려서부터 슬기로운 덕이 있어 문안(問安)·시선(視膳)을 할 때 이미 주 문왕(周文王) 같은 행실이 있었다. 급기야 왕위에 올라 왕의 예를 행하면서는 그 효자로서의 굵직굵직한 덕목들이야 모든 신민들이 다 보고 들어 아는 사실이지만 그 밖의 두 대비(大妃)를 섬기는 일에 있어서도 정성과 예가 빈틈이 없었고 부드러운 얼굴 기쁜 마음으로 화기가 항상 넘쳐흘렀다. 대왕 대비가 완산부 부인(完山府夫人) 상을 당하여 너무 슬퍼하다가 병이 더치자 왕은 뜰에 늘 앉아서 의원을 불러 약문의를 하고 약물은 반드시 손수 가져다가 올렸으므로 그를 듣는 자 모두 감동하였다.
왕대비가 처음에는 통명전(通明殿)에서 기거하였는데 왕의 거소와 조금 사이가 뜨다 하여 새로 집상전(集祥殿)을 지어 옮겨모시고 밤낮 시봉에 편리하도록 하였으며, 대비에게 숙환이 있었는데 왕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정성을 다해 마음에 위안을 주었으므로 대비가 항상 이르기를,
"왕이 언제나 곁에 있어 주어 병이 몸에서 다 떠난 것 같다."
하였다. 일찍이 대비를 모시고 온천 행차를 하였다가 효험을 보고는 그 도내에다 은혜를 베풀고 노인들에게는 벼슬을 내렸으며, 환궁해서도 종척(宗戚)들 또는 조신(朝臣)으로서 나이 많은 자 및 부모가 있는 자들에게도 은혜를 베풀고 이어 중외의 사민(士民)들에게까지 미쳤다. 판서 박장원(朴長遠)이 효자였는데 자기 어머니보다 먼저 죽자, 특명으로 그의 어머니가 죽을 때까지 늠록을 내리게 하는 등, 자기 마음을 미루어 다른 효자들에게 미치는 덕이 그러했기에 백성들이 감화를 받아 모두 효도에 대한 관심이 대단했었다.
왕에게는 다섯 자매가 있었는데 매우 서로 사랑하고 은우(恩遇)도 골고루 내렸다. 색다른 음식이 있으면 반드시 나눠먹고 병이 있다고 들으면 놀라고 걱정되어 소식을 묻고 약물을 보내는 일이 끊기지 않았으며, 누가 죽기라도 하면 슬픔을 가누지 못하였다. 소현 세자의 딸이 황창 부위(黃昌副尉) 변광보(邊光輔)에게 시집갔었는데, 그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슬픈 표정을 지으며 이르기를,
"선왕조에서 여러 부마(駙馬)들 못지 않게 사랑을 베푸셨는데 그것을 생각할 때 지금 내 심정이 어떻겠는가. 특별히 후하게 돌보아 선왕께서 가까이 대하시던 뜻에 손상이 없도록 하라."
하였다. 종족(宗族) 사이에도 돈목하여 은혜가 고루고루 미쳐갔고, 사이의 친소(親疎)에 따라 그에 상응하는 보살핌을 가했으며, 귀척(貴戚)에 있어서 대우는 비록 융숭히 할지라도 역시 사사 일로 하여 공(公)을 해치는 일은 하지 않았다. 그리고 여러 궁가의 노복들도 조금이라도 잘못을 범하면 반드시 담당자를 시켜 법으로 엄히 다스리게 하였다.
유신 송시열·송준길 등이 효종 시절부터 서로 의기 상합하여 효종이 두 신으로 하여금 춘궁(春宮)에서 왕을 모시게 하였는데, 정상적인 도의와 예법을 가르치기도 하고 간접적인 방법으로 깨우치고 권유하기도 하였으며 왕은 그때마다 마음을 기울여 받아들여 날이 갈수록 진보가 있었다. 그러나 오랜 기간을 두고 그 일을 전임하기는 시열보다 준길이 더하였었다. 왕이 즉위하여서는 그 때문에도 두 신에 대한 예우가 더욱 융숭했고 나라에 무슨 일이 있으면 반드시 자문을 구하였으며, 그 밖에 당시 학문의 선비로 윤선거(尹宣擧) 같은 몇몇 사람도 역시 초빙하여, 모두 다 남다른 예우를 하였던 것이다.
