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문제는 589년 남조의 마지막 왕조 진(陳)나라를 멸망시키고 370여년간 분열된 남북조 시대를 마감하고 중국을 마침내 재통일했다...
고구려 원정길에 수군을 이끈 수군총관 주라후는 훗날 수양제가 될 양광이 남조를 정벌할 때 장강 파협에서 마지막까지 분전하다 항복한 수군명장이다. 수나라는 고구려 원정 때 발해방면의 수로군을 중시하여 귀수한 주라후를 수군사령관으로 임명한다.
수나라 군대는 주라후가 이끄는 7만여 수군을 주력으로 7월 초 산동반도 동래(래주)를 떠나 묘도열도를 지나 요동반도 남쪽 끝 비사성 앞바다로 나아가다 중간에 철군한다.
배가 태풍을 만나 대거 침몰했기 때문이며, 육지로 진군한 양량의 군대도 요하까지 나아갔으나 장마철이라 전염병이 퍼지고 식량부족으로 자진 철병했다고 <자치통감>에 기록돼있다.
신채호 선생은 그의 저서 <조선상고사>에서 고구려 강이식(姜以式)장군이 수군을 이끌고 발해바다로 나가 수나라 수군을 물리쳤기 때문이라고 다르게 해석한다.
주라후의 수군이 발해만의 남단 장산군도를 따라 평양으로 진군하는 도중에 폭풍우를 만나 철군한 것이 아니고, 비사성과 장산군도 앞에서 고구려 요동총관 강이식 장군의 수군과 해전을 벌인 끝에 대부분의 병력을 잃고 철수한 것이라고 주장한다....113 - 115쪽
당태종과 당군은 요하에서 만리장성 끝의 임유관까지 1500리 길을 달포가 넘게 걸려 도착했다. 태종은 관에서 마중나온 태자 덕분에 처음으로 옷을 갈아입을 수 있었다. 고구려 추격군과 싸우면서 퇴각한 당군의 처참한 회군을 짐작케한다.
임유관은 만리장성이 동쪽에서 시작되는 최초의 관문이라는 의미로 '천하제일관'이라고도 불린다.
요동 - 요서의 외부지방에서 임유관을 통과해 중원으로 입관한다고 하며, 외부에 있는 동북지역을 '관외'나 '관동'이라고 칭했다.
한(漢) 때는 '임유관'이라 칭했고, 수문제의 오만한 국서에 격분하여 598년 고구려 영양왕때 강이식장군이 선제공격해 임유관전투를 벌인 곳이다...128쪽
산동이야기, 박영호, 2019, 씨 에디터
첫댓글 위의 글에 따르면 두 번의 전투 상황이다. 임유관과 비사성 근처의 싸움.
고구려 요동총관이라니 또 하나의 미고증 오류를 퍼뜨리는 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