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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MALAYAN LETTER(27)
《卍(卐)이라는 기호문양에 대하여: About letter(or signature) called ‘Swastika’ or ‘만(Man)’ 》
며칠 전 끝난 네팔 총선거에서 집권당이었던 ‘네팔 의회당(Nepal Congress Party)’이 패배를 한 것으로 언론에 보도되었다. 1980년대 이후 오랫동안 연립정부 형태로 국회를 장악하여 사회주의 대신 시장경제체제로 바꾸면서 네팔을 다스려왔지만, 변화를 바라는 네팔국민들의 열망은 네팔 공산당(Nepal Communist Party)의 손을 들어준 것으로 보인다.
네팔의 선거풍토는 참으로 요란하다. 오래 전부터 시작된 선거전도 그렇거니와 우리 동네 같이 조그만 마을에도 수십 명의 경찰들이 배치되어 몽둥이를 들고 떼거리로 돌아다니거나 혹은 다리목에서 차량과 행인들을 검문하면서 경색된 분위기로 몰아가고 있으며 심지어는 학교 대문을 5일간이나 닫게 만들어 기숙사생활을 하던 10학년 학생들까지 집으로 돌려보내는 등의 조치를 취하기도 했다. 그 이유는 테러의 우려 때문이란다. 우리나라도 이전에는 선거 때가 되면 공안정국으로 몰아갔던 것처럼 네팔도 툭하면 테러우려를 앞 세워 긴장분위기를 조성하고 있는 것 같아 보인다.
이미 알려 진대로 네팔의 국민평균소득은 세계최하위권이다. 빈부격차와 부패지수 또한 심각한 수준이다. 그래서 부자들은 엄청 부자이다. 물론 그들 중에는 부지런히 돈 벌어서 부자 된 사람들도 있겠지만, 개중에는 정치권에 줄을 대고 철밥통을 지키면서 뒷주머니 챙기느라 더 바쁜 관리들도 있다. 어느 나라가 부패 없이 깨끗하기야 하랴마는 네팔은 전형적인 후진국형 부패라고 볼 수 있다. 그런 관리들에 의한 검은 뒷주머니 거래를 ‘바랏처’라고 부르는데, 이 용어는 아주 보편적으로 광범위하게 사용되고 있다고 한다.
네팔이 왕정체제에서 벗어나 민주화의 길을 걷고 있는지가 얼마 되지 않은 과도기라지만, 머지 않는 시간에 위정자들이 국민위에 군림하지 않고 봉사하는 민주사회가 되어 빈부격차가 줄어들고 나아가 학교에서 점심시간에 굶는 학생들이 없는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기원해본다.
각설하고 ‘스와스띠까(Swastika)’ 이야기를 하려다 말고 네팔 정치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아래와 같다. 우리 동네를 주름잡고 있는 네팔 의회당의 엠블럼(Emblem)에 스와스띠까가 들어 있기에 그 오랜 선거기간 내내 눈에 진물이 날 정도로 그 문자를 보았기에 가끔은 정말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라 생각해왔다.
처음 인도나 네팔에 온 나그네들은 도처에 깔려 있는 스와스띠까의 다양한 쓰임새가 이색적으로 보일 것이다. 힌두사원 뿐만이 아니다. 일반 가정집 대문에서부터 도처에 이 문양이 깔려 있다. 심지어는 쌀부대, 과자봉투, 라면봉투 같은 일용품에서도 이 기호가 박혀 있기에 좀 지나면 만성이 되어버리지만, 그래서 선거판에 등장한 스와스띠까가 신기한 일은 아닌데도, 하도 선거운동자체가 죽고살기 식으로 격렬하게 오랫동안 하다 보니 이 선거용 깃발에 조잡하게 찍혀있는 신성하다는 스와스띠까의 신세가 처량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이 기호문양은 한국에서는 ‘절만자(卍)’ 로 쓰이는 바로 그 글자로써 사찰이나 무당집의 엠블럼으로 사용되고 있는 바로 그 것이다. 그렇기에 이방인인 내게는 살벌한 선거판에서 이 문양이 사용되고 있는 것이 이채로울 수밖에 없어서 이참에 이 문양 또는 글자에 대하여 정리를 해보면서 또한 우리 불교계가 계속 이 ‘절卍자’를 사용해도 되는가? 에 대한 물음도 던져보고자 한다.