기해년 겨울 시열이 비방을 당하고 그 때문에 물러갈 것을 청했을 때 왕은 그를 만류하다 못해,
"내가 차라리 가서 보리라."
하는 하교를 하였고, 뒤 이어 준길마저 물러가자, 왕은 그 두 신이 생각나 계속 불렀으며, 혹은 사관 혹은 승지를 보내 한장 서찰이 열 줄이나 되도록 그 내용이 지성스러웠다. 혹 세시 때면 잊지 않고 물어주기도 하고, 혹은 흉년에 돌보기도 하며, 초야에 있어도 사람을 시켜 좋은 찬수를 내리기도 하고, 도성에 들어오면 반드시 식량과 육류를 대었다. 그리고 시열이 예를 논했다가 남에게 배척을 당하자, 왕은 상하의 사이를 헐뜯고 이간질한다 하여 그 사람을 내쫓고 시열은 결국 재상에까지 이르렀던 것이다. 준길이 세상을 뜨자 하교하기를,
"선왕조 시절에 천고에 없는 사랑과 예우를 하였고, 과인의 몸에 있어서는 교훈의 공로가 감반(甘盤) 정도가 아니었다. 지금 와서 그 시절을 생각하면 감회가 새롭고 슬퍼지는 것이다."
하고, 영의정을 추증하도록 명하였다.
왕은 학문에 정신을 쓰고 의리를 강구하였다. 일찍이 강관(講官)으로 하여금 선유의 인심도심설(人心道心說)을 써 들여오게 하여 그 이치를 살피고 완색하였으며, 참찬 송준길이 태극(太極) 음양(陰陽)에 관한 것을 그림으로 올리고 이어 차자를 올려, 양이 다하면 반드시 다시 오는[陽復] 이치를 아뢰자 왕은 그것을 가상한 마음으로 받아들였다. 병이 아니면 반드시 경연에 나왔고 또 역사 강독을 좋아하여 임금이 덕을 잘 닦고 못 닦았던 일 또는 정치의 득실, 민생의 휴척에 대한 진지한 토론을 하여 그를 거울로 삼았는데 견해가 고명하여 항상 강관보다 한 수 위였었다. 《서경(書經)》을 강하다가, "그대의 자리를 삼가라.[愼乃在位]" 한 그 대목에 이르러 왕이 이르기를,
"임금이 자리를 지키는 방법이 ‘신(愼)’ 이 한 글자보다 더 중한 것이 없겠다. ‘기(幾)’니 ‘강(康)’이니 한 것들은 ‘신’을 하는 데 있어 가장 긴요한 부분을 말한 것으로서 ‘기’란 무슨 생각이 싹틀 때를 말하고, ‘강’이란 무사태평한 때를 말한 것으로서 더욱 삼가야만 할 때인 것이다."
하였고, 당 고조(唐高祖)의 세자 건성(建成)을 논하면서는 이르기를,
"명 태종(明太宗) 때 인종(仁宗)이 태자였는데, 한왕(漢王)인 고후(高煦)의 사람됨이 선량하지 못하였으나, 인종이 그를 은혜와 사랑으로 대했기 때문에 인종의 세대가 끝나도록 그가 감히 딴 마음을 먹지 못했었다. 건성도 태종(太宗)을 그렇게 대했더라면 무슨 피를 흘리는 변고005) 가 있었겠는가."
하였으며, 송 태조(宋太祖)가 한잔 술로 병권을 해제한 일006) 을 논하면서는 강관이 아뢰기를,
"이것은 권모술수에 가깝습니다."
하니, 왕이 이르기를,
"아무려면 어떤가. 그게 바로 사람을 즐겁게 해주면서 부리는 방법인 것이야."
하였다. 진종(眞宗)이 천서(天書)를 태묘(太廟)에 고한 일007) 을 논하면서는 이르기를,
"자신을 속이는 것도 안 될 일인데, 어떻게 하늘에 계신 조종 열성의 영령을 속인다는 것인가. 진종의 초기 정사는 볼 만한 것들이 있었으나 간사한 소인배들 때문에 끝마무리가 잘 되지 못 했었다. 깊이 경계할 일이로다."
