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째 날은 옷본을 천에 옮겨 그려서 자르는 마름질을 하는 날이다. 내가 가장 머리를 싸매는 시간이기도 하다. 정확하게 그린다고 애썼는데도 마름질을 하고 나면 천의 성질에 따라 시접이 늘어나 있기도 하고, 다림질을 꼼꼼히 안해 두면 접혀 있던 부분을 뒤늦게 발견해 천 위에 온갖 선들이 난무하는 때이기도 하다. 어제와 달리 조금 무거운 마음으로 천을 펼쳤다. 함께 옷을 만드는 아홉 선생님 모두 교실 바닥 가득 천을 펼쳐 마름질할 준비를 한다.
근데, 아 얘네가 너무 고운 거다. 어제 시장에서 천 고를 때도 어떤 빛 아래에서 보느냐에 따라, 어떤 필에서 풀려나왔는지에 따라 천 빛깔이 오묘하게 달라서 감탄이 나왔는데, 이렇게 나란히 펼쳐 놓으니 내 천만 보던 때와는 또 다르다. 서로 어우러져 새 얼굴로 옷감들이 우리를 보고 있다.
'이제 우리를 어떻게 할 건가요?'
설레는 눈빛으로 우리를 바라보는 천을 마주하고 있으니 마름질에 대한 부담이 좀 옅어진다.
선생님 도움으로 최대한 천이 덜 버려지도록 옷본을 대어 잘라냈다. 무얼 배울 때 가장 기쁜 일 가운데 하나가 바로, 배우고자 한 것 말고도 생각도 못한 것들을 더 배우는 것이다. 옷 만드는 기술 말고도, 천을 귀하게 여기고 아껴서 마름질하며 한 조각의 천이라도 더 살려보려는 마음을 새로이 선생님께 배운다. 가위질 한 번만 조심스레 해도, 긴 천 하나를 건져낼 수 있다. 그럼 거기다가 옷 고름도 그리고 깃도 그린다. 그럼 반대쪽 넓은 천을 온전하게 다른데 쓸 수 있다.
아이 어렸을 때부터 열 해 동안 놀이 삼아 바느질을 해 왔지만, 오늘처럼 천을 귀하게 다룬 적은 처음이다.
치마부터 시작해 저고리와 곁마기, 당, 소매, 수구, 요선 따위의 마름질을 끝내고 본격적으로 바느질을 시작한다. 선생님이 먼저 시범을 보여주시면 그대로 한 단계씩 따라가본다. 유투브나 설명서를 보고 혼자서 만들 때와는 정말 다르다. 다시 도움을 요청하면 언제든 도와주시긴 하지만, 그래도 선생님 설명을 들으며 저고리 전체 모양을 끊임없이 머릿 속에서 그려내지 않으면 바느질이 쉽지 않다. 그러니까 왜 저 곳을 저렇게 바느질해야 하는지 내가 완전히 이해가 되어야 첫 바늘땀이 경쾌하고 즐겁다. 뒷길 등솔(등 가운데 부분)을 잇는데 내 등이 따땃하다. 곁마기와 당을 시침질할 때는 이 저고리 입고 팔벌려 뛰기도 문제 없겠구나 싶어 벌써부터 팔이 펄럭펄럭거린다. 요선(허리둘레선)을 잇고 있자니, 벌써 내 머릿 속에서는 치마가 저고리에 찰싹 붙었다. 소매 어깨선을 앞판, 뒷판에 붙인다. 민소매 입다가 긴팔 입은 듯 어깨가 덜 시렵다. 저고리 한 부분, 한 부분을 이어갈 때마다 옷을 한 조각씩 입어나가는 듯하다.
어느 정도 저고리 모양이 만들어졌을 때 선생님이 지영 언니를 앞에 불러 말씀하셨다.
"자, 이제 옷에 몸을 담아 보세요."
입는 게 아니라 '담아 보라'니. 참 근사한 말이다. 내 몸을 덮는 천 조각이 아니라, 내 몸을 담아내는 그릇같은 옷이라 생각하니 옷의 품격이 올라간다. 이런 걸 두고 명품이라 할 수 있을 게다.
오늘 또 새로이 배운 건, '시접'을 향한 마음이다. 그동안 '시접'은 내게 안전지대같은 거였다. 완성선이 좀 어긋나도 시접에서 좀 당겨 쓰면 되니 불안한 마음을 잠재우려 늘 정해진 치수보다 더 넉넉하게 시접을 두어왔다. 그런데 바느질하다 보니, 시접이 정확하면 바느질이 정말 편했다. 바느질하며 안감, 겉감의 완성선을 끊임없이 확인하는 수고도 덜 수 있었다. 시접을 넉넉히 하며 불안을 미루어두는 방법 말고, 처음부터 꼼꼼히 마름질해서 불안을 없애는 방법을 새로이 익혔달까?
그것 뿐인가. 오늘은 새로운 말도 많이 배웠다. 곁마기, 당, 수구, 요선, 앞길, 뒷길, 등솔, 겉섶, 칼깃처럼 새로운 세상의 말도 배웠다. 옷 짓는 법 배우러 왔는데, 새 세상을 배워 가고 덩달아 그 나라 말도 배워간다. 올해 목표가 '안 해 본 일 하기'인데, 새해 첫 주부터 안 해 본 말도 잔뜩 배우고 몰랐던 세상도 알아간다. (24.1.4.)
첫댓글 같이 연수 듣는데 언제 이렇게 이쁜 사진을 찍으셨을까요? 진도 따라가기 바빠 헉헉거리는 와중에 선생님 글 읽으니 마음이 정리가 되네요. 다음 글도 기대할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