이 스와스띠까는 이집트, 그리스, 로마, 아시리아, 인도, 중국 등과 같이 고대문명이 찬란하였던 곳에서 흔히 발견되고 있다. 그 본래의 뜻은 태양에너지를 상징한다는 설이 지배적인데. 고대로 올라갈수록 태양의 존재감이 묵직할 수밖에 없기에, 태양에너지를 상징하는 이 기호문양은 모든 고대유적에서 단골메뉴로 등장하고 있다. 예를 들면 이집트의 토용에 그려진 선명한 스와스띠까를 비롯하여 중국의 신석기유적의 토기 발견되는 만자문양이나 파키스탄의 모헨조다로(Mohenjodaro)나 하랍빠(Harappa)유적에서 발견되는 흙도장 형태의 문양은 이미 널리 알려진 고고학적 증거들이다.
정리하자면, 고대사회에서는 단순하게 태양에너지의 숭배하는 상징으로 이 문양을 사용되었지만, 점차로 여러 가지 의미를 부여하게 되었다. 이런 문양을 한 단계 승화시켜 어떤 목적으로 이용한 집단은 원시종교의 수뇌부였다. 그들은 자기네 종교를 상징하는 엠블럼이 필요했기에 태양에너지의 단순한 이미지를 변화하여 선회하는 십자가형의 스와스띠까류의 기호나 문양을 만들어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 선두주자는 고대 힌두교였다. 힌두삼신(三神)의 하나인 유지의 신 비슈누(Vishunu)의 가슴털이 이 기호와 같다고 찍어다 부치면서 상서로운 조짐이나 길상을 나타내는 것이라는 의미를 부여했다. 그 후 힌두교의 여러 분파별로 각자 조금 씩 의미와 이름을 달리 부르게 되었는데, 첫째가 길상해운을 뜻하는 슈리밧사(Shrivatsa), 둘째는 오른쪽으로 선회하는 머리카락 모양을 한 난디아바타라(Nandy Avatara), 셋째는 행복을 상징하는 스바스띠까(Svastika), 넷째는 물병모양을 한 푸르나가타(Purnaghtata) 등이었다. 그러나 큰 틀에서는 스바스띠까’(Svastika(Snt) 또는 Svatthika(Pli)) 라고 부르다가 현재와 같음 영어식 발음인 ‘스와스띠까’로 변하여 통용되고 있다.
그러다가 초기불교 시대를 지나 본격적으로 불교가 조직화, 종교화되면서 이 기호는 불교의 판테온(Phantaon)으로 들어오게 되는데, 기존의 비슈누의 가슴털에서, 고타마 붓다의 가슴털로 수평이동을 하면서 “붓다의 제53번째 신체적 특징” 으로 못을 박았다. 그리고 이 문양은 그 이후에는 발의 발가락까지 내려가 역시 붓다의 신체적 특징으로 자리를 잡았다. 그리하여 불교를 상징하는 기호로 굳어지게 되는데, 그 의미는 힌두교와 별로 달라지지는 않았다. 역시 길상, 덕상, 행복 등의 뜻이었다.
한편 이 기호문양은 불교의 동점에 따라, 인도불교권의 인식이 그대로 한자문화권에도 등장하기 전부터 중화권에서 발견되고 있다. 바로 한나라 때의 통용되던 화폐인 ‘오주전(五鑄錢)’에서도 발견되고 있지만, 이 문양의 본격적인 등장은 불교의 동점과 괘적을 함께 하고 있다.