하였고, 또 언젠가 본조의 성삼문(成三問) 일을 논했는데, 왕이 이르기를,
"성삼문 등은 옛사람에다 비유하자면 명(明)나라 방효유(方孝孺)008) 등 몇몇 사람의 부류인 것이다."
하였다. 성삼문 일에 있어, 여러 조정을 거치는 동안 주상 앞에서 혹 그 사실을 아뢴 자도 있었지만 그를 포상하는 뜻으로 하교하기는 이번이 처음이었던 것이다. 왕이 경연에 나와 강설할 때면 이와 비슷한 일들이 매우 많아 이루 다 기록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또 정강(停講)하는 날이면 유신들로 하여금 역사와 전기를 열람하여 고사(故事)를 써서 올리게 하여 깨우침을 받고 사실을 알려고도 하였으며, 밤이면 자주 근신(近臣)을 불러 경사(經史)에 대해 진지한 강론을 하고 때로는 백성들의 일까지 물으면서 겉다르고 속다른 것 없이 마치 가정집의 부자간 사이처럼 허심탄회하게 의견을 개진하곤 하였다.
눈병이 늘 있었기에 촛불을 대하여 책 보는 일을 두고, 눈이 더 상할까 염려스럽다고 말하는 신료가 있으면 왕이 이르기를,
"겨울밤이 길고 또 잠이 없어 책을 볼 수 밖에 없다."
하였다. 그후 눈병이 심해지자, 옥당으로 하여금 사서(四書)·오경(五經)의 글자를 크게 써 들여오게 하여 보기에 편리하도록 하는 등 비록 병환 속에 있으면서도 그 정도로 학문하는 데 전일하였다.
대신이라면 믿고 맡겨 체통을 존중히 하고, 말을 하면 종합하여 받아들여 그를 정사에 반영하였으며, 병이 들면 의원을 보내고 약도 보내고 죽으면 3년 동안은 그대로 녹을 주고, 덕이 있고 연로한 자에게는 특별히 궤장(几杖)을 내려 우대하고 존경하였으며, 뭇 신하를 대하는 데도 너그럽고 인후하였다. 항상 이르는 말이,
"임금으로서 시기와 의심으로 아래를 대하면 아래서는 틀림없이 불안한 마음이 있는 것이다. 오직 정성껏 대해야만 할 일이다."
하였다.
언로(言路)를 열기에 힘써, 신료들 중에 비록 남의 사사로운 일만 들추어 내고 성질이 과격한 자가 있어도 반드시 마음을 열고 받아들이고 너그럽게 포용하여 혹은 포장을 내리기도 하고 혹은 장려하기도 하며, 비록 초야에 있는 미천한 자의 말이라도 반드시 그도 채택하여 혹 벼슬을 내리거나 혹은 상을 내렸다. 흉년이 들에 대신이 백관들 녹봉을 감할 것을 청하자, 왕이 이르기를,
"선왕조에서도 흉년이 들었을 때 뭇 신하들이 녹봉 감할 것을 청한 일이 있었지만 선왕은 그를 허락 않고 어공(御供) 만을 재감하도록 하였었다. 지금도 비록 모자란 상태지만 백관들 녹봉을 감해서는 안 되고 어공 중에 아직도 재감해야 할 것들이 많으니 다시 뽑아내어 아뢰도록 하라."
하였고, 신하들이 죽었을 때 그가 혹 나라 위해 남다른 노고를 하였거나 옳은 일을 하고 청렴 근신으로 들먹여진 자이면 예부(例賻) 이외에 별도로 관재(棺材)·역정(役丁)을 내리고 아울러 처자(妻子)의 생활까지 돌보았으며, 방백 수령이 하직 인사를 올릴 때면 질병이 아닌 한 곧 인견하고 백성 다스리는 도리를 묻기도 하고 사랑으로 이끄는 방법을 거듭 당부하기도 하였다.
