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에, 2008년 가을
주홍꽃
이 성 자
기차가 빠르게 달린다. 산이 지나가고, 들이 지나가고, 봉긋한 집들이 아련한 추억을 남기며 지나간다. 들길 사이로 트럭 한 대가 지나간다. 들판에 세워진 전봇대가 이정표처럼 길을 안내하고, 그 뒤를 따라 오토바이 한 대가 달려간다. 터널을 지나고 있다. 짧은 터널은 곧 끝나버린다. 차창 밖을 기웃거리던 태양, 그 태양만이 끊임없이 우리를 따라오고 있다.
옆 의자에 앉은 가족들이 참 단란해 보인다. 다섯 살쯤 된 사내아이가 칭얼거린다. 누나가 동생을 바라보며 웃는다. 그 옆에 앉은 엄마는 사랑스런 눈으로 두 아이를 바라본다. 스포츠신문을 펼쳐들고 있는 아빠도 힐끗힐끗 가족들의 모습을 바라보며 얼굴 가득 웃음을 머금고 있다.
“내 면도기 넣었어?”
“당신이 다 챙겼잖아요.”
남편은 시종 여행에 필요한 물건들을 확인 중이다. 여행 출발하기 일주일 전부터 메모지에 기록을 하고, 준비물을 체크하던 남편이었는데, 그래도 안심이 안 되는 모양이다. 여행 하루 전에 부랴부랴 몇 가지 챙겨서 가방에 넣는 나와는 너무도 대조적이다.
30년이 넘는 세월을 함께 살면서 남편은 그런 나를 단 한 번도 탓하거나 원망하지 않는다. 나는 그런 남편에 대한 한구석 믿음이 있어서 매사 준비에 소홀하고 무관심했을 것이다. 아니, 내게는 메모공책과 볼펜만 있으면 되었기에 그리 버릇됐는지 모른다.
오늘 아침에도 그랬다. 내가 입을 잠바며, 모자까지 미리 준비해 준 남편이다. 빨간 잠바를 입어보라느니. 모자를 써보라느니, 가방을 메어보라느니, 주문이 많았다. 나는 말을 잘 듣는 초등학생처럼 남편이 시키는 대로 했다. 고개를 갸웃하면서 모자를 이리저리 돌려보던 남편, 참 행복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그런데 무슨 조화일까. 까닭 없이 내 가슴 한 구석이 짜르르해졌다.
어느새 부모 손밖으로 나도는 자식들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아빠가 쏟아주는 애정이 부담스러운지 자식들은 “알아서 한다니까요!” 퉁명스럽게 한 마디 뱉고는 제 방으로 들어가곤 한다. 그런 자식들에게 베풀지 못한 사랑이 남아서 내게 이토록 관심을 쏟는 것일까. 아니면 한 가지밖에 모르고, 만날 컴퓨터 앞에 앉아있는 내가 안쓰러워서 그러는 것일까?
평생을 교단에서 살아온 남편이다. 그런 남편이 퇴임하고 집에 돌아왔으니, 사랑하는 자식들에게 눈을 돌리는 건 당연하다. 그 동안 여러 가지로 베풀지 못해 미안했던 자식들에게 뭔가 해주고 싶어서 이것저것 상관하곤 했으리라. 그런데 자식들은 모든 것을 자신들이 알아서 하겠다니, 남편의 허전한 맘인들 오죽했으랴.
나는 그 동안 직장생활 한다고, 게다가 글을 쓴다는 이유로 늘 아내 노릇을 제대로 못했다. 솔직히 내가 해야 할 일을 시어머님이 평생 대신하셨기 때문이다. 시어머님이 하늘나라로 떠나고, 갈피를 잡지 못하는 내게 남편은 무엇이든 살뜰하게 보살펴주었다. 자식들에게 베풀어야할 사랑이 덤으로 내게로 쏟아졌던 건 아닐까. 이래도 저래도 고마운 일이다. 남편의 허허로운 마음을 조금이라도 채울 수만 있다면…….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남편은 쉬지 않고 당신의 미래를 설계하고 있었다. 설계 한가운데는 세 명의 자식들이 동그랗게 앉아 있었다.
“자식들을 위해 우리가 기도를 많이 해줍시다.”
“지들이 다 알아서 한대잖아요.”
내 목소리가 조금 컸을까? 옆 의자에 앉은 까만 눈의 사내아이가 나를 쳐다본다. 함께 바라보던 아이 엄마가 무안했던지 얼른 고개를 돌린다.
“모든 아이들은 당신이 써놓은 글을 먹고 자랄 거요. 그러니 앞으로 더 좋은 글 쓰도록 노력하구려.”
“능력이 될지 모르겠어요.”
기차를 타고 가며 우리는 모처럼 한가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그 이야기 속에는 하늘이 있고, 산이 있고, 들이 있고, 정다운 이웃이 있고, 그리고 어느덧 훌쩍 자라 제 갈 길을 찾아 떠나는 자식들이 있다. 조화로운 삶을 위해서는 이 모두를 넉넉한 사랑의 힘으로 보듬고 가꾸어야 하리라.
쉬지 않고 따라오던 태양이 산꼭대기에 걸린 채 눈부신 주홍꽃을 피우고 있었다.
첫댓글 글을 읽고 나니 주홍꽃으로 덮인 교수님댁 지붕이 떠오릅니다. 행복해서 활짝 웃는 주홍꽃 말예요. 그 따스함이 넘쳐서 교장선생님과, 자녀분들도 모두 잘 되실겁니다. 다 커버려서 알아서 하겠다는대도 쫓아다니며 챙겨주고 싶은 교장선생님의 그 마음에 가슴 뭉클해집니다. 그 마음이 영원한 부모의 마음이라는 거 부모되기전에는 모르겠더라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