『화엄경』권48에는, “여래의 가슴에 상(相)이 있는데 ‘卍’자와 같이 생겼다. 이를 길상해운이라 한다(如來胸臆有大人相 形如‘卍’字 名吉祥海雲)” 또한 현장법사(玄裝, 602~664)도 여래의 발가락 문양에 대하여『대당서역기』에서 한 수 거들었다. 그가 중인도 마가다국(摩竭陀國)을 지날 때 어느 사원 인근 넓은 바위 위에 고타마 붓다가 입적하기 직전에 새겼다는 붓다의 발자국 자국이 남아 있기에, 그가 친히 이 족적에 예배하고 탁본을 떠서 중국에 가져와서 다시 너른 바위에 새기게 했다는 것이다.
그것이 현재 산시성 방주(坊州)에 있는 옥화산(玉華山)에 남아 있다고 하는데, 바로 우리나라 통도사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석가여래유족도(釋迦如來遺足圖)>의 원본일 것이다. 탁본 사진을 보면 그 왼발 발가락에는 ‘卍’자 형태가, 오른쪽 발가락에는 오른쪽으로 회전하는 문양인 역만자(逆卍字), 즉 ‘卐’가 동시에 새겨져 있다.
이 문양이 현재 우리나라에서 사용하고 있는 <절‘卍’자>에 해당하는 중국한자로 변한 때는 당나라 측전무후(則天武后) 장수(長壽) 2년(693)이었다. 당시 무후는 불교를 장려하기 위한 방편으로 ‘卍’ 모양의 글자를 새로 만들어 정식 문자로 채택하면서 “만덕(萬德)이 모이다” 라는 의미를 담아 ‘완[万]’으로 읽게 하였다고 것이다.
그 전까지는 후진(後秦)의 인도승려 구마라습(鳩摩羅什, 344~413)은 이를 ‘덕(德)’자로 해석하여 즐거움과 복과 행이란 의미로 사용하였고 현장법사도 같은 해석을 내린 것을 보면 의미는 같지만 ‘덕’에서 ‘만’이란 음으로 통일된 시기는 측천무후 당시부터라고 보아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채로운 점은 남방불교권에서는 고타마 붓다의 가슴털 모양이라고 받아드린 게 아니라 여래의 경지 또는 보살도의 최고 경지인 십지보살(十地菩薩)의 가슴에 생기는 길상문으로 은유적으로 인식하여서인지 북방불교처럼 불교의 직접적인 상징문양으로 사용하지는 않았다.
한편 이제는 눈을 우리나라로 돌려보자. 십자가가 기독교의 상징이라면 옥편상의 이름 그대로 절만자, 즉 ‘卍’은 불교쪽의 엠블럼이다. 대개의 사찰건물에 흔하게 그려져 있으며 그밖에 기념비적인 석주, 탑비의 귀부(龜趺), 불화 등에서도 흔하게 쓰였다. 물론 일부 무당집에서도 만자 깃발을 높이 세워두고 있는 곳도 있기는 하다.
또한 우리나라에서는 풍수지리나 음양오행론에서 사용되기도 하였다. 이 글자의 생김새가 동·서·남·북을 의미하고 왼쪽 또는 오른쪽, 그리고 위에서 아래쪽으로 회전하는 운동요소를 의미한다고 풀이하여 도시나 궁성을 세울 때 스와스띠까의 기가 모이는 교차점에 각각 성문을 배치하고 궁궐은 십자형의 중앙에 배치하는 모양새를 갖춘 것들이 그런 예이다.
또한 우리민속이나 생활문화에서도 원형 그대로 순수한 길상문으로 사용하여 영원, 원만, 통합, 생명, 중심 등의 의미를 부여하기도 하고 때로는 원형을 일부 변형시키는 변화나 사방 끝을 연장하는 디자인으로 끊임없이 이어지는 이미지를 강조하여 시작도 끝도 없는 무한함과 영원함을 의미한다고 해석하기도 한다.
또한 오방색의 색깔에 따라 의미를 다르게 부여하기도 한다. 예를 들면 청색 만자는 천계에 속하는 무한한 덕을, 적색 만자는 부처님의 마음에 자리 잡은 무한한 성스러운 덕을, 황색 만자는 무한한 번영을, 녹색 만자는 농경생활에서의 무한한 은덕을 나타낸다고 해석하기도 한다.