인재 수용에 있어서도 멀고 궁벽한 곳이라 하여 제외되지 않았다. 서북(西北) 두 도가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 그곳 인사들이 벼슬에 대한 희망을 포기하기 때문에 두 도에 다 중신(重臣)을 보내 과거를 보여 문사·무사를 취하게 하고, 제주도는 멀리 바다 가운데 있어 왕화(王化)의 혜택을 보지 못한다 하여 두 번이나 근신(近臣)을 보내 인재를 취하도록 하였으므로 그 고장 사람들 모두가 고무되었다.
충신(忠臣)·현사(賢士)와 공렬(功烈)이나 덕의(德義)가 특수한 자는 옛분이거나 근세 사람이거나 관계 없이 사우를 건립하고 관작을 추증하기도 하고, 혹은 비를 세우고 분묘를 표하기도 하며, 혹은 그 후손들에게 벼슬을 주기도 하고, 혹은 조세 부역 등을 면제하기도 하여 거의 누락자가 없었으며, 효자(孝子)·정부(貞婦)라면 곧 정표(旌表)를 가하여 아무리 멀리 떨어진 곳 미천한 백성일지라도 역시 들추어 알리게 하여 혜택이 두루 미쳤다.
고려(高麗) 시대의 원침(園寢)이 오래도록 묵어있는 것을 예관을 보내 새로 손을 보게 하고 또 3년마다 한 차례씩 봉심하도록 규정을 두었다. 중종 대왕의 폐비(廢妃) 신씨(愼氏)의 신주가 그의 친가편 외손 집에 붙여 있는데, 너무 가난하여 제사를 차리지 못할 처지였다. 이를 들은 왕은 측은한 생각이 들어 그 신주를 신씨들 본종(本宗)이 맞게 하고, 총호관(塚戶官)을 두었으며 제수(祭需)를 대주었다. 지극한 정성으로 하늘을 경외하고 백성을 위해 부지런하였으며, 기우제를 올릴 때면 비록 친히 제사지내는 것이 아니더라도 반드시 궁중에서 시행에 앞서 재계하고 밤새도록 노천에서 묵도(默禱)하다가 제사가 끝날 때쯤에 비로소 스스로 안정하였다.
만약 천재지변이나 흉년을 만나면 신료들을 접견하고 진구책(賑救策)을 강구하는 외에 위의 것을 덜어 백성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일이면 모든 방법을 다 썼다. 언젠가 옥당의 차자로 인하여 답하기를,
"내가 덕이 부족하여 신명에게 죄를 얻고 수재·한재·풍재·상재가 없는 해가 없이 우리 적자들로 하여금 이렇게 망극한 재앙을 당하게 하고 있는 것이다. 생각이 거기에 미치면 밤중에라도 놀라 일어나, 저 하늘이 내게 직접 화를 내리지 않고 창생들이 대신 그 화를 받게 하고 있는 것을 슬프게 여긴다. 차라리 당장이라도 죽여 조금이나마 민생의 고달픔에 답이 되었으며 좋겠다."
하였고, 또 언젠가 시신(侍臣)들에게 이르기를,
"백성들이 굶주리고 있는 것을 생각할 때마다 차라리 살고 싶은 마음이 없는 것이다. 단 일분이라도 백성들을 살릴 수 있는 길이 있다면 무슨 물건을 내가 아끼겠는가."
하기도 하였다. 신하들이 혹 기민 구제에 있어, 건량(乾粮)을 주면 되지 꼭 죽을 쑤어줄 것은 없다고 말하는 자가 있으면, 왕이 이르기를,
"백성을 편안하게 만들 장구한 방법으로 말한다면 건량으로 주는 것이 물론 좋지만 그러나 저 떠돌이 백성들을 어떻게 서서 보고만 있고 구제를 않을 것인가."
하였다. 그리고 진정(賑政)이 끝나면 반드시 어사를 내보내 수재(守宰)들이 잘했는가 못했는가를 탐문하여 승진 파출을 결정하게 하였다.