자 이제는 이글의 중심테마 쪽으로 이동을 해보자. 바로 ‘좌만자’와 ‘우만자’ 중에 어느 것이 역사적 근거가 있는 것이고 또한 논리적 합당한 것인가에 대한 물음이다. 이 두 기호 또는 글자의 의미는 전문가도 헷갈릴 때가 많다. 그럼으로 이참에 공개토론장에 올려 강호제현의 의견을 들어 볼 필요가 있다.
앞에서 이미 이야기한데로 이 문양, 즉 우리 사전류나 컴퓨터의 좌판에 등록되어 있는 ‘절만자’ 는 중심에서 오른쪽으로 도는 ‘좌만자(卍:左旋)’이다. 이 글자에 대해서는 별 이론이 제기되지는 않는다. 옛날 그대로의 뜻과 음으로 사용하면 되니까.
그러나 문제는 또 하나의 만자라고 볼 수밖에 없는, ‘卐’ 같이 생긴 글씨이다, 이 글자는 현재 사전류나 좌판에서 찾아볼 수가 없고 또한 현재 우리나라에서는 ‘좌만자’만 글자로 알고 있기에 사실은 이 글자를 뭐라고 불러야 할지 모른다는 게 정답이다. 그렇기에 필자도 편의상 ‘역만자’라고 부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 글자를 곱씹어보면 논리적으로 스와스따까 본연의 뜻에 부합함을 알 수 있다, 이 글자는 우주와 태양계의 회전 운동방향에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옛날부터 오른쪽으로 도는 우선(右旋)을 우주 자연의 정상적인 운동 원리로 여겼기에 그 반대 방향 즉 좌선(左旋)은 우주 질서를 역행하는 것으로 여겼다. 그래서 탑돌이 같은 ‘꼬라(Kora: Skt)’를 돌 때 ‘우요삼잡(右繞三匝)’이라 하여 탑을 중심에 두고 시계 방향으로 세 번 도는 방법으로 정착되었다.
비록 당나라 때 처음 만자로 제정될 때 좌만자가 채택이 되었더라도, 이처럼 후대에는 우만자가 이치에 맞는 다는 인식이 대세를 이루며 우만의 사용도 많아지게 되었다. 그 결과 사실상 좌만 우만의 혼용하는 시대가 근대까지 계속되었던 것이다.
그 대표적인 예가 원주 거돈사지(居頓寺趾) 고려시대 원공국사(圓空國師)석비 귀부이다. 이 거북 등에는 좌, 우만자가 같이 또렷이 새겨져 있다. 이런 혼용 예는 고성 금강사 건봉사(乾鳳寺)에 있는 두 개의 돌기둥에서도 나타나는데, 왼쪽 기둥에는 좌선하는 卍문양이, 오른쪽 기둥에는 우선하는 卐문양이 음각되어 있다.
그러나 근래에 들어오면서 어쩐 일인지, 언제부터인가, 슬그머니 사찰에서도 ‘우만자’ 가 사라져버렸다. 예를 들면 근래에 지은 사찰에서는 우선하는 문양은 거의 찾아볼 수 없고, 좌선하는 문양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불교 각종단에서 상징으로 내세우는 표지 역시 좌만자이다. 유일하게 현대에 신축한 남양주 봉선사(奉先寺)의 경우가 우만자라는 정도이다.