신해년에 와서 팔도 전역에 기근이 들고 이어 마마가 크게 유행하자, 왕은 정성과 생각을 다 짜내고 밤낮으로 노심초사하여 무슨 어려운 방법으로든지 뭇 백성들 입에 곡식알을 넣어줄 수 있는 길이면 온갖 방법을 다 썼을 뿐만 아니라 국내에 유시를 내려 해묵은 포흠은 일체 탕감하고 가벼운 죄수를 풀어주며 버려져 있던 인재를 다시 서용하게 하였으므로 시골 아낙들이 그 유시를 언문으로 번역하여 서로 외우면서 감격의 눈물을 흘리고 죽음이 있는 것도 다 잊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천재가 유행한 것이 나라를 병들게 한 것이 아니라 도리어 나라를 튼튼하게 해주었고, 백성이 죽고 물건이 모자랐던 것이 원망의 대상이 아니라 도리어 덕으로 변했으니, 그 위태로운 상황을 오히려 안정으로 바꿔놓은 공로야말로 사실 중흥(中興) 재조(再造)와 같다고 할 것이며 만약 그 난이(難易)를 따지기로 하면 아마 중흥 재조보다 더 어려웠을 것이다.
온천 행차를 위하여 길을 닦으라고 하면서도, 너무 넓게 하여 백성들 전지에 피해를 주지 말고 가마(駕馬)가 겨우 갈 정도로만 하게 했으며, 행차를 마치고는 곡식 손상 여부를 묻고 휘장을 친 근처에 조금이라도 손상을 입은 곳이 있으면 즉시 댓가를 넉넉히 쳐주도록 하였다. 우리 나라는 원래 호구(戶口)에 대한 부세가 없이 군병(軍兵)의 납포(納布)만으로 경상비를 충당해왔기 때문에 백성들이 오랜 기간 그에 시달려 왔었는데, 왕은 그 폐단의 원인이 어디 있다는 것을 알고 일대 변통을 꾀하여 영원히 갈 수 있는 일정한 제도를 만들려고 했다가 미처 못하였고, 각사 노비의 공포(貢布)가 일방적으로 과중하여 오랜 고질적 폐단이었는데, 왕은 내노(內奴)의 공포를 감하여 받도록 특별 명령을 하면서 다른 공포까지 아울러 똑같이 감하도록 하여 그때문에 탁지부(度支部)및 내수사(內需司) 재원이 턱없이 부족했지만 왕은 개의하지 않았다.
진휼청(賑恤廳)을 별도 설치하여 재능과 식견 있는 재신을 골라 그 일을 맡게 하면서 진구하고 나머지를 항상 비축하였다가 백성들 역사가 있을 때 그를 돕게 하였고, 선왕조 시절에 부세의 균등과 백성들 편의를 위하여 양호(兩湖)에 대동법을 시행하면서 호남의 산군(山郡)에는 미처 시행을 못했었는데, 왕은 그 제도가 잘 시행되고 있는 뒤를 이어 더욱 더 세분화하고 빠진 곳 없이 시행되도록 하였다.
왕은 집안 법도도 매우 근엄하여 궁중이 숙연하고 안의 말이 밖으로 나오거나 밖의 말이 안에까지 들어가는 일이 없었다. 간관(諫官)이 언젠가 척속(戚屬) 궁금(宮禁)에 관한 말을 하면서 그 말이 사실과는 달랐었는데 왕이 이르기를,
"내가 참으로 털끝만큼도 사사로운 뜻이 없다면 남이 그렇게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사실이 있으면 고치고 없으면 더 노력하는 것이지, 비록 사실 아닌 말을 했다 하더라도 혐의로울 게 뭐가 있겠는가."
하였고, 또 언젠가는 장번 내관(長番內官)이 휴가를 받아 고향에 내려가면서 지나가는 길에서 횡포를 부렸다 하여 그 내관을 꾸짖어 내쫓고, 그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하여 감사까지 추고하였다.
왕은 천성이 독실하고 명예 같은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여 궁중에 있으면서 하는 일들에 좋은 점이 많았지만 남이 듣고 아는 것이 싫어서 밖으로 말을 내지 못하게 했기 때문에 외인들이 못 들은 것들이 많았고, 더욱 검약을 좋아하여 겉옷을 제외하고는 비단을 입지 않았다. 질환이 있어 신료들을 대내에서 접견한 적이 있었는데, 깔고 있는 자리가 많이 해졌는데도 그대로 깔고 있어 신료들이 물러나와 감탄한 일도 있었다.
왕은 또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여 군정(軍政)을 늘 보살피고 장신(將臣)들을 인접하여 지칠 줄 모르고 의견교환을 하였으며, 혹 후원에 나가 열무(閱武)도 하고, 혹은 행차 시기를 이용하여 관병(觀兵)도 하였다. 그리하여 행진(行陣)하는 법 또는 병갑(兵甲) 제도에 있어 모든 것을 다 강론하고 병조 판서 김좌명(金佐明)이 중국에서 간행한 《기효신서(紀効新書)》 및 《연병실기(鍊兵實紀)》 등의 서적을 올리자, 왕은 즉시 그를 반포하고 그대로 익히도록 하였다. 그리고 정초군(精抄軍)을 두어 병조 판서로 하여금 대장을 겸임하게 하였는데, 그는 정용한 군대를 육성하고 군량·군기 등을 비축하여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리고 또 특별히 어사를 내보내 해방(海防)을 순찰하고 주사(舟師)를 정비하게 하려고 했다가 미처 못했는데, 왕이 그렇게 무략(武略)을 숭상하고 군대에 관심이 깊었던 것은 숙위(宿衛)를 엄히 하고 국경지대를 튼튼히 하기 위해서 뿐만이 아니라 세상의 변천 상황을 묵묵히 지켜보았다가 어떤 기회가 오면 무엇인가 결행하여 선왕이 못 이룬 뜻을 이어보자는 것이었다.
대각이 언젠가, 쓸모없는 병력을 파해버리지 않는다고 간하자, 왕이 이르기를,
"나도 군대가 좋아서 그러는 것 아니다. 깊이 생각해보면 내 뜻을 알 것이다. 나도 국가를 위망의 지경에다 놓아두고 군대만을 일삼는 사람은 아니다."
하였다. 또 언젠가는 시신(侍臣)들과 사대(事大) 교린(交隣)에 관하여 논했는데, 상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말하는 자가 있었다. 왕은 탄식하며 이르기를,
"사대와 교린이 같은 것이 아니다. 내 비록 나이 적고 덕이 부족하나 조종 백세의 치욕을 어떻게 잊을 것인가."
하였다. 북녘 지대의 목수(牧守)들이 무관 출신이 많아 탐욕스럽고 방종하자, 다시 병마 평사(兵馬評事)를 두고 반드시 이조의 낭관 또는 홍문관 관원을 차출하여 보내 그들이 함부로 행동하는 것을 막게 하였다.
형옥(刑獄)에 있어서는 더욱 더 세밀하고 신중을 기하여 수재·한재·풍재 등의 천재를 당하면 곧 억울한 옥사를 심리하고 죄적(罪籍)을 친히 열람하여 죄질의 경중 및 과실·고의 등을 낱낱이 밝혀낸 다음 죄질이 경한 자는 모두 관대한 처분을 하였다. 그리고 죄수에 있어 한번 문안(文案)은 오래되어도 잊어버리지 않고, 뒤에 심리할 때 형관은 잊어버리고 있는 것도 왕은 그것을 기억하고 있어 신하들이 놀라고 탄복할 정도였으며, 또 오래 갇혀 있는 죄수에 대해 그 주리고 추운 것을 염려하여 먹을 것과 옷가지를 주도록 하였다.
왕에게는 지병이 있었는데, 정사 처리에 부지런하여 병이 조금 차도가 있으면 곧 승지로 하여금 공문서를 들고 와내(臥內)로 입시하도록 하였다.
왕은 부왕을 일찍 여읜 것을 항상 애통히 여겨왔는데, 급기야 모비(母妃)마저 승하하자 오래 봉양 못한 것을 지극한 한으로 삼아 거의 자신을 가누지 못할 정도로 슬퍼하고 야위었다.
대비가 일찍이 경덕궁(慶德宮)으로 거처를 옮겼었다가 이때 창경궁(昌慶宮)으로 반우(返虞)를 하였는데, 왕도 옛 거소로 다시 돌아와 눈에 보이는 것마다 옛일을 생각나게 하였으므로 마치 무엇인가 찾고 있는 사람처럼 온종일 말 한 마디가 없었다. 그렇게 잠시도 슬픔을 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때문에 곁에서 모시고 있는 시어들도 모두가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혼전(魂殿)에 제물을 올릴 때면 반드시 친히 살펴보고 올렸으며, 승하하시기 하루 전까지도 친히 살피지는 못하였지만 제수가 정결한지의 여부를 물었고, 이튿날 아침에도 계속 그렇게 물었다.