나아가 현대에 이르면 그 현상은 더욱 심해진다. 예를 들면 컴퓨터의 한문번역자판에서도 좌만자만 칠 수 있고 옥편이나 사전 등에서도 온통 좌만자만 쓰여 있다. 그렇기에 이런 글을 쓸 때 매우 불편하기 그지없다. 우만자를 사용하려면 딴 곳에서 ‘복사하기’해서 다시 ‘붙이기’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럼 왜 ‘좌만자의 천하평정’이 되었을까? 필자의 견해로서는 한자옥편, 국어사전, 백과사전 등의 편집진들의 무지에서 비롯되었거나 아니면 모종의 의도가 작용했을 가능성에 무게를 두고 있다. 그들이 역사적으로 우만자의 사용빈도를 몰랐을 이 만무함에도 불고하고, 좌우만자 혼용도 아니고, 의식적으로 좌만자만 사전류에 넣었다면, 그것도 이런 편향적인 작업이 일제치하 이후부터 시행되었다면 그런 상황을 어떻게 해석해야 좋은가?
그 과정과 배경을 소급해서 유추해보자면 첫 번째는 당나라 때부터 좌만자라고 써 왔으니까 도중에 우만자가 사용되어진 때가 있더라도 편찬자들이 이를 고의적으로 무시하고 좌만자 위주로 편찬을 했을 것이라는 견해이다. 이 경우 당연히 편찬자들의 직무유기가 거론될 수밖에 없는 대목이다.
두 번째는 이들 편찬자들이 조선조의 통치철학이었던, 성리학의 뒤편에서 우리 서민생활을 오랫동안 잠식해 온 음양오행사상에 젖어 있던 인물들이어서 ‘오른쪽 돌이’는 음(陰)을 상징한다는 그릇된 인식을 가지고 있었기에, 그것을 바로 잡는 의도에서 편찬을 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세 번째는 일본의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도 있다. 그 이유는 “일본에서는 좌만자를 주로 쓰기 때문에 내선일체(內鮮一體) 차원에서 그런 추세를 따라야 한다” 라는 주장이 당시는 설득력이 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만약 그것이 진실이라면 이것은 분명 시정되어야 할 또 하나의 ‘적폐대상’ 아닐 수 없다. 참고로 우리나라와 일본을 제외한 나라들은 좌우만자를 모두 혼용하여 쓰고 있다는 사실은 세 번째 견해에 무게를 실어준다고 하겠다.
[(사족) 현재 일본의 좌만자의 현황에 대해서 급히 일본에 있는 페이스북 친구이신, 김권미님에게 도움을 청한바, 일부 귀족들은 우만자를 집안의 문양으로 쓰고 있지만, 대부분의 귀족들과 서민들은 좌만자를 쓰고 있다고 전해주셨다. *감사~]
물론 현 상황에서 결론 내리기는 쉽지 않겠지만, 미래지향적으로 본다면 좌, 우만의 병용(倂用) 내지 혼용(混用)하는 방법이 합리적인 대안이라는 것만은 확실하다.
물론 그 한 예로 티베트의 경우도 생각해볼 수 있다. 현재 티베트에서는 불교 쪽에서는 우만자를, 나머지 민간종교에서는 좌만자를 사용하고 있다는 말이다. 불교쪽 진영에서는 탑돌이 같은 꼬라행위도 반드시 오른쪽으로 돌 뿐만 아니라 불교나 사원의 상징으로 사용할 때도 반드시 역만자와 같은 우선(右旋) 스와스띠까를 사용한다.
반면 고대민간 샤머니즘 종교인 융둥뵌교(gyung drung Bo"n)에서는 꼬라를 왼쪽으로 돌고 표식도 좌선 스와스띠까를 쓰고 있다. 이는 우리의 샤머니즘을 비롯해 뵌교 또한 천체가 왼쪽으로 회전하고 있다고 해석하여 모든 종교적 행위를 외로(왼쪽) 도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기에 ‘탑돌이’ 또는 ‘꼬라(Kora)’ 같은 행위도 불교도와 반대로 외로 돌고 있다고 한다. 수미산(須彌山)으로 알려진 카일라스산(ST Kailash) 꼬라에서도 반대편으로 도는 예가 바로 그런 이유이다.
그렇다면, 티베트식으로만 본다면 한국불교는, 전통불교가 아닌 샤머니즘 뵌교와 같은 계열이라는, 아이러니가 성립된다는 이야기가 된다.