병이 위독했을 때 창 밖의 바람소리를 듣고는 이르기를,
"저게 곡식 해치는 바람인데 내가 어쩌다가 저 소리를 또 듣는가!"
하여, 어버이에 대한 효성과 백성들을 걱정하는 마음이 일어나지 못할 단계에까지 와서도 그 정도였었다. 유갑(襦匣)·의복 등 염습에 필요한 물건들을 모두 궁내에서 마련하고 단 한 자 한 치도 호조로 하여금 시민에게서 징수하지 않게 하였는데, 그도 궁중에서 왕의 평일 백성을 걱정하던 지극한 뜻을 따라 취한 조처였던 것이다.
왕비 김씨가 1남 3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바로 우리 사왕(嗣王) 전하이고 딸은 맏이 명선 공주(明善公主), 둘째가 명혜 공주(明惠公主), 막내가 명안 공주(明安公主)이다. 사왕은 전비가 김씨(金氏)였는데 영돈녕부사 광성 부원군(光城府院君) 만기(萬基)의 따님이고, 계비 민씨(閔氏)는 영돈녕부사 여양 부원군(驪陽府院君) 유중(維重)의 따님이다. 명선·명혜는 다 출가전에 죽고 명안은 해창위(海昌尉) 오태주(吳泰周)에게 출가했다.
왕은 총명하고 슬기로운 바탕에 너그럽고 온유한 덕이 있었으며, 마음이 깊고 독실하고 성품이 후하고 규모가 컸다. 선왕으로부터 정일(精一)을 이어받고 사부에게서 절차(切磋)의 도움을 받아 높기가 임금이었으면서 행실은 증자(曾子)·민자건(閔子騫)보다 고고하였고, 부자로는 나라를 소유하였으면서 절제하기가 포의 한사와 같았다. 궁금을 엄히 하여 사사롭고 그릇된 길을 막았으며, 조정을 바로세워 되도록 화평을 주장하였다. 나라 법을 굳게 지켰으나 폐단이 있으면 반드시 고쳤으며, 신하들을 예로 대우했으나 죄가 있으면 반드시 징계하였다. 몸에 비록 지병이 있어 한철 한달도 평온할 때가 없었지만 그렇다고 단 하루도 쉬며 안일을 취하지 않았으며, 비록 만 가지 일이 답지하여도 일 처리에 있어 조용하고 신밀하게 이리 살피고 저리 살펴 크고 작은 일 할 것 없이 그냥 지나쳐버리는 경우가 없었다. 관직 제배에 있어 한 관직도 사사로이 제배하지 않았으며, 형옥(刑獄)에 있어서도 죄 없이 죽은 사람이라곤 하나도 없었다. 안에서 성색(聲色)을 즐기는 일도 없었고 밖에서 유전(游田)을 좋아하지도 않았으며, 사사로이 있을 때도 관대(冠帶)를 반드시 갖추고 병이 아무리 심해도 의관을 않고는 신료들을 접견하지 않았다. 그것은 임종 직전까지도 그러했었다. 걱정하고 근면하고 두려워했던 정성이 위로 하늘을 감동시키기에 족했으며, 불쌍히 여기고 슬피 여기는 마음은 아래로 뭇 백성들을 결속시키기에 족했다. 조심조심 깊은 못 가에 있는듯이 하기 15년을 하루같이 하였는데 이것들이야말로 온 나라 신민(臣民)들이 마음에 생각하고 입으로 외우고 있는 것들이며 따라서 천지신명에게 질정하더라도 될 일들인 것이다.
비록 만난 것이 어려운 시기였고 하늘이 수명에 대하여 인색했으나 그 동안 사람들 마음에 스며든, 인자한 마음 인자하다는 소문 만으로도 이미 국가 억만년 기반을 공고히 하기에는 충분했던 것이다. 신이 보건대 전대의 순미했던 임금들로서 은(殷)의 중종(中宗)·고종(高宗)·조갑(祖甲)은 덕이 훌륭했다고 할 수 있고, 한(漢)의 문제(文帝)와 송(宋)의 인종(仁宗)도 선정을 베풀었다고 할 만하다. 그러나 그들에 대한 찬사라는 것이 고작, 근엄하고 공순하고 하늘을 무서워했다는 것, 감히 황령(荒寧)하지 않았다는 것, 감히 환과(鰥寡)를 업신여기지 않았다는 것, 공순하고 검소했다는 것, 형(刑)을 없애고 조(租)를 내려주었다는 것, 남이 덕택을 입었다는 것, 사직이 영원토록 그의 힘을 입을 것이라는 것 등등에 불과하였다. 아, 우리 현종 대왕도 백세를 두고 잊지 못할 일들이 아마 이상에 열거된 것과 같은 것들이리라. 아마 꼭 그러하리라.
자헌 대부 병조 판서 겸 동지경연사 신(臣) 남구만(南九萬)이 지어 올림.
【태백산사고본】 29책 1권 1장 A면【국편영인본】 38책 199면
【분류】
역사-편사(編史)
[註 001]
신사년 : 1641 인조 19년.
[註 002]지방 : 심양.
[註 003]신묘년 : 1651 효종 2년.
[註 004]기해년 : 1659 효종 10년.
[註 005]무슨 피를 흘리는 변고 : 당 태종(唐太宗)이 자기 형인 건성(建成)을 살해한 변고. 건성이 태자 시절에 태종이 진왕(秦王)으로 있으면서 공로가 많고 명망이 높자, 그를 시기한 건성이 원길(元吉)과 짜고 참소를 꾸며 그를 죽이려고 했다가 도리어 태종에게 사살당하였음. 《통감절요(通鑑節要)》 당기(唐紀) 태종(太宗) 상(上).
[註 006]송 태조(宋太祖)가 한잔 술로 병권을 해제한 일 : 한 잔의 술로 상대의 마음을 감화시켜 그로 하여금 무력을 사용하지 않고 귀화하게 한 일. 남한(南韓)의 유장(劉鋹)이 자기 나라에 있을 적에 걸핏하면 짐주(酖酒)로 신하를 독살하였다. 유장이 내조(來朝)하였을 때 태조가 술을 따라 주었더니, 유장은 그 술에 독이 들어있는 것으로 알고 울면서 하소연하니, 태조가 웃으면서 "짐은 짐의 충심을 상대방의 뱃속에다 전하려는 사람이다"하였다. 그리고 그 술을 자신이 마시고 다른 잔에 술을 따라 유장에게 주었다.《송사(宋史)》 권3(卷三) 태조본기(太祖本紀).
[註 007]진종(眞宗)이 천서(天書)를 태묘(太廟)에 고한 일 : 천서(天書)란 하늘이 내려준 글이라는 뜻. 글안(契丹)의 풍속이 하늘을 크게 숭배하였으므로 송(宋)의 군신(君臣)들이 우선 글안이 넘보는 것을 간접적으로 제어하기 위하여 천서(天書)가 내렸다고 중외에 과시했던 것인데, 진종은 그 천서라는 것이 거짓임을 알면서 대중상부(大中祥符) 6년에 그것을 조원전(朝元殿)에 바치고 옥청소응궁(玉淸昭應宮) 및 태묘(太廟)에 고하였다.《송사(宋史)》 권7∼8 진송본기(眞宋本紀).
[註 008]방효유(方孝孺) : 명(明)의 태조(太祖)부터 혜제(惠帝) 때까지의 명신. 건문(建文) 시절 시강 학사(侍講學士)였는데, 뒤에 성조(成祖)가 된 연왕(燕王)의 군대가 들어와 혜제를 몰아내고 방효유를 불러 조서(詔書)를 초하게 하였다. 이때 효유는 상복을 입고 궁전이 떠들썩하게 곡을 하면서 들어왔다. 연왕이 자리에서 내려와 위로하면서, 선생이 아니면 쓸 사람이 없으니 조서를 초하라고 하고 좌우를 시켜 붓과 종이를 가져와 권했으나, 붓을 땅에다 던져버리고는 죽으면 그냥 죽지 조서는 못 쓰겠다고 하여 결국 책형(磔刑)을 당하였다. 《명사(明史)》 방고유전(方考孺傳).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