마지막으로 ‘역만(卐)자’, 즉 우만자 문양인 하켄크로이츠(Hakenkreuz) 대해서도 한 번 가볍게 다뤄보기로 하자. 일명 ‘갈고리 십자가’라는 뜻의 이 문양이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것은 나치 독일이 상징으로 사용했기 때문이다. 히틀러가 1920년 나치당(黨)을 결성하고 정권을 잡은 후 붉은 깃발 바탕 한가운데에 흰색으로 둥근 원을 그리고 그 안에 아리안의 승리를 위하여 싸울 사명을 천명하는 뜻으로 스와스띠까를 검은 색으로 대각선으로 세워서 그려 넣은 강열한 엠블럼을 채택하여 나치스의 상징으로 사용하였다.
물론 그 뒷배경으로는 게르만족이 인도아리안족의 후예임을 강조하고 민족의 정통성과 단합을 유도하면서 과거의 영광을 되찾자는 선동적 의미도 포함되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나치 패망 후 이 문양은 결국 죽음, 광기, 공포의 상징으로 변모되어 서양에서는 기피하는 문양 ‘0순위’가 되어 버렸고 특히 유태인에 대한 나치의 반인류적 반도덕적인 행위가 드러남에 따라 독일이나 서구는 물론 세계적으로 금기시 된 문양이 되었다.
어찌 보면 제국주의 시대의 일본의 욱일승천기나 하켄크로이츠의 비참한 말로는 처음에는 태양에너지를 상징하는 좋은 뜻의 문양으로 비롯되었지만,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들이 아가페적인 사랑이 결여된, 국수주의적인 집단의 광기에 이용되었을 때는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지를, 우리 인류에게 보여주는 좋은 본보기가 아닐 수 없다고 하겠다.
▲ ‘네팔의회당’의 엠블럼 우만 스와스띠까 문양
▲ 마케토니아 성 클레멘스 교회 바닥에 십자가와 절 만자가 함께 있는 문양
▲ 파리 루브르 박물관 에집트 전시관에 있는 토용이 목에 그려진 절 만자
▲ 현재 용인 호암미술관 소장의 〈아미타삼존도〉에는 가슴에 우만자가, 삼성출판박물관 소장의 『감지은니묘법연화경』 권2의 표지에도 우만자가 보이는거를 보면 고려시대 이전에는 우만자가 대세였던 모양이다.
▲통도사 성보박물관 소장의 <釋迦如來遺足圖>에는 왼쪽 발가락에는 우만자가, 오른쪽 발가락에는 좌만자가 표시되 있다.
▲ 남양주 奉先寺 淸風樓 합각 부분의 우만자는 요즘 건물에서는 보기 드문 사례이다
▲ 고성 금강산 乾鳳寺 돌기둥의 卐과 卍
▲ 원주 居頓寺 圓空國師勝妙塔碑 귀부의 卍문양이 龜趺에는 좌선과 우선의 두 가지 형식이 동시에 등장하고 있어 흥미롭다. 사진의 것은 왼쪽으로 도는 卍문양이다
▲ 중국 각지의 고대유적에서 출토된 토기의 만자들
▲ 다양한 민속품에 새겨진 만자문양,
▲ 松花茶食板에 변형된 만자가 찍혀있다.(* Mary Kwon님 제공 자료)
▲ 妙法蓮華經 變相圖의 우만자 동국대학교 박물관 소장.
▲ 티베트의 뵌교의 엠블럼 좌만자1
▲ 뵌교의 좌만자
▲ 몽골 샤먼의 북에 그려진 만자
▲ 일본에서 주로 사용 중인 좌만자(*김권미님 제공자료)
▲ 나치의 엠블럼인 하켄크로이츠 문양
▲ 좌우 만자와 하켄크로이츠의 비교도
첫댓글 대단하십니다.
이 많은 자료를~
잘 봤습니다~^^
卍자를 다음엔 자세히 볼것같네요~^^
풍부한 고증들과 명쾌한 해석 그리고 문제점 지적 등 어느하나 ~~ 정말 훌륭한 글입